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452화 (452/605)

452화. 기분

시간은 고집스럽고 부지런하여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인간이 죽고 죽이고 또 죽는 동안 산뜻한 봄이 찾아왔다.

숲 속 깊은 곳에서 흘러내려온 시냇물이 얼어붙은 땅을 적시고, 구슬피 우는 암수 말 한 쌍이 해묵은 땅을 갈아엎으니 새파란 보리싹이 머리를 내밀고 방긋 웃었다.

“집에 가고 싶다...”

어린 집사가 한숨처럼 한탄했다. 단순한 향수병이 아니었다.

까마귀 성은 객관적으로 봐도 그리 큰 성이 아니었다. 계곡과 절벽을 앞뒤로 끼고 있어 면적 자체가 적은데, 그 좁은 공간에 각종 군사시설과 저장고를 두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외성이 뚫리면 고립되는 지형이라 최대한 많은 물자를 비축해야 했다.

자연히 아성도 작고 초라했다. 1층 홀은 열 걸음이면 왕복할 만큼 협소하고, 2층 계단은 술 먹고 오르다 낙사한 선대가 하나쯤 있을 만큼 좁고 가팔랐다. 영주의 침실은 어떤지 몰라도 객실은 침대 하나 겨우 들어갈 크기였다. 이것도 왕이라 대우받은 것이었다. 예전에 왔을 때는 창고에서 지냈었다.

그래도 경치는 아주 좋았다. 해가 뜨는 동쪽 하늘로 구불구불 뻗어가는 계곡이 보이고, 가파른 산길을 오르는 양떼와 빗물이 빠지도록 쟁기질하는 농부가 한번에 보였다. 삭막하고 냄새나는 도시생활에 지친 부르주아라면 하루쯤 와서 쉬었다 가고 싶은 풍경이었다.

“하루! 하루라고요! 기약 없이 죽치는 게 아니라요!”

어린 집사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전쟁이 끝난 지 열흘이 지났는데, 로벨과 로벨의 군대는 여전히 검은 숲에 주둔 중이었다. 로벨이 뱀브레이스 뒷면을 두드리며 말했다.

“제임스 공작의 답장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해.”

제임스 가문과 검은 숲 영주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일종의 무력시위였다. 이참에 늑대성에 도전하지 못하게 기를 죽여야 했다.

“휴가라고 생각해. 그동안 정신없이 바빴잖아.”

“시원한 맥주와 맛있는 닭고기를 먹으며 시집을 읽는 게 휴가죠.”

“맥주? 가져다줄까?”

“말이 그렇다고요.”

로벨도 즐겁지는 않았다. 불사신과 싸우며 갑옷이 많이 상했기 때문이다. 특히 뱀브레이스-팔뚝 보호대는 울퉁불퉁하게 꾸겨져서 망치로 두드려도 펴지지 않았다.

로벨은 작은 망치를 휘두르다 잘 되지 않자 손가락 힘으로 꾹꾹 눌렀다. 그리고 울상을 지었다.

“저기, 집사? 나 갑옷...”

“안 돼요.”

마법검도 울고 갈 즉답이었다.

“우리 이제 부자잖아?”

“우리 가난하거든요? 누가 기사들 몸값을 전부 수리비로 써서 더욱 가난해졌어요.”

아직도 삐진 듯했다. 협상을 위해서는 기분을 풀어줘야 할 것 같았다.

“성 아랫마을에 가볼까?”

“왜요?”

“그냥. 심심하니까.”

어린 집사는 심드렁하게 창밖을 보았다. 전술적 가치 외에 아무것도 없는 계곡길을 오르내리기 싫었다. 성벽 아래를 내려다보기 전까지 말이다.

“어? 키르케?”

마녀 키르케가 기사 종자들과 함께 성문을 통과하고 있었다. 스무 살 밤색 머리의 건장한 사내 종자도 있고, 열다섯 살 금발 머리의 풋풋한 소년 종자도 있었다. 무엇이 즐거운지 하하호호 웃는데, 어린 집사는 즐겁지 않았다.

“저, 저것들이?”

어린 집사 이마에 핏대가 솟았다. 이안 선장이 태풍에 화물을 버리고 왔다 보고했을 때와 가을 농사를 냉해로 망쳤을 때 이후 처음이었다. 로벨은 만질수록 망가지는 갑옷을 내버려두고 어린 집사 머리 위로 창 밖을 보았다.

“와, 사이좋네?”

“기사란 자가! 아직은 아니지만, 곧 기사가 될 자가! 저게 무슨 짓이죠?”

“기사가 왜?”

“저, 저건 아니죠! 아무튼 아니죠!”

어린 집사가 청춘남녀를 삿대질했다. 로벨은 성난 집사와 고깔모자 키르케를 번갈아 보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어린 집사는 그러거나 말거나 계속 화를 냈다.

“키르케는, 키르케는 폐하의 정인(情人)으로 알려졌잖아요? 기사란 자가 주인의 여자를 넘보다니! 그런 파렴치한...!”

“왜? 흔하잖아?”

“폐하가 보는 이상한 소설에서나 흔하죠!”

어린 집사는 주섬주섬 모자와 옷가지를 챙겼다. 로벨이 ‘어디가?’ 묻자 당당하게 소리쳤다.

“아랫마을에 가자면서요? 당장 출발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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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봄이고 날씨가 봄이니 사람도 봄이었다. 청춘남녀는 이름대로 화사하게 피어있었다. 슐츠 경의 기사 종자가 멋진 미소를 지으며 운을 띄웠다.

“솔직히 마녀라고 들었을 때 오해를 많이 했소.”

“어머! 정말요?”

“이렇게 멋진 레이디인 줄 몰랐으니 말이오.”

“히히... 호호호!”

꽃송이에 꼬이는 꿀벌이라고 할까, 켈트 경의 기사 종자와 바이란 경의 기사 종자가 질 새라 아부를 던졌다.

“본인은 처음 봤을 때 알았소. 마녀에 관한 악랄한 소문은 뭇 처녀들의 시샘이구나.”

“늑대성에는 화원이 없다더니, 새빨간 거짓말이었소. 여기 살아 숨 쉬는 아름다움이 있거늘.”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하고, 아부는 설탕처럼 달콤한 법이다. 속이 불편한 제삼자만 빼고 말이다.

“그림 좋은데요? 아주 좋아요. 그대로 박재해서 화장실에 걸어두고 싶네요.”

어린 집사가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막아섰다. 기사 종자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칼을 찬 사내라면 시비를 피하지 않는 법이었다. 숙녀 앞이라면 더욱 그러했다.

“우리에게 하는 말이오?”

“여기 그쪽 말고 누가 있나요?”

기사 종자들의 마스터였다면 어린 집사의 ‘파워’를 알고 감히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영광스러운 승전 만찬에 초대받은 적 없는 기사 종자들은 어린 집사의 권력과 인맥을 알지 못했다.

“우리가 누군지 알고 감히...”

“너희가 누군데?”

어린 집사 뒤로 키가 큰 기사가 나타났다. 기사 종자들이 ‘익숙한 얼굴인데...’ 생각할 때, 마녀가 쏜살같이 뛰쳐나갔다.

“와아! 와! 기사님!”

로벨의 두 손을 꼭 쥐고 강한 호감을 표시했다. 기사 종자들은 졸지에 닭 쫓던 강아지가 되었다.

‘기사님?’

‘기사라고?’

기사 종자들은 크게 두 무리로 나눠졌다. 로벨의 정체를 깨달은 볼탄 반도 출신과 여전히 상황파악을 못 한 검은 숲 출신이었다. 후자의 경우 존 도너반 자작의 기사 종자가 대표적이었다. 서임 받지 않은 종자 신분으로 기사와 맞서는 것이 부담은 있으나, 자존심상 그냥 물러날 수 없었다.

“그 레이디는 우리와 선약이 있으니 양보하시오.”

무릎을 꿇을까 말까 갈등하던 켈트 경의 기사 종자 등은 기겁해서 사귄 지 얼마 안 된 친구를 끌어당겼다. 그러나 존 도너반 자작의 기사 종자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볼탄 반도 종자들은 모두 겁쟁이라고 비웃었다. 더욱이 이곳은 까마귀 성이었다. 강아지도 자기 집에서는 기세등등한 법이다.

“그 약속 취소해주지 않겠어?”

로벨은 화내지 않았다. 권위의식이 부족한 탓도 있고, 왕관을 쓰지 않은 탓도 있었다. 지혜롭고 사려 깊은 자라면 로벨의 정중함을 품위로 여기겠지만, 그렇지 못한 자는 쉽게 오해했다.

기사 종자는 상대가 ‘부탁’하자 더욱 기고만장해졌다.

“그건 안 되겠소. 무릇 기사라면 물러나야 할 때를 알아야 하는 법. 자존심 세우지 말고 어서 레이디를 보내시오.”

저리 꺼지라는 말을 길게 할 줄 아는 기사 종자였다. 하지만 주먹을 막는 방법은 몰랐다. 로벨은 왼손으로 가볍게 잽을 날렸다. 벌처럼 쏜다는 표현이 와 닿는 기술이었다. 퍽-!

“...어?”

기사 종자는 두 눈을 깜박였다. 뭔가 번쩍하는 것을 봤는데 그게 뭔지 깨닫지 못했다. 잠시 뒤, 코피가 주르륵- 떨어졌다.

“기사가 종자와 결투할 수 없으니, 이걸로 무례를 용서할게.”

“지, 지금 나를 때렸...”

기사 종자는 화가 많이 났는지 칼자루를 쥐었다. 로벨은 눈살을 찌푸리고 주먹을 몇 번 더 날렸다.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르고 강하며 정확했다. 흡사 물에 젖은 채찍 같았다. 퍽! 퍽! 퍼벅-!

기사 종자의 얼굴이 좌우로 한 번씩 돌아가더니 칼을 반도 뽑지 못하고 허물어졌다.

“에휴...”

로벨이 폭력적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본디 기사 종자는 얻어맞는 게 일이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뼈가 부러지지 않으면 제대로 배우는 게 아니란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건 마스터가 가르칠 때 이야기 아닌가요?”

“저 종자의 주인의 주인이니까. 괜찮아.”

그게 아니어도 무적무패 왕에게 ‘물러나야 할 때’ 어쩌고 운운한 대가가 고작 주먹질이면 자비롭다 칭송할 수 있었다.

“기사에게 훈계할 사람 또 있어?”

“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기사 종자들은 즉시 손을 저었다. 어린 집사가 턱짓하자 기절한 친구를 들쳐메고 잽싸게 도망갔다. 마녀 키르케가 울상을 짓고 말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 없는데...”

로벨도 그렇게 생각했다. 애들 노는 곳에 끼어든 어른 심정이었다. 하지만 어린 집사는 달랐다.

“이게 다 키르케 때문이에요.”

“저요?”

“다 큰 처자가 외간남자들이랑 몰려다니면 어떡해요?”

“어머나? 그게 무슨 영감 같은 소리죠?”

마녀 키르케가 도끼눈을 떴다. 어린 집사는 눈알을 굴리며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고, 공왕 폐하 입장에서 생각해 보라구요. 그 뭐냐, 이상한 소문이 나면 어떡해요?”

“무슨 소문요?”

“그런 게 있어요! 그런 거!”

“난 상관없는데...”

“제가 상관있어요!”

로벨은 어깨를 으쓱이고 대화에서 빠졌다. 솔직하지 못한 집사와 아쉬워하는 마녀를 데리고 성 아래 분주한 마을로 향했다. 말싸움을 막으려면 뭐라도 물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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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 성 아래 있어 까마귀 마을이라 불리는 계곡 마을은 몹시 분주했다.

전쟁 중에 비운 집과 창고는 못 배운 용병과 무책임한 기사의 숙소가 되어 엉망이었다. 망가진 문짝을 고치고, 방안에 쌓인 오물을 퍼내고, 사라진 울타리를 찾아 계곡 주변을 헤매고 다녔다.

“어이구! 기사 나리! 오랜만입니다요!”

“예끼! 나리라니? 폐하라고 불러야지!”

로벨을 기억하는 마을주민이 꽤 있었다. 이번이 벌써 네 번째 방문이고, 그때마다 큰 홍역을 치렀으니 당연했다.

“어어억-! 공왕 폐하!”

성 밖을 정찰하라고 보냈더니 술집에 눌러앉아 농땡이 피우는 울프 용병단도 제법 있었다. 로벨과 어린 집사를 보고 화급히 숨거나 도망갔는데, 그리 영리하지 않았다.

“얼굴 다 봤어요! 전부 감봉이야!”

검은 숲을 벌벌 떨게 한 최강 용병들을 생쥐처럼 다루는 솜씨가 대단했다. 로벨은 식탁 아래 숨은 용병을 시 서펜트 망토로 가려주며 말했다.

“그만 화내고 술 마시자. 와인? 와인 좋아?”

술집 주인이 황송하다는 몸짓으로 다가왔다.

“저, 폐하, 저희 집에 와인은 없습니다요.”

“그럼 맥주는 있어?”

“아! 마침 최고의 맥주가 있습니다! 저 멀리 볼탄 반도 북쪽 마을에서 생산한 희귀품으로, 리암 수사 맥주라 불리는 것인데, 맛이 쌉싸름하면서 목 넘김이 아주 좋습니다.”

어린 집사와 마녀는 서로를 보고 동시에 깔깔 웃었다. 조금 전까지 싸운 것은 사랑싸움이 분명했다.

“그 최고의 맥주로 3잔 주세요.”

“아주 현명하신 선택입니다.”

어린 집사는 로드릭 시티 특산품이 잘 나간다는 것을 확인해서 기분이 좋았고, 마녀 키르케는 맛있는 술을 마시게 되어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로벨은 친구들이 좋아하니 덩달아 좋았다.

“그래서 말인데, 내 갑옷...”

“안 돼요.”

“...아직도?”

아무튼 좋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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