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6화. 회군
로벨 로드릭 연합군은 잉그비아 왕국의 수도 린딘 시티에 무혈입성했다.
볼탄 반도 군대만 왔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존심이 강한 린딘 시티의 기사와 시민이 순순히 항복할 리 없으니까. 물론, 에드워드 3세 군대만 왔어도 불가능했다. 전쟁에서 약자의 편에 서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오늘의 승리는 로벨과 에드워드가 힘을 합친 결과였다.
“아직도 소식이 없는가!”
“외람되오나, 이미 티스 강을 건넜을 겁니다.”
고르곤 공작은 충성스러운 기사들만 데리고 하이랜드로 도주했다. 에드워드 3세가 진노하여 추격대를 보냈지만, 체포는 회의적이었다.
화이트 타워에서 쫓겨났으나, 그래도 하이랜드의 공작이었다. 그 세력을 얕잡아 볼 수 없었다.
“이곳은 에드워드의 고향이라 그나마 쉬웠죠. 영주들도 우호적이고요. 하지만 북쪽으로 올라가면 달라요. 그곳은 고르곤 가문의 땅이니까요.”
“잉그비아 왕국은... 한동안 내전에 시달릴 거야.”
“언제는 안 그랬나요? 맨날 싸우는 게 기사의 일인데.”
로벨과 어린 집사는 잡담을 나누며 린딘 시티 시내를 순회했다. 시민들을 안심시키고, 혹시 모를 반란을 잠재우기 위한 행사였다.
린딘 시티의 분위기는 흥미로웠다. 전쟁에서 승리한 듯 기뻐하는 시민과 패배감에 젖어 우울해하는 시민이 뒤섞여 있었다.
술집에서는 에드워드 3세의 복권을 축하하며 건배하는 시민과 화이트 타워의 함락을 슬퍼하며 한탄하는 시민이 끝내 멱살잡이를 벌였다.
“존 2세 폐하는 다시 오신다! 하이랜드의 군대를 이끌고 돌아와 네놈들의 하찮은 대가리를 친히 쪼개주실 것이다!”
“양치기 공작이 무슨 폐하냐! 흑태자의 호통에 꼬리 말고 도망간 겁쟁이지! 지금쯤 똥통에 숨어서 살 궁리나 할 거다!”
로벨은 술잔이 날아다니는 술집 난투를 구경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잉그비아야.”
술 취해서 싸울 때도 입담은 죽지 않았다. 볼탄 반도였으면 일단 칼침부터 놓았을 텐데, 여러모로 재미있는 나라였다. 호른 경이 한심하다는 듯 싸움꾼을 보았다.
“누가 적이고, 누가 친구인지 알지 못하는군요.”
잉그비아 왕국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막간극이 끝나고 2막이 시작되었을 뿐이다.
“우리가 알 바 아니야.”
로벨은 창밖으로 튀어나온 맥주잔에 코를 박고 냄새 맡는 모닝스타를 달랬다. ‘지지야. 지지.’ 그러자 어린 집사가 반색하며 물었다.
“어어? 그럼 끝인가요? 이제 돌아가나요?”
로벨은 말머리를 남쪽으로 돌리고 끄덕였다.
“응. 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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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해서 재미있는 광경이었다.
일국의 왕과 왕자가 성 밖까지 쫓아와 매달리는 광경은 오래 살아도 쉽게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으아닛! 진짜 가신다고? 고르곤 공작은? 프란시스 공자는 어찌하고 말이오?”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어찌 이러시오? 여름까지만 남아주시오.”
로벨은 모닝스타의 안장을 점검하며 태연히 거절했다.
“이 전쟁은 잉그비아 왕국의 전쟁이오. 외지인이 개입하면 폐하의 정통성만 흔들릴 뿐이오.”
그럴듯한 핑계였다. 에드워드 3세는 걸쭉한 신음을 흘렸다. 외세를 끌어들인 왕의 평가가 좋을 리 없었다.
로벨은 명예로운 기사답게 작별을 고했지만, 실무는 조금 지저분하고 질척거렸다.
“에드워드 폐하? 에드워드 전하? 저기, 약속한 보상에 관해서 좀...”
어린 집사가 수줍게 종이뭉치를 내밀었다. 잉그비아 왕국의 모든 항구에서 관세를 면제한다는 조약서와 잉그비아 국왕의 이름으로 선원과 선박을 보호한다는 서약서였다.
실제 효력을 발휘하려면 복잡한 공문이 오고 가야 하지만, 잉그비아 왕국의 내정이 엉망이라 지금 당장은 어려웠다. 그래도 이렇게 증서를 따놓으면 나중에 딴말 못하니 안심할 수 있었다.
욕심 많고 무도한 왕이라면 ‘난 그런 거 약속한 적 없소!’라고 입 씻을 수도 있으나, 존경받는 왕 에드워드 3세는 그러지 않았다. 혹은 그러지 못했다. 아무리 낯짝이 두꺼워도 3천 개의 창칼을 튕겨내지는 못했다.
어린 집사는 증서들을 챙겨 들고 ‘히히힛!’ 웃었다. 이 종이 한 장 한 장이 나중에 수만, 수십만 페닝의 재산이 될 것이다.
어린 집사의 기분이 좋아 로벨도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로벨이 웃자 기사와 마녀와 용병이 모두 웃었다. 결국 로벨 로드릭 연합군은 실없는 웃음과 함께 해산되었다.
흑태자가 건틀렛을 벗고 악수를 청했다.
“집안 정리가 끝나는 대로 찾아뵙겠소. 오늘 못한 축하주는 그때 듭시다.”
로벨은 건틀렛의 가죽끈을 풀면서 적어도 올해는 아닐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 있게 약속했다.
“좋은 술로 준비해두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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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소설이나 기사소설이면 이쯤에서 장면이 전환되어 개선식이 시작되어야 하는데, 현실은 소설보다 팍팍했다.
엘리엇 성 전투와 에드워드 3세 군대의 이탈로 숫자가 조금 줄었지만, 그래도 총 3,500명의 병력이었다. 그중 100여 명이 부상자였다. 규모가 규모라 회군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로벨은 과묵한 몬트 소대를 백악성으로 보내 항구에 정박 중인 맥켈런 남작의 함대를 준비시키고, 호른 경, 켈트 경, 바이란 경 등 가장 신뢰하는 기사들을 주변 마을로 보내 식량을 조달케 했다. 가급적이면 거래를 권했지만, 천성이 못돼먹은 게 기사들이라 얼마 주고 거래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살려는 드릴게. 가기 전에 빵 정도는 줘도 되잖아?’ 식으로 상대방 목숨 가지고 거래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괜한 걱정이 아니었다. 로벨의 성품을 모르는 ‘일부’ 기사들이 멋대로 이탈하여 농가의 가축을 사냥하고, 여자와 술을 탐한 일이 일어났다. 로벨은 매우 화가 났지만, 처벌하지 못했다.
로벨을 따라 먼 곳까지 온 기사들이었다. 애써 승리한 전쟁에서 정복자의 권리도 누리지 못하고 돌아가는데 처벌까지 할 수 없었다. 에드워드 3세에게서 보상을 받았지만 배 한 척 없는 가난한 기사들은 체감할 수 없었다.
로벨은 불필요한 징발을 자제하라 권고하고, 늑대성에 돌아가는 즉시 공적에 따라 금화를 내릴 것을 약속했다. 기사들의 패악질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조금은 진정되었다.
그렇게 어르고 달래며 꾸역꾸역 남하하여 백악성에 이르자, 맥켈런 남작이 어이없어하며 말했다.
“그냥 함대를 린딘 시티 동쪽으로 부르면 되지 않았소?”
“...아?”
그래도 의미가 없지는 않았다. 우선 항해시간을 줄일 수 있었다.
“갈 때도 두 번 나눠서 가야 하는데, 린딘 시티에서 사트로 시티까지는 너무 멀잖아요?”
어린 집사가 주인의 명예를 위해 변명했다. 바닷길은 종잡을 수 없으니 가급적 거리를 줄이는 것이 좋았다.
로벨 로드릭 군이 차례로 배에 올랐다. 로벨은 가장 믿을 수 있는 기사, 호른 경에게 지휘권을 주어 1,800명을 먼저 보냈다. 그리고 나흘 동안 풍비박산이 난 백악성에서 백악성의 주인 도베른 백작과 불편한 시간을 보냈다.
“거, 참, 올 때는 먼저 오고 갈 때는 나중에 가니 참된 기사로군?”
잉그비아 왕국인이라 칭찬도 조롱 같았다. 로벨은 편협해진 마음을 다잡고 활짝 웃었다.
“그리 말해주어서 고맙소.”
도베른 백작의 표정이 이상해진 것을 보아 칭찬이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라 천진난만함으로 무마했다.
미쳐 날뛰는 부하들을 통제하고, 땅 주인의 눈치를 보며 나흘을 버티자 맥켈런 남작의 함대가 돌아왔다.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곧은 돛대가 반가워서 눈물이 날 정도였다.
여기서 때 이른 태풍이 불거나 반(反)에드워드 3세의 함대가 공격해 오면 세 페이지에 한 번씩 옛 신의 이름을 부르짖는 영웅소설-살아남을 경우-이 되겠지만, 편리함만큼이나 자극적인 전개도 없었다.
고질병이 된 뱃멀미 외에는 전원 무탈하게 볼탄 반도에 돌아왔다. 역사서에는 한 줄로 처리될, 혹은 한 줄조차 나오지 않고 ‘승리했다’ 뒤에 생략될 대규모 회군이 끝났다.
“하아... 싸우는 것보다 힘들어...”
사실 평범하게 회군하면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긴 항해와 약탈금지로 어려운 길을 돌아왔다.
“그래도 소득이 있잖아요?”
어린 집사가 에드워드 3세의 인장이 찍힌 서류를 펼쳐 보이며 말했다. 이안 선장의 남해항로 외에도 북해항로와 외해항로를 개척할 수 있게 되었다. 마녀 키르케가 검지를 세워서 까닥였다.
“하지만 진짜 목적은 못 이뤘어요.”
“진짜 목적?”
“류트 프란시스 공자님이랑 악마추종자를 잡는 거요!”
마녀 키르케가 허리에 손을 얹고 말했다. 암살미수범인 동시에 사악한 이교도 마법사였다. 로벨과 어린 집사가 동시에 한숨 쉬었다.
“암살자 하나 잡자고 저 많은 병사를 외국에 주둔시킬 수 없어.”
“사실 안 될 것은 없지만... 비용을 생각하면 효율이 떨어지죠.”
로벨은 흐느적거리며 부두에 내리는 울프 용병단을 보고 말했다.
“흑태자도 알고 있어.”
“뭐, 그렇긴 하죠?”
정확히 말하면 흑태자가 먼저 알았다.
“고르곤 공작의 배후에 악마추종자가 있으니까 뿌리를 뽑으려고 할 거야. 그리고 류트 공자도...”
로벨은 또다시 배를 타서 골이 난 모닝스타에게 다가갔다.
“무엇보다 류트 공자가 어디 있는지 모르잖아? 그 기사처럼 무턱대고 찾아다닐 수도 없고.”
“그 기사요?”
로벨은 모닝스타를 달래느라 대답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단단히 삐진 듯 로벨의 손길에도 고개를 휙- 휙- 돌리며 외면했다.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는 서로를 보면 지혜를 짜내었다. 영리하고 영특한 소년 소녀라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하? 더스틴 폴라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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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릭 시티로 가는 길은 순탄했다. 완연한 봄이라 춥지도, 덥지도 않았다. 로벨에게 충성하는 영주들이 자발적으로 먹을 것과 쉴 곳을 마련해주어 불필요한 마찰도 없었다. 그러나 늑대성에 도착한 이후에는 정신이 없었다.
로벨은 늑대성 금고를 탈탈 털어서 굶주린 기사들에게 포상을 내려주었다. 금화가 부족하면 보석과 귀중품을 섞어서 하사했다. 포클랜드에서 선물받은 보물과 해적섬에서 가져온 보석이 전부 바닥났다.
로벨은 하룻밤의 짧은 연회를 베풀고 재빨리 해산을 명령했다. 말안장에 금화주머니를 꿰찬 기사들은 희희낙락해서 고향으로 돌아갔다. 부모와 형제에게 전공을 자랑하고 흥청망청 놀고 마실 것이다. 그러나 로벨은 그럴 수 없었다.
리암 수사와 그람 형제가 많은 일을 해주지만, 그래도 영주가 해야 할 일은 남아있었다. 로벨은 자리를 비운 서른 날 남짓한 시간 동안 쌓인 일거리를 확인하고 진저리쳤다.
“숫자가 너무 많아...”
“뭐가요? 뭐가 많아요? 세 장 밖에 안 되는데요?”
로벨은 어린 집사 앞에 쌓인 한 무더기 서류를 보고 말을 바꿨다.
“계산이 너무 어려워...”
“에이, 동방숫자(10진법)잖아요? 요즘은 어린아이도 한다고요.”
“거짓말하지 마.”
“거짓말 아닌데요? 전 7살 때 12진법 사칙연산을 익혔거든요?”
“나, 나도 7살 때... 어... 음...”
로벨은 자신이 7살 때 뭘 했는지 고민하다가 포기했다. 첫째 오라비의 칼을 가지고 놀다가 열흘간 외출금지 당한 일이랑 나무 위에서 떨어져서 한쪽 다리가 부러진 일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로벨이 구시렁거리며 산수에 전념할 때 펄프 대장이 찾아왔다. 로벨은 울프 용병단의 인원 및 물자보고서를 가져왔다고 생각하고 손을 내밀었는데, 예상 밖에 정갈한 편지가 놓였다.
“강철성에서 온 편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