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307화 (307/605)

307화. 마스코트

봄.

겨우내 쌓인 눈이 녹고 초록이 방울방울 맺히는 생명의 계절.

깊은 잠에서 깨어난 짐승은 따스한 햇살에 미소 짓고, 추위를 버텨낸 짐승은 떫은 새순에 한숨 쉬고, 먼 곳에서 돌아온 짐승을 낡은 집을 보수하느라 분주했다.

로벨과 어린 집사는 세 짐승 모두에 해당했다.

“농경지가 늘어났는데 농부가 줄었어요. 너도나도 장사하겠다고 상단에 들어가니까 쟁기질할 일손이 부족해요.”

“농마를 사면 어때? 아니면 황소도 좋아.”

“자갈을 골라내고, 씨를 뿌리고, 잡초를 솎아내려면 손이 필요해요. 그건 발굽으로 되는 게 아니에요.”

봄을 맞아 행복하지만, 쓸 돈이 없어서 우울하고, 할 일은 많았다.

“발굽이라도 많으면 한결 낫잖아?”

“예산이 되면 말이죠.”

어린 집사가 주판알을 쓸어 담으며 한숨 쉬었다.

“으으... 그렇게 다 퍼주는 게 아니었어요.”

그렇게 다 퍼준 로벨은 할 말이 없어서 목을 움츠렸다. 기사와 용병의 불만을 잠재우려면 달리 방법이 없었다. 어린 집사도 그 사실을 알기에 입술을 한번 삐죽이고 말았다.

“장기적으로 보면 잘한 일이에요. 올봄이 고단해서 그렇죠.”

“우쭈쭈쭈! 이것 보세요! 이것 좀 봐요!”

영주와 집사가 영지 경영에 골머리를 앓는 사이, 마녀 키르케는 늑대 남매와 어울려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사람에게는 각자의 역할이 있으니, 늑대성의 마스코트(Mascot, 魔女)가 진짜 마스코트 아야와 이야카를 돌보는 것을 탓하면 안 되는데, 참을성이 부족한 어린 집사는 그만 소리 지르고 말았다.

“왜 여기서 노는 건데요! 제발 나가서 놀아요!”

아야의 볼살을 늘려서 웃는 얼굴로 만들던 마녀 키르케가 깜짝 놀랐다.

“왜 또 구박해요? 맨날 구박이야!”

“정신 사납잖아요!”

“거짓부렁이야! 애들도 나이 먹어서 얌전하다구요!”

마녀 키르케가 소리를 빽! 지르자 돌연히 로벨이 탄식했다.

“아, 아아...”

어린 집사가 부쩍 커서 수염이 거뭇거뭇 나고, 바구니에 쏙 들어가던 아야와 이야카가 노견(?) 소리를 들으니 새삼 세월의 변화가 느껴졌다.

‘나도 금방 서른이잖아?’

로벨은 자신의 나이를 깨닫고 충격 먹었다. 여염집 아낙이면 결혼해서 자식을 셋 정도 봤을 나이였다. 로벨보다 어린 제시가 쌍둥이를 낳고도 아들을 또 낳았으니 농담이 아니었다.

“실감이 나지 않아.”

“뭐가요?”

“내가 늙었다는 사실 말이야...”

로벨이 우울해 하자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가 당황해서 위로했다.

“어린 나이는 아니지만, 늙었다고 하기는 좀... 아직 20대잖아요?”

“맞아요! 맞아! 기사님은 동안이라 10대라고 해도 믿어요!”

“에이, 그 정도는 아닌... 것이 아니라 정말 그래요! 영주님은 젊어요! 진짜로!”

두 친구의 위로에 로벨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평균수명이 40대라 해도, 칼 맞거나 병들지 않으면 대개 60살까지는 살았다. 로벨은 아직 한창때 나이였다. 그런데 작은 실수가 있었다.

“가만, 가만, 기사님이 왜 20대에요?”

로벨과 어린 집사는 동시에 아차! 했다. 로벨이 아닌 진짜 로벨은 로벨보다 4살이 많아 세간에 알려진 나이는 32살이었다. 그걸 생각하면 로벨이 동안이란 말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아무튼 20대의 외모를 간직하고 있으니 말이다.

“정신연령이 20대라고요! 우리 영주님은 아직도 철이 안 들었으니까요!”

“응! 응! 맞아! 난 아직 철이 안 들었어!”

로벨이 열정적으로 긍정하자 마녀 키르케가 박수치며 좋아했다.

“와아! 그렇게 말하니까 정말 철이 안 든 것 같아요!”

마녀 키르케가 납득하자 로벨은 무사히 속여 넘겼다는 안도감보다 왠지 모른 불쾌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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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사흘간 두문불출하다 간신히 어린 집사의 허락을 받아 늑대성을 나왔다.

로벨이 꼭 해야 하는 일-예산안 승인, 사형집행 승인, 국왕과 봉신들에게 편지쓰기 등등-이 아니면 로벨이 없는 편이 일 처리가 빠르기에 굳이 붙잡지 않았는데, 로벨은 자신이 유능해서 일이 금방 끝났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푸르릉-! 푸르르르-!”

로벨만큼이나 신이 난 것이 로벨의 애마 모닝스타였다. 본디 야생마인 모닝스타는 성 안에 갇혀있는 것을 싫어했다. 하루라도 산책하지 않으면 골이 나서 ‘조랑말’ 등을 괴롭혔다.

이제 와 하는 말이지만 ‘조랑말’의 기수인 과묵한 몬트는 성질 더러운 모닝스타 때문에 머리카락이 뭉텅이로 빠졌다. 겁도 주고, 달래기도 했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 말이라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애초에 로벨이 아니면 만지지도 못했다.

“그렇게 좋아?”

“푸릉!”

“사실 나도 좋아.”

로벨과 모닝스타의 산책 코스는 몇 년째 비슷했다. 로드릭 시티 외곽을 돌며 농경지와 방목장을 살피고, 울프 용병단 주둔지에 잠깐 들렀다가 별일 없으면 시장으로 향했다.

올해 춘·추경지는 방목장과 가까워 금방 첫 코스를 돌았다. 어린 목동이 잘 익은 치즈를 가져와 고귀한 영주에게 진상하고, 늙은 농부가 굽은 허리를 더욱 구부리며 위대한 기사에게 경의를 표시했다. 로벨은 치즈값으로 10로닝 은화 세 장을 주고, 이빨 빠진 농부에게 반쪽을 나눠주었다. 모두가 행복했다.

로벨은 치즈 껍질을 질겅질겅 씹으며 로드릭 시티 동문을 지나 시장으로 향했다. 농사와 장사는 비슷한 점이 많았다. 계절을 탄다는 점에서 특히 그러했다.

겨우내 가공한 가죽과 모피가 시장에 풀렸다. 네일 공국의 유능한 사냥꾼이 잡은 겨울 짐승은 상처가 없고 부드러워 인기가 많았다. 봄을 나고 여름을 보낼 줄 아는 상인은 기꺼이 가죽 모피를 구입했다. 씨를 뿌리고 피를 뽑으며 가을을 기다리는 농부와 비슷한 심리일 것이다. ‘올 겨울은 따뜻하게 나겠지?’

로벨은 모닝스타가 사고 치지 못하게 고삐를 살짝살짝 당기며 시장을 거닐었다. 로벨을 알아본 시장 상인은 모자를 벗고 머리를 조아렸다.

로벨의 땅에서 로벨의 인기는 대단했다. 제빵업자는 아침에 갓 구운 빵을 진상했고, 무두장이는 고삐가 낡았다며 가죽끈을 선물했다. 유라피아 대륙이 넓다고 하지만, 로벨만큼 사랑받는 영주는 다시 없을 것이다. 비결을 물으면 별거 없었다.

‘세금 줄이고, 노역 줄이고, 징발 안 하기.’

그렇게 해서 어떻게 영주 자리를 지키느냐고 물을 텐데, 무적무패의 기사와 경영의 귀재가 있으면 가능했다.

“어이쿠! 영주님 오셨습니까요!”

“고뿔이라도 든 게 아닌지 걱정했습니다요.”

뉴 로드릭 마을의 징수관, 그람 형제가 두 손을 비비며 로벨을 맞이했다. 로벨은 안장뿔에 한 손을 올리고 비스듬히 굽어보았다.

“너희가 여기 무슨 일이야?”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징수관이 상회에 출입하는 것이 좋은 일 같지 않았다.

이제는 오래된 이야기지만, 로벨의 부친 필립 로드릭이 운영한 상단도 징수관과 결탁해서 부정을 저질렀다. 어린 집사가 인간불신&의심병에 걸린 것이 그 때문이었으니, 지금 상황이 달갑지 않았다.

“아이고, 그런 거 아닙니다. 올해 보리작황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왔습니다요. 영주님도 아시다시피 로드릭 상회의 효자 상품이 뉴 로드릭 맥주 아닙니까요?”

“리암 수사와 페리 행정관도 있습니다요.”

로벨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었다. 그람 형제는 높고 낮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인사했다.

“헤헤, 그럼 저희는 이만...”

“다음에 찾아뵙겠습니다요!”

로벨은 헨리 상회장을 보고 갈까 고민하다가 그만두었다. 로벨이 찾아가면 최소 2시간은 업무가 마비될 것이다. 요즘 같이 바쁜 시기에 할 짓이 아니었다.

로드릭 시장은 볼탄 반도 각지에서 온 상인과 손님으로 북적북적했다. 기사, 귀부인, 부르주아, 농부, 광대, 용병, 술꾼, 사냥꾼, 떠돌이, 취객, 일꾼, 순례자 등등 온갖 사람이 들끓었다. 어느 처녀는 농장에서 가져온 계란을 팔고, 어느 소년은 일을 시켜 달라 조르고, 어느 순례자는 신실한 신도에게 자비를 구했다.

처음 시장을 만들 때는 이렇게 커질 줄 몰랐다. 로드릭 항구를 개방하고, 페르젠 시티에서 노스폴드 시티까지 포장도로를 연결한 것이 효과적이었다. 오늘날에는 볼탄 반도의 중심도시 중 하나로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로벨 로드릭 공작님.”

로벨은 시장 사람을 구경하다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았다.

화사한 봄 날씨에 어울리지 않게 두꺼운 후드를 쓴 사람이 있었다. 여기저기 기운 흔적이 많은 꼬뜨와 험하게 다룬 스태프가 거렁뱅이 같기도 하고 가난한 순례자 같기도 했다.

“도반 도트넘 백작님의 답신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나 둘 다 아니었다. 로벨의 왼손이 슬금슬금 흐룬팅으로 향했다. 거리와 각도가 안 좋아 단숨에 베기는 힘들었다. 모닝스타의 목덜미를 긁자 영리하게 옆으로 움직였다.

“넌 누구야?”

“그분의 미천한 종입니다.”

로벨은 대명사가 싫었다. 정체를 숨기는 것은 음흉한 구석이 있다는 거니까.

“뱀파이어야?”

후드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로벨은 간격을 가늠한 후 마음을 놓았다. 이 거리면 사람이든 괴물이든 눈 깜짝할 사이 머리통을 쪼갤 수 있었다.

“난 너희를 믿을 수 없다고 했어.”

“제 주인께서도 신뢰를 바라진 않습니다.”

로벨은 사흘 전 전달받은 강철성의 편지를 떠올렸다. 긴 문장이 아니라 어렵지 않았다.

‘네 발 달린 마녀와 죽은 자의 왕을 조심하시오.’

로벨은 고민 끝에 친필로 답장을 보냈다.

‘수작 부리지 마!’

로벨의 반응이 무척 서운했던 모양이다.

“조만간 마녀가 찾아갈 겁니다.”

“자주 봤어.”

로벨은 저주를 퍼붓다가 목이 떨어진 마녀들을 떠올리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뱀파이어가 살짝 당황했다.

“지금까지 만난 마녀와 다릅니다. 그녀는 오두막의 악마, 절구통의 노파, 뼈다리의 마녀, 바바 야가(Baba Yaga)입니다.”

로벨의 표정이 딱딱하게 변했다. 시장의 소란이 귓가에 떠나 기묘한 고요가 내려앉았다. 칭호 하나하나가 무시무시했다. 로벨은 마른침을 삼키고 물었다.

“...그게 누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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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키르케가 손뼉을 짝! 치고 말했다.

“네 발 달린 오두막에 사는 늙은 마녀에요.”

로벨은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어째 표현이 하나같이 이상했다.

“네 발 달린 오두막?”

“한 발이란 이야기도 있고, 두 발이란 이야기도 있는데, 아마 네 발일 거예요. 그래야 균형이 맞잖아요?”

마녀 키르케는 놀라운 추리가 아니냐는 듯 깔깔 웃었다. 하지만 로벨은 오두막에 발이 달린 것을 상상하지 못했다.

“동방에서 유명한 전설이에요. 지역마다 조금씩 다른데, 아름다운 미녀, 추한 노파, 세쌍둥이, 엄마와 딸, 사악한 마녀, 선량한 마법사...”

“잠깐. 잠깐만. 그게 모두 같은 사람이라고?”

“옛 신의 신앙이 전해지면서 신성을 잃은 여신이란 말도 있어요.”

로벨은 옛 신까지 거론되자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그 말은... 그 마녀가...”

마녀 키르케는 배려 없이 긍정했다.

“네에! 맞아요! 마도의 수호자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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