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305화 (305/605)

305화. 노동자

빠아아암-! 빠아암-!

포비아 왕국의 뿔나팔이 울리고, 잉그비아 왕국의 청동나팔이 울렸다. 불씨와 잿가루가 고동소리에 들썩이다 푸른 하늘로 흩어졌다.

엘리엇 성 앞마당에 기사와 병사가 모였다. 격렬한 전투로 지치고 다쳐서 볼품은 없었다. 무기는 땅바닥에 끌리고 갑옷은 피와 먼지로 지저분했다. 머리와 팔다리에 붕대를 감은 부상자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표정은 하나같이 밝았다.

볼품없는 기사 중 가장 볼품없는 기사가 아성의 계단을 올라갔다. 성 안마당을 넘어 성 밖과 성벽 위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로벨은 계단 위에서 환한 미소를 짓는 기사를 내려다보았다. 오늘의 주인공은 로벨이 아니었다. 조연 자리도 양보해야 했다.

로벨 옆에 앉은 노(老)기사가 몸을 일으켰다. 과장된 동작으로 롱소드를 뽑아 가슴에 세웠다.

“채프 브롬턴 경.”

오늘의 주인공이 무릎을 꿇었다. 3천 명의 시선이 집중된 장엄한 연극이 시작되었다.

“잉그비아 왕국의 적법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이름으로 브롬턴 경의 공을 치하하오. 실로 장한 일을 해주었소.”

“성은이 망극합니다.”

에드워드 3세는 롱소드를 기울여 브롬턴 경의 어깨를 두드렸다.

“거룩한 옛 신의 이름으로 브롬턴 경을 브롬턴 남작으로 봉하고 황금평야의 비옥한 땅을 하사하겠소.”

“성은이!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와아아아- 와아아-!”

국왕과 공작이 모인 자리에서 전공을 치하받는 것은 덧없는 영광이었다. 채프 브롬턴 남작은 위대한 영광 앞에서 자신의 선택을 기꺼워했다.

호른 경이 호기심을 참지 못해 속삭였다.

“저런 자가 있을 것을 어찌 아셨습니까?”

로벨은 흑태자와 기사들에게 둘러싸인 브롬턴 남작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나도 몰랐소.”

“허나, 그때는 분명...”

작전을 짤 때는 누구보다 확신이 있어 보였다. 로벨은 살포시 웃었다.

“누대에 걸쳐 왕좌를 지켜온 집안이니 알려지지 않은 자기 사람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생각했소. 황금평야의 가치를 생각하면 더욱 말이오. 그리고 사실 없어도 상관없었소.”

로벨은 후대에 길이 전해질 승전에도 끝까지 차분했다. 엘리엇 백작의 말대로 고작 전투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때는 진짜 린딘 시티를 공격했을 테니까.”

“하... 하하... 과연 주군이십니다.”

평소에는 신발끈도 못 묶을 것처럼 맹한데, 전장에만 나오면 딴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로벨을 좋아했다.

“이제 거점이 마련되었군요. 다음 행보는 어디입니까?”

엘리엇 성은 크고 넓고 튼튼했다. 식량도 충분하고 수량도 풍부했다. 3천 5백 명의 로벨 로드릭 연합군이 주둔하기 충분했다.

“본인이 정할 일이 아니오.”

“그러면 누가 정할 수 있습니까?”

로벨은 시끌시끌한 메인 홀을 지나 뒤뜰로 향했다. 축하와 농담을 나누면서도 윗사람에게 시선을 떼지 않던 기사들은 자리를 피해 길을 열어주었다.

로벨은 강철의 벽을 지나 황금평야가 내려다보이는 2층 테라스에 올랐다. 구름 아래로 이름 모를 산능선이 보이고, 평지에 흐르는 안개 강이 보였다.

“저들이 결정할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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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 성의 함락 소식이 잉그비아 왕국을 다시 흔들었다. 백악성에 이어 두 번째 패전이었다.

이것으로 로벨 로드릭 연합군은 도베른 백작령, 웨스텅 백작령, 엘리엇 백작령을 차지했다. 잉그비아 섬에 첫발을 내디딘 지 열흘만의 전과였다.

잉그비아 왕국의 제후들은 자신이 다음 타켓이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였다. 이제 두 가지 선택만 있었다.

“하, 항복하는 것이 어떻소?”

“저 비열한 침략자에게 굴복하자는 말이오?”

“볼탄 반도의 공작에게 항복하는 게 아니라, 에드워드 3세 폐하에게 항복하는 거요.”

“끄응... 그것은 뭐, 그리 불명예가 아니지만...”

로벨이 점령한 린딘 시티 남쪽 영주들이 먼저 행동하기 시작했다.

“에드워드 3세 폐하만이 잉그비아 왕국의 진정한 왕이시다!”

친(親) 에드워드 3세의 기사들이 엘리엇 성으로 병사와 말을 끌고 찾아왔다. 그 숫자가 매일같이 불어나 닷새 만에 700명이 넘었다.

이제 고르곤 공작과 린딘 시티 기사들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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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딘(Llyn-Din).

안개 강과 장로 강이 만나는 곳에 세워진 1,000년의 도시는 옛 이름처럼 아름다운 호수를 품고 있었다. 아침마다 자욱한 안개가 깔리고, 겨울이면 강변을 따라 차디찬 바람이 몰아치지만,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사랑하고 아끼는 도시였다.

“볼탄 반도의 늑대가 오면, 고르곤 공작이 막을 수 있을까?”

“제아무리 늑대의 공작이라도 우리 도시를 파괴할 수는 없소!”

“엘리엇 백작도 그리 장담했으나...”

기사와 시민 얼굴에 걱정, 불안, 공포, 초조 등이 감돌았다. 포비아 왕국의 왕좌를 바꾸고, 에르나 왕국의 1만 군사를 물리친 무적무패의 기사가 비로소 실감되었다.

그러나 위기가 닥치면 영웅이 등장하는 법이다. 평소 ‘조용한 이웃’이라 불려온 시민이 광장에 올라왔다.

“자랑스러운 호수의 시민들은 들으시오! 부디 청하건대! 비겁한 겁쟁이처럼 굴지 마시오!”

이른 아침, 하얀 안개 위로 비장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우리의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 그리고 그 아버지까지 싸우지 않고 항복한 역사는 없었소!”

싸워서 박살이 난 적은 많다는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았다.

“로벨 로드릭이 얼마나 강한지는 중요하지 않소! 에드워드 3세가 적법한 왕인지는 중요하지 않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단 하나! 우리의 허락 없이 저 성벽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오!”

신념이 깃든 목소리에는 마력이 있으니, 마법사가 아니어도 마법을 부릴 수 있다.

“우리는 자유시민이요! 우리가 굴복하는 것은 우리가 그리하기로 마음먹었을 때뿐이오! 우리의 충성을 창과 칼로 강요한다면! 우리도 창과 칼을 준비해야 하오! 그렇지 않으면 비루한 노예와 다를 것이 무엇이오!”

피를 토하는 외침은 활활 타는 불이 되어 캄캄한 안개를 걷어냈다.

“싸우자! 싸우자! 침략자와 싸우자!”

“린딘 시티의 자유를! 린딘 시민의 영광을!”

시민들은 무기를 꺼내들었다. 용기와 광기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불길에 부채질하는 사람은 차가운 심장을 가지고 있었다.

“아주 훌륭한 연설이었소.”

안개 속에 숨은 사내가 속삭였다. 피가 얼어붙은 듯한 목소리였다. ‘조용한 이웃’은 광장을 돌아보고 말했다.

“이걸로 고르곤 공작도 싸움을 피할 수 없겠지.”

안개의 사내는 소리 내어 웃다가 잔기침으로 마무리했다. 몸이 안 좋은 듯 말을 잇지 못했다. ‘조용한 이웃’은 사내의 말을 기다리지 않았다.

“내 역할은 여기까지요. 이번 일은 그쪽이 시작했으니 그쪽이 마무리하시오.”

“물론, 그럴 것이오.”

‘조용한 이웃’은 안개에 눅눅해진 망토를 추스르고 발을 떼었다.

“행운을 빌겠소, 류트 프란시스 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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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브롬턴 경이 협조하지 않았으면 직접 린딘 시티를 공격했을 거라 말했지만, 그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지난 1천 년 동안 무수히 많은 공격을 받은 도시였다. 전쟁준비와 마음가짐이 어느 도시보다 철저했다.

“싸울 필요가 있을까?”

“예?”

로벨은 심각한 보고에도 긴장하지 않았다. 로벨의 기사들은 로벨이 무장이 덜된 시민이라고 무시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린딘 시티 인구가 1만인데...”

“그중 1/3만 동조해도 3천이야.”

기사치고 셈이 빠른 편이었다. 로벨은 골치 아픈 숫자 따위 집어치우고 명령했다.

“슬슬 끝을 보자. 흑태자를 모셔와.”

로벨은 울프 용병단 이하 볼탄 반도 군사를 뒤에 두고 에드워드 3세를 따르는 잉그비아 왕국 군사를 앞으로 내세웠다.

지난 아흐레 사이 세력이 크게 늘어 1천에 가까웠다. 사기도 대단히 높아 로벨 로드릭 군은 그만 집에 가도 된다는 농담이 새어 나왔다. 진짜 집에 가려고 하면 울고 불며 매달리겠지만.

흑태자가 앞장서서 잉그비아 왕국군을 이끌었다. 백악성과 엘리엇 성의 승리로 사기가 대단히 높았다.

고르곤 공작은 1천의 휘하 병력을 집결시키고 린딘 시민의 참전을 독려했다. 그러나 의외로, 정말 의외로 반응이 미지근했다. 며칠 전만 해도 결사항쟁 할 것처럼 굴던 시민들이 돌연 외면했다. 겁쟁이라고 욕해도 소용이 없었다. 성 안의 시민과 성 밖의 시민이 다르기 때문이다.

로벨은 전황을 보고받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유민도 두 부류가 있으니까.”

“성 안의 부르주아와 성 밖의 가난한 노동자요?”

어느 도시나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로드릭 시티도 도시 안의 시장 상인과 도시 밖의 농민이 나뉘어 있었다.

“부르주아는 고르곤 공작을 지지할 거야. 처음부터 그랬으니까. 하지만 대다수의 노동자는 에드워드 3세를 지지할 거야.”

어린 집사는 두 손을 모으고 감탄했다. 어린 집사가 검은 숲에서 알려준 이야기였다. 로벨은 잊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까 흑태자한테 맡기자.”

“우리는 뭐하나요?”

로벨은 잠깐 고민했다. 뭘 해야 할지 몰라서가 아니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서였다. 그리고 간신히 적당한 단어를 찾아냈다.

“무력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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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태자가 이끄는 1천 명의 에드워드 3세 군대와 로벨이 이끄는 3천 명의 볼탄 반도 군대가 린딘 시티를 포위했다.

수십 문의 대포와 발리스타, 수백 발의 크로스보우가 성탑을 겨냥하고, 가문의 깃발을 꼿꼿이 세운 기사들이 일렬로 늘어서서 성문을 굽어보았다. 전쟁의 나팔이 울리면 단숨에 성벽을 부수고 시가지를 짓밟을 기세였다.

승패에 민감한 것은 기사도, 시민도, 농민도 아니라 용병이었다. 지는 편에서는 땡전 한 푼 받지 못하니 당연했다. 가족도 없고, 땅도 없으니 미련도 없었다. 고르곤 공작에게 고용된 용병들이 무단이탈했다. 그러자 연쇄효과가 나타났다.

고르곤 공작편에 가담한 기사와 부르주아도 슬금슬금 발을 빼기 시작했다. 몰래 도시를 빠져나가 항복하는 기사도 여럿 있었다.

흑태자는 하루하고 한나절을 기다렸다. 영리한 시간이었다. 공포가 확산되는, 그러나 면역이 되지 않는 적당한 시간이었다.

“뛰어난 전술가는 심리전의 달인이지.”

훗날 ‘왕위복권전쟁’이라 명명될 싸움에 클라이맥스가 펼쳐졌다.

“에드워드 3세 폐하의 장자, 흑태자 에드워드다.”

해가 지는 시간이라서일까, 크지 않은 목소리가 멀리 울려 퍼졌다.

“긴 시간을 걸쳐 이 자리에 왔으며, 긴 시간을 들여서 기회를 주었다. 아직까지 항복하지 않은 ‘나의 백성’에게 마지막으로 묻겠다.”

성벽 위의 병사들이 술렁거렸다.

“그대들은 정녕 나 흑태자 ‘에드워드’와 맞서 싸울 것인가!”

펄프 대장은 농담 삼아 ‘에드워드 가문’이라 말했다. 그만큼 오랜 시간 잉그비아 왕국을 다스린 왕의 이름이었다.

3대에 걸친 ‘에드워드’와 고작 1년 남짓한 ‘존 2세’ 중에 어느 쪽이 무거운지 말할 것 없었다. 그리고 사람의 심리는 ‘마지막’에 약했다. 지금 항복하지 않으면 전쟁에, 그것도 명분과 실리가 없는 전쟁에 휘말리게 될 것이다.

“나, 나는 싸우지 않을 것이오!”

“국왕 폐하와 고르곤 공작의 싸움에 왜 우리가 피를 흘려야 하는가!”

그 말에서 이미 답이 나왔다. 린딘 시티의 대다수 노동자는 에드워드를 왕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고르곤 공작도, 그리고 류트 공자도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항복하겠소! 항복하겠소!”

“성문을 여시오! 우린 싸우지 않겠소!”

로벨은 린딘 시티의 성벽과 흑태자 에드워드가 한눈에 보이는 곳에서 우쭐거렸다.

“내가 말했잖아. 조급하게 결정하지 말아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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