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화. 손님
로벨이 성공한 만큼 로벨을 따르는 사람들도 성공했다.
이름뿐인 기사에서 가시나무 성의 자작이 된 머를 브릭 경, 호른 성과 로드릭 항의 주인이 된 패트릭 호른 경, 수백 명의 용병을 지휘하는 펄프 용병대장, 그리고 짐말 한 필로 싸구려 맥주를 찾아 시골 마을을 떠돌던 헨리 피터 상회장이 대표적이었다.
헨리 상회장은 이제 어엿한 도시가 된 로드릭 시티에서 30명이 넘은 직원을 거느리고 300명의 행상인과 거래했다. 또한, 두 아들을 에르나 왕국으로 유학 보내 무사히 대학과정을 마치게 하고, 볼탄 반도 공작을 보좌하는 행정관으로 앉혔으니, 이만하면 상인으로서, 자유민으로서 더할 나위 없이 성공한 인생이었다.
“비축량을 좀 더 늘릴 수 없어?”
“그것이... 검은 숲으로 보내라 하셔서... 서류상으로는 늑대성 창고로 보내진 것이라... 갑자기 매입하면 비용도 비용이지만... 다른 상회의 의심을 사지 않을까...”
모두가 부러워하는 ‘성공한 상인’ 헨리 피터가 고양이 앞의 쥐처럼 쩔쩔매었다. 하지만 안쓰럽게 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포비아 왕국에 적을 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로벨은 자리가 불편한 듯 팔걸이 아래로 칼집을 풀어 어깨에 걸쳤다. 차를 가지고 들어오던 상회 직원이 눈에 띄게 움찔했다. 자비롭고 이해심 많은 기사라 하지만 일단 기사였다. 눈알을 뽑고 코를 잘라도 목은 치지 않았으니 자비라고 우기는 것이 기사였다.
“그거 홍차야?”
자비로운 기사가 자애롭게 묻자 상회 직원 일동이 사색이 되었다.
“다, 다, 다, 당장 와인으로 바꿔오겠습니다!”
“에라이, 멍청아! 공작님이 홍차 따위나 홀짝이겠냐!”
“으응? 그런 뜻이 아닌데...”
애써 차를 끓여온 상회 직원은 소리 없는 구박 속에 와인 창고로 달려갔다.
로벨은 그러지 말라고 말리려다 그래도 싱거운 홍차보단 와인이 낫겠다 싶어 가만있었다. 그리고 헨리 상회장과 협상이 끝나지 않았다.
“전쟁이 시작될 거야.”
로벨의 말에 헨리 상회장은 피곤한 듯 한숨을 쉬었다.
“언제나 그랬지 않습니까?”
유라피아 대륙에서는 사흘에 한 번꼴로 크고 작은 전쟁이 일어났다. 지금 당장도 에르나 왕국과 네일 공국에서는 전쟁이 진행 중이었다. 기사의 가치가 시들지 않고, 용병업이 성행하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우리가 치르는 전쟁은 다르잖아. 질 수도 없고, 져서도 안 돼. 그러기 위해서는 상회장 도움이 필요해.”
로벨이 진지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기다란 속눈썹이 고운 처마 같고, 새까만 눈동자는 깊은 우물 같았다. 헨리 상회장은 곤란했다.
“일단 곡물은 가능합니다. 보리 소비량이 매년 늘어나고 있으니까요.”
로드릭 상회는 고기, 가죽, 양털, 면화, 향신료 등등 다양한 물품을 취급하지만, 그중 가장 주력하는 상품이 ‘리암 수사 맥주’로 널리 알려진 뉴 로드릭 마을 특산품이었다.
맥주 제조에 보리와 홉과 기타 잡곡이 사용되기 때문에 그 부분은 의심 없이 물량을 비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철과 화약은 달랐다. 갑작스럽게 주괴와 초석을 매입하면 포클랜드의 상인이 동시에 바보가 되지 않은 이상 전쟁준비를 알아챌 것이다.
어린 집사가 답답한 듯 뒤통수를 긁었다.
“내일 당장 마련하라는 게 아니잖아요. 내년 봄까지 조금씩 늘리세요. 그 정도 요령도 없어요?”
헨리 상회장은 즉시 반박했다.
“어린 집사도 알다시피 철과 화약은 전략물자입니다.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상단이면 눈을 벌겋게 뜨고 감시하고 있지요. 이만한 물량을... 포클랜드 상인 몰래 구매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어린 집사가 재차 반박하려고 했지만, 타이밍 좋게 와인이 들어왔다. 흐름이 끊겼다. 로벨은 직원이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먼저 말했다.
“그럼 어쩔 수 없네.”
“영주님?”
헨리 상회장과 어린 집사가 로벨을 돌아보았다. 로벨은 팔짱을 끼었다.
“그냥 구입해.”
“그냥요?”
“그래. 그냥 공개적으로 구입해. 단, 아주 많이 구입해.”
헨리 상회장은 멍청해 보일 것을 알면서도 계속 반문했다.
“아주 많이라고 하시면...?”
“말 그대로야. 몇 년을 써도 될 만큼, 아주아주 많이 구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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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의 의도는 단순했다.
어차피 숨기지 못하면 대놓고 전쟁 준비하겠다는 심보였다. 이제 겨울이 시작되었으니 포클랜드든 잉그비아 왕국이든 먼저 쳐들어오지 못할 거란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로벨의 명성은 크고 복잡했다. 자연히 로벨의 의도 또한 복잡하게 전해졌다.
포클랜드의 귀족과 잉그비아 왕국의 외교관은 볼탄 반도의 지배자가 누구와 싸울 생각인지 알아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접촉했다. ‘우린 아니겠지?’라는 신뢰로 시작했으나, 비축량에 질릴 때쯤 ‘우린 아니어야 해!’라는 간절함이 바뀌었다. 여기서 두 가지 성과가 나타났다.
첫 번째는 권력자의 시선이 검은 숲이 아니라 볼탄 반도에 집중된 것이다.
사실 세상사에 예민한 사람이 주의 깊게 살펴야 할 대상은 검은 숲이었다. 제임스 공작과 검은 숲 기사들은 열과 성과 악으로 병력으로 모집했다. 로벨의 비밀스러운 후원으로 충분한 물자도 확보했다. 이제 남은 것은 봄이 올 때까지 전력을 숨기는 일인데, 로벨의 기지(?)로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다.
두 번째는 강철과 화약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것이다.
전쟁이, 그것도 포비아 왕국이 두 쪽으로 쪼개지는 대전쟁이 일어날 거란 소문이 돌면서 이름 있는 상단은 너도나도 철광과 초석을 매입했다. 그러나 그것은 로드릭 상단이 충분한 양의 물자를 비축한 이후였다. 뒤늦게 대비에 들어간 포클랜드와 잉그비아 왕국 기사들만 허리가 휘었다.
후세의 전략가라면 심리전과 정보전으로 완전한 승기를 잡았노라 평할 것이다.
“정말 타이밍이 절묘했어요.”
어린 집사가 희희낙락해서 떠들었다.
“잉그비아 왕국의 내전이 길어질 거라 전망하고 물자를 모은 상단이 많았거든요.”
역시 상인들은 손이 빨랐다. 물론, 빠르다고 좋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영주님의 활약으로 반년도 못 갔으니, 창고에 가득 쌓인 물자가 처치곤란이 되었죠. 마침 겨울도 왔겠다, 눈길에 마차가 막히기 전에 팔라고 했더니 흥정도 안 하고 발주서를 꺼내더라고요.”
그 제안이 볼탄 반도 전(全)상단에 전해진 것임을 알았으면 쉽게 안 팔았을 것이다.
늑대성에는 막대한 양에 주괴와 화약이 쌓였다. 아무리 싸게 샀어도 양이 양이라 지출이 어마어마했다. 로벨이 해적섬에서 보물을 찾아오지 않았으면 로드릭 가문은 빚더미에 앉았을 것이다. 그쯤 되자 금전감각이 떨어지는 로벨조차 걱정했다.
“너무... 많이 샀나?”
하지만 늑대성의 재정을 책임진 어린 집사 생각은 달랐다. 할 수 있으면 로벨의 머리를 쓰다듬고 싶어 했다.
“전혀요! 전혀 괜찮아요! 전쟁이 일어나는 시기는 우리만 아니까요! 이히히! 그때까지 가격을 최대한 올려서 막바지에 팔아치우면 돼요!”
로벨이 심각하게 되물었다.
“적한테 판다고?”
“에이, 설마 그러겠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제삼자한테 팔 거예요”.
포비아 왕국의 긴장감이 높아지면서 인접한 에르나 왕국, 네일 공국, 심지어 바다 건너 아이란드 왕국까지 촉각을 곤두세웠다. 전쟁은 고통이고 슬픔이지만, 동시에 기회였다. 그 기회에는 기회를 노리는 사람을 이용할 기회도 포함되었다. 로벨은 골치가 아픈 듯 머리를 가로저었다.
“난 모르겠어. 집사가 알아서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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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깊어갔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아름다운 쓰레기는 귀천을 가리지 않아 늑대성 안마당에도, 가난한 농가의 지붕에도, 외로운 양치기의 오두막에도 소복이 쌓였다.
“치워도 또 쌓일 텐데 왜 치우는 거요?”
싸움개 닥스가 빗자루를 옆구리에 끼고 차가운 손에 숨결을 불어넣었다. 늑대성 근무도 아닌데 늑대성까지 불려 와 불만이 많았다. 훌륭한 용병 대장 펄프 대장이 솔선수범을 위해 빗질하며 혼냈다.
“그걸 말이라고... 얌마! 넌 먹어도 또 배고픈데 왜 처먹냐?”
“그래서 난 아침에 몰아서 먹소. 그러니 눈도 아침에만 치웁시다.”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 지가 않지! 영주님이 말 타고 가다 미끄러지면 어쩌려고? 이만한 직장이 흔한 줄 아냐?”
“이히히히힝-!”
모닝스타가 눈밭 위를 폴짝거리며 뛰어갔다. 콧김을 뿜고 갈기를 좌우로 흔드는 것이 몹시 기분이 좋아보였다. 무대 위의 광대처럼 요란하고, 산길을 달리는 산양처럼 경쾌했다.
“저 망아지가 그럴 것 같진 않수다.”
“저게 뭔 강아지도 아니고...”
정작 강아지과(?)인 아야와 이야카는 처마 아래 턱을 괴고 누워서 심드렁하게 하품했다. 졸린 눈을 깜박이다가 가끔씩 밥 값하느라 바쁜 용병들을 안쓰럽게 보았다. 귀여움 하나로 삼시세끼 꼬박꼬박 챙겨 먹는 자의 여유였다.
마녀 키르케가 양고기를 한 바가지 내오며 말했다.
“잘 쓸고 있어요? 저 언덕 아래까지 치워야 해요.”
고기냄새를 맡은 늑대 남매가 게으른 몸을 일으켰다. 마녀 키르케는 호들갑을 떨며 눈곱을 떼주고 목과 귀를 마구 주물렀다.
“우리 귀염둥이들! 배고팠어요?”
늑대는 늑대인데 두 발이라 차별 받는 늑대들이 못마땅한 얼굴로 마녀를 쳐다보았다. 마녀는 마법의 단어를 내뱉었다.
“어린 집사가 시켰어요. 해질 때까지 못하면 고기배식 없대요.”
권력과 자본의 마법은 위대했다. 성질 사나운 싸움개조차 움찔해서 한결 빠르게 빗질했다.
마녀 키르케는 네 발 달린 늑대들에게 양고기 한 점을 주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피냄새와 향신료 냄새가 가득한 마녀의 주방이었다. 간단한 스튜는 메인 홀의 벽난로로 요리하지만, 제대로 굽고, 삶고, 쪄내는 요리는 가마솥이 있는 주방에서 해야 했다.
“흐으음... 계란도 있고, 양젖도 있고, 양고기도 있으니까...”
마녀는 팔짱을 끼고 고민하는 시늉하다가 결정했다.
“보리빵에 사과잼이 좋겠다!”
앞서 나열한 재료가 무슨 의미인지는 궁금하다면, 불을 피우기 싫은 마녀의 속마음을 먼저 봐야 할 것이다.
여름이면 재료가 상할까 서둘러 조리해야 하지만, 지금은 그냥 밖에 내놔도 열흘은 보관되는 겨울이었다. 게으름 좀 피워도 괜찮았다. 로벨이나 어린 집사나 먹는 거로 투정부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마녀의 나태함은 금방 제지당했다. 보리빵을 잘게 썰어 사과잼에 절일 때 애꾸눈 볼포스가 찾아왔다.
“오늘 저녁은 양고기와 삶은 계란, 그리고 치즈 넣은 야채스튜를 준비하라 하시오.”
“으앙-!”
마녀가 마녀다운 비명을 질렀다. 애꾸눈은 안대를 쓱쓱 문지르며 위로했다.
“마을 아낙을 몇 명 보내주겠소. 먼저 준비하시오.”
“왜요? 왜 갑자기 고기랑 치즈를 찾아요?”
그 정도는 답할 수 있었다. 성 아래까지 눈을 치우는 것과 같은 이유였다.
“오늘 저녁 손님이 오실 것이오.”
“누구요? 누군데요?”
마녀가 원망을 담아 물었다. 애꾸눈은 주방 기둥에 기대서서 한숨을 쉬었다.
“류트 프란시스 공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