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299화 (299/605)

299화. 방법

로벨은 흑태자의 꼬임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의 말에 동의는 하지만, 동참하는 것은 별개였다. 아쉬운 것은 에드워드 3세 쪽이고,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로벨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병력이 얼마나 되시오?”

흑태자의 콧등에 굵은 주름이 생겼다. 로벨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공께서 데려온 병사가 30명... 에드워드 3세 곁을 지키는 병사도 그 정도 될 테니, 기사와 하인을 전부 합쳐도 100명이 되지 않을 것이오.”

흑태자는 부정하지 않았다. 100명도 후하게 잡은 숫자였다.

“검은 숲의 군사도 많지 않소. 세 집 건너 한 집 꼴로 사내가 죽어나갔으니 인력도 재화도 부족하오.”

로벨이 볼 때 제임스 공작은 1천 군사를 모으기도 힘들었다. 물론, 노인과 아이를 포함해 닥치는 대로 징집하면 수천 명을 모으겠지만, 그것은 군대가 아니었다. 그런 짓은 검은 숲의 파멸을 앞당길 뿐이었다.

“결국, 볼탄 반도가 앞장서란 뜻이지.”

“...인정하오. 공작의 도움이 아니면 우리는 승산이 없소.”

로벨은 흑태자 뒤로 옹기종기 모인 늑대성 식구들을 보았다. 어느새 펄프 대장과 외팔이와 허풍쟁이가 합류해 훔쳐보고 있었다. 기사의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호른 경과 점잔빼는 애꾸눈 볼포스도 아닌 척 돌아서서 귀를 기울이고 있으니, 이 정도면 그냥 대놓고 참관하는 수준이었다.

로벨의 결정이 흑태자만큼이나 저들에게도 중요할 테니 이해했다. 예의 바르다고 할 수는 없어도 말이다.

“나는 볼탄 반도의 공작이오.”

무게감을 잔뜩 주었다. 허세를 부리는 용도는 아니었다.

“10년 전에 거리낄 것 없는 철부지 기사였다면, 당장 창과 말을 챙겨 검은 숲으로 달려갔을 것이오. 허나, 이해하시오. 우정과 명예만으로 결정할 수 없는 곳에 올라왔소.”

그런 곳에 있기 때문에 흑태자씩이나 되는 자가 고개 숙이고 찾아왔다.

“기사 로벨에게는 그대의 우정과 가문의 명예면 족하오. 하지만 볼탄 반도는 아니오. 나의 기사와 나의 백성에게 무엇을 약속할 수 있소?”

대놓고 금화와 땅을 요구하는 것보다 어려웠다. 가진 것이 이름뿐인 에드워드 부자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나의 나라... 나의 자리를 되찾으면...”

로벨은 흑태자의 제안을 면밀히 검토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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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태자가 다녀간 후에도 늑대성은, 그리고 볼탄 반도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추수제가 끝나고도 어물쩍거리며 남아 염탐하던 국왕의 사절과 잉그비아 왕국 영사는 안심했다. 하지만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로벨 로드릭 공작, 볼탄 반도를 집어삼킨 영악한 늑대의 공작 속내는 쉬이 짐작할 수 없었다. 겨울이 코앞이라 잠시 숙이고 힘을 비축하는 중일지도 몰랐다.

“그게 정답이지.”

로벨은 부정하지 않았다. 어린 집사가 옆구리를 찌르고 호른 경이 헛기침을 했지만 어깨를 으쓱였다.

“겨울에는 못 싸우니까.”

“영영 안 싸울 수도 있잖아요? 괜히 국왕 폐하랑 포클랜드 귀족들 귀에 들어가게 하지 말자구요.”

“글쎄... 그건 좀 힘들걸...?”

검은 숲과 포클랜드의 불화가 눈에 띄게 커졌다. 심지어 분리·독립주장까지 나오고 있었다. 검은 숲이 위기에 처했을 때 국왕이 무엇을 해주었냐는 말이 공공연하게 돌았다.

검은 숲의 불만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검은 숲 해방전쟁 당시 로벨과 맥켈런 남작, 심지어 옛 신의 기사단까지 나서서 적극적으로 도왔는데, 왕실과 포클랜드 기사들은 침묵했다. 왕위계승전쟁 당시에도 로벨이 직접 찾아가 설득하기 전에는 꿈쩍하지 않았다. 고르곤 공작이 블랙우드 시티를 점령했을 때는 도리어 뒤통수를 쳤다. 국왕과 포클랜드는 검은 숲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외면했다. 그것만도 괘씸한데, 온갖 조롱을 퍼부으며 감 놓아라 배 놓아라 하고 있으니, 참는 것이 용할 지경이었다.

“힘이 없으니까 참는 거 아니오. 우리 기사 나리만큼 힘이 있었으면 진작 뒤집어엎었지. 암.”

외팔이 더치가 중얼거렸다. 로벨은 책상 위에 놓인 고급 종이를 바라보았다. 면섬유로 만든 종이는 대마나 나무껍질로 만든 종이보다 질기고 오래갔다. 성경처럼 귀한 책을 만들 때 쓰는 종이였다. 한번 보고 불태워야 할 비밀 편지로 쓰기 아까웠다.

“제임스 공작도 그냥 참는 것은 아니야.”

로벨은 검은 숲에서 온 편지를 곱게 접어서 벽난로에 넣었다. 세 번 정독해서 내용을 모두 기억했다.

“이번 일은 우리가 먼저 나설 수 없으니까. 시작은 제임스 공작이 할 거야.”

“요구사항이 있습니까?”

“까마귀 성의 이용권한과 군수물자 지원을 요청했어. 그리고 볼탄 반도의 제후들이 불참할 경우 울프 용병단을 따로 고용하겠다고 해.”

펄프 대장 이하 용병들이 코웃음 쳤다.

“우리가 오라 하면 오고 가라 하면 가는 삼류 떨거지 용병단인줄 아나?”

“선금으로 1만 2천 페닝을 주겠데.”

“난 삼류 맞아. 부르면 간다니까? 진짜야.”

“나도! 나도 삼류 할래!”

“거, 대장은 일류라 안 되겠네. 우리끼리 다녀올게.”

호기롭게 외친 펄프 대장 외에는 모두가 짐 싸는 시늉하며 작별인사했다. 펄프 대장의 얼굴이 이맘때 사과처럼 붉어졌다. 당연하지만 장난이었다. 울프 용병단의 무적신화는 로벨이 있어야 가능했다. 애초에 로벨이 고용해서 로벨이 지휘하는 로벨의 사설 용병단이었다.

마녀 키르케가 이야카의 볼살을 꼬집으며 말했다.

“검은 숲 공작님이 진심이란 것은 알겠어요.”

“그래도 지금 당장 전쟁하겠다는 것은 아니야. 아무리 빨라도 보리 씨앗을 뿌릴 때일 거야.”

그리고 로벨이 참전하는 것은 보리가 알알이 여물 때쯤이었다. 가급적이면 싸우지 않고 중재할 방침이지만, 여의치 않으면 약간의 무력충돌은 감수할 것이다.

포클랜드와 사이가 틀어질 수 있는 위험한 결정이지만, 어린 집사를 비롯해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지금의 늑대성 전력이면 해볼 만하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리고 성공 후에 얻게 될 과실이 너무나 달콤했다.

흑태자는 에드워드 3세, 혹은 본인이 왕위를 되찾았을 때를 전제로 다음과 같은 조건을 내걸었다.

‘잉그비아 왕국 소유의 모든 항구에서 관세면제. 로드릭 가문이 소유한 모든 선박에 사략행위 금지.’

첫 번째 조건에서 경제개념이 있는 사람은 비명을 질렀다. 프란시스 시티, 사트로 시티, 버팅거 시티 세 곳의 관세면제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수익이 생겼는데, 외해와 북해에 뻗어있는 잉그비아 왕국 모든 항구에서 관세가 면제되면 그 이문은 상상을 초월했다.

두 번째 조건에서는 군사지식이 있는 사람이 감탄사를 터트렸다. 해적질 안 하겠다는 것이 무슨 보답이냐고 따질 수도 있지만, 그리 고깝게 볼 일이 아니었다.

수송선을 공격하는 것은 적대국의 상업과 공업을 망치는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이었다. 해군이나 다름없는 사략해적은 전시가 가까워질수록 적극적인 약탈을 시행하는데, 평소라면 눈독 들이지 않을 철, 구리, 초석, 양털 등을 노려 가라앉혔다. 그것은 해적질 수준을 넘어 전쟁이었다. 그런데 사략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침을 약속한 것이다. 그것도 일방적인 불가침조약이었다.

로벨과 로벨의 측근들은 이만한 조건을 거부할 만큼 모자라지 않았다.

“요청을 받아들이실 겁니까?”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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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집사는 올해 수확한 밀을 청동사자 호에 실어 블랙우드 시티로 보냈다. 영리한 방법이었다. 포클랜드의 감시자들은 가까운 북부대로를 놔두고 인어의 바다를 빙 돌아 북해로 보낼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호른 경은 까마귀 성의 방어시설을 정비했고, 펄프 대장은 울프 용병단을 증원하는 동시에 쓸 만한 용병을 추려 가시나무 성의 브릭 자작에게 파견했다. 로벨이 태평한 얼굴로 영사와 사냥 다니는 동안 은밀하게 일어난 일이었다.

시간은 무심히 흘러 서리가 내려앉았다.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날씨가 이어졌다. 성 밖에서 하룻밤 지낸 아야와 이야카가 감기에 걸렸다. 꼭 사람처럼 재채기했다. 콧구멍에 콧물이 대롱대롱 매달린 것이 우스웠다.

로드릭 시티의 공사가 계속되었다. 인구가 늘어나는 만큼 새로운 집이 필요했다. 이제 시내에서는 옛날의 흙집을 찾아볼 수 없었다. 2층, 3층, 심지어 4층짜리 고층건물이 빼곡히 들어섰다. 가장 큰 빌라에는 100여 명이 살기도 했다.

어린 집사는 도시가 다 되었다고 좋아했지만, 로벨은 옛 로드릭 마을이 그리워했다. 애초에 도시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인구밀도가 높은 곳은 필연적으로 지저분했다.

로벨은 도로가에 쌓인 오물과 쓰레기를 보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어느 도시에서는 창밖으로 오물을 뿌린다는데, 그 정도면 관리가 관리를 포기한 것이고, 보통은 정해진 곳에 내다버렸다.

‘그게 넘쳐흐르니까 문제지...’

사람을 시켜 꾸준히 비우고 있지만, 큰비가 오거나 사흘 정도 처리하지 못하면 도로 위로 침범했다. 악취에 적응이 끝난 로드릭 시민은 아무렇지 않게 오물을 밟고 다녔지만, 외지에서 온 기사와 농민들은 코를 틀어막고 오물을 피해 까치발로 이동했다.

“하수시설을 만들면 어떨까? 시가지 밖으로 흐르게 말이야.”

로벨의 제안에 어린 집사가 질색했다.

“하수시설이요? 금화가 썩어나나요? 저 성탑 위에 대포를 팔아치우면 생각해볼게요.”

“아니. 아니야. 그냥 말해본 거야.”

더럽고 냄새나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도시를 사랑했다. 보리가 자라는 것만큼이나 느리고 조용한 농촌과 달리 하루하루 생동감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그냥 시끄러운 것뿐이잖아?’

로벨의 의심도 일리가 있었다. 로벨이 등장하자 소음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오오! 영주님!”

“공작님께서 오셨습니다!”

로벨을 본 시민들이 모자를 벗고 머리를 숙였다. 칼을 차고 건들거리는 용병도, 고집불통 당나귀를 끄는 성실한 일꾼도, 삶의 길이를 지혜로 믿어 의심치 않는 노인도 예외가 아니었다.

로벨은 추운 날씨에 휑한 정수리를 드러낸 노인에게 미안해서 모닝스타를 재촉했다. 큰길을 두 번 돌자 큰 건물이 나타났다. 99개나 되는 시장 건물 중 가장 크고 가장 입지가 좋은 로드릭 상회 본점이었다.

로벨은 모닝스타의 고삐를 말뚝에 묶고 어린 집사를 앞세워 건물에 들어갔다. 겨울맞이로 한창 바쁠 시기였다. 칼을 찬 기사도 주목받지 못했다. 로벨은 헛기침하고 창구직원을 불렀다.

“헨리 피터 상회장 어디 있어?”

“2층 집무실에 있을... 어이구! 공작님!”

얼굴을 들이밀자 겨우 알아보았다. 영주 겸 상회주가 등장하자 발칵 뒤집혔다. 자리에서 벌떡벌떡 일어나 인사하고, 책임자를 부르기 위해 뛰어갔다. 로벨은 호들갑이 마뜩치 않아 조금 크게 말했다.

“어디 가는 거야? 날 집무실로 안내하면 되잖아.”

창구직원이 눈알을 데구루루 굴렸다.

‘그걸 몰라서 저러는 게 아닌뎁쇼?’

물론,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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