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301화 (301/605)

301화. 교훈

류트 프란시스 공자.

전(前) 볼탄 반도 공작 윌리엄 프란시스의 둘째 아들이자 장미성의 공작 에릭 프란시스의 이복동생이며 잉그비아 국왕 존 2세의 사절이었다. 그리고 비공식적으로 확인한 바에 따르면 악명 높은 악마추종자의 일원이기도 했다.

“와... 실물은 처음 봐요.”

“저렇게 생겼구나.”

고백하자면, 로벨 이하 늑대성 식구들은 짐승 같은 작자라 생각했다. 얼음처럼 차가운 얼굴에 뱀처럼 찢어진 눈과 매처럼 구부러진 코를 가진 젊은 사내를 상상했다. 하지만 편견이었다. 진짜 악당은 악당처럼 생기지 않았다.

“이곳이 늑대들의 보금자리인가? 기대한 것과 다르지만, 나름대로 운치가 있군.”

첫인상은 곱상함이었다. 곱슬거리는 금발에 크고 투명한 파란눈. 햇볕을 쬐지 않아 피부가 백옥처럼 하얬다. 눈밭에 세워두면 옷가지만 둥둥 떠다니게 보일 정도였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펄프 대장과 외팔이 더치가 사절단을 안내했다. 외견만 보면 흉터투성이 울프 용병단이 악당이었다. 그림을 그려서 ‘부르주아 도련님을 납치하는 산적 무리’라 소개하면 모두 납득할 것이다.

‘에릭 공작과 닮지 않았군.’

로벨은 아성 앞에서 류트 공자를 맞이했다. 호른 경을 비롯해 애꾸눈 볼포스, 허풍쟁이 제이콥, 겁쟁이 데비 등등 유명세를 떨치는 울프 용병단이 도열해 위압감을 주는데, 류트 공자는 아무렇지 않게 승용마에서 내려 성문 앞으로 다가왔다. 자신을 겨냥한 수십 개의 창칼이 안 보이는 눈치였다.

‘날 만나러 오는 것부터 평범하지 않아.’

로벨 로드릭과 류트 프란시스는 후계자 전쟁 시절부터 적이었다.

로벨이 에릭 프란시스 공작에게 충성하는 순간 류트 공자와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지만, 에릭 프란시스 공작과 갈라서는 순간 류트 공자의 불구대천 원수가 되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면 듣기 좋은 소리고, 실상은 류트 공자가 가지고 싶어 하는 볼탄 반도를 로벨이 차지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류트 공자가 망토자락을 길게 늘어트리고 로벨 앞에 섰다.

눈 덮인 고성(古城)에서 마주한 미청년 기사들의 모습은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실제로 마녀 키르케와 로드릭 시티 아낙들이 작게 감탄했다.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군, 로드릭 공작.”

“충성의 대상이 다르니까, 프란시스 공자.”

충성의 대상이란 포비아 왕국과 잉그비아 왕국, 그리고 인간과 악마를 의미했다. 로벨치고 그럴듯한 일침이었다. 하지만 류트 공자는 안색 하나 바꾸지 않았다.

“본래 충성이란 것이 어제오늘 다르지 않소. 공작께서도 잘 아시잖소? 경험이 있으니까.”

잉그비아 왕국에서 오래 지내더니 잉그비아 왕국인이 다 되었다. 아니면 천성이 얄밉거나.

로벨은 송곳니가 보이게 씨익- 웃으며 칼자루에 손을 올렸다. 로벨을 잘 모르는 사람은 거만한 자세라 생각하지만, 로벨을 잘 아는 사람은 화가 난 자세라 생각했다. 손가락이 폼멜에 닿아 있었다. 어린 집사가 무례인 줄 알면서 끼어들었다.

“급하게 차려서 별거 없지만! 만찬을 준비했어요!”

류트 공자는 건방진 어린 집사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주인 앞에서 하인을 혼낼 수 없는 법이다. 로벨이 고개를 끄덕이자 더 할 말이 없었다.

‘세습 기사 가문이라 위계질서가 엉망이군.’

평가는 공평한 법이라, 어린 집사 역시 구시렁거렸다.

‘반란죄로 쫓겨난 주제에 주둥이만 살았네.’

물론, 얼굴은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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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트 공자는 에릭 공작과 달랐다. 생김새뿐만 아니라 성격도 아주 달랐다.

“호오? 냄새가 좋군. 생후 1년이 안 된 양고기야. 이 향은 뭐지? 로즈마리인가? 아니군. 타임이야.”

류트 공자는 고기 한 점을 썰어 입속에 넣고 천천히 씹었다. 양손에 다리 한 짝, 갈비 한 짝 들고 우악스럽게 뜯어 먹는 평범한 사람과 달랐다.

로벨의 둔한 혀와 코로는 무슨 냄새가 나는지 알 수 없었다. 로벨뿐만 아니라 늑대성 식구 모두 비슷했다. 외팔이 더치의 경우 고기에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래도 조금 아쉽군. 후추가 있는가?”

호른 경이 헛웃음을 삼키고 질문했다.

“음식에... 조예가 깊으시오?”

“그럴 수밖에. 잉그비아 왕국인은 이상한 종교관을 가졌소. 맛있게 먹는 것을 죄악으로 아는 사람이 많지. 그 때문에 요리를 천시한단 말이오.”

어린 집사가 재빨리 후추통을 가져다주었다. 류트 공자는 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은 후 칭찬했다.

“흑후추로군. 좋은 선택이야. 멋도 모르는 것들이 비싸다고 백후추를 선호하는데, 양고기에는 향이 강한 흑후추가 어울리지. 요리사가 센스가 있군.”

‘그냥 값이 싸서 쓰는데요?’

어린 집사는 속마음을 꾹꾹 눌러 담았다.

늑대성의 만찬은 류트 공자의 페이스로 진행되었다. 호른 경과 펄프 대장은 알 필요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은 지식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거렸고, 외팔이 더치와 허풍쟁이 제이콥은 좋은 음식을 먹고도 속이 더부룩한 표정을 지었다. 로벨은 친구들을 위해 분위기를 쇄신하고자 했다.

“적당히 배를 채웠으니 본론으로 들어가겠소. 어느 왕의 명령으로 오셨소?”

류트 공자는 나이프를 내려놓고 손수건을 꺼내 입가를 닦았다. 기묘한 식사 예절이라 보는 사람이 불편했다. 호스트도 아닌데 칼을 쥐고 고기를 써는 것이 괘씸하기도 했다. 류트 ‘프란시스’ 공자가 아니었으면 엉덩이를 차서 쫓아냈을 것이다.

“나를 보낸 왕은 한 분이지만, 모든 왕이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오.”

로벨은 나이프를 빙그르 돌려 탁자에 꽂았다. 탁! 작지 않은 메인 홀이지만 워낙 조용해서 칼 소리 크게 들렸다.

“어려운 대화는 좋아하지 않소. 알기 쉽게 말하시오.”

로벨을 따르는 기사와 용병이 두 자릿수로 모여 있었다. 성문 밖에는 세 자릿수가 대기 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권유는 권유를 가장한 강요였다. 그러나 류트 공자는 거부했다.

“왕이 되고 싶소?”

“뭐?”

류트 공자는 상체를 앞으로 숙이고 속삭이듯 말했다.

“아니면 영웅이 되고 싶소? 후세에 길이 전해지는 위대한 영웅이라. 나쁘지 않지.”

로벨은 뼈만 남은 양고기를 옆으로 치우고 마주 속삭였다.

“재미없는 소리를 계속하면 재미없게 응대하겠소.”

류트 공자는 1층 창문과 2층 테라스를 둘러보았다. 저격수를 숨겨둘 법도 한데 깨끗했다. 칼솜씨에 자신이 있거나, 순진할 만큼 명예에 집착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거래를 제안하는 것이오.”

“왕좌를 놓고?”

“그대에게 어울리는 자리니까.”

로벨은 어이가 없어 실소했다. 나이 어린 데이브 국왕이 저런 소리를 할 리 없고, 잉그비아 국왕이라 자칭하는 고르곤 공작이 로벨을 회유하려는 듯했다.

‘그자가 왜?’

로벨은 고르곤 공작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았다. 가장 강력한 방해자인 로벨을 볼탄 반도의 왕으로 지지해 친분을 쌓고, 포비아 왕국에 혼란을 부추기며, 자신의 입지를 세우는...

‘그럴 리 없지.’

욕심 없이 생각하니 이상함이 눈에 띄었다. 로벨이 왕이 되든 말든 포비아 왕국의 혼란은 필연적이었다. 이미 좋은 관계를 쌓은 포클랜드와 등질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은 류트 ‘프란시스’ 공자였다. 누구보다 볼탄 반도를 탐내는 자였다. 로벨은 처음으로 돌아갔다.

“그대의 왕이 누구요?”

로벨의 반응에 류트 공자가 소리 없이 감탄했다. 보통은 왕좌란 단어에 홀려서 집중하지 못하는데, 늑대의 공작은 뭔가 달랐다. 권력욕심이 없거나, 현자의 기질이 있었다. 권력욕이 없으면 공작이 되지 못했을 테니 후자라 판단했다. 사소한 오해지만, 그 덕분에 진실을 끌어낼 수 있었다. 류트 공자는 주위 이목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야 물론, 위대한 마법사의 왕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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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의 왕.

익숙한 이름이라 생각하는 순간, 기억의 저편에서 오래된 편린이 떠올랐다. 고블린, 마녀, 마법, 모몬트 가...

“내가 죽였는데?”

“모몬트 가문에 보내진 고약한 마녀를 말하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겠소. 그런 자가 우리의 왕일리 없잖소.”

“...불필요한 말이지만, 짚고 가야겠소. 나의 왕은 아니오.”

“상관없소. 왕은 왕이기에 왕일 뿐. 양해를 구하고 왕이 되지 않소.”

“나는 기사요. 기사의 충성은 권리요. 나의 왕이 되고자 하면 나에게 양해를 구해야 할 것이오.”

“그대의 왕은 누구요? 샘 포클의 핏줄을 이었을 뿐인 어린 국왕이오?”

“핏줄은 고귀한 것이오. 부모의 재산이 자식에게 물려지듯 공훈 또한 계승되어야 마땅하오. 프란시스의 혈통을 내세우는 자가 그리 말할 줄 몰랐소.”

애초에 있었는지도 의문이지만, 화기애애한 만찬은 물건너갔다. 로드릭 시티에서 불러온 여인들이 눈치를 보며 그릇을 치웠다.

로벨은 오랜만에 의중을 파헤치는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눠 피로했다.

“본론이 그것이오? 왕이 되라? 그렇다면 농담이나 하려고 먼 곳을 온 셈이오.”

“나의 왕에게 충성하면 볼탄 반도를, 나아가 포비아 왕국을 가질 수 있소. 거짓이 아니오. 과장도 아니오. 공작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기사요.”

로벨은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대답했다.

“볼탄 반도는 이미 내 것이고, 왕좌에는 아무 관심이 없소.”

로벨의 단호한 거절에 류트 공자가 활짝 웃었다.

“그리 말해주어 다행이오.”

“다행?”

“사실은 내가 가지고 싶었으니까.”

류트 공자의 손이 기묘하게 움직였다. 호른 경, 펄프 대장, 애꾸눈 볼포스 등 경험 많고 재주 좋은 전사가 일제히 움찔했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안심했기 때문이다. 로벨과 류트 공자 사이에는 7피트 이상 거리가 있었다. 창을 접어서 보관하지 않는 이상 해를 끼칠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류트 공자 손에서 완만하게 휘어진 쇠몽둥이가 나오는 순간에는 당황해서 움직일 수 없었다. 처음보는 형태지만, 이상하게 낯이 익었다. 겁쟁이 데비가 비명처럼 소리 질렀다.

“아, 아쿼버스!”

소형화한 대포를 더욱 소형화한 대포였다.

호른 경은 괴성을 지르며 워 해머를 뽑았고, 펄프 대장은 식탁 위에 흩어진 촛대를 살폈다.

‘닿지 않아!’

어느 촛대도 류트 공자 손에 닿지 않았다. 불을 붙이지 않으면 대포는 무거운 쇳덩이일 뿐이다. 무슨 수작인지 모르지만, 지금 상황에서 위험이 되지는...

“나의 욕망은 시들지 않는 불꽃. 피어나라.”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다면 흑태자의 충고였다. 류트 공자는 악마추종자였다. 당연히 마법을 부릴 줄 알았다.

쾅-!

눈부신 섬광이 터지고, 굉음이 울리고, 폭력적인 쇠구슬이 쏟아졌다. 마법사가 다루는 신무기는 무시무시했다. 그러나 기사가 다루는 무기도 만만치 않았다.

쇠구슬 사이사이로 고기 기름이 번들거리는 나이프가 비집고 들어갔다. 구슬 하나가 칼날을 스치며 작은 불똥을 뿌렸지만 서로의 방향을 바꾸지는 못했다. 그 사실에 안도하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이 볼 수 없는 0.07초의 교류였다.

“영주님!”

“기사 나리!”

로벨은 뒤로 쓰러지고, 류트 공자는 앞으로 꼬꾸라졌다.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가 기겁해서 뛰어왔다.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괜찮아. 안 맞았어.”

로벨은 바닥에 누운 채로 손을 흔들었다. 어린 집사는 안도하는 것만큼이나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류트 공자가 주문을 외우는 순간, 로벨은 식탁에 꽂아놓은 나이프를 집어던지며 반동으로 몸을 눕혔다. 간발의 차이로 총격을 피할 수 있었다.

“와, 그 순간에 칼을 던질 생각을 했어요?”

“당하고는 못 사니까.”

로벨이 잡소리하는 사이 호른 경과 외팔이와 허풍쟁이가 류트 공자를 덮쳤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기사와 용병들은 다짜고짜 병장기를 쑤셔 박았다. 퍽- 퍽-! 그러나 이미 늦었다.

살이 찢어지고, 피가 낭자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모래주머니를 때린 것처럼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이게 뭐야?”

“마, 마법이다!”

비유가 아니라 진짜 모래주머니였다. 류트 공자의 몸이 모래로 변해 스르륵- 흘러내렸다. 비단 옷가지와 사슴가죽 부츠가 모래 속에 파묻히며 한때 류트 공자였음을 증명했다.

“도망쳤군.”

“하긴, 이만한 준비도 없이 암살을 시도하진 않았겠지.”

마법을 처음 본 용병들은 공포에 떨었다. 펄프 대장은 성 밖으로 뛰쳐나가며 “비상! 비상!” 소리쳤다. 로벨의 경호를 강화하고, 늑대성 주변을 샅샅이 수색할 것이다.

한편, 호른 경은 땅에 떨어진 나이프를 주워 살폈다.

“그래도 교훈은 얻었겠군.”

나이프 끝이 붉게 물들어있었다. 그것도 꽤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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