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298화 (298/605)

298화. 흑태자

마녀 키르케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에드워드? 에드워드 3세 임금님 가문이에요?”

로벨과 어린 집사가 서로를 보았다. 잉그비아 왕국인이 아니면 헷갈리기 쉬운 호칭이었다.

“사실 가문이 아니에요. 잉그비아 왕실은 성(姓)을 쓰지 않거든요.”

“엑? 왜요?”

“그 동네는 좀 특이해서... 땅이 작으니까 굳이 성이 필요 없나보죠.”

어린 집사가 골치 아픈 듯 투덜거렸다. 북해의 섬나라는 대륙의 크고 작은 나라와 다른 것이 너무 많았다. 장자만 귀족으로 인정하고, 여자가 가문을 계승하고...

“에드워드 1세부터 3대째 이어져 온 이름이라 농담 삼아 에드워드 가문이라 불러요. 에드워드 3세의 장남도 에드워드거든요. 뭐라더라, 흑태자 에드워드였나?”

“아, 그자로군.”

로벨이 작게 소리쳤다. 성 밖에 머무는 기사의 정체를 알았다. 잉그비아 왕국의 영웅이자 차기 국왕이라 추앙되는 흑태자 에드워드(Edward the Black Prince)였다.

“정체를 아니까 더 의심되네요.”

“프린스쯤 되는 사람이 왜...”

로벨은 한숨을 쉬었다. 친해지면 마시고, 틀어지면 싸우는 단순하고 아름다운 늑대성에 싸워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알 수 없는 정치판이 생겼다.

“이런 거 머리 아파.”

어린 집사, 마녀 키르케, 펄프 대장, 심지어 아야와 이야카까지 고개를 주억대며 동의했다.

“어쩔 수 없죠. 원래 중간에 낀 사람이 가장 힘든 법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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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로벨이 신경 써야 할 것은 마상시합과 사냥대회가 아니었다. 성 밖에 모여 있는 무장 세력을 먼저 경계해야 했다. 그것은 꽤 피곤한 일이었다.

“사냥대회를 중지해야 할까요?”

“그럴 수야 없지.”

고작 30명의 무장집단이 무서워 행사를 취소하면 비웃음을 살 것이다. 그렇다고 위험부담을 안고 강행할 수도 없었다.

“날 노리는 거면 차라리 다행인데...”

로벨은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몸은 건사할 자신이 있었다.

어린 집사도 은근히 동의했다. 에드워드 3세가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아군이 되어줄 가능성이 가장 높은 로벨을 위해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로벨의 손님은 달랐다. 포클랜드 사절이나 잉그비아 왕국 영사가 기습받으면 큰일이었다. 펄프 대장이 조심스레 제안했다.

“울프 용병단을 보내 체포하시죠.”

“무슨 명분으로?”

“...체포가 곤란하면 우선 초대를 하시죠.”

어린 집사가 답답한 듯 가슴을 두드렸다.

“초대해서 올 거면 진작 찾아왔겠죠. 그리고 국왕 폐하와 고르곤 공작의 눈이 있는데 에드워드 3세 세력을 끌어들이면 어떡해요? 대놓고 저쪽 편을 드는 거잖아요. 그걸 피하려고 이 생난리를 피우는데...”

로벨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펄프 대장은 입을 다물고 불을 쬐는데 집중했다.

로벨은 고심 끝에 울프 용병단 100명을 동원해 북쪽 숲을 방어하고 애꾸눈 볼포스를 비롯한 정예 용병 10명을 호위로 붙였다, 로벨 또한 우플랑드 속에 브리간딘을 입고 무장을 갖추었다. 그리고 철저한 방비가 무색하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혹은 철저한 방비 덕분일지도 모르죠.”

어린 집사가 좋은 쪽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흑태자 에드워드는 사냥대회 사흘 차에 당당하게 등장했다.

“멈춰라!”

로벨을 호위하는 맨앳암즈 1소대와 크로스보우 2소대가 일제히 무기를 겨냥했다. 살벌한 쇠붙이에 잉그비아 왕국 병사, 아니, 에드워드의 병사들이 얼어붙었다.

로벨은 칼자루를 쥐고 흑태자를 찾았다. 누가 흑태자인지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소문대로 묵빛 플레이트 아머를 입고 있었다.

‘머... 멋져...’

로벨의 두 눈에 탐욕이 스쳐지나갔다. 잉그비아 왕국제라 디자인은 촌스러웠다. 브레스트 플레이트는 둥글둥글해서 거북이 등딱지 같고, 폴드런은 넓적하니 방패로 써도 될 것 같고, 카우터, 폴린, 럼프 가드 등도 쓸데없이 크고 밋밋했다. 그럼에도 새까만 광택이 매력적이었다.

‘무슨 철로 만들면 저렇게 까맣게 되지?’

로벨의 눈초리가 점점 가늘어졌다. 무기와 갑옷을 좋아하는 순수한 기사의 순진한 흑심이지만, 그것을 알지 못하는 흑태자 얼굴에 당혹감이 피어났다.

“로벨... 로드릭 공작 아니오?”

로벨은 이름이 불리고도 한참 뒤에 깨달았다. 그 사이 에드워드의 병사들은 지상과 지옥을 오고 갔다.

‘싸울 거면 그냥 지금 덤벼!’

물론, 로벨은 싸울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국왕 폐하의 사절과 잉그비아 왕국 영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공적인 흑태자와 친근하게 보일 생각도 없었다. 그것이 정치감각이 부족한 로벨의 최선이었다.

“로드릭 가문의 로벨 로드릭이오.”

로벨은 짤막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흑태자는 비로소 만족하고 이름을 밝혔다.

“잉그비아 왕국의 적법한 왕위 계승자, 스톤랜드의 공작이자 웨스텅의 백작 에드워드요.”

“전(前)계승자고, 전(前)공작이지요. 잉그비아의 왕은 하이랜드의 공작 존 2세 폐하십니다.”

공작(Duke)과 공작(Prince)이 대화하는데 무례하게 끼어든 자가 있었다. 잉그비아 왕국 영사였다.

“조쉬 백작, 천박한 동산의 수퇘지와 똥밭을 구르더니 아예 돼지 흉내를 내는군. 그대가 이 대화에 끼어들 자격이 있다 보는가?”

“신의를 저버린 기사가 왕위를 잃은 아비의 이름을 업고 설치는 것이 가당치 않아 하는 말이오.”

“아비의 이름을 빌리는 것은 허물이 될 수 없지. 그래서 그대의 아비는 고르곤 공작인가? 그대 어미의 정절을 의심케 하는군.”

로벨 일행 얼굴에 혼란함이 떠올랐다. 공용어로 대화하는데 공용어스럽지가 않았다.

‘이, 잉그비아 왕국 놈들이란...’

말싸움에도 지역별로 특징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잉그비아 왕국 기준으로 꽤 살벌한 언사인 듯 에드워드의 병사들이 창끝을 내렸다. 영사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하지만 믿는 구석이 있었다. 로벨이 호위로 붙여준 울프 용병단 맨앳암즈 소대가 본분을 다하기 위해 마주 창을 겨냥했다.

“내 앞에서 감히 창을 겨누는 것이오!”

로벨의 목소리가 앙칼지게 높아졌다. 두 사람의 사정이 어떻듯 백주대낮에 영사를 해치게 둘 수 없었다. 그런 로벨의 입장을 이해한 듯 흑태자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무기를 거두어라.”

북해를 건너와서도 충성을 바치는 잉그비아 왕실의 병사들이었다. 흑태자 한 마디에 즉시 창을 위로 세웠다. 그러자 맨앳암즈 소대도 머쓱해져서 슬금슬금 창을 치웠다.

로벨은 이어서 영사에게 말했다.

“이곳은 내 나라, 내 땅이오. 경을 귀빈으로 초대했으니 그에 걸맞게 행동하시오.”

영사는 입을 꾹 다물고 묵례했다. 로벨 로드릭 공작의 심기를 거스르면 어찌 되는지 충분히 겪었다. 로벨은 양쪽이 한발씩 물러나자 만족했다.

“호른 경, 본인을 대신해 사냥대회를 주관하시오.”

“명을 받들겠습니다.”

로벨은 펄프 대장에게 눈짓했다. 긴말이 필요 없었다.

“영사님, 구경만 하시기 지루할 텐데 직접 사냥감을 잡아 보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최고의 사수들로 모시겠습니다.”

적대국에 영사로 파견될 정도면 눈치는 기본으로 탑재되었다. 로벨의 얼굴을 힐끔 보고 말했다.

“용병대장이 직접 보좌해준다면 우승도 가능하겠지. 허허! 안내해주게.”

펄프 대장은 크로스보우 소대원 몇 명을 지목해서 영사와 함께 자리를 피했다. 로벨은 한결 편하게 흑태자를 대할 수 있었다.

“본인을 찾아온 이유가 무엇이오?”

흑태자는 머리와 꼬리가 실종된 직설적인 화법에 살짝 당황했다. ‘누가 볼탄 반도 아니랄까봐...’ 하지만 지금 처지에서 나쁘지 않았다. 지성과 교양을 가늠하는 대화를 나눌 만큼 여유롭지 않았다.

“본인을, 아니, 잉그비아 왕국을 도와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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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로드릭 시티 토너먼트가 끝났다. 가장 껄렁한 사제도 눈살을 찌푸릴 만큼 화려하고, 가장 깐깐한 호사가도 고개를 끄덕일 만큼 성공적이었다.

마상시합의 우승은 네일 공국에서 온 30대 중년 기사가 차지했고, 사냥대회의 우승은 붉은 산에서 온 10대 청년 기사가 차지했다. 로드릭 가문의 기사들은 주군과 시민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하지만 괜한 자격지심이었다.

시민들은 잘 익은 술과 재미있는 구경거리로 충분히 만족했다. 마음속의 진정한 챔피언은 로벨 로드릭이었으니, 로벨이 출정하지 않은 이상 누가 우승하든 사실상 2등이었다. 이유는 다르지만, 로벨도 우승자에 관심이 없었다.

로벨은 응접실 밖에서 응원의 제스처를 보내는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를 힐끔 보고 말했다.

“본인이 공을 도와야 할 이유가 있소?”

흑태자는 건틀렛을 벗고 가죽장갑을 벗고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반복했다. 로벨은 흑태자의 손을 유심히 관찰했다. 일조량이 안 좋은 동네에서 자랐는지, 아니면 장갑을 벗을 일이 거의 없어서인지 희고 고왔다. 하지만 손바닥을 보면 로벨 못지않게 굳은살이 가득했다. 수십 번 찢어지고, 수백 번 터지면서 완성된 기사의 손이었다.

“류트 프란시스 공자가 달갑지 않을 것이오.”

로벨은 번뜩 정신을 차렸다.

“그야 물론...”

로벨은 진솔하게 답하려다가 께름칙해서 멈추었다. 이것은 정치였다. 정직함이 미덕이 되지 않는 분야였다.

“...갈 곳 잃은 망명 공자에 신경 쓸 이유가 어디 있소?”

로벨은 속으로 뿌듯해했다. 이 정도면 꽤 공작다웠다. 그러나 흑태자는 순순히 넘어가지 않았다.

“프란시스 가문의 그림자가 지워지지 않았으니까. 에릭 프란시스 공작은 우리에 가두었지만, 그보다 사나운 짐승이 울타리 밖을 떠돌고 있잖소.”

로벨이 좋아하지 않는 화법이었다. 로벨은 흐룬팅 손잡이를 앞으로 당기며 속삭였다.

“어떤 짐승도 내 칼 앞에서 무사할 수 없소.”

흑태자는 위협에도 굴하지 않았다.

“그럴 것이오. 늑대의 왕조차 경을 당해내지 못했으니.”

로벨은 깜짝 놀랐다. 잉그비아의 왕자가 늑대의 왕을 아는 것이 신기했다.

“그리 놀랄 것 없소. 악마추종자의 본산이 어디인지 알지 않소.”

“아...?”

“류트 프란시스 공자도 악마추종자의 일원이오.”

“아...!”

오늘은 놀랄 일이 많았다. 악마추종자와 연관이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아예 몸을 담고 있을 줄은 몰랐다. 흑태자는 로벨의 무구한 표정에 확신을 얻었다.

“지금 당장은 고르곤 공작과 손잡아 평화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이오. 그러나 얼마나 갈 것 같소? 1년? 2년? 악마추종자는 볼탄 반도의 혼란을 이용할 것이고, 그 혼란의 중심에는 류트 프란시스 공자가 있을 것이오.”

지난날을 돌아보면 반박할 수 없었다.

“본인을 도와달라고 말했지. 미안하오. 정정하겠소. 공작은 스스로를 도우시오.”

“...어찌 말이오?”

“본인을 돕는 것이 공작을 돕는 것이오.”

흑태자는 입꼬리를 올렸다. 매력적인 미소지만 왠지 얄미웠다.

“류트 프란시스 공자가 살아있는 한 볼탄 반도와 로드릭 가문에 평화는 없을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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