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2화. 동굴
로벨의 명령은 명령을 가장한 위협이었다. 해적들은 기겁하여 무기를 팽개치고 항복을 외쳤다. 간발의 차이로 칼 맞은 불운한 한 명 빼고 무사히 포로가 될 수 있었다.
“볼탄 반도의 로벨 로드릭 공작?”
“그래, 새꺄! 상대를 봐가며 덤벼야지!”
울프 용병단은 해적을 발로 뻥뻥 차며 주갑판 한가운데 모았다. 모욕적인 처사지만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차갑게 식어서 바다에 던져지는 동료에 비하면 행운이었다. 그리고 ‘볼탄 반도’란 단어도 마음에 들었다.
“포비아 왕국 귀족 나으리란 말이지?”
해적들은 전설적인 기사 이름에도 활짝 웃었다. 해적의 생리를 잘 모르는 용병들은 미친 건가 의심했다. 그러자 이안 선장이 이유를 알려주었다.
“에르나 왕국에서 해적은 무조건 교수형이오. 부둣가에 걸어두고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전시하지.”
“그럼 뭐요? 우리 나으리가 만만해서 안심한 거요? 이 자식들이 진짜...!”
싸움개 닥스가 징 박힌 가죽 부츠로 마구 짓밟았다.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싸움개의 또 다른 별명이 미친개였다. 눈알이 돌아가자 죽기 살기로 때렸다. 해적들은 살기 위해 소리 높여 외쳤다.
“거래! 거래를 제안하려고 그랬습니다!”
“목숨 값을 지불하겠소! 살려주시오!”
로벨이 원하는 것이기도 했다.
로벨은 피 묻은 칼을 닦으며 다가갔다. 강철과 금화로 다져진 고용주의 위엄은 옛 신과 버금가서 싸움개조차 제정신 차리고 슬쩍 물러났다.
“누가 선장이야?”
“저, 저기...”
허풍쟁이 제이콥과 겁쟁이 데비가 앞뒤로 잡고 들어 올리는 시체를 가리켰다. 그네처럼 좌우로 흔들리다 난간 너머로 사라졌다. 풍덩-!
“...이제 없네.”
로벨은 한숨을 쉬고 다음 책임자를 찾았다. 부선장, 일항사, 이항사, 갑판장, 포수장...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애꾸눈, 너 때문이잖아.”
애꾸눈 볼포스는 안대를 만지며 머쓱해 했다. 목청 좋은 놈을 저격하다 보니 지휘관급 해적이 남아나지 않았다. 그나마 살아있는 간부가 선창에 숨어 있던 노예장이었다.
“사, 살려주십쇼! 뭐든지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요!”
노잡이 노예의 공포, 재앙, 악마가 비굴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로벨은 불쾌함을 담아 직설적으로 말했다.
“보물 내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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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마진이 아주 많이 남는 제안을 던졌다.
“협조하면 살려줄게.”
남의 것으로 남의 것을 얻어내니 상인이라면 누구나 좋아할 거래였다. 해적 노예장은 자기 것이지만 자기가 다룰 수 없는 담보를 위해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저쪽은 수심이 낮아서 저 배로 못 들어갑니다요. 예예.”
로벨은 해적 노예장의 말을 따라 주변 바다를 살폈다.
원숭이 꼬리 섬 남동쪽 해안절벽 아래에는 길쭉한 암초와 넓적한 암초가 엎어지며 코 닿을 거리에 나란히 솟아있었다. 배를 타고 지나가면서 보면 흔해빠진 부속 암초였다. 그러나 속임수였다. 큰 배에서 내려 작은 보트로 조심히 접근하면 암초와 암초에 가려진 사각지대에 비밀스러운 해안동굴이 숨어 있었다. 절벽에 칼을 꽂아 바위를 파낸 듯한 멋진 동굴이었다.
“정말 절묘한 위치군요.”
푸른고래 호가 이 앞을 두어 번 지나갔지만, 이런 동굴이 숨어있는 줄 꿈에도 몰랐다. 절벽에서 분리된 암초가 입구를 완벽하게 숨긴 탓이다.
“저 안에 보물이 있다고?”
“보, 보물은 모르지만 선장님이, 아니! 두목놈이 수시로 들락거렸습니다요.”
그 ‘두목놈’이 살아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웠다. 로벨은 엄한 애꾸눈을 쏘아본 후 이안 선장에게 말했다.
“보트 내려. 호른 경, 애꾸눈, 허풍쟁이, 겁쟁이, 싸움개만 따라와.”
“저요! 저! 제 이름 빼먹었어요!”
마녀 키르케가 오른손을 번쩍 들었다. 로벨이 못 들은 척하자 까치발로 왼손까지 번쩍 들었다.
“제 보물지도라고요! 제가 가야죠! 제 지분을 무시하면 안 돼요!”
“음...”
마녀 키르케답지 않게 일리 있는 주장을 펼쳤다. 그 사이 선원들이 상륙용 보트를 내렸다. 활대에 밧줄을 감아 기중기처럼 돌려 보트를 옮기는 것이 대단했다. 로벨은 6명이 넉넉하게 탈 수 있는 보트를 보고 결심을 굳혔다.
“내 옆에서 절대 떨어지지 마.”
마녀 키르케는 즉시 행동으로 대답했다.
“그럼요! 매미처럼 붙어있을게요! 히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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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 중 가장 짬이 안 되는 싸움개 닥스가 보트의 노를 잡았다. 성깔이 어디 안 가서 ‘왜 내가...’로 시작하는 구시렁거림을 시작했으나, 로벨의 한마디 하자 얌전해졌다. “네 몸값이 제일 비싸” 울프 용병단에서는 몸값이 곧 노동 강도였다.
노잡이가 엉성해서 조금 삐뚤지만, 그럭저럭 앞으로 나아갔다. 바다 이끼와 갈매기 똥과 울퉁불퉁한 따개비 암초를 차례로 지나자 꼭꼭 숨겨진 해안동굴이 나타났다. 거인이 거인의 도끼로 찍어서 만든 듯 커다란 구멍이었다.
“이런 곳에 숨어 있었어.”
“그러니 못 찾지요.”
로벨과 호른 경은 보트 앞에서 진지한 척, 근엄한 척, 멋있는 척하며 동굴을 내다보았다. 그러는 사이 애꾸눈과 겁쟁이는 랜턴에 불을 밝히고, 밧줄을 어깨에 두르고, 보물이 있으면 싸들고 나올 포대자루를 허리에 묶었다. 고귀한 기사 나리와 일하는 용병 나부랭이 모습은 새삼스러울 것 없었다.
싸움개 닥스는 끙끙거리며 보트를 동굴까지 끌어갔다. 고기잡이배 한 척 겨우 비집고 들어갈 좁은 입구를 지나자 상상 이상으로 큰 공동이 나타났다. 랜턴의 작은 빚으로는 천장조차 비추지 못했다.
“이렇게 넓으면 보물찾기가 진짜 보물찾기 되는데...”
애꾸눈은 랜턴을 뱃머리에 걸고 비상용으로 가져온 횃불을 꺼냈다. 말발굽 모양 부싯돌에 쇠질을 하자 불꽃이 번쩍 일어났다. 새까만 수면 위에 비치는 찰나의 불꽃이 아름다웠다.
애꾸눈은 노련한 용병답게 부싯깃 없이 곧장 횃불에 불을 붙였다. 기름 냄새가 많이 나는 것만 빼면 양초나 호롱보다 횃불이 훨씬 좋았다. 동굴 안이 한층 밝아졌다.
로벨은 뱃머리에 한쪽 발을 올리고 횃불을 이리저리 비춰보았다. 해적 두목이 수시로 오갔다면 뭔가 징표가 있을 것이다.
“기사 나리! 저쪽입니다요!”
허풍쟁이가 동굴 오른쪽을 가리켰다. 불그스름한 횃불이 우물 속 같은 바닷물에 삼켜지는 중 이질적인 그림자를 드러냈다. 자연에서 거의 볼 수 없는 직선이었다.
“싸움닭! 오른쪽!”
“싸움닭이라고 부르지 말랬지!”
“시끄럽고! 오른쪽! 멍청아! 나한테 오른쪽!”
노 젓기도 하다 보면 익숙해지는지 제법 그럴듯하게 움직였다. 허풍쟁이는 보트 아래로 상체를 기울이고 손을 뻗었다. 얼음장 같은 물을 한 꺼풀 걷어내고 뻣뻣하게 꼬아진 밧줄을 건져냈다.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당겨진 밧줄이었다.
“기사 나리, 이거...”
한쪽은 햇살이 비치는 동굴 입구로, 다른 한쪽은 어둠이 깊은 동굴 안쪽으로 뻗어있었다. 그 용도를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당겨.”
이제 노를 저을 필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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횃불 하나와 호롱불 하나로 물에 잠긴 동굴을 탐험하는 것은 신비로우면서 공포스러웠다. 뱃머리에서 물줄기가 갈라지는 소리, 천장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밧줄로 보트를 끄는 허풍쟁이와 겁쟁이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메아리쳐서 삼중창으로 울렸다.
이 비밀스러운 동굴이 얼마나 크고 얼마나 깊은지 의심이 걱정이 될 무렵, 새로운 소리가 온몸으로 전달되었다. 쿵-
보트 바닥에 땅에 닿았다. 로벨은 횃불을 아래로 내려 바닥을 비췄다. 검게 보이던 바닷물이 마침내 투명한 모습을 보였다.
“여기가 동굴 끝인가 봐요.”
마녀 키르케가 꼬뜨 자락을 걷고 폴짝 뛰어내렸다. 로벨은 조심하라고 한마디 할까 하다 그냥 따라 내렸다. 강철 부츠 틈새로 햇볕을 쬐지 못한 차디찬 물이 스며들었다.
울프 용병단이 보트를 땅 위로 끌어올리고 무기와 조명을 챙기는 사이, 로벨과 호른 경과 마녀 키르케는 한발 앞서서 동굴의 끝을 탐사했다. 마녀 키르케가 로벨 뒤에 바짝 붙어서 속삭였다.
“옛날이야기에서는 보물을 지키는 몬스터가 꼭 등장하는데요...”
호른 경이 어이없어서 실소했다.
“왕의 보물도 아니고, 해적소굴에 몬스터가 가당키나 하나.”
“어머나! 왕의 보물창고에는 몬스터가 있어요?”
“세금으로 먹고사는 괴물이 있다.”
“그건 별로 안 무서운데...”
“세금을 내면 무서울 거다.”
이런저런 잡담하며 깊은 곳으로 걸어갔다. 겁쟁이 데비가 ‘기사 나리! 같이 갑시다요!’ 어쩌고 외치며 화급히 쫓아왔다. 죄진 것이 많은 용병이라 어둠 속에 남는 것이 무서운 모양이다.
로벨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겁쟁이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마침내, 마침내 찾아냈기 때문이다.
“...진짜 있었어.”
바닷물이 닿지 않는 마른 땅에 찬란한 빛이 퍼져갔다. 인간이 문명사회를 구축한 이래 가장 값지게 거래되어온 금속. 그 어떤 마법보다 마법 같은 힘을 지닌 금속이 작은 산을 이루고 있었다.
“어어? 어? 어억? 억?”
“금! 금! 금이다!”
로벨의 허리까지 오는 금화 동산이었다.
상자 안에 담긴 것도 있지만, 상자로 채우지 못해 바닥에 쏟아 부은 금화도 상당했다. 사실 10페닝 이하의 은화가 더 많은데, 흥분한 로벨 일행 눈에는 누런 금화가 먼저 들어왔다. 금화든 은화든 양을 보아 결코 적지 않았다.
10만 페닝? 20만 페닝? 조명이 부실해서 얼마나 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1, 2년으로 모을 수 없는 엄청나게 많은 페닝이란 것이다.
“보물이다! 보물이에요! 꺄아!”
마녀 키르케가 비명을 질렀다. 그 말에 성질 급한 싸움개와 허풍쟁이는 물론, 점잖은 애꾸눈까지 허둥거리며 쫓아왔다.
로벨은 입을 쩍 벌리고 현실에 적응하느라 노력 중인 호른 경에게 횃불을 넘기고 직접 다가갔다. 동산에서 흘러내린 금과 은이 발에 밟혀 차르륵-소리를 내었다. 로벨은 생각 없이 발을 내딛다가 지금 막 100페닝쯤 꾸겼다는 것을 깨닫고 얼어붙었다.
“어, 음, 이제 어쩌지?”
그 말에 바로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뒤돌아보니 전부 의미 없는 감탄사만 흘리고 있었다. 결국, 자문자답해야 했다.
“자루 꺼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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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일행은 정신을 차리고 금과 은을 챙기기 시작했다. 상자에 담긴 것은 상자 채로 보트에 옮기고, 땅에 굴러다니는 것만 주워 담았는데 그래도 가져온 자루가 부족했다. 양이 너무 많아서 1페닝 짜리는 바다에 흘려도 귀찮아서 줍지 않았다. 싸움개 닥스가 금화 몇 개를 슬쩍 챙기는 것을 보았지만 모른 척했다.
“해적질이 돈이 되는구나...”
인어의 바다를 건너오는 값비싼 향신료를 초기비용 없이 꿀꺽하니 이문이 얼마나 남을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페닝 뿐이네요? 도자기나 비단이나 그림 같은 것도 있을 줄 알았는데...”
“이런 습한 곳에 보관할 수 없잖아. 그리고 비밀창고인데 환전성이 좋은 것만 모았겠지.”
그러나 꼭 페닝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진주, 에메랄드, 호박 같은 보석도 조금씩 있었다. 그리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엄청난 보물도 있었다.
마녀 키르케가 이상하게 생긴 상자를 열어보고 깜짝 놀라 로벨을 불렀다.
“기사님! 기사님! 이것 좀 보세요!”
“응?”
처음에는 은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보통 은이 아니었다. 눈처럼 하얗고 옥처럼 반짝이며 깃털처럼 가벼운 은이었다. 로벨은 손바닥만한 은덩어리를 집어 들고 깜짝 놀랐다.
“왜 이리 가벼워?”
깃털은 좀 과장이지만, 철이나 구리에 비해 확실히 가벼웠다. 금속처럼 보이는 나무가 아닐까 생각하다가 지식의 창고 구석에서 단어 하나를 끄집어냈다.
“알루미늄?”
그 말에 두 가지 반응이 나왔다. 기절초풍하는 반응과 어리둥절해하는 반응이었다.
“으허억! 알루미늄! 그게 알루미늄이군요!”
“뭐야? 그게 뭐야?”
겁쟁이 데비가 맹한 얼굴로 물었다. 일확천금의 기쁨에 아는 척 할 수 있는 기쁨을 더한 허풍쟁이와 애꾸눈이 마구 떠들었다.
“이 멍청아! 저걸 몰라? 황금보다 10배! 아니! 100배 더 비싼 보물이야!”
“신화 속의 은 혹은 찰흙 속의 은이라 불리는 광물이다. 고대 왕국 시절에는 황제만이 가질 수 있었지.”
황금보다 비싸다는 말에 기사나 용병이나 하던 일을 치우고 몰려왔다. 겉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물건이었다.
“왜 찰흙 속의 은이오?”
“...내가 어떻게 아냐. 찰흙에서 나오나 보지.”
“그래서 얼마나 하는 거요?”
호른 경이 슬그머니 알루미늄을 만지며 말했다.
“글쎄... 이만한 크기면 성 하나쯤 살 수 있을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