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화. 생포
로벨 일행은 푸른고래 호로 돌아왔다. 금은보화를 기대하며 선창을 비운 이안 선장 이하 푸른고래 호 선원들은 몹시 실망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미안해졌다.
“그,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
로벨은 이안 선장과 항해사를 불러서 상황을 설명했다. 이안 선장은 부상을 입고 실려 온 울프 용병단과 포박되어서 끌려온 해적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뭔가 있군요.”
이안 선장이 긍정하자 모두가 화색이 되었다. 선장에게 태클 거는 것이 본분인 항해사가 ‘자기 집 지키려고 그러는 거 아닙니까?’ 하고 따졌지만, 언제나 그랬듯 선장의 권위에 짓밟혔다.
“해적 놈이 무슨 놈의 집이냐. 해군이 와도 짐 싸들고 튀면 그만인 놈들인데. 선주님 말씀대로 숨기는 것이 있다.”
푸른고래 호의 닻이 올라갔다. 암초와 소용돌이가 많은 곳이라 돛은 사용하지 않았다. 26개의 노가 푸른 바닷물을 밀고 당기며 앞으로 나아갔다.
로벨은 흐룬팅과 아론다이트를 잘 닦아서 허리에 차고 파나케아 투구를 조심히 벗어 옆구리에 끼운 후 선수상 너머 오밀조밀한 바다를 보았다. 바다에 어울리지 않는 수식어지만 달리 묘사할 단어가 없었다. 눈길이 닿는 곳마다 섬과 암초가 있어서 미로 속을 헤집고 다니는 기분이었다.
“저 숲보다는 낫지만...”
“어디에 숨어 있을지 알 수 없군요.”
이 해역이 악명 높은 이유를 알았다. 에르나 왕국의 해군이 게으르거나 무능해서 이곳 해적을 방치하는 것이 아니었다. 로벨은 귀밑머리를 귓등으로 넘겨 거슬리지 않게 하고 중얼거렸다.
“어디로 간 걸까?”
허풍쟁이 제이콥이 입 찢어져라 하품하고 중얼거렸다.
“기사 나리가 온 걸 알고 전부 튀었나 봅니다.”
가능성은 있지만 성급한 결론이었다. 그 말을 한지 1시간이 지나지 않아 졸리 로저를 당당히 내건 해적선이 나타났다.
해적 두목은 종이를 둘둘 말아 만든 확성기로 기고만장함을 보여주었다.
“우하하핫! 우하핫! 걸렸구나! 네놈들이 바다로 나오길 기다렸다!”
로벨은 칼자루에 손을 얹고 턱을 만졌다.
“말투가 너무 건방져.”
“못 배운 뱃놈들이란...”
해적 두목은 혹평에도 불구하고 의기양양해서 계속 떠들었다.
“배 위에서는 기사가 아니라 기사 할애비(Grandpa)라도 어쩔 수 없을 거다! 각오해라!”
“와! 날카로운 해적이네요? 기사님이 그랜드 챔피언인 것을 아나 봐요!”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시답지 않은 농담과 달리 상황이 안 좋았다. 갤리선은 범선과 달리 선수에 대포가 집중되어 있었다. 오베리아 갤리선처럼 초대형 갤리선은 측면과 후미에 대포를 달기도 하지만,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갤리선은 불가능했다. 노와 노잡이를 배치하는 것만으로 하부갑판이 꽉 차는데 대포까지 놓을 공간이 없었다. 푸른고래 호도 선수에 팔코넷 2문이 전부였다. 뒤를 잡힌 것이 치명적이었다.
“선회하시오. 배를 붙이면 본때를 보여줄 테니.”
“여기서는 곤란합니다.”
이안 선장은 뭔가 설명하려다가 시간이 아까운지 그만두었다. 갑판으로 뛰어가 해치를 열고 소리쳤다.
“노예장! 전속 전진! 해적놈을 따돌린다! 수작 부리는 노예놈이 있으면 본보기로 창자를 뽑아라! 조타수! 타륜 고정해라! 지금 방향에서 1도라도 틀어지면 아가리를 찢어버리겠다!
이안 선장은 생김새와 달리 신사적인 선장이었다. 조금 전까지 말이다. 전투상황이 되자 허풍쟁이도 울고 갈 만큼 험한 말을 쏟아 부었다. 마녀 키르케가 겁먹고 로벨 뒤에 숨었다. 로벨도 당황해서 말을 조금 더듬었다.
“왜 도망치는 거야? 싸워야지?”
이안 선장은 숨을 크게 들이시고 평소 모습으로 돌아왔다. 육지 사람에게, 그것도 큼직한 칼을 찬 기사이자 선주에게 화를 내를 만큼 흥분하지는 않았다.
“이곳은 외길입니다. 얼핏 보면 열린 곳 같으나 이 길에서 벗어나면 곳곳에 암초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 그래?”
“게다가 선회하는 순간 저놈들과 거리가 좁혀집니다. 포격 거리를 내어주는 거지요. 꼬리가 잡힌 상황에서 반전하는 것은 팔 한쪽을 내주고 시작하는 싸움입니다.”
“그럼 어쩌려고?”
이안 선장은 청동고래 선수상을 힐끔 보고 말했다.
“거리를 벌려야지요.”
자신이 없어 보였다. 해적보다 항해술이 떨어지거나 함선이 부실해서가 아니었다. 다음 수가 보이기 때문이다. 주 돛대 위 까마귀 둥지에서 견시원이 소리쳤다.
“12시 방향! 졸리 로저! 해적선입니다!”
“역시...”
이곳은 해적의 안마당이었다. 이안 선장이 모르는 비밀스러운 항로를 여럿 꿰고 있을 것이다.
“이거 포위되었군요.”
호른 경이 헬름을 꺼내며 중얼거렸다. ‘빵이 맛있군요’ 보다 성의 없는 말투였다.
“무슨...? 선주님...?”
호른 경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로벨은 아예 활짝 웃었다.
“적이 앞에 있어. 그럼 팔을 줄 필요 없지?”
“그건 그냥 비유였습... 지금 무슨 생각이십니까?”
애꾸눈 볼포스는 아바레스트를 장전한 후 용병들을 종대로 세웠다. 해전 경험이 풍부한 용병들이라 구시렁거리면서도 대열을 갖추었다. 충격을 받아도 서로가 서로를 지탱해서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로벨은 말 꼬랑지 머리를 아래로 누르며 파나케아 투구를 뒤집어썼다.
“항해술은 모르지만, 싸우는 법은 알아.”
“무슨 말씀인지...”
“포위를 뚫어야 하잖아. 전속력으로 전진해.”
“설마?”
“응. 들이 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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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 선장은 될 때로 되라는 심정으로 명령했다.
“메인마스트 전부 풀어! 바람을 품는다! 뭐? 멍청아! 개프(gaff)를 왜 내리냐! 스퀘어(square)! 스퀘어 세일만 풀어! 전진이다! 전진! 전속력으로 달리기만 하란 말이다!”
구체적인 의미는 모르지만 돛을 사용하니 확실히 속도가 빨라졌다. 얼마나 빠른지 무게중심을 높이면 뒤로 넘어갈 정도였다.
“꽉 잡아!”
갤리선을 운용할 때 돛을 펴고 노를 젓는 것은 그리 권장하는 항해술이 아니었다. 1+1이라고 2의 속도가 나는 것도 아니거니와 노잡이가 쉬이 지치고 감속과 방향전환이 어려웠다.
물론, 예외는 항상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벼랑 끝 항로에서 순간적인 가속을 하는데 덧없이 옳았다.
푸른고래 호 앞을 막은 소형 갤리어스 해적들은 성난 황소처럼 돌진해오는 푸른고래 호에 그만 당황했다. 겁 많고 소심한 상인을 주로 상대하다 보니 낯선 것도 있었다.
“쏴, 쏴라! 쏴라!”
해적 중에 엘리트라 할 수 있는 포수가 대포 심지에 불을 붙였다. 불씨가 타들어가는 4, 5초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다음부터는 심지를 짧게 잘라 곧장 격발되게 해야겠다고 생각할 때 화약이 폭발했다. 콰과광-! 콰광-!
주먹만한 강철 포탄 2발이 쏘아졌다. 한 발은 아주 엉뚱한 곳으로 날아갔고, 한 발은 앞 돛대를 아슬아슬하게 스친 후 푸른고래 후 뒤쪽에 물보라를 일으켰다.
“그거 하나 못 맞히냐!”
선장이 윽박지르자 엘리트 해적이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갤리선 시대의 대포는 견제, 위협, 협박, 압박용이며 ‘운 좋으면 맞겠지’하며 쏘는 것이었다.
재장전을 위해 대포를 끌어내는데 선장이 발로 엉덩이를 차고 욕설을 퍼부었다.
“늦었다! 머저리 자식아! 크로스보우를 들어라! 저 땅강아지 놈들한테 바다 사나이의 무서움을 보여주자!”
해적들은 크로스보우를 장전해 뱃머리로 몰려왔다. 재블린이나 슬링을 가진 해적도 일부 있었다. 직업이 직업이라 나름 숙련도가 엿보였다. 어디까지 해적치고 말이다.
“셋의 하나다! 셋의 하나는 돛줄을 노려라! 나머지는 무기를 가진 놈부터... 커헉-!”
그때, 마술 같은 일이 일어났다. 선장의 가슴에 한 뼘쯤 되는 가지가 돋아난 것이다. 단말마에 놀라 돌아본 해적들도 저게 뭔지 바로 알아채지 못했다. 선장이 힘없이 무릎을 꿇고 피가 섞인 걸쭉한 침을 흘릴 때 누군가 외쳤다.
“저격이다!”
그 사이 푸른고래 호가 300야드 앞으로 다가왔다. 해적들은 허둥지둥 크로스보우를 겨드랑이에 끼웠다. 그러나 사격 명령을 내릴 선장이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바람을 등진 상대가 먼저 공격을 시작했다.
“발사-”
거친 바람과 요란한 파도 사이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20여 발의 쿼럴이 날아왔다. 악마가 장난질 친 것처럼 정확한 사격이었다. 뱃전의 해적 예닐곱 명이 방아쇠를 당기기도 전에 와르르 쓰러졌다.
“쏴! 우리도 쏴라!”
해적 하나가 다급히 소리쳤다. 운 좋게 쿼럴 소나기를 피한 해적이 되는대로 응사했다. 그러나 반의반도 푸른고래 호에 닿지 못했다.
푸른고래 호는 알량한 잔가시가 우습다는 듯 웅장한 몸을 내던졌다. 청동을 씌운 고래상이 파도를 타고 높이 비상했다. 해적의 비명이 갈매기 울음처럼 울려 퍼지는 가운데 선수상 아래 숨겨진 충각이 해적선의 뱃머리를 부수고 선실로 파고들었다. 쿠우우-웅-! 쿠쿵-!
산과 산이 부딪치는 느낌이었다. 양측의 선원과 해적은 유아기 시절로 퇴행해 네 다리로 몸을 보호했다. 선체를 구성하는 나무파편과 갑판 위에 묶어놓은 잡기가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재수 없는 선원 몇 명이 크게 다쳤다.
비명조차 집어삼키는 재앙이 지나가고, 두 척의 갤리선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사지 멀쩡한 사람 순으로 하나씩 몸을 일으켰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주 짧은 침묵이었다.
“해적 모가지 하나에 1페닝이다! 죽여라!”
“이 개자식들이? 너나 죽어라!”
기사와 용병과 선원과 해적이 뒤얽힌 뱃머리를 뛰어넘어 상대방에게 달려들었다. 해전의 정석이었다. 막상 겪으니 무시무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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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은 해적다운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다. 육지 사람은 물 위에서 싸우지 못한다는, 아무 근거 없지만 왠지 그럴듯한 편견 말이다. 그러나 로벨의 역사를 알면 어떤 경우에도 백병전을 피했어야 했다. 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수차례 바다에서 싸운 경험이 있었다.
“죽어라! 좀!”
해적의 주 무기는 커틀러스와 대거였다. 가끔 롱소드나 하프 파이크를 가진 해적도 눈에 띄었지만 극소수였다.
백병전이 곧 난전인 바다에서 길고 무거운 장병기보다 짧고 날렵한 무기가 선호되는 것은 당연했다. 해적의 주된 상대는 선원이나 어부들이었으니 그 정도로 충분했다. 하지만 강철을 두른 ‘진짜 싸움꾼’ 앞에서는 많이 부족한 무기였다.
로벨은 팔뚝보다 좀 짧은 커틀러스를 힐끔 보고 칼 쪽으로 오히려 어깨를 내밀었다. 완만하게 휘어져서 힘이 잘 받는 무기지만, 타격점이 묘하게 빗나간 탓에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온 힘을 다해 때려도 ‘아야!’ 할까 말까한데, 어설프게 때리니 때린 해적 손만 아팠다.
“이, 이, 이...”
“괴물 아니야.”
로벨은 여섯 번째로 들을 호칭을 가로채고 텅 빈 해적 복부에 흐룬팅을 박아주었다. 가죽 한 장 걸치지 않은 몸뚱이라 아주 부드럽게 살을 헤집었다.
“해적이니까 지옥에 가겠지?”
“끄으으...”
로벨은 칼날을 45도 비틀어 확실하게 이번 생을 마감시킨 후 도로 뽑았다. 그리고 꺼져가는 숨결에 관심 두지 않았다. 그런 것이 너무 많았다.
호른 경은 제 세상 만난 것처럼 날뛰었다. 철구가 달린 플레일을 위아래, 위위아래로 휘두르며 해적을 튕겨내다가 공간이 좁아지자 애용하는 워 해머를 뽑아 머리통을 깨기 시작했다.
애꾸눈 볼포스는 까마귀 둥지에서 견습 선원이 장전해주는 아바레스트를 느긋하게 쏘았다. 시작부터 대마를 잡은 탓에 특별히 공을 탐내지 않았다. 목소리 큰 놈만 표적 삼았다.
싸움개 닥스와 맨앳암즈들은 두 기사를 피해 주갑판으로 모인 해적을 가지치기했다. 테두리부터 하나하나 찌르고 베는데, 정말 정원사가 된 기분이었다. 잔가지가 아니라 팔다리가 떨어지는 것이 조금 다를 뿐이었다.
“우리가 이렇게 셌었나?”
“양심껏 말해서 기사 나리가 센 거지.”
허풍쟁이 제이콥과 겁쟁이 데비는 휘두를 기회가 좀처럼 없는 무기로 뒤통수를 긁적였다. 푸른고래 호로 넘어오는 용감하고 멍청한 해적을 손봐준 뒤 한숨 쉬었다.
“보물 찾으려면 몇 놈 잡아놔야 하지 않을까?”
“아니, 됐어. 저쪽에 한 척 더 있잖... 잉? 기사 나리! 기사 나리!”
허풍쟁이가 뒤쪽을 돌아보고 다급히 로벨을 불렀다. 로벨은 일곱 번째 해적 목을 자른 후 파나케아 투구의 힘으로 돌아보았다. 큰일이 난 듯한 목소리라 걱정되었다.
“왜 그래?”
“저놈들이! 저놈들이 도망칩니다요! 이리 안 오고 튀고 있어요!”
로벨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신이 나서 쫓아오던 배후의 해적이 슬그머니 뱃머리를 돌려 도망치고 있었다. 큰일이라면 큰일이었다. 잡을 수 있는 해적 숫자가 크게 줄었다.
“저럴 거면 왜 쫓아온 거야?”
이안 선장과 푸른고래 호 선원은 해적을 이해했다. 궁지에 몰아넣고 보니까 여우가 아니라 호랑이였다. 로벨은 강철 건틀렛으로 여덟 번째 해적의 턱을 돌리고 외쳤다.
“가급적 생포해! 목 자르지 말고 팔다리만 잘라!”
모조리 죽이라는 명령보다 끔찍하게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