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293화 (293/605)

293화. 금의환향

해적의 보물은 보트 하나에 싣기에 지나치게 많았다. 포대자루가 모자란 문제도 있었다.

로벨은 고심 끝에 애꾸눈, 겁쟁이, 허풍쟁이를 동굴에 남겨두고, 세 번에 걸쳐서 보물을 옮기기로 결정했다. 사람이 빈 만큼 많이 실을 수 있었다.

첫 번째 보물을 옮겼을 때 푸른고래 호 선원과 울프 용병단이 경악했다. 햇빛 아래 드러난 금은보화는 아름답다 못해 경이로웠다.

“호른 경은 이곳에 남아서 감시하시오.”

로벨이 나직이 속삭였다. 황금은 묘한 마력이 있어서 사람을 쉽게 유혹하고 금방 타락시켰다. 아닌 게 아니라 몇몇 선원 얼굴에 탐욕이 엿보였다.

“저를 믿으십니까?”

호른 경이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자그마치 10만 페닝이었다. 10페닝 때문에 사람이 죽고 사는 세상에서 10만 페닝은 충성서약조차 다시 쓸 수 있는 금액이었다. 로벨이 동굴로 돌아간 사이 선원들과 작당해서 로벨 일행을 버리고 도망가면...

“경이 말이오? 농담이 지나치오.”

로벨은 재미있다는 듯 까르르- 웃었다. 호른 경이 명예와 우정을 저버리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꼭 명예 때문이 아니라도, 로벨이 하사한 성과 마을은 10만 페닝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 금화는 한번 쓰면 끝이지만, 땅은 매년 소출을 만들어 냈다.

“그럼 다녀오겠소.”

로벨은 마녀 키르케와 싸움개 닥스를 데리고 다시 동굴로 향했다. 호른 경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보물을 옮기고, 애꾸눈을 태워 돌아갈 때까지 일말의 걱정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푸른고래 호가 제자리에 없을 때 충격이 대단했다.

“어? 어라?”

로벨 일행 얼굴에 당혹감이 스쳐갔다. 갈매기가 끼룩거리며 머리 위를 날아가고, 파도가 철썩거리며 텅 빈 암초를 오르내렸다.

“어... 어디 간 겁니까요?”

허풍쟁이가 더듬더듬 물었다. 그 순간 공통된 단어들이 떠올랐다. 배신, 배반, 도주, 탈주, 낙오...

“호른 나으리 짓입니다!”

“아, 아니야!”

로벨이 깜짝 놀라 부정했다. 호른 경이 그럴 리 없었다.

“그 나으리가 아니면 누가 이런 짓을 합니까요? 기사 나리를 여기 버려서 굶어죽게 하고, 자기는 보물을 가지고 에르나 왕국이나 아이란드 왕국으로 도망가겠지요!”

“아니라니까! 호른 경은 그런 짓 안 해!”

“아니... 아니면 아닌 거지... 왜 칼을 뽑고 그러십니까요...”

로벨이 흐룬팅을 두 마디쯤 뽑자 열 받아서 날뛰던 용병들이 얌전해졌다. 잘 벼려진 강철에도 마력이 있는 게 분명했다.

애꾸눈이 안대를 만지며 상황을 정리했다.

“이안 선장과 선원들 짓일지도 모릅니다. 호른 경을 제압한 후 작당했을지도 모르지요. 어찌되었든 푸른고래 호가 사라졌으니 살 길을 모색해야 합니다.”

허풍쟁이 이하 용병들은 즉시 태세를 전환하여 푸른고래 호 선원들을 욕했다. 면전에서 사용하면 평생 원수가 될 용어가 대량 사용되었다.

“조용. 조용해 보세요.”

마녀 키르케가 귀를 쫑긋 세우고 조용하라고 말했지만, 자신의 어휘구사력에 심취한 용병들은 듣지 못했다. 마녀도 화가 나서 소리를 빽! 질렀다.

“아! 좀! 조용하라구요! 저거 안 들려요?”

마녀의 고음 뒤로 묵직한 저음이 울려왔다. 쿠우웅- 보트가 조용해졌다.

“이 소리는...”

“대, 대포소리입니다!”

이어서 두 발의 포음이 들려왔다. 쿵... 쿠웅- 울프 용병단 포병 소대장 겁쟁이 데비가 중얼거렸다.

“보물을 독차지해서 신나서 저러나?”

그럴 리 없었다. 푸른고래 호의 대포는 2문인데, 지금 4번 연속으로 폭발음이 들렸다.

“전투 중입니다.”

“이런...!”

지난번 전투에서 도망친 해적이 보물을 지키기 위해 돌아온 모양이다. 이안 선장과 호른 경은 해적과 싸우기 위해, 혹은 로벨 일행을 보호하기 위해 자리를 이탈했다. 버리고 도망간 것이 아니었다.

“그런 일이 있으면 말을 하지!”

“...어떻게?”

걱정되기에 앞서 괜히 미안해졌다. 애꾸눈이 아바레스트를 풀어 시위를 감으며 물었다.

“어찌 하시겠습니까?”

“그렇게 물어도... 음...”

로벨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발버둥만 세게 쳐도 뒤집어질 보트로 해전에 끼어들 수도 없고, 배와 보물을 두고 도망갈 수도 없었다.

“기다리자.”

이안 선장과 호른 경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

로벨 일행은 보트를 넙적한 암초에 정박하고 갈매기 똥을 피해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섬 뒤쪽 멀지 않은 곳에서 포성이 몇 번 들리더니, 어느 순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배 밑바닥에 구멍을 내어 자침시키는 것이 아닌 이상, 어지간해서 배가 가라앉는 일은 없었다. 화약고가 폭발하거나 용골이 부러지는 등의 최악의 경우도 침몰할 수 있지만, 그럴 경우 대포보다 더한 소음이 일어날 테니 아마 아닐 것이고, 십중팔구 백병전에 돌입했을 것이다.

“호른 경은 강해. 울프 용병단은 무적이야. 걱정할 것 없어.”

로벨이 아론다이트와 흐룬팅을 차례로 뽑으며 말했다. 알루미늄보다 신비로운 마법의 검은 숫돌을 대지 않아도 예기를 잃지 않았다. 깨끗한 기름으로 광택 나게 닦아주면 끝이었다.

“말씀하고 행동하고 다르십니다요.”

허풍쟁이가 툴툴거렸다. 로벨은 칼자루를 쥐고 팔다리 근육을 풀었다.

‘만에 하나...’

만에 하나 해적이 이길 경우, 해적 두목은 남은 보물을 확인하기 위해 이곳 해안동굴로 올 것이다. 그때가 복수의 순간이었다. 로벨의 얼굴에 적의가 떠올랐다. 에르나 왕국도, 잉그비아 왕국도 끝내 감당하지 못한 지상 최강의 기사이자 포비아 왕국의 1/5을 지배하는 볼탄 반도 공작의 분노였다. 호른 경을 꺾고, 해안동굴에 오지 않는다 해도, 로벨이 살아있는 한 마음 편히 해적질을 못할 것이다.

해적에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지만, ‘만에 하나’는 없었다. 로벨이 없어도 로벨의 기사와 용병단은 강했다. 최초의 포성이 울린 지 1시간이 지나지 않아 암초의 기둥 사이로 푸른고래 호가 나타났다. 경박한 허풍쟁이와 겁쟁이는 물론이고, 점잖은 애꾸눈조차 벌떡 일어나 환호했다.

“기사님! 이겼어요! 우리가 이겼어요!”

로벨은 환하게 웃다가 머쓱해진 칼을 회수했다. 그리고 승리를 의심한 적 없는 것처럼 새침히 말했다.

“응. 내가 말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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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고래 호가 승리하긴 했지만, 피해가 상당했다. 보물에 눈이 뒤집힌 해적들은 광기 버섯을 먹은 바바리안처럼 달려들었다. 최정예로 구성된 울프 용병단에서 일곱이 죽거나 다쳤다. 무장이 부실한 선원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주군의 허락 없이 배를 움직여 죄송합니다.”

해적의 공격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호른 경조차 부상을 입었다. 헬름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아래턱에 자상이 새겨졌다. 왼쪽 뱀브레이스 철판 사이로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풀 플레이트 차림으로 저리될 정도면 개싸움도 보통 개싸움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뻐하십시오. 주군의 보물을 무사히 지킬 수 있었습니다.”

로벨은 기뻐하지 않았다. 호른 경의 자상으로 손을 뻗다가 차가운 건틀렛을 꼈음을 깨닫고 화급히 내렸다.

“상처가... 심하오?”

호른 경은 너덜너덜한 왼팔을 들어 보이고 씨익-웃었다.

“이 정도는 찰과상입니다.”

로벨은 남자의 얼굴도 아름다울 수 있음을 깨달았다.

“경은... 경은 내게 보물보다 소중한 기사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로벨은 자신의 말에 얼굴을 붉혔다. 기사 소설은 수십, 수백 권을 읽었지만, 귀부인이 좋아하는 로맨스 소설은 단 한 권도 읽어본 적 없었다. 이런 대사는 익숙하지 않았다. 결국 보고 배운 대로 말을 맺었다.

“키르케에게 상처를 보이고 속히 치료하시오. 그대의 주인이 내리는 명령이오.”

호른 경은 서운해하지 않았다. 로벨의 표정에서 이미 많은 것을 받았다.

“주군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두 기사의 모습을 지켜보던 마녀 키르케가 입술을 삐죽였다.

“칫! 그럼 진짜 보물은 제가 가져도 되나요?”

로벨과 호른 경이 정색해서 대답했다.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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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일행은 로드릭 항에서 출항한지 열아흐레 만에 영웅이 되어 돌아왔다.

울프 용병단 300명이 총동원되어 삼엄한 경계를 펼치는 가운데, 금과 은을 실은 수레가 줄지어 늑대성으로 향했다. 한마디로 장관이었다.

소문은 바람보다 빠른 법이라, 로드릭 시티의 상인과 농민은 물론이고, 노스폴드 시민과 주변 영지민도 구경 나왔다.

“발레아 제도에서 해적 수천 명을 소탕하고 보물을 찾아왔다네.”

“인어의 바다를 주름잡는 해적도 우리 공작 나리한테는 안 되는구만.”

“그야 당연하지! 잉그비아의 해적놈들도 싹싹 빌고 도망치게 한 분이신데!”

로벨의 명성도 금화의 무게만큼 더해졌다.

로벨의 금의환양을 가장 많이 반긴 것은 로드릭 영지의 모두가 짐작했듯 어린 집사였다. 어린 집사는 늑대성 밖까지 마중 나와 함박웃음 지었다.

“영주님!”

로벨은 모닝스타에서 내려 두 팔을 활짝 벌렸다. 기쁨을 함께 나누기에 어린 집사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어린 집사의 모든 관심은 찰랑찰랑 소리 내는 수레에 고정되어 있었다. 로벨을 벼락같이 지나쳐 수레로 달려갔다.

“이게 다 금화에요? 100페닝 짜리? 아, 은화도 있네요? 수레가 몇 대죠? 와! 이 정도면 족히 10만! 아니, 15만 페닝은 되겠어요!”

“......”

로벨은 포옹은 외로이 방치되었다. 뒤에서 지켜보던 허풍쟁이 이하 울프 용병단이 웃음을 참기 위해 어깨를 들썩였다.

“이놈들아! 웃지 말고! 풉! 수레 안으로 옮겨!”

펄프 대장이 존경하는 고용주를 위해 부하들을 닦달했다. 어린 집사는 장부 가져와야 하니까 잠깐 기다리라고 외치고 아성으로 뛰어갔다. 마녀 키르케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속삭였다.

“기사님? 이제 팔 내리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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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화와 은화를 분류하고, 보석을 시세에 맞춰 환전하니 12만 8천 페닝이었다. 늑대성의 3년치 예산이었다. 가격을 책정 할 수 없는 알루미늄까지 더하면 어마어마했다.

로벨을 따라간 울프 용병단과 푸른고래 호 선원에게 전투수당 외 100페닝이 포상으로 주어졌다. 그리고 이안 선장에게는 특별히 비단옷과 황금단검을, 호른 경에게는 오베리아 전투마와 보석이 장식된 방패를 하사했다.

어린 집사가 몹시 아까워했지만 로벨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저 두 사람이 아니었으면 외딴섬에 고립되어 생사를 알 수 없었을 거라 주장하니 아무리 보물이 귀해도 아낄 수 없었다.

그 다음은 흥청망청... 까지는 아니지만, 제법 호화로운 연회였다.

어린 집사는 술을 마시면서도 수시로 지하창고를 찾아갔다. 자물쇠를 4중으로 채워놓고도 불안한 건지, 아니면 그냥 보기만 해도 좋은 건지 알 수 없었다. 허풍쟁이 제이콥은 특유의 입담으로 보물을 발견한 이야기를 떠벌렸고, 펄프 대장과 외팔이 더치는 나도 따라갔어야 했다고 한탄했다. 호른 경이 맥주를 따르며 축하했다.

“성벽 공사를 올해 안에 마무리 할 수 있겠군요.”

“해자도 파고, 다리도 놓고, 그리고 대포도 배치할 거요. 정말 멋지지 않소?”

로벨은 꿈꾸는 소녀처럼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젊은 레이디가 드레스와 브로치를 고를 때 모습하고 비슷했다. 호른 경은 할 말이 많지만 하지 않고 그냥 웃었다. 저 얼굴을 보니 뼈가 부러지도록 싸운 보람이 있었다.

술기운이 얼큰하게 돌아 정신이 한 가닥씩 풀렸을 때, 금일 근무를 자처한 성실하고 과묵한 몬트가 메인 홀로 들어왔다.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외팔이 더치와 해적에게 배운 뱃노래를 발정난 고양이처럼 흥얼거리는 허풍쟁이를 피해 기둥 사이를 빙글빙글 도는 로벨을 찾아갔다. 제정신으로 못할 추태에 박수를 보내는 호른 경과 마녀 키르케 모습에 혼란을 느꼈지만, 다행히 본분을 다할 수 있었다.

“영주님, 에디즈 자작이 보낸 전령입니다.”

“으응? 덩굴성?”

로벨이 반응을 보이자 과묵한 몬트는 안심했다. 그래도 아직 사람이었다.

“강철성에서 찾는 더스틴 폴라 경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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