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263화 (263/605)

263화. 장미성

263화. 장미성

장미성(Rose Castle).

위대한 왕 샘 포클이 볼탄 반도를 정복한 이래 300년 동안 프란시스 가문의 거점이자 상징이었다. 장미성은 프란시스 가문이며, 프란시스 시티이며, 프란시스의 모든 것이었다. 그러나 300년의 세월은 길었다. 한 가문이 영화를 독점하기에는 지나치게 긴 시간이었다.

“그대는 로드릭 가문의 적법한 주인 로벨 로드릭 후작을 주군으로 받들어 목숨이 다할 때까지 충성할 것을 맹세합니까?”

“맥기 가문의 호마 맥기가 충성을 맹세합니다.”

“에디즈 가문의 하롤드 에디즈가 충성을 맹세합니다.”

노대의 계단이 발모양으로 오목하게 주저앉고, 처마 아래 주춧돌이 빗방울에 움푹 파이는 긴 시간이 지나, 처음으로 프란시스의 핏줄이 아닌 사람이 장미의 홀에 주인으로 섰다. 또한 누대에 걸쳐 장미성에 충성해온 볼탄 반도의 기사들이 처음으로 프란시스의 핏줄이 아닌 사람 앞에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했다. 영원할 것 같던 질서가 뒤집히는 순간이며, 한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전지전능한 옛 신의 이름으로 오늘의 서약을 증명하니, 성부와 성자가 성령이 가호하사 정의와 믿음이 다하는 순간까지...”

옛 신의 사제가 엄숙한 얼굴로 성서를 펼쳐 낭독하고, 어린 수사들이 성가를 열창하는 가운데, 포클랜드 시티에서 친히 방문한 주교가 볼탄 반도의 새 주인과 그의 기사들을 축복했다. 333개의 초를 밝혔지만, 여름 햇살을 고스란히 비추는 스테인드글라스 아래에서는 조명보다 장식에 가까웠다. 온 세상이 충만함으로 로벨 로드릭을 축하하는 듯했다.

장엄하고 성스러운 충성 서약의 자리지만, 빛이 닿지 않는 곳에는 음험하고 음습한 조소가 감돌았다.

‘개가 주인을 물었는데, 어찌 웃음이 나오겠소.’

‘개가 아니라 늑대지. 늑대는 애초에 길들일 수 없으니...’

심지어 아야와 이야카가 들으면 고개를 갸우뚱할 소리까지 나왔다.

호른 경은 장미의 홀의 기둥과 기둥 사이를 유령처럼 오가며 속삭임을 수집했다. 그리고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로벨의 최측근 어린 집사, 펄프 대장, 마녀 키르케 곁으로 돌아왔다. 수 백 마디의 말을 한 줄로 전달했다.

“장미성에서 충성 서약식을 거행한 게 옳은지 모르겠다.”

어린 집사는 깃털 펜을 바람처럼 휙휙- 움직이며 충성을 맹세한 가문을 기록했다. 그러는 동시에 로벨에게 조언하고, 마녀 키르케와 잡담하며, 호른 경의 걱정까지 받아주었다.

“프란시스 가문의 그림자가 스며들까 봐요?”

“표현이 좋군. 그렇다.”

어린 집사는 펜촉에 잉크를 묻히며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그래도 몇 가지 장점이 있어요. 우선 거부감이 덜하죠. 충성의 대상이 프란시스 핏줄인지, 장미성인지 항상 모호했으니까요.”

“흐음. 그럴듯하군.”

“그리고 저 많은 기사들을 대접하려면 비용이 무지막지하잖아요? 늑대성은 그렇게 크지도 않고요.”

“그게 주된 이유로군.”

로벨은 서른일곱 번째 충성 맹세를 받은 후 짧게 한숨을 쉬었다. 볼탄 반도의 기사 가문이 대부분 모인 만큼 끝이 보이지 않았다.

‘오늘 중에 끝나려나...’

어린 집사가 로벨의 지친 표정을 읽고 위로했다.

‘일단 중요한 가문은 끝났어요. 잠깐 쉬었다가 할까요?’

‘아니야. 오늘 끝내야지.’

프란시스 가문의 재산과 권리를 흡수하긴 했지만, 진짜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에릭 프란시스 공작 일가와 방귀 좀 뀌는 페르젠 가문, 헤르만 가문 등이었다. 그들을 생각하면 일처리를 미룰 수 없었다.

‘잘 생각하셨어요! 할 일이 태산인데 훌딱 끝내야죠!’

로벨은 조금 전과 다른 의미로 한숨을 쉬었다. 한동안 햇살을 베개 삼고 구름을 이불 삼아 한가로이 낮잠을 즐기는 일은 힘들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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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집사는 프란시스 시티의 조세권, 재판권, 시설 이용권과 허가권 등을 그대로 가져왔다. 그러나 300년 동안 ‘프란시스’ 이름으로 운영되어 온 만큼 쉽게 바뀌지 않았다. 서기관이 로벨 로드릭을 로벨 프란시스로 기록하거나, 재판관이 프란시스 가문의 이름으로 판결하는 등의 사고가 잇달았다. 반면, 세상물정에 민감한 자들은 로드릭 가문에 연줄을 대기 위해 재빨리 행동에 나서기도 했다.

“저희 동부 상회에서 로벨 로드릭 후작님의 경사를 축하하고자 약소하게나마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카틀린 상회에 귀한 동방비단이 들어와 진상하고자 합니다.”

주로 금화를 자루 채로 다루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로벨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보기 위해 갖은 애를 썼지만 쉽지 않았다.

“으... 이제 그만 오라고 해. 아니면 집사가 대신 만나 봐.”

“으아아! 저도 한계라구요!”

볼탄 반도에서 콩알만큼이라도 권력과 명성이 있는 사람은 모두 찾아왔다. 군사와 행정업무에 치이면서 얼굴도장까지 찍기는 무리였다. 어린 집사의 경우 하루에 두 시간도 자지 못해 다크 서클이 턱 밑까지 내려왔다.

화장실 갈 틈도 없이 열흘 밤낮을 일한 결과 ‘로벨 로드릭’이란 이름이 확실히 자리매김 되었다. 또한 프란시스 가문의 숨겨진 재산도 대부분 찾아냈으며, 페르젠 가문과 헤르만 가문의 입지도 줄일 수 있었다. 그리고 열하루째 되는 날, 어린 집사는 페리 피터 행정관과 마틴 루드 지부장에게 뒷일을 맡기고 졸도했다.

“이걸 혼자 처리했다고?”

마틴 지부장은 산더미처럼 쌓인 종이를 보고 깜짝 놀랐다. 임명장, 계약서, 권리증, 회계장부 등등 프란시스 시티와 인근 마을의 모든 행정자료가 정리되어 있었다.

“열 사람이 할 일을 혼자서 해치웠군.”

“백일 걸릴 일을 열흘 만에 해치웠지.”

페리 행정관과 마틴 지부장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관리와 상인 사이에서 ‘늑대성의 귀재’ 이야기가 전설처럼 떠도는 이유를 알았다.

‘정말로 천재였어...’

어린 집사가 남겨놓은 자잘한 업무를 처리하는데도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빠졌다. 에르나 왕국 수도 대학에서 나름 천재 소리를 듣던 두 사람이 ‘진짜 천재’ 앞에서 새삼 겸손해졌다.

어린 집사는 집사장 침대에 대자로 뻗어 열흘 치 수면을 몰아 해결했다. 얼마나 피곤한지 눈꺼풀이 다 잠기지 않아 흰자가 살짝 보이고, 창백한 입술 사이로 굵직한 침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게 천재라고요?”

마녀 키르케는 공작 깃털로 어린 집사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어린 집사는 재채기할 듯 우물우물하다가 ‘피슈우-웅’ 소리를 내고 입맛을 다졌다. 마녀는 그 모습이 재미있는지 몇 번 더 반복했다. 로벨은 소리 없이 웃다가 좀 지나친 듯해서 시치미 뚝 떼고 점잖게 만류했다.

“그만해. 깨겠다.”

천방지축 마녀 키르케지만 로벨의 말은 잘 들었다. 공작 깃털을 왼쪽 귓가에 끼우고 몸을 돌렸다.

“전쟁도 끝났는데, 이렇게 바쁠 필요가 있나요? 여유를 가지고 일해도 되잖아요.”

로벨은 윤기 흐르는 멋진 깃털을 은근히 부럽게 보며 대답했다.

“그게... 포클랜드 시티에 가야 해서 그럴 거야.”

“수도에요?”

“국왕 폐하께 충성 맹세해야 하니까. 그래야 볼탄 반도를 통치할 정통성이 생기잖아.”

“이미 기사님이 통치하고 있잖아요?”

“아직 충성하지 않는 가문이 많이 있잖아.”

국왕이 충성을 받지 않고 공신인 프란시스 가문을 지지하면 일이 골치 아파질 수 있다. 그러나 로벨의 사람들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로벨은 새로운 국왕-데이브 국왕을 왕위에 올린 일등공신이며, 실리적으로도 대세가 된 늑대성을 쳐내고 몰락한 장미성과 손잡을 리도 없었다.

설령 왕실이 로벨을 견제하려고 해도, 제임스 공작, 노릭스 후작, 자비에 후작 등 각 지방의 제후에게 지지를 받으면 어쩔 수 없었다. 지난 수년간 발바닥에 땀이 나게 뛰어다닌 보람이 있었다.

로벨은 어린 집사가 정리해놓은 일정표를 대충 훑어보았다. 국왕 폐하 외에도 만나야 할 사람이 한 가득이었다. 재무대신, 외무대신, 법무대신, 상회장, 상단장, 주교, 수도원장후 등등... 로벨에게 힘이 되어줄 귀족과 상인과 성직자 등이었다.

“주군은... 아니, 에릭 프란시스 공작은 항상 이런 일을 한 거야?”

포클랜드 시티에 다녀온 뒤에도 입으로만 충성 맹세한 가문들을 한 번씩 방문해야 했다. 올해에는, 어쩌면 내년까지도 쉴 틈이 없었다. 로벨은 볼탄 반도의 새 주인이란 자리가 얼마나 골치 아픈 자리인지 깨닫고 좌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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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가문에는 7척의 갤리선이 있었다. 그중 가장 큰 배인 청동사자 호는 바위 곶에 좌초되었고, 두 번째로 큰 배인 혹등고래 호는 남해 교역을 떠나 2년째 소식이 없었다. 그리하여 현재 항구에 남아 있는 배는 5척인데, 어린 집사가 전쟁 배상금 명목으로 3척을 뜯어냈다.

“새로운 선주님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희 뱃놈이야 뭐, 배만 탈 수 있으면 그만입죠.”

말 위에서 대적할 자가 없는 로벨과 깃털 펜 하나로 천만금을 움직이는 어린 집사지만, 바다의 일은 견습 선원보다 아는 것이 없었다. 에릭 프란시스 공작 사람이라 불안하지만, 달리 대안이 없어 기존의 선장과 선원을 그대로 고용했다.

“그렇게 불안하면 육로로 가는 게 낫지 않아?”

로벨이 어린 집사 귀에 속삭였다. 어쩔 수 없어 고용하긴 했는데, 단순히 못 미더운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로벨과 어린 집사를 포클랜드 시티로 태우고 갈 선장과 선원이기 때문이다.

어린 집사는 하루 종일 자고도 피로가 가시지 않은 듯 연신 하품했다.

“어느 세월에요? 그리고 수레로 운반하기에는 짐이 좀 많아요.”

로벨은 울프 용병단 2개 소대가 엄중히 지키는 ‘짐’을 돌아보았다. 금궤와 은궤는 기본이고, 유리, 도자기, 비단, 향신료 등등 국왕 폐하에게 진상할 선물이었다. 시가로 족히 6, 7만 페닝은 되었다. 장미성에서 긁어모은 재산의 절반이었다.

마녀 키르케가 엄지손가락을 빨며 물었다.

“구두쇠 집사가 웬일이래요? 아깝지 않아요?”

“아까워도 어쩔 수 없죠. 그리고 국왕 폐하의 승인을 받으면 내년에는 더 많이 벌 수 있으니까요.”

지금은 예산이 아니라 안전이 문제였다. 뱃길로 가는 것이 처음인데, 수행원 중 절반이 프란시스 가문의 사람이었다. 저들 중 누가 ‘잠재적 적’과 내통하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저번에 해적 사건도 있었고...”

로벨은 율리아 유리우스 호를 습격한 기사와 해적단을 떠올렸다. 지금은 그때보다 더 안 좋았다. 충성 서약식을 못마땅하게 지켜본 기사가 족히 두 자릿수였다. 충성 서약을 하지 않은 기사들까지 생각하면 어린 집사의 걱정이 결코 지나친 것이 아니었다. 마녀 키르케가 침 묻은 손가락을 퉁겼다.

“이안 선장님이 올 때까지 기다리면 되잖아요?”

“가을 추수할 때나 돌아올 텐데요. 시간이 없어요.”

볼탄 반도의 지배자로 입지를 굳히기 위해서는 포클랜드로 가야 한다. 그러나 입지가 약해서 포클랜드로 가는 길이 위험하다. 어린 집사는 말똥 묻은 기사들만큼이나 예의가 없는 선장들을 대접하면서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결국, 결정은 로벨이 내렸다.

“내일 출발하자.”

“어? 그렇게 빨리요?”

로벨은 환한 웃음으로 어린 집사의 근심을 덜어주었다.

“가을 추수 전에 집으로 돌아가야지. 그래야 또 같이 놀 수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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