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262화 (262/605)

262화. 수비대

262화. 수비대

로벨과 어린 집사와 마틴 루드 지부장은 ‘유라피아 대륙인’이란 것 외에 공통점이 없었다.

로벨은 까만 머리의 동부쪽 미인이고, 어린 집사는 주근깨 있는 북부쪽 소년이며, 마틴 지부장은 파란 눈의 서부쪽 청년이었다. 형제는 고사하고 이웃 같지도 않았다. 상식적으로 의심하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마틴 지부장의 친화력을 얕잡아 보았다.

프란시스 시티 동문 수비대장은 누가 봐도 말이 안 되는 헛소리에 껄껄 웃었다.

“그나저나 조카치고 나이가 많은데?”

“큰 형님의 첫째놈이죠. 이쪽은 우리 형제의 막내놈이고요. 둘 다 생긴 게 이래서 외탁한 거 아니냐는 말이 나옵니다.”

“마, 막내놈...?”

로벨은 난생처음 듣는 막말에 당황했다. 쟁쟁한 가문의 기사도, 주교도, 국왕조차도 감히 이리 부를 수 없었다. 그러나 마틴 지부장의 넉살은 그치지 않았다.

“이쪽의 계집은 조카의 처인 제이미고, 저쪽의 덩치들은 사거리 마을 독스 형제인데 힘이 좋아 데려왔습니다. 그리고 저 뒤에 키 작은놈들은 셋째 형님 댁에서 더부살이하는 일꾼으로 조니, 존슨, 지미, 숀 입니다.”

로벨을 따라온 울프 용병단 중 절반이 순식간에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수비대장은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이름에 우물쭈물하다가 질문을 바꿨다.

“수레가 왜 이리 많은 거요?”

“전쟁통에 귀리 값이 올랐다는 말을 듣고 종자로 쓸 것만 남기고 싹싹 긁어왔습니다. 이쪽 수레는 제거고, 저쪽 수레는 둘째, 셋째 형님 것인데...”

수비대장이 숏소드를 뽑아 대뜸 포대자루를 찔렀다. 알이 굵직한 귀리가 우루루- 쏟아졌다. 마틴 지부장은 움찔했다가 버럭! 소리 질렀다.

“이런 쓰읍! 이게 무슨 짓입니까!”

“아, 그냥 절차요.”

“거리에 굶주린 사람이 수백 명이란 말을 듣고 애써 가져왔건만! 우리 집안을 이리 대해도 됩니까? 우리가 한두 해 본 사이도 아닌데? -한두 해 보았...- 이런 식으로 모욕하면 길드와 관청에 고발해서...!”

“절차라니까! 절차!”

수비대장은 수레를 하나하나 꼼꼼히 조사하기 시작했다. 마틴 지부장은 그 옆에서 화내고, 항의하고, 자루를 풀어줄 테니까 찢지 말라고 애원했다. 그 바람에 정작 조사해야 할 것은 생긴 게 딴판인 형제와 인상 사나운 일꾼임에도 엄한 귀리 자루만 헤집어놓았다.

혹은 위험한 무기만 없으면 사내 몇 명이야 문제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 수비병력이 부족하다 해도 족히 200명은 되는데, 고작 십여 명으로 도시가 위험해질 거라 여기지 않았다. 그들이 볼탄 반도 최강의 기사와 최고의 용병단이 아니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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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성문을 지나자마자 정수리에 걸친 후드를 앞으로 끌어당겨 깊숙이 눌러 섰다. 장미성의 사람이 돌아다닐 수 있으니 혹여나 자신을 알아볼까 걱정했다.

로벨이 하면 금방 따라 하는 마녀 키르케와 울프 용병단도 덩달아 후드와 모자를 눌러썼다. 그러자 농장 사람이 아니라 순례자나 수도사 같았다.

“그러니까 더 수상하잖아요!”

어린 집사가 윽박지르자 그제야 하나둘 후드를 벗었다. 남달리 무게감 있는 애꾸눈도 슬그머니 후드를 벗으며 아닌 척 말을 돌렸다.

“이제 어디로 가면 됩니까?”

로벨은 수레 난간에 한 손을 얹고 바지춤으로 삐져나온 칼자루를 만지작거렸다.

전쟁 중에도 도시의 공기는 자유로웠다. 성벽 밖에서 수백 명의 병사가 창에 찔리고 대포에 박살나도 성벽 안은 평소처럼, 혹은 평소보다 더욱 활기찼다.

식료품 및 생필품의 가격이 올라 육지로, 바다로 상인이 몰려왔으며, 소금, 철, 와인, 향신료 등 세금이 많이 붙은 품목은 감찰이 뜸해진 틈을 타 거래량이 크게 늘어났다. 수상한 복장으로 수상하게 숙덕거리는 일당이 조금 섞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우선 군사시설을 장악해야 해.”

“장미성과 수비대 본부군요. 수비대는 도시 북쪽 성탑에 주둔합니다.”

로벨은 20명도 안 되는 인원으로 장미성을 공격하는 것은 무리라 판단하고 우선 외곽수비와 치안유지를 담당하는 프란시스 시티 수비대를 공격하기로 했다. 목표가 정해지자 망설일 이유도 없어졌다.

마틴 지부장이 엉망진창이 된 귀리와 보리를 아쉬운 듯 만지며 말했다.

“항구에 쪽배를 하나 준비해뒀습니다. 만약 일이 잘못되면 3번 부두로 피신하십시오.”

로벨은 고개를 끄덕이고 발을 돌렸다. 로벨을 뒤따라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와 울프 용병단이 무리지어 이동했다.

고집불통 노새를 억지로 끌고 가는 상인도, 세상을 향해 술주정하는 선원도, 목청 높여 실랑이하는 손님도 거리를 장악한 인상파 인파에 화급히 입을 다물고 자리를 피했다. 신고 정신이 투철한 일부 시민은 심상치 않은 무장집단의 출현을 알리고자 수비병을 찾아갔지만, 별 소용이 없을 것이다. 무장집단의 목표가 바로 수비대 본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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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렴결백까진 아니어도 나름대로 모범적인 시티가드라 자부해온 매부리코 존은 지금의 상황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지난 10년 동안 복무하면서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아니, 일어날거라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십 수 명의 용병 패거리가 수비대 본부로 박차고 들어와 살인과 폭력을 행사하는 일 말이다.

“무기를 버리면 죽이지 않겠다!”

술 취한 난동꾼을 쫓아내거나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악동을 혼쭐내는 것이 가장 큰 무용담이며, 뒷돈 받고 밀거래를 눈감아주는 것이 가장 큰 모험담인 소박한 시티가드지만, 300년 역사의 프란시스 시티를 지킨다는 자부심이 없지 않았다. 용병 떨거지에게 항복하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 새끼들이!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그러나 농사일이 싫어서, 도제 생활을 견디지 못해서, 한탕주의에 빠져서 용병업에 뛰어든 그저 그런 용병 나부랭이가 아니었다. 수비병의 매서운 칼질에도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앞발로 걷어찼다. 펑-!

힘이 얼마나 좋은지 사람이 아니라 성질 사나운 종마한테 차인 느낌이었다. 자존심 강한 수비병은 칼을 놓치고 얼키설키 쌓여있는 보급품 상자 더미에 처박혔다. 우당탕-! 쿵-! 청소를 열심히 하지 않았는지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소심하거나 몸이 둔해서 먼저 덤비지 않은 수비병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항복은 무슨 항복이오? 일단 잡아놓읍시다.”

“영주님이 가능한 피를 보지 말라 하셨다.”

남보다 머리 하나 더 큰 거구의 용병이 짐승처럼 으르렁거리자 외눈 안대를 낀 중년 용병이 성탑 밖을 힐끔거렸다.

수비병은 ‘영주님’이란 단어에 몸을 떨었다. 술 처먹고 행패 부리는 것이 주된 일과인 도시 용병이 아니라 영주에게 고용되어 전쟁터를 누비는 전쟁 전문 용병이었다. 그런 용병이 십 수 명이나 몰려온 것은 단순한 난동이 아니었다.

‘이런 미친... 늑대성의 병사잖아!’

‘성문이 뚫린 거야?’

‘장미성이 패배했다!’

기선이 제압된 상황에서 패배감이 더해지자 싸울 의지가 꺾였다. 30명이 넘는 병사가 있지만 누구 하나 덤비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영주님’이 등장했다.

로벨은 울프 용병단과 프란시스 시티 수비병의 대치를 힐끔 보고 한마디 던졌다.

“나는 로드릭 가문의 로벨 로드릭이야.”

크지 않은 목소리가 눅눅한 성탑 안을 가득 채웠다. 프란시스 시티에서 챔피언이 되어 첫 명성을 떨친 로벨이었다. 전설의 시작과 끝을 모두 보아온 프란시스 시티 수비병은 즉시 무기를 내던졌다.

“항복! 항복합니다!”

“저희들은 장미성이 아니라 시청 소속입니다!”

“혀, 협력하겠습니다! 죽이지 마세요!”

로벨은 예상외로 쉽게 항복하는 수비병을 보며 한심함을 느꼈다. 이렇게 간단한 것을 실행하지 못하고 쿠데타에 실패한 노(老)페르젠 백작이 불쌍했다. 물론, 상대가 챔피언 로벨 로드릭이 아니면 이처럼 쉽게 항복하진 않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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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수비대 본부를 장악한 후 바쁘게 움직였다.

우선 무기고를 털어서 빈약한 무장을 보강하고, 상대적으로 허술한 북문을 점거하여 로드릭 가문의 깃발을 높이 올렸다. 뒤늦게 상황을 눈치 챈 장미성에서 지원병을 보냈지만, 만반의 준비를 갖춘 울프 용병단에게 패퇴했다. 그러는 사이 ‘싸움개’ 닥스가 지휘하는 맨앳암즈 2개 소대가 도착하면서 도시의 전반이 로벨 손에 들어왔다. 고작 50여 명으로 볼탄 반도 최대 규모의 도시를 장악한 것이다.

“스톤헤드 요새는 더욱 고립될 거야.”

냉정하게 말하면 전황은 바뀐 것이 없었다. 에릭 프란시스 공작과 주력군은 여전히 스톤헤드 요새에 남아 있으며, 저항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100일 걸릴 포위를 30일 앞으로 앞당기는 효과가 있었다. 봉신들이 모두 돌아선 마당에 거점인 프란시스 시티까지 빼앗겼으니 싸울 의지가 남아있을 리 만무했다. 특히 페닝에 따라 움직이는 용병들은 망설임 없이 항복했다.

그것이 정통성 전쟁 때와 다른 점이기도 했다. 그때는 로벨 로드릭이란 북부의 봉신이 끝까지 충성하며 수차례 승전했기에 반년 가까운 포위에도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에릭 프란시스 공작 곁에는 어떤 봉신도 남아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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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복하겠다.”

가을 파종이 끝날 무렵 스톤헤드 요새 성벽 위에 백기가 걸렸다. 그리고 에릭 프란시스 공작은 항복을 받으러 온 것처럼 항복을 선언했다.

화려한 갑옷을 입고, 깨끗한 전투마를 탄 채 뻣뻣하게 행동했다. 그리고 로벨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볼탄 반도의 주인으로 군림해온 프란시스 가문 당주로서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오히려 로벨이 고개를 숙여서 봉신의 예를 갖추었다. 두 사람만 보면 승자와 패자가 뒤바뀐 것 같았다. 그러나 자존심과 별개로 현실은 냉혹했다.

호른 경과 펄프 대장은 스톤헤드 요새의 모든 병사를 무장해제 시키고 용병 계약을 파기했다. 어린 집사와 마틴 지부장은 장미성의 행정관리를 구금한 후 프란시스 가문이 소유한 재산을 전부 압류했다. 그 과정에서 약간의 칼부림이 있었지만 크게 번지진 않았다.

로벨 로드릭이 2천의 병력을 도시 안팎에 주둔하였으니, 감히 누구도 대들지 못했다.

“에릭 공작님한테는 장미성과 성 밖 농장 몇 개만 남겨줄 거예요. 공작으로 품위 유지할 정도는 되겠지만, 군사를 일으키긴 힘들게요.”

“그래...?”

“충성을 맹세한 봉신들의 권리는 그대로 유지시켜주고, 세금만 늑대성으로 보내도록 조치했어요. 충성을 거부하는 건방진 기사들이 몇 명 있는데... 호른 경과 브릭 경에게 울프 용병단을 빌려줘서 밟아놓았으면 해요.”

“그건 좀 그렇지 않아?”

“아니면 다른 봉신에게 시켜도 되고요. 충성심을 증명하라고 하면 열심히 싸울 걸요?”

“너... 무서워졌어.”

“똑똑해진 거죠!”

로벨이 못하는 일은 어린 집사가 대부분 처리했다. 그리고 며칠 뒤, 지원군이라 한가한 검은 숲의 제임스 공작이 장미성의 임시 집무실을 찾아왔다.

“로드릭 후작, 바쁠 때 방문하여 미안하오.”

어린 집사가 반색하며 먼저 물었다.

“아! 드디어 돌아가시나요?”

“...일 끝났다고 바로 쫓아내는가?”

제임스 공작은 까불거리는 어린 집사를 한 대 쥐어박은 후 진중하게 말했다.

“전공포상도 좋고, 권력재편도 좋지만, 그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소.”

로벨은 자신보다 먼저 한 지방의 패자가 된 기사의 조언을 겸손히 받아들였다.

“그게 무엇이오?”

제임스 공작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로 조언했다.

“새로운 국왕 폐하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볼탄 반도의 지배권을 인정받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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