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4화. 위스프
264화. 위스프
중형 갤리선 3척이 인어의 바다 북쪽 볼탄 반도 해안을 따라 미끄러졌다.
바람을 품은 삼각돛이 오븐 속 빵처럼 부풀어 오르고, 구름에 닿을 듯 말 듯한 망루 위에 로드릭 가문 깃발이 거세게 나부끼며, 햇빛에 반짝이는 파도가 뱃전에 쪼개지며 뽀얀 물보라를 일으켰다.
로벨은 뱃머리에서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하늘과 구름과 바다가 전부지만, 하나같이 웅장하고 장엄하여 지루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나들이 나와 신이 난 어린 집사 때문이기도 했다.
“오늘은 파도가 잔잔해서 다행이에요.”
“응.”
“이맘때쯤 태풍이 불어서 잘 다니지 않는데요.”
“응?”
“세이렌이나 윌 오 위스프가 보이면 태풍의 전조니까 잘 살펴보래요.”
“응!
로벨과 어린 집사는 선원의 이야기를 즐겨 들었다. 어두운 밤에 어두운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선원들은 자신도 모르게 신비의 경계에 발을 디딜 때가 있었다. 그리하여 현세에 존재하지 않는 기묘한 생물을 목격하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인 윌 오 위스프(Will-O'-Wisp)였다.
“아니면 졸다가 헛것을 봤거나요. 으하아암-!”
“...마녀가 그렇게 말하면 안 되죠.”
“마녀 아니라니까욧!”
로벨은 틈만 나면 티격태격하는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를 외면하고 다시 광활한 바다를 보았다. 어릴 적에는 바다와 인연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최근 들어 이상하게 배에 자주 올랐다.
‘백상아리 호.’
전장 108.8피트, 폭 21.8피트, 노 36개를 사용하는 중형 갤리선 백상아리 호. 지금 로벨이 탄 배 이름이었다. 덩치만 보면 푸른고래 호보다 약간 크지만, 배수량은 오히려 낮았다. 포비아 왕국의 조선술이 에르나 왕국의 조선술을 못 따라가는 탓이다.
“고귀한 후작님을 모시니 바람까지 축복하는군요. 지금 속도면 이틀 뒤에 포클랜드 항구가 보일 겁니다.”
백상아리 호 선장이 모자를 벗고 반들반들한 정수리를 닦았다. 로벨은 무시무시한(?) 선주 앞에서도 서글서글한 선장이 나쁘지 않았다.
“선장은 재미난 이야기가 없어?”
“...저 말입니까?”
@
그날 밤, 로벨은 아무 징조 없이 눈을 떴다.
밤이 깊은 바다는 고요한 듯 고요하지 않았다. 선장의 말대로 바람이 좋아 속도를 내는 것은 돛으로 충분했고, 낮 동안 충분히 휴식한 노잡이들은 잠이 오지 않는 듯 꼼지락거리며 쇠사슬 소리를 자아냈다. 먼 곳에서는 뱃노래 소리가 들려오고, 머리맡에서는 술 취한 늙은 선원의 잠꼬대가 자장가처럼 울렸다.
군영에서 지낸 세월이 긴 만큼 무리지어 생활하는 것이 낯설지 않았다. 그러나 머리 위 갑판과 발아래 선창에서 소음이 들려오는 것은 조금 이상했다. 그리고 파도 소리가 있었다.
까르르-! 까륵-!
“...응?”
파도 소리가 어쩐지 웃음소리 같았다.
로벨은 침대에서 일어나 옷가지를 챙겼다. 우플랑드는 어린 집사가 실을 꿰매주지 않아 펑퍼짐하고 불편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소매가 짧은 튜닉을 두 장 겹쳐 입었다. 여름에는 옷이 얇아 신경이 쓰였다.
까르르르-
그러나 옷보다 신경 쓰이는 것이 기이한 파도 소리였다.
‘파도가 맞긴 한가?’
로벨은 칼집에 둘둘 말아놓은 소드 벨트를 어깨에 걸치고 공작 깃털을 꽂은 캐벌리어 햇을 머리에 얹었다. 그리고 옆방의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가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어둡고 습한 공기가 온몸에 휘감겼다.
선실에서는 화재의 위험 때문에 불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게다가 판자와 판자를 이어붙인 선박 구조상 송진으로 꼼꼼히 마감해도 바닷물이 스며드는 것을 완전히 막지 못했다. 겨울에는 입김이 얼어붙을 만큼 춥고, 여름에는 쥐와 해충과 악취가 들끓었다.
‘항구에서 볼 때는 평화로운데...’
멀리서 보면 바람 따라 물길 따라 떠돌아다니는 모습이 퍽 낭만적인데, 막상 갑판에 오르면 썩은 내와 곰팡내와 술 취한 선원의 욕설과 매 맞는 노잡이의 비명으로 낭만 비슷한 것도 찾을 수 없었다.
‘가만, 농장도 마찬가진가?’
파릇파릇한 작물과 천진난만하게 뛰어노는 송아지를 보면 평화롭지만, 막상 가까이 가면 짐승 냄새와 배변 냄새와 손톱만한 파리와 살찐 벼룩이 득실거렸다.
로벨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선실을 지나 채광창에 놓은 사다리로 갑판에 올라왔다. 그리고 조그맣게 감탄했다.
“아...”
유난히 날씨가 좋아서일까, 아니면 한여름 밤의 신비한 마법일까. 하늘을 가득 채운 별무리와 바다를 뒤덮은 고운 달빛이 꿈속의 풍경처럼 아름다웠다.
사방이 탁 트인 밤하늘에 은하수가 수평선에서 수평선으로 건너가고, 별빛이 깃든 바다는 검은 비단에 모래 진주를 뿌린 것처럼 반짝반짝 빛을 냈다. 선실의 묵은 공기가 바닷바람에 씻겨 나가고, 귓가에 감도는 소음이 파도 소리에 쓸려나갔다.
“예쁘다...”
별과 바람과 파도가 펼치는 무도회는 어느 궁정에 어느 파티보다 화려하고 찬란했다. 로벨은 신들의 잔치를 엿보는 보잘것없는 시골 소녀의 심정으로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이 아름다움을 친구들에게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까르르륵-!
사람도, 바람도, 파도도 아닌 소리가 들렸다. 로벨은 반사적으로 어깨에 건 소드 벨트를 내려 아론다이트와 흐룬팅을 동시에 뽑았다.
“누구야!”
허공에 칼질 한번 했을 뿐인데 풀피리 소리가 나는 동화에서 피비린내 나는 투기장으로 바뀌었다. 하얗고 까만 두 자루 칼이 달을 찢고 꿈을 깨트렸다. 그러나 아직도 동화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어... 어? 위스프?”
로벨은 애써 치켜든 칼을 아래로 떨구었다. 메인마스트 주위로 주먹만한 광구(光球)가 떠다녔다. 순간 반딧불인가 생각했지만, 반딧불보다 훨씬 크고 훨씬 밝았다. 애당초 망망대해에 반딧불이 있을 리 없었다.
‘오래 살고 볼 일이네.’
로벨은 어릴 적 늙은 집사가 해준 이야기를 더듬었다. 윌 오 위스프는 악령에 가깝지만, 인간에게 특별히 해를 끼치지는 않았다. 요정과 마찬가지로 장난이 조금 심할 뿐이다.
‘조금이 아닌가?’
로벨은 슬금슬금 다가오는 윌 오 위스프에게 경고했다.
“이 칼은 요정의 칼이야. 인지의 존재도 해칠 수 있어.”
로벨의 말을 알아들은 거지, 아니면 예기가 철철 흐르는 새까만 흐룬팅에 겁을 먹을 건지 멀찍이 떨어졌다.
로벨은 돛대 주위를 빙빙 도는 윌 오 위스프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가끔씩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내는데, 어린 소녀의 투정 같기도 하고, 꼬부랑 할머니의 속삭임 같기도 하고, 눈썹이 내려앉은 할아버지의 훈계 같기도 했다.
‘천국도, 지옥도 가지 못하는 가엾은 영혼...’
로벨은 늙은 집사의 마지막 이야기를 중얼거렸다. 그러자 윌 오 위스프가 돛대 뒤에 숨더니 그대로 사라졌다. 로벨은 혹시나 싶어서 칼을 꼬나 쥔 채 십여 분 동안 기다렸지만, 더 이상 동화 속의 존재는 나오지 않았다.
@
로벨은 간밤에 일을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와 울프 용병단 모두에게 말했다. 그러자 육지 사람과 뱃사람의 차이가 나타났다.
육지에서 온 사람들은 흥미로운 경험이란 듯 껄껄 웃었지만, 바다에서 사는 사람들은 사형선고라도 받은 듯 안색이 하얗게 바뀌었다.
“위스프를 보았다고요!”
심지어 체면 때문에 재미난 이야기도 안 해주던 백상아리 호 선장이 헐레벌떡 뛰어와 소리쳤다. 로벨은 딱딱한 비스킷을 스튜에 휘저으며 끄덕였다.
“그랬는데?”
“어, 어, 어디서 말입니까? 설마 우리 배는 아니지요?”
“이 배 맞는데?”
“으아아아! 항해사! 항해사 어디 있나!”
선장은 고래고래 고함지르며 어디론가 뛰어갔다. 귀족의 품위를 위해 식탁에 촛불까지 밝힌 어린 집사가 투덜거렸다.
“영주님 식사하는데 무례하게... 하여간 뱃놈들은 예의가 없어요.”
“언제부터 그런 거 신경 썼다고...”
펄프 대장은 생선 대가리가 둥둥 떠다니는 스튜를 한 국자 퍼서 후루룩- 마셨다. 어린 집사는 선장도, 대장도, 마녀도 모두 못마땅했지만, 펄프 대장을 따라 하는 로벨이 가장 못마땅했다. 기사나 용병이나 선원이나 하는 짓이 거기서 거기였다.
“놀랄 만도 해요.”
마녀 키르케가 정어리를 뼈째 오도독- 오도독- 씹으며 말했다. 어린 집사가 인상을 찌푸리고 물었다.
“왜요? 정말 태풍이 올까 봐요?”
마녀 키르케는 한참을 우물우물하더니 꿀꺽 삼키고 말했다.
“정말 올 거예요.”
“...그거 그냥 전설이잖아요?”
“저절로 생겨난 전설은 없어요. 그리고 여러 사람이 믿으면 그 자체로 힘이 되어요. 기사님, 기사님은 알죠?”
“응? 으응. 그런데 내가 본 위스프는...”
로벨은 간밤에 본 윌 오 위스프를 떠올렸다. 이상하고 놀랍기는 하지만 무섭지 않았다.
“윌 오 위스프가 태풍을 불러오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그 반대죠. 태풍이 오는 것을 알려준 거예요.”
“그렇게 착한 괴물 같진 않은데요?”
“에헤이! 모든 괴물이 사악한 것은 아니라고요.”
마녀 키르케의 말이 여러모로 맞았다.
아침 식사가 끝나자 선장과 일, 이등항해사가 우르르 몰려와 항로를 바꾸겠노라 고했다. 로벨은 정말 태풍이 불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선원들의 울 것 같은 얼굴을 보고 어쩔 수 없이 허락했다.
“하루나 이틀 정도는 늦어도 괜찮으니까. 어디로 가려고?”
로벨의 허락하자 선장이 크게 기뻐하며 해도를 펼쳤다. 그러나 육지의 지도와 달라 봐도 알 수 없었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인어의 섬’이라는 작은 어촌이 있습니다.”
“인어의 바다에 인어의 섬이라고요? 히히힛! 정말 성의 없는 이름이네요!”
마녀 키르케가 재미있다는 듯 깔깔 웃었다. 그러나 체면 때문에 재미난 이야기도 안 하는 선장은 진지했다.
“그 반대일세. 인어의 섬 때문에 인어의 바다란 이름이 생겼지.”
어린 집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엄청 유명한 섬인가 봐요?”
“어이구, 아닙니다. 인어의 섬이라 불리는 섬이 대여섯 곳은 됩지요. 모두 평범한 섬입니다.”
마녀 키르케는 자신을 하대하고 어린 집사를 존대하는 선장이 얄미워 입술을 삐죽였다.
“그런데 왜 인어의 섬이에요?”
선장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거야 당연히 인어가 사니까.”
@
인어의 바다.
북해(北海)와 구분해서 남해(南海)라 부르기도 하고, 외해(外海)와 구분해서 내해(內海)라 부르기도 하지만, 고대 왕국 시절부터 공식적인 이름은 ‘인어의 바다(人魚海)’였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시절부터 그리 불러왔기에 육지에 사는 사람이나 바닷가에 사는 사람이나 아무런 의심 없이 인어의 바다라 불러왔다.
“진짜로 인어가 있다고요?”
“그리 많지는 않지만 종종 나타납니다. 그곳 주민은 머메이드라 부릅지요.”
“세이렌하고 다른 건가요?”
“아무래도 좀 다르지요. 저 남쪽의 뱃놈들은 머메이드도 태풍을 불러온다고 싫어하는데, 상식적으로 말이 됩니까? 머메이드가 태풍을 어떻게 부릅니까? 으허허헛!”
“상식적으로 인어 자체가 말이 안 되는데...”
로벨은 상식의 기준을 따지려다가 그만두었다. 볼탄 반도를 떠나니까 별의별 이야기를 다 들었다.
‘하긴, 뱃사람들은 오우거나 페어리가 신기하겠지.’
로벨은 스스로 답을 내리고 분위기를 바꿨다.
“그래서, 언제 도착해?”
“채찍질 좀 하면 저녁 식사 전에 도착할 겁니다.”
로벨은 노잡이 노예를 괴롭힌다는 뜻으로 이해했고, 어린 집사는 바람을 타지 못하는 남서쪽으로 항해한다는 뜻으로 이해했으며, 마녀 키르케는 말이나 소처럼 갤리선에 채찍질한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마녀 혼자 웃음을 터트렸다.
“...왜 저래?”
“괜히 마녀겠어요? 저 여자 은근히 무섭다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