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261화 (261/605)

261화. 미남

261화. 미남

“Fire!”

콰콰콰쾅-! 콰쾅-!

높은 언덕 위에 지어진 높은 성탑에서 20문의 대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커다란 불꽃과 요란한 천둥이 울리고, 이어서 무거운 것이 공기를 찢어발기는 쒜에에-ㄱ 소리와 함께 벼락이 떨어졌다.

그 벼락에 맞은 것은 요새 북쪽과 동쪽에서 공격 중인 로벨 로드릭 연합군이었다.

“끄아아아악-!”

“저 씹어 먹을 대포 좀...!”

“내 다리! 내 다리가!”

돌로 만든 포탄은 착탄 즉시 깨져서 붉은색 파문을 일으켰고, 쇠로 만든 포탄은 비탈길을 따라 통통 튀며 붉은색 오솔길을 만들었다.

어느 쪽이 더 피해가 큰지 따지는 것은 온몸이 돌파편에 난자된 병사와 두 다리가 절단된 병사 중 누가 더 아픈지 따지는 것만큼 무의미했다.

“재장전이 끝나기 전에 성벽에 붙어야 한다! 움직여라!”

제임스 가문의 용감한 기사가 재촉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앞서 가던 전우가 피투성이로 쓰러지고, 옆자리의 전우가 잘려나간 종아리를 끌어안고 비명 지르니 선뜻 움직일 수 없었다.

“죽기 싫으며 뛰어! 뛰란 말이다!”

“저 배신자들을 용서하지 마라! 쏴라!”

기사의 호통에 마지못해 언덕을 기어 올라갔으나 17피트나 되는 까마득한 성벽과 살의와 쇠뇌로 무장한 수비병에 또다시 대규모 피해가 발생했다.

한편, 대포의 사거리 밖에서 전투를 지켜보는 로벨과 로벨의 우방들이 혀를 찼다.

“아직도 저항이 완강하군.”

“그래 봐야 마지막 발악이오! 지금쯤이면 무기도, 식량도 바닥을 보이고 있을 거요!”

파도성의 페르젠 ‘주니어’ 백작이 강하게 주장했다. 그리 틀린 주장은 아니었다. 1천 명이 넘는 병사가 전투로 소모하는 물자는 상당했다. 에릭 프란시스 공작이 진두지휘한다 해도 요새에 갇혀서 보급 없이, 그리고 희망 없이 견디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호수성의 헤르만 백작이 눈을 돌리지 않고 반박했다.

“우리쪽 피해도 크니까 하는 말이오. 이쯤에서 부대를 물립시다.”

“또? 또 말이오? 오늘은 반드시 결착을 내야 하오!”

“시간은 우리 편이오. 보리 수확이 끝나면 가을까지 포위할 수 있으니 서두를 필요가 없소.”

“제길! 가을까지 여기 있을 거요? 경은 그리 한가하시오?”

의견이 엇갈리자 자연스럽게 로벨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대놓고 인정하진 않지만, 로벨을 반(反)프란시스 연합군의 총사령관으로 여기고 있었다. 로벨이 전군돌격을 명령해도 마지 못하는 척 따를 것이다.

로벨은 두 다리가 잘려서 질질 끌려오는 늙은 병사와 어깨와 등에 쿼럴이 꽃인 채 싸울 수 있다고 소리치는 젊은 병사를 착잡한 얼굴로 보았다.

“오늘은 이만 합시다.”

로벨은 모닝스타의 고삐를 옆으로 당겼다. 그 한 마디로 충분했다. 로벨의 봉신과 우방들이 각자의 부대를 통솔해 물러났다. 지칠 대로 지친 요새 수비병은 성벽 위에 주저앉아 안도할 뿐, 추격 따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스톤헤드 요새 7차 공방전이 끝났다.

@

로벨은 개인 막사로 돌아와 파나케아 투구를 벗어 던지고 컨틀렛을 거칠게 풀었다. 어린 집사가 눈치껏 시원한 물과 마른 수건을 가져왔다.

“오늘도 실패에요?”

로벨은 수통을 받아 한 모금 마시고 남은 것은 머리에 부었다. 어린 집사가 입술로 투덜거리며 젖은 머리에 수건을 씌워주었다.

“열 식히는 방법 좀 바꿔요.”

“...응.”

로벨은 푹 젖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난 보름간 죽고 다친 병사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했다. 그리고 내일 또다시 죽어갈 병사들을 생각하면 화가 났다.

로벨은 지리멸렬한 소모전을 막고자 에릭 프란시스 공작에게 휴전을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 상황에서 휴전은 사실상 항복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그렇지. 이대로는 안 돼.”

“안 될 게 뭐 있어요? 여름 지나고, 가을 지날 때까지 포위해버리죠. 제 까짓것들이 겨울이 와도 버티겠어요?”

“그때까지 비용은?”

“전쟁이 끝나면 장미성에 청구해서 받아내야죠. 새로운 영지와 새로 충성한 봉신들의 권리도 받아내야 하고요.”

로벨은 젖은 머리를 뒤로 젖히며 감탄했다.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계획이고 뭐고 전쟁 배상금은 승자의 당연한 권리라구요.”

로벨은 어린 집사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머리가 제법 굵은 어린 집사는 옛날과 달리 손길을 피하고 화를 냈다.

“애도 아닌데 그러지 마요! 그리고 지금 손도 젖었잖아요!”

로벨은 어느새 훌쩍 커버린 소꿉친구의 태도에 섭섭함을 느꼈다. 그래서 생각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장미성... 장미성이라...”

“영주님?”

로벨은 야전 침대 겸 모닝스타의 간식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 결심을 세웠다.

“펄프 대장을 불러와.”

“예? 예예. 그런데 왜요?”

로벨은 머리끈을 풀어 젖은 머리카락을 털며 말했다.

“저 못된 요새에서 강제로 끄집어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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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밖에 요새를 짓는 것은 도시를 지키는 나름의 수단이었다.

성과 달리 도시는 수비에 취약했다. 물론, 모든 도시가 허술한 것은 아니라 천년 동안 함락되지 않은 유명한 도시도 있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도시는 교통이 좋은 평지에 세워져 수비의 3요소 중 최소 2개는 포기해야 했다.

“수비의 3요소가 뭐에요?”

어린 집사가 큼직한 눈을 깜박였다. 세상일을 다 아는 것 같은 어린 집사가 뜻밖에도 무지했다. 마녀 키르케는 허리에 손을 얹고 콧대를 높였다.

“성벽이 높을 것, 입구가 좁을 것, 자급자족이 가능할 것. 세 가지에요.”

“아하? 뒤에 두 개가 어렵군요?”

“그래서 도시의 경계나 가까운 요충지에 요새를 짓고 전투병을 배치해서 수비하는 게 일반적이죠. 버팅거 시티의 팔콘 요새가 대표적이에요. 거긴 도시 방어가 워낙 허술하니까요. 음... 폭풍성은 그렇지 않지만...”

성을 안팎으로 짓는 것은 유라피아 대륙인의 문화이자 생존방식이었다. 프란시스 시티만 해도 요새가 두 개나 있어서 어지간한 병력으로는 정복할 수 없었다. 과거 정통성 전쟁 때 페르젠 백작이 실패했고, 현재 로벨 로드릭 연합군도 고충을 겪고 있었다. 그래서 고심 끝에 내린 것이 지금의 작전이었다.

“장미성의 공작님이 눈치채면 어쩌죠?”

“그러지 못할 거야.”

로벨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스톤헤드 요새 공격이 예정대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제8차 공격이며, 앞서 7번처럼 실패하겠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지금 로벨이 노리는 것은 요새가 아니었다.

“후작님? 이쪽입니다! 이쪽이요!”

로벨 일행은 울타리 밖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병장기를 움켜쥐었다. 성질 급한 흉내쟁이 퍼시발은 칼자루를 반쯤 뽑기까지 했다. 그러나 어린 집사가 만류했다.

“마, 마틴 루드 씨? 맞아요?”

“예. 맞습니다. 로드릭 상회 프란시스 지부장 마틴 루드입니다. 하하핫!”

“쉿! 쉿! 소리 좀 낮추세요!”

약속한 사람이 약속한 시각에 나타났다. 로벨은 건초더미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털고 후드를 벗었다. 헛간 안에서, 우물 그림자에서, 울타리 아래 구덩이에서 철컹- 철컹- 쇳소리 내는 용병들이 로벨을 따라 모습을 드러냈다. 수도사 복장으로 찾아온 마틴 지부장이 여전히 큰 목소리로 감탄했다.

“오! 저기에도 숨어계셨군요? 정말 감쪽같습니다!”

“그럴만한 정예 용병으로 추려왔으니까요.”

어린 집사가 우쭐해서 말했다. 자신이 정예 울프 용병단과 동급이란 자부심이었다. 로벨은 헝겊으로 칭칭 감은 칼자루에 손을 얹고 오랜만에 만난 지부장에게 안부를 물었다.

“오랜만이야. 별일 없었지?”

“별일 없을 리가 있습니까? 아주 난리가 났지요.”

“난리?”

“장미성에서 병사들이 몰려와 사무실을 뒤집어엎고, 창고를 통째로 압류하고, 상회 소속 상인을 억류하고...”

“...고생이 많았네.”

“뭐, 그래도 피해가 크진 않습니다. 조만간 사단이 날 것 같아서 중요한 자료와 상품은 이곳에 옮겨두었지요.”

마틴 지부장이 발을 통통 굴렸다. 로벨과 울프 용병단이 숨어있는 ‘이곳’은 프란시스 시티에 고기와 계란을 공급하는 작은 농장이었다. 공식적으로는 필 더스크라는 사람이 주인이지만, 그 사람은 1년 6개월 전에 사트로 시티로 이사 갔고, 지금은 비밀리에 권리를 양도받은 마틴 지부장이 비밀창고로 사용했다.

“비밀창고가 왜 필요해?”

“세금을 내지 않으려고요. 여러모로 유용합니다. 계란이나 채소를 이곳에서 난 것처럼 팔 수 있고, 감찰관을 피해 몰래 밀거래할 수 있고...”

“...그거 불법이잖아?”

“하하핫! 그리고 불법으로 침입하는 후작님을 도울 수도 있지요.”

로벨은 프란시스 지부의 순이익이 이상하게 많은 이유를 알았다. 여러모로 유능한 친구였다.

“프란시스 시티는 해상교역이 중심이지만, 그렇다고 육지교통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춘궁기는 도시도 피해갈 수 없으니, 인근 농장과 거래가 끊기면 곡물값이 크게 오르지요.”

“그럼 가능해?”

“예. 충분히 가능합니다. 마틴 루드 지부장이 아니라 필 더스트 농장주라면 말이지요.”

로벨의 얼굴이 밝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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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의 작전은 조건이 어려울 뿐 내용은 간단했다. 에릭 프란시스 공작을 스톤헤드 요새에 묶어두고, 프란시스 시티에 몰래 잠입하여 도시를 먼저 점령하는 것이다. 도시가 먼저 함락되면, 도시 밖 요새에서 백 년이고 천 년이고 버텨봐야 의미가 없었다.

“체스로 말하면 킹보다 룩을 잡는 거죠.”

“체스라... 비유가 좋군요.”

에릭 공작에게 남은 것은 킹(에릭 공작)과 룩(프란시스 시티)뿐이다. 폰(용병)과 나이트(기사)는 괴멸되었고, 비숍(붉은 장미 수도원)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럼 퀸은요? 가장 강한 말이잖아요?”

“퀸은 우리 영주님이요. 킹이 멍청해서 가장 강한 아군을 적으로 돌렸죠.”

로벨의 성별을 생각하면 그럴듯한 비유였다.

로벨은 후드를 쓰고 손가락을 입술에 붙였다. 쉿- 프란시스 시티의 성문이 가까웠다.

평소라면 2중 성문을 모두 활짝 열고 외지인을 반겼을 텐데, 전쟁의 영향으로 마차 한 대 겨우 통과할 쪽문 하나만 열고 철저히 검문을 실시했다. 전시특수를 노린 용감한 상인이 많은지 생각보다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로벨은 수레에 기대서서 어린 집사 귓가에 속삭였다.

“걸리면... 강행돌파할 거야.”

“에엑? 수비병이 몇인 줄 알고요?”

“모닝스타도 놓고 왔어. 도망치다 잡힐 바에 각개격파를 노리는 게 나아.”

로벨다운 무모함이었다. 로벨의 뜻을 전달받은 애꾸눈 볼포스 이하 울프 용병단은 고개를 끄덕이고 바지 주머니에 구멍 내어 숨겨둔 워 해머 등을 움켜쥐었다. 가장 먼저 꼴통을 깨부술 수비병을 점찍어두기까지 했다. 그러나 쓸데없는 준비였다.

“여어, 수비대장님! 고생이 많으십니다!”

“어라, 필 씨? 피난 간 거 아니었소?”

“제 고향을 떠나 어딜 갑니까? 살아도 여기서 살고, 죽어도 여기서 죽어야지.”

마틴 루드 지부장과 수비대장 사이에서 김빠지는 대화가 오갔다. 어린 집사는 가물가물한 기억 속에서 마틴 지부장이 에르나 왕국 출신이란 사실을 떠올렸다. 하마터면 알고도 속을 뻔했다.

“역시 ‘정직한’ 필 씨는 다르구려. 도시의 부르주아란 것들은 제 몸 하나 챙겨서 도망치기 바쁜데. 그런데 저 친구들을 누구요?”

“아, 이 친구들이요?”

마틴 지부장은 능청스럽게 몸을 돌려 다가왔다. 로벨은 순간 움찔해서 흐룬팅의 손잡이를 끌어당겼다. 지부장은 그런 로벨과 어린 집사 어깨에 자연스럽게 손을 걸쳤다.

“제 동생하고 조카입니다. 하하핫! 저를 닮아서 미남들 아닙니까?”

마녀 키르케가 눈을 질근 감았다. 마지막 말 때문에 들킬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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