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화. 주인
260화. 주인
영웅소설이나 전쟁소설에서 자주 생략되는 장면이 전쟁의 뒤처리였다.
철저한 준비와 처절한 싸움 뒤에는 항상 처량한 뒷정리가 따라왔다. 전사자를 수습하고, 부상자를 후송하고, 쇠붙이를 수거하고, 몸값을 받을 수 있는-시체 포함하여-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분류했다.
“귀족하고 부르주아는 오른쪽! 뭐야? 딱 보면 모르냐? 비단쪼가리나 황금쪼가리 가졌으면 오른쪽! 이놈들아! 멋대로 반지 빼지마! 영주님이 알면 경을 친다!”
시체에서 전리품을 챙기는 것도 절차가 있었다. 보잘것없는 말단 병사 시체에서 녹슨 칼이나 은화 부스러기를 주워가는 것은 상관없지만, 기사와 자유민의 시체에는 함부로 손을 대서 안 되었다. 시신과 유품을 비싼 값 받고 ‘판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가문의 누구인지 공들여 조사할 필요 없었다. 아버지를, 남편을, 아들을 전쟁터로 보낸 가문에서 먼저 연락하기 때문이다. 연락이 안 오면 뭐, 그때 처리할 일이다.
펄프 대장은 잔뜩 쉰 목소리로 ‘값나가는 시체’를 한곳에 모았다. 몇 놈이 작당해서 빼돌린 시체도 있을 것이다. 그것까지 찾아서 질책할 수 없었다. 재수 없게 눈에 띄면 그때는 채찍질해야겠지만...
‘그래도 살아있는 놈 상대하는 것보다 낫지.’
명망 높은 기사든 부유한 자유민이든 죽으면 말이 없었다. 조금 막 굴려도 역정을 내지 않았다. 그러나 살아있는 포로는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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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사고방식은 기사가 아닌 사람이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있었다. 그중 하나가 포로 문제였다.
싸우지 않는 것은 불명예지만, 싸워서 진 것은 불명예가 아니었다. 그 말인즉, 싸우지 않고 포로가 되면 불명예지만, 싸워서 포로가 된 것은 불명예가 아니었다.
얼핏 들으면 상무 정신에 입각한 기사도의 발현 같지만, 속내를 보면 ‘난 용감했으니까 대접 받아야 한다’ 수준의 유치한 자존심이었다. 물론, 당사자에게는 목숨보다 중요한 명예가 걸린 일이었다.
“고기가 왜 이리 질기냐! 다시 내와라! 당장!”
아무튼, 이름만 포로지 행동은 상전이었다. 감옥이 아니라 징발한 농가에 연금하고 삼시세끼 고기와 와인을 대접했다. 감옥도 없지만, 감옥이 있어도 어지간히 원수진 사이가 아니면 가두지 않으니 죽어 나가는 것은 접대하는 아랫사람이었다.
“저기, 기사 나으리, 벌써 세 번째인데...”
“그게 뭐? 로드릭 가문에는 제대로 된 요리사 하나 없는가!”
“어, 없는뎁쇼?”
“...그럼 구해와라!”
종군상인이 가져온 고기 중 가장 좋은 부위를 골라 소금과 후추를 팍팍 뿌리고 바싹 구웠는데 통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뭐가 불만인지 모르겠네! 카악- 퉷!”
발냄새 베커가 구시렁거리며 고기접시를 도로 가져왔다. 애꾸눈 볼포스가 쿼럴의 깃을 다듬으며 힐끔 보았다.
“조금 있다가 그대로 갖다 줘.”
“그대로?”
“꼴에 기사라고 자존심 세우는 거다. 영주님한테 얻어터진 게 쪽팔리기도 하겠고.”
“오호라! 그런 거였어?”
애꾸눈 볼포스는 귀족 밑에서 일한 만큼 귀족의 생리에 밝았다. 본인은 그 시절을 썩 좋아하지 않지만, 지금처럼 귀족을 상대할 때 도움이 되었다.
“잠깐만? 엄밀히 말하면 우리 기사 나리도 귀족이니까, 우리 모두 귀족 밑에서 일하는 건데...?”
발냄새가 문뜩 깨달음 비슷한 것을 얻었다. 애꾸눈이 피식- 웃고 쿼럴을 통에 넣었다.
“귀족이 귀족다워야지. 영주님은 그런 점에서 영...”
“뭐야! 지금 우리 기사 나리 욕한 거냐!”
“뭣이라? 누가 감히 우리 나리를 욕해?”
포로의 수발을 드는 용병들이 으르렁거리며 몰려왔다. 높으신 분 비위를 맞추느라 스트레스가 쌓인 것도 있지만, 로벨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도 있었다. 애꾸눈 볼포스는 열렬한 추종자 탓에 화급히 뒷말을 붙여야 했다.
“그런 점에서 매우 훌륭한 분이다! 참으로 좋은 고용주야!”
그 마무리에 만족한 용병들은 코밑을 쓱쓱 긁으며 다시 흩어졌다. 누구와 달리 못돼 처먹은 프란시스 가문 기사들을 대접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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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고용주 로벨 역시 전후처리에 정신이 없었다.
전사자 몇 명, 부상자 몇 명, 탈주병 몇 명, 누가 누구를 사로잡았고, 누가 누구에게 붙잡혔으며, 전리품이 이렇고, 몸값이 저렇고, 병력을 보충하고, 재배치하며, 포상하고, 질책하고... 호른 경과 어린 집사가 발 벗고 도와주는데도 정신이 없었다.
“구릉성 이북은 명실상부하게 주군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몇몇 가문이 충성을 거부하고 있지만, 영향력이 크지 않아 당장은 위협은 되진 않습니다. 시간을 들여서 회유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로벨은 승전 하루 만에 적과 아군을 분류한 호른 경의 노고를 치하했다. 소싯적에 떠돌이 기사 생활하며 인맥을 쌓은 것이 빛을 발했다.
“에릭 프란시스 공작군은?”
“스톤헤드 요새로 철수해서 병력을 모집 중입니다. 하지만 쉽지 않을 겁니다. 생각을 할 줄 아는 기사라면 이 상황에서 프란시스 가문 편을 들지 않겠지요.”
어린 집사가 입술을 삐죽였다.
“생각을 안 하는 기사가 훨씬 많잖아요?”
“그거야 그렇지만... 기분이 나쁜 말이군.”
“맞아! 우리도 생각할 줄 알아!”
로벨과 호른 경이 한 마음으로 공분을 표출했다. 그러자 천하의 어린 집사도 찍소리 못하고 사과했다. 로벨은 근 3년 만에 어린 집사를 이기게 되어 머리털이 빠지는 스트레스 속에서도 활짝 웃었다. 그러나 가벼운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변수가 있다면 두 가문입니다.”
“페르젠 가문과 헤르만 가문...”
“주군이 위명이 떨치기 전에는 볼탄 반도에서 최고의 봉신 가문이었습니다.”
“지금도 얕잡아 볼 수 없어요. 정통성 전쟁 때 그리 깽판 쳤는데도 끝내 적으로 돌리지 못했잖아요.”
300년의 뿌리를 가진 가문이라 여기저기 뻗은 가지가 상당했다. 이권과 혈연으로 맺어진 기사가 족히 2, 30명은 되니, 작정하고 덤비면 골치 아픈 적이 되었다. 마녀 키르케가 천막 아래로 머리를 불쑥 내밀었다.
“그치만 장미성 공작님하고도 사이가 안 좋잖아요.”
“우아이씨! 내 심장아!”
어린 집사가 깜짝 놀라 멀찍이 떨어졌다. 그 과정에서 종이뭉치가 쏟아져 마녀의 얼굴을 덮었다.
“멀쩡한 입구 놔두고 왜 그리로 기어들어 와요!”
“그야 당연히 놀래주려고요.”
“아? 그럼 성공했네?”
“이히힛! 그렇죠?”
로벨은 대견하다는 듯 칭찬했고, 마녀 키르케는 종이를 뒤집어 쓴 채로 깔깔 웃었다.
호른 경은 이마를 짚고 한숨 쉬었다. 위대한 주인과 영리한 몸종인데, 통 집중을 못하는 게 탈이었다. 자신만이라도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다짐했다. 마녀 키르케 빼고 모두가 한 번씩 하는 다짐이란 것은 몰랐다.
“우리가 먼저 손잡는 것이 어떻습니까?”
호른 경의 말에 기사와 집사와 마녀가 동시에 돌아보았다. 이해하는데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 뭐라고 했소?”
“두 가문과 동맹을 맺는 겁니다. 그리하면 힘들이지 않고 장미성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습니다.”
어린 집사가 말도 안 된다는 듯 따졌다.
“걔네는 우리하고도 사이가 안 좋아요! 영주님을 암살하려고 했잖아요!”
“그것은 페르젠 백작의 뜻이 아니다. 그자는 단순한 작자라 복잡한 음모를 꾸미지 못한다. 이해만 맞으면 좋은 우방이 될 수 있다.”
“헤르만 백작은요? 폭풍성에서 싸운 게 작년 가을이잖아요?”
“주군보다 공작에게 원한이 많을 것이다. 애당초 우리와 전쟁한 것도 에릭 프란시스 공작의 뒷공작 때문이었으니까.”
로벨은 호른 경의 제안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리 할 수 있다면 나쁘지 않았다. 전쟁은 짧을수록 좋고, 피는 적게 흘릴수록 좋았다.
“그런데 어떻게 말이오? 그들이 우리를 도울 이유가 없잖소?”
“페르젠 백작에게는 프란시스 시티의 각종 권리를 내어주고, 헤르만 백작에게는 동부평야의 일부를 할애하면 기꺼이 동참할 겁니다.”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가 입을 쩍! 벌렸다.
“그걸 다 주면 우리 영주님은 뭘 가져요!”
“맞아요! 맞아! 싸우는 것은 우리 기사님인데!”
호른 경은 영리한 몸종들이 엉뚱한 항의를 하자 도리어 당황했다.
“그야 당연한 것 아닌가?”
“뭐가요? 뭐가 당연해요?”
호른 경은 멍~ 한 표정을 짓는 로벨을 힐끔 보고 답답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주군은 볼탄 반도 전체를 가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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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가문과 로드릭 가문의 대회전이 끝난지 나흘이 지났다. 산 자는 산 자대로, 죽은 자는 죽은 자대로 각자의 자리를 찾아갔다. 황량해진 전쟁터에는 여름을 기다리는 들꽃이 한 송이 두 송이 피어났다.
그리고 인근 마을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민폐를 끼치던 로벨 로드릭 후작군도 남쪽으로 떠나갔다.
늦봄에 시작된 전쟁은 느리지만 확실하게 매듭지어져 갔다. 로벨이 지나가는 길에 자리한 성과 마을은 싸우지 않고 항복했다. 식량과 재화를 자발적으로 바쳤으며, 병사를 이끌고 합류하기까지 했다. 행군 거리에 비례하여 병력이 소모된다는 군사상식이 뒤집혔다. 스톤헤드 요새에 도착하자 총 병력이 1,900명으로 불어났다. 그중 350명이 헤르만 가문의 병사들이었다.
“로벨 로드릭 후작.”
“몰드 헤르만 백작.”
두 명의 대영주가 스톤실드 언덕 아래에서 인사했다. 장례식 추도사 수준으로 관계를 미화해도 결코 살가운 사이가 아니지만, 공통된 적과 합당한 이문 앞에서 보란 듯이 손을 잡았다.
사실 로벨도, 헤르만 백작도 표정이 좋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 죽기 살기로 싸워놓고, 1년도 지나지 않아 형제 운운하는 것은 아무리 낯짝 두꺼운 기사라도 어색한 일이었다. 먼 훗날의 후손이 역사책으로 지금 상황을 본다면 ‘저 시대 마인드는 참...’ 하고 혀를 찰지도 모른다.
“경은 명예로운 기사지. 약속을 지키시오.”
로벨은 헤르만 백작이 제시한 조건을 떠올렸다. 호수성의 안전을 보장할 것. 버팅거 강 동쪽 일대를 할양할 것. 그리고 뜻밖이지만, 프란시스 가문을 존속시킬 것이었다. 옛 정이나 마지막 충성심인 듯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다. 어린 집사가 구렁이 같은 속마음을 정확히 짚어냈다.
“에릭 공작이랑 똑같아요. 영주님이 장미성까지 차지하면 도저히 대적할 수 없다고 판단한 거겠죠. 하여간 저쪽 집안은 타고난 정치가라니까요.”
로벨은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수용했다. 앞에 두 개는 처음부터 주기로 한 것이고, 마지막 하나도 내심 고민하던 것이다. 로벨의 경우 진짜로 옛 정이었다.
“주군을 만나면 뭐라고 할까?”
“이제 주군이 아니잖아요?”
“아참, 그렇지?”
로벨은 에릭 프란시스 공작과 관계를 새로 정의하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실패했다.
“주군을 만나면 뭐라고 할까?”
“아, 정말...!”
아무튼 생각해 둬야 했다. 로드릭 후작군, 제임스 공작군, 헤르만 백작군이 스톤헤드 요새를 완전히 둘러쌌다. 프란시스 공작군에게 희망이 있다면 페르젠 백작뿐일 것이다. 그러나 헛된 희망이었다.
성벽을 포위한지 사흘째 되는 날, 마침내 하버트 페르젠 백작군이 도착했다. 요새 안의 병사들이 화색이 되어 성벽 위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희망은 더 큰 좌절이 되어 돌아왔다. 하버트 페르젠 백작의 깃발이 로벨 로드릭 후작 깃발 옆에 나란히 걸린 것이다.
사실상 볼탄 반도의 주인이 바뀌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