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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182화 (182/605)

182화. 새 주인

182화. 새 주인

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자비에 후작을 제대로 골탕 먹이고 신명 나게 남쪽으로 달려갔다. 사흘 전 출발한 하얀 숲의 슐트 경과 외팔이 더치 일행을 따라잡으려면 잠잘 시간과 밥 먹을 시간도 아껴야 했다.

로벨은 문득 주위가 밝아졌음을 깨닫고 고개를 들었다.

보랏빛으로 물들어가는 장엄한 새벽하늘과 조금은 눅눅한 아침공기가 상쾌하고, 칭얼거리는 짐말과 하품하는 마부가 절묘했다. 여름에서 가을로 정신없이 달리다가 잠시 숨을 고르는 듯한 시간이었다.

로벨은 수백만 번, 어쩌면 수천만 번 반복되어왔을 경이로운 자연현상을 수레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다소 볼품없이 맞이했다.

‘전투마를 구해야 하는데...’

기사 체면에 차마 걸어 다닐 수 없어 수레에 탔는데, 수레를 끄는 농마도, 수레에 실린 부상자도 영 편하지 않았다.

‘포클랜드 시티에 가면 구할 수 있을까?’

로벨은 밤새 걸어온 시간을 바탕으로 거리를 가늠해보았다. 포클랜드 시티까지 42마일 남았다. 울프 용병단의 행군속도로 이틀 거리였다.

“기사 나리, 잠깐 쉬어갈까요?”

로벨은 지평선 위로 빼꼼히 머리를 내미는 아침 해와 인사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자비에 후작이라면 오래 속지 않을 것이다. 길어야 한나절이었다.

“아니야. 오늘은 조금 무리해야 할 거야.”

울프 용병단은 ‘조금’의 기준을 짐작하고 탄식했다. 허풍쟁이가 분위기를 바꾸려고 무게를 잡았다.

“포클랜드 시티 성벽도 대단하지 않습니까요? 아무리 에릭 공작님이라도 쉽지가 않을 텐데요?”

허풍쟁이치고 꽤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전격전의 묘미는 적이 예상하지 못한 공격으로 단시간에 끝내는 것이다. 시간을 끌게 되면 적진 깊숙한 곳에 들어간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된다. 즉, 포클랜드 시티 수비군와 자비에 후작군 사이에 포위당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애꾸눈을 보냈잖아.”

로벨은 포스트 포트레스 요새를 지나 동쪽으로, 그리고 포클랜드 시티를 지나 남쪽으로 가고 있을 애꾸눈 볼포스를 생각했다. 그림 리퍼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너무 무리한 명령을 내린 게 아닐까 걱정되었다. 로벨은 최악의 가정을 생각하다가 부하들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그만두었다. 고대의 위대한 장군이 말했듯이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에이, 정 안 되면 볼탄 반도로 도망가자. 국왕이 누가 되든 무슨 상관이야? 우리 땅에서 우리끼리 잘 살면 되지.”

기사답지 않은 말에 용병들은 피식피식- 웃었다. 용병에게 물들어가는 것은 어린 집사뿐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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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자비에 후작의 기사들이 추격해 오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포클랜드 시티 인근 지역까지 공격을 받지 않았다. 로벨이 함정을 파놨을 거라 의심한 건지, 아니면 에릭 공작의 본대를 저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로벨 입장에서 다행이었다.

에릭 공작군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시야가 탁 트인 평야에서 1,500명의 대군은 못 보고 지나치기란 힘들었다. 밤새 피워놓은 모닥불만 100개가 넘었다.

“불 피운 것을 보니 슐트 경이 제때 도착했나 봐.”

볼탄 반도의 병사들과 왕제파 병사들은 오랜만에 영접하는 고기와 밀가루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로드릭 깃발을 높이 들고 아군진영을 가로질렀다. 볼탄 반도에서는 왕가의 깃발보다 유명한 깃발이라 제지를 받지 않았다. 그 깃발을 유난히 환영하는 무리도 있었다.

“기사 나리가 오셨다!”

“우앗! 드디어 도착하셨다!”

로벨의 본대와 펄프 대장이 이끄는 분대와 마침내 합류했다. 열흘 만에 다시 만난 용병들은 교양 대신 정감을 담아 그동안의 안부를 물었다.

“안 죽고 돌아왔네?”

“이 자식! 살아났구나!”

전투 중에 죽고, 부상이 악화되어 죽은 사람은 가급적 거론하지 않았다. 죽음이 일상이고 누운 곳이 무덤인 용병이었다. 떠나간 사람은 굳이 들춰보지 않았다. 그러나 지휘관까지 외면할 수 없었다. 펄프 대장이 구두로 보고했다.

“앞니 빠진 조니와 당나귀 장이 죽었습니다.”

“시신은?”

“친구들 곁에 묻어줬습니다.”

로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늑대성에서 함께 온 110명의 울프 용병단이 81명으로 줄었다. 남은 전쟁을 생각하면 큰 손실이었다.

한편, 로벨의 도착소식이 전해졌는지 고귀한 기사들이 찾아왔다. 그중에는 하워드 성 앞에서 헤어진 하얀 숲의 슐트 경도 있었다.

“로벨 경! 무사하니 참으로 다행이오!”

로벨은 슐트 경의 환대에 잠시 당혹감을 느꼈다. 우정과 존경의 중간쯤 되는 눈빛이었다.

“겨, 경도 무사하시오? 아, 무사하니까 여기 있겠네.”

로벨의 횡설수설에 펄프 대장과 허풍쟁이가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그러나 콩깍지 비스름한 것이 씌인 슐트 경은 개의치 않았다.

데이브 왕제님과 에릭 공작이 기다리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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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국왕이 될지 모를 왕제와 어쩌면 패권을 장악할지 모를 공작이 로벨의 무사귀환에 정신적인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오! 로벨 경! 어서! 어서 오시게!”

에릭 공작은 로벨을 끌어안고, 나의 자랑, 우리의 자랑, 볼탄 반도의 자랑, 포비아 왕국의 자랑이라며 극찬했다. 로벨은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자랑거리가 된 후 간신히 정신을 차린 데이브 왕제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자비에 후작이 추격해오고 있습니다.”

로벨이 운을 띄우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에릭 공작은 헛기침으로 체통을 주섬주섬 주워담았다.

“그 때문에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네.”

로벨은 1,500명의 대군이 자신을 기다렸다는 말에도 별다른 감명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로벨 외의 봉신들은 달랐다. 에릭 공작은 봉신들의 자존심을 생각해서 변명을 덧붙였다.

“자네 덕분에 무사히 포클랜드 시티에 도착했지만, 지금부터가 진짜 전쟁이 아니겠나? 앞뒤에 적을 두고 있으니 신중해야 하네.”

로벨은 분위기가 이상하다 생각하면서 되물었다.

“생각하신 바가 있습니까?”

“이곳에서 반전해서 자비에 후작 일당을 쳐부수자는 의견이 있네.”

“아니? 대체 누가...”

로벨은 지휘막사를 빽빽하게 채운 쇳덩이들을 돌아보았다. 그중 유난히 거친 숨소리를 내며 라이벌 의식을 불태우는 기사가 있었다. 하버트 페르젠 ‘주니어’ 백작이었다.

“포위당하지 않으려면 각개격파해야 하오! 성벽 뒤에 숨어있는 제1왕자 군대보다 헐레벌떡 쫓아오고 있을 자비에 후작 군대를 먼저 상대해야지 않겠소!”

로벨은 지휘막사까지 오면서 본 지형을 생각했다.

“이곳에는 아무것도 없잖소?”

“경의 눈은 옹이구멍이오? 50명의 기사와 1,500명의 병사가 있지 않소!”

“적에게도 기사와 병사가 많소. 이곳에서 싸우면 양측 다 피해가 커질 것이오.”

“우리군은 자비에 후작의 2배가 넘소!”

“그렇다고 피해가 작지는 않겠지.”

로벨은 왕자파와 왕제파가 정면충돌해서 포비아 왕국이 재기불능에 빠지는 것이 악마추종자의 뜻이라 생각했다. 꼭 악마추종자가 아니어도, 에르나 왕국이나 잉그비아 왕국을 경계하려면 피해를 최소화해야 했다. 에릭 공작의 오른팔인 로벨이 왼팔인 페르젠 백작 의견에 반대하자 휘하 기사들이 웅성거렸다. 로벨 휘하의 봉신들은 목청 높여서 골육상쟁을 피하자고 주장했고, 페르젠 백작 휘하의 봉신들은 피가 무서워서 승리를 놓칠 거냐고 반박했다. 그때, 이 막사의 주인이자 기사들의 주인인 데이브 왕제가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로, 로벨 경의 생각은 무, 무엇인가!”

데이브 왕제 성격상 엄청난 용기였다. 그것을 알기에, 혹은 아무 생각 없지만 가장 고귀한 분이 물었으니까 입을 다물었다.

로벨은 친절한 왕제에게 묵례한 후 영주와 기사들을 향해 말했다.

“자비에 후작은 하워드 성에서 곧장 추격하지 않고 정비부터 맞췄습니다. 그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람성의 맥기 남작이 대표로 대답했다.

“기회를 엿보는 것이오?”

로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비에 후작은 영리하고 조심스러운 기사입니다. 설령 우리가 회전을 유도해도 응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럴듯한 추측이었다. 페르젠 백작의 기사가 수증기를 뿜었다.

“우리가 쫓아가서 공격하면 되지 않소!”

“그러면 이 먼 곳까지 내려온 보람이 하나도 없지. 그리고 이 땅은 자비에 후작 일파의 근거지요. 사자성이나 얼음성에 숨으면 어찌할 것이오?”

혈기 넘치는 기사는 욱! 했지만 대답하지 못했다.

“회전에 응해도 문제요. 우리군은 이 땅에 거점이 없소. 손실된 병력을 보충할 수 없다는 뜻이오. 적의 수가 적지 않으니 이긴다 해도 큰 피해를 입으면 포클랜드 시티를 점령하지 못할 것이오.”

로벨의 설득에 페르젠 백작을 제외한 모두가 납득했다. 페르젠 백작도 콧김만 거세게 뿜어낼 뿐 반박하지는 못했다. 헤르만 백작이 두 마디쯤 자란 수염을 만지면 물었다.

“그럼 달리 작전이 있소?”

“각개격파해야 한다는 것은 맞소. 단, 먼저 격파해야 할 것은 포클랜드 시티요. 정리하자면, 포클랜드 시티를 점령한 후 성벽에 앉아 물러날 곳이 없어진 자비에 후작군을 격파해야 하오.”

쇠와 말똥으로 묘사되는 기사들이지만 의심하는 재주는 있었다.

“샘 포클의 위대한 도시를... 2, 3일 만에 점령할 수 있겠소?”

“그 전에 자비에 후작군이 도착하면...”

결국 원점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로벨에게는 비장의 수가 있었다.

“그 어려운 걸 해내야 승리자라 불릴 수 있지 않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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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의 작전이 채택되어 전군이 행진을 시작했다.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자신감이 넘치는 기사도 있고, 무모하다 생각하는 용병도 있고, 어떻게든 되겠지 생각하는 농민병도 있었다. 그리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로벨은 후자에 가까웠다.

“작전 기획자가 될 대로 되라니요? 나 참! 너무 무책임한 거 아닙니까요?”

허풍쟁이가 간덩이만큼이나 큰 소리를 냈다. 로벨은 어린 집사에게 길들여진 버릇으로 움츠렸다가 곧 어린 집사가 아님을 깨닫고 어깨를 폈다.

“지금 나 혼내는 거야?”

허풍쟁이는 자신이 너무 나갔음은 시인했다. 아무리 친해도 귀족이고 고용주였다.

“호, 혼내다니요? 으헤헤! 정중한 질문이었습니다요!”

“정중한 거 다 얼어 죽었네.”

외팔이 더치가 어찌되나 보자는 듯 기름을 끼얹었다. 허풍쟁이가 눈꺼풀을 뒤집고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로벨은 불씨가 아니었다. 불보다 물에 가까웠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어. 남은 건 운이야. 그래도 지금까지 운이 좋았잖아. 포스트 포레스트 요새에서도, 하얀 숲에서도, 하워드 성에서도 잘 풀렸으니까. 이번에도 잘 되기를 바랄 수밖에.”

로벨 로드릭 군을 포함한 왕제군이 300년 역사의 정점인 포클랜드 시티를 향해 나아갔다. 도시를 오가는 행상인과 인근 마을 주민은 숨 막히는 표정으로 동부의 군대를 보았다.

어제와 같고 내일과 같을 하루라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들은 자각하지 못하지만, 오늘은 역사의 큰 갈림길이 되는 날이었다.

포비아 왕국의 새 주인이 등장할지도 모르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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