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전술
181화. 전술
로벨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하워드 성을 점령했다. 저항은 일체 없었다. 하워드 자작은 비굴하다 싶을 정도로 저 자세를 취했다. 무장을 해제하고 재화도 준비했다.
기사의 드높은 자존심상 좀처럼 드문 일인데, 사실 현실적인 판단이었다. 충성하는 대상이 없으니 보호도 받지 못한다. 지원군도, 중재자도 없는 상황에서, 자비에 후작을 두 번이나 격파한 로벨 로드릭 백작과 하얀 숲의 제후 둠 노릭스 후작의 주력군에게 대항할 수 없었다.
로벨은 근엄한 표정을 지으려고 안면근육을 조작하다가 포기하고 평이하게 말했다.
“자작과 자작의 사람에게 해를 끼칠 생각 없소.”
‘그럼 오질 말든가!’
하워드 자작은 마음의 소리를 목구멍에서 적절히 필터한 다음 정화된 상태로 내보냈다.
“로벨 로드릭 백작은 정의를 사랑하고 명예를 소중히 여긴다고 들었소. 이유 없는 만행은 아닐 터,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로벨 이하 로드릭 군의 핵심인사는 쉽게 알아들었다. ‘민폐 끼치지 마’'
하지만 작정하고 민폐 끼치려고 찾아온 로벨이었다. 헛기침을 한 번 하고, 손가락 발가락을 한번 꼼지락거린 후, 최대한 부드럽게 목적을 밝혔다.
“성을 잠시 빌릴까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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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영지민을 몽땅 내보내고 울프 용병단으로 성을 점거했다. 그리고 오랜 전쟁 노하우를 살려서 성문을 보강하고 성벽에 무기와 병력을 배치했다.
몇몇 사람은 보급품을 쌓아놓고 왜 주저앉는지 의아했다. 로벨은 수성준비가 끝난 다음에 알려주었다.
“이곳에서 수비하며 에릭 공작과 왕제파를 불러올 거야. 음... 일단은 말이야.”
“일단은...?”
보급부대가 본대를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본대가 보급부대를 찾아오게 하는 기이한 작전이었다. 아군 진영에서 오는 보급이 아니라 적진을 가로질러 오는 보급이라 가능한 일이지만, 아무튼 재미난 상황이었다. 마녀 키르케가 ‘이히힛!’ 웃으며 말했다.
“지금 아쉬운 것은 우리도, 자비에 후작도 아니고, 에릭 공작님과 데이브 왕제님이니까요.”
로벨은 기동력이 좋은 부대, 즉, 울프 용병단의 기마 소대와 슐트 경의 직속 랜스를 세 갈래로 나눠서 포스트 포레스트 요새로 보냈다. 자비에 후작군이 길을 막아도 한 명쯤은 무사히 도착할 것이다.
하워드 자작 일가에게는 데이브 왕제에 충성하는 대가로 안전을 보장했다. 하워드 자작은 울면 겨자 먹기로 충성을 약속했다. 신념도 힘이 있을 때 지켜지는 법이다.
“이제 남은 것은...”
로벨은 성 안을 가득 채운 상자와 성 밖에 우글거리는 병사를 배부르게 보았다.
“기다리는 것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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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드 성은 평지에 세워진 전형적인 포클랜드 성채였다.
“볼탄 반도는 구릉이 많아서 주로 언덕 위에 성을 지어. 그래서 크지는 않지만 수직으로 높아.”
로벨은 성벽을 따라 걸으며 전문직 종사자답게 전문적인 지식을 자랑했다.
“반면 포클랜드 지방은 평지라서 언덕이 없어. 그래서 이렇게 넓게 지을 수 있는데, 문제는 석재가 귀해서 성벽을 높이 못 쌓아.”
로벨은 걸음을 멈추고 15피트 남짓한 성벽을 올려다보았다. 가장 낮은 곳은 9피트 밖에 안 되는 곳도 있었다. 이런 성에서 전쟁을 치러왔을 포클랜드 기사들이 존경스러웠다.
“그 대신 해자를 깊게 파서 높이를 해결하는데, 음... 이곳은 해자가 없어서 아쉬워.”
“컹!”
아야가 귀를 쫑긋 세우고 갸우뚱했다.
로벨의 재미있고 알찬 성(城)교육을 경청하는 것은 네발 달린 아야와 이야카 뿐이었다. 두발짐승들은 지금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성벽을 따라 한 바퀴 돌았을 때, 초대장을 보내지는 않았지만 초대한 것과 진배없는 손님이 도착했다.
“기사 나리! 기사 나리! 적군입니다! 자비에 후작군입니다!”
로벨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태양이 정상을 지나 서쪽으로 살포시 기울었다. 제7시였다.
“역시 부지런하네.”
로벨은 당황하지 않고 서쪽 성탑으로 올라갔다. 허풍쟁이 제이콥이 주도해서 수성준비를 마쳤다.
“휘유! 엄청나게 많습니다요!”
“저 깃발은... 사자성과 얼음성이군.”
자비에 후작 이외에도 돌체 백작, 데이브 백작 등 왕자파의 중심 세력이 모두 모였다. 기사가 20~30명, 병사가 500명이었다. 로벨 로드릭 군의 10배가 넘었다.
“병사를 탈탈 털어온 모양입니다요.”
“응. 여기서 승부를 볼 작정이야.”
에릭 공작군과 정면으로 싸워서 승부를 내기 힘드니, 보급부대를 끊어서 철수시키겠다는 속셈이었다.
로벨은 서쪽으로 한창 달려가고 있을 과묵한 몬트를 떠올렸다. 오늘 중에 포스트 포레스트 요새에 도착할 것이다. 그리고 로벨의 예상대로 움직여준다면 사흘, 아무리 늦어도 나흘이면 결착이 날 것이다.
“사흘만 버티면 돼.”
허풍쟁이 제이콥이 의아하게 돌아보았다.
“왜 사흘입니까요?”
로벨은 빙그레 웃으며 손가락을 입술에 대었다. 허풍쟁이는 아차 해서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준비는?”
“아주 완벽합니다요!”
로벨은 성벽에 기대앉은 크로스보우 소대를 쭉 둘러보았다. 언제 어느 때나 믿을 수 있는 베테랑 용병들이었다.
“처음은 탐색전이야.”
“저것들은 시간이 없는뎁쇼? 총력전으로 나오지 않겠습니까요?”
허풍쟁이는 조심스럽게 질문한 후 전우들을 의식해서 목에 힘을 줬다. ‘기사 나리와 어려운 대화를 나누는 최고참 용병’의 자부심이었다. 로벨은 하나의 생물처럼 꿈틀거리는 자비에 후작군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자비에 후작 성격상 한 번에 전 병력을 밀어 넣지는 못해. 더욱이 두 번이나 당했으니 조심스러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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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의 예상이 적중했다. 자비에 후작군 총 5개 중대 중 1개 중대만 공격을 시작했다. 에르나 왕국의 회색곰 용병단이었다.
회색곰 용병단은 네일 공국인이 즐겨 쓰는 라운드 실드를 머리에 이고 사다리를 옮겨왔다. 화살을 쏘고, 함성을 지르고, 성벽을 기어오르는 시늉도 하지만, 생각보다 열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성의 취약점과 수비병의 대응을 알아보는 탐색전이었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빼들고 성벽 위를 오가며 적을 상대했다.
“통행료!”
“토, 통행료?”
“없으면 안 돼!”
로벨은 애써 사다리를 올라온 자비에 후작군 용병을 꾹 찔렀다. 용병은 대단히 찰진 욕설을 내뱉으며 성 아래로 뛰어내렸다. 높이가 고작 9피트 남짓이라 죽지는 않을 것이다. 로벨은 무임승차객을 추방하고 다음 손님을 보았다. 그 손님은 목숨과 화살을 바꾸는 용병치고 꽤 괜찮은 유머감각이 있었다.
“...외상 안 됩니까요?”
로벨은 고개를 가로젓고 아론다이트를 치켜들었다. 유머감각 있는 용병은 앞서 모범을 보인 전우를 따라 찰진 욕설을 하며 뛰어내렸다. 로벨은 피식- 웃고 다음 상대를 찾아 이동했다.
어느 곳이나 비슷한 상황이었다. 자비에 후작이 보낸 회색곰 용병단은 위협만 하면 알아서 떨어져 나갔다. 아니, 애당초 성 아래에서 깔짝거릴 뿐 가까이 오지도 않았다. 울프 용병단의 크로스보우맨만 신이 나서 전공을 갱신했다.
로벨은 문뜩 자비에 후작의 표정이 궁금해졌다. 파나케아 투구도 800야드 밖의 사람 표정을 볼 수는 없었다. 그래도 대충 짐작은 되었다. 아무리 탐색전이라지만, 이처럼 지리멸렬하게 싸우는 용병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본디 울프 용병단처럼 고용주를 위해 헌신적으로 싸우는 용병단이 드물었다.
로벨은 큰 소리로 허풍쟁이 제이콥을 불렀다. 로벨처럼 전신이 쇳덩이가 아닌 허풍쟁이는 파비스를 오른쪽에 세우고 숨어서 이동했다.
“기사 나리! 이크! 부르셨습니까요!”
로벨은 아론다이트로 적 용병대장을 가리켰다. 새하얀 칼날이 반사광을 내자 여러 사람이 움찔했다. 로벨은 성벽 위에 모두가 들을 수 있게 소리쳤다.
“적이 물러날 거야!”
“아앗! 드디어 끝입니까요?”
“응! 선물 잊지 마!”
허풍쟁이는 파비스를 아래로 기울이고 머리를 빠끔히 내밀었다. 성 반대편으로 도망치는 적병이 다수 보였다. 허풍쟁이는 자신감을 가지고 가슴을 쭉 폈다.
“적이 도망친다! 통나무 준비!”
울프 용병단은 환호하며 여장 아래 숨겨둔 통나무를 번쩍 들어 올렸다. 기름을 듬뿍 먹여서 번들번들했다. 용감해서, 혹은 눈치가 없어서 아직 성벽 아래 붙어있는 자비에 후작 용병들은 ‘어? 어억? 하지 마!’ 따위의 영양가 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허풍쟁이는 코를 실룩이고 존경하는 고용주를 흉내 냈다.
“싫어.”
부싯돌을 튕겨서, 아니면 횃불을 쑤셔서 통나무에 불을 붙였다. 기름 먹은 미루나무가 얼마나 잘 타는지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던져라!”
허풍쟁이가 활기차게 명령했다. 던지지 말라고 해도 뜨거워서 던졌겠지만. 아무튼 7개의 불타는 통나무가 성 밖으로 굴러 떨어졌다. 해자가 없는 것이 적의 불운이었다. 몇몇 통나무는 방향을 잘못 잡아서, 또는 시체와 장애물에 걸려서 성벽 아래 멈췄지만, 그래도 몇 개는 완만한 경사로를 따라 통통거리며 굴러갔다. 눈치 보며 슬금슬금 빠져나가던 자비에 후작 용병들은 기겁해서 전력으로 도망쳤다. 아쉽게도 통나무에 깔려 죽거나 다치는 굼뜬 용병은 없지만, 그래도 퍽 유쾌한 장면이었다. 자비에 후작이 결국 퇴각 나팔을 불었다. 울프 용병단은 크로스보우와 워 해머를 휘두르며 올 때보다 3배는 빨리 내빼는 적을 야유했다.
“이제 알아 모시겠냐! 으하핫!”
“꼬우면 내일 또 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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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드 성 첫 공방전은 로벨 로드릭 군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전과는 미미했다. 울프 용병단은 전사자 1명, 부상자 3명이었고, 자비에 후작군은 전사자 12명에 부상자도 비슷하게 나왔을 뿐이다. 로벨과 자비에 후작 모두 ‘진짜 전투’는 시작하지 않았다는데 동의했다. 그러나 진짜 전투가 언제 시작될지는 의견이 달랐다.
“시골 담장 같은 성이오! 재고 말고 할 것도 없소!”
자비에 후작군은 시간이 없었다. 에릭 프란시스 공작의 본대가 지원 오면 앞뒤로 포위당할 뿐더라, 겨울까지 전쟁을 수행할 물자를 넘겨주게 되었다.
“오늘이 지났으니 이틀 남았소. 이틀 안에 저 성을 함락해야 하오.”
“로벨 로드릭 백작은 만만한 자가 아니오. 지금껏 수성에서 단 한 번도 성을 뺏긴 적이 없는 자요.”
“그래봐야 100명도 안 되는 병사잖소! 우리군은 600명이외다!”
돌체 백작 등이 신중론을 펼쳤지만, 그것은 왕제파가 우위를 잡은 전황에서 눈치 보기일 뿐, 전략적으로 숙고할 주장은 아니었다.
“내일 아침 동문과 서문에서 일제히 공격하겠소. 부대를 나눌 테니 오늘 밤 동쪽으로 우회하시오.”
자비에 후작은 영주와 용병대장을 한 명씩 지목하며 작전을 지시했다. 고전적이지만 효과적인, 그래서 흠잡을 것이 별로 없는 양면공격이었다. 호전적인 기사는 흡족하게, 소극적인 기사는 불안하게 명령을 접수하고 각자 숙영지로 흩어졌다.
자비에 후작은 수행 기사와 종자도 돌려보내고 홀로 지휘막사 밖에 앉았다. 성벽을 따라 화톳불을 훤히 밝힌 하워드 성이 흡사 하늘에 떠있는 것 같았다.
‘로벨 로드릭! 이번에야말로 수모를 갚아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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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에 후작의 열의에 응답하듯, 자비에 후작군은 하워드 성을 점령했다. 그것도 화살 하나 쏘지 않고 말이다.
“텅 비었습니다!”
“...뭐라고?”
“성 안이, 그러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회색곰 용병대장이 기쁜 듯 기쁘지 않게 보고했다. 자비에 후작은 밤새 불타고 꺼져서 연기만 내뿜는 성벽 위 화톳불을 보았다. 그리고 어이가 없어서 버럭 소리쳤다.
“보급물자! 하얀 숲의 요술쟁이가 보낸 무기와 식량이 있잖은가!”
회색곰 용병대장은 고용주의 분노에 당혹해 하며 다시 보고했다.
“그게,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병사도, 무기도, 식량도...”
“그, 그럴 리가...?”
자비에 후작은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왕성에서 반평생 동안 군림한 영리한 사내였다. 로벨 로드릭이란 기사의 성향, 그리고 눈앞에 닥친 상황을 비교적 정확하게 분석했다.
자신을 미끼로 적을 유인하고, 그 사이 전쟁물자를 안전하게 수송한다.
‘그자가 나를 속인 건가?’
자비에 후작은 자신에게 정보를 준 하워드 자작을 떠올렸다. 하워드 자작은 정통성을 중시하는 고지식한 기사였고, 평소에도 제1왕자를 지지하는 발언을 자주 해왔다. 그런 자가 보내온 정보라 더욱 믿었다.
‘아니. 아니지. 그런 작자인 것을 알고 역이용했군. 왕제에게 우호적인 성을 두고 굳이 이곳을 점령한 이유가...’
전황과 심리를 이용해서 완벽하게 속였다. 자비에 후작은 어금니가 부러져라 갈았다.
‘로벨 로드릭, 실로, 실로 무서운 자가 아닌가!’
돌체 백작 등도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떨떠름하게 물었다.
“그렇다면 하얀 숲의 식량과 무기가 포스트 포레스트 요새로 갔단 말이오?”
“우리가 길목을 장악하고 있는데, 어찌 그럴 수 있소?”
성을 점령하며 이목을 끌었다 해도, 자비에 후작의 정찰대를 피해 수십 대의 보급마차를 옮기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 정보가 들어오지 않은 것은 이상했다. 자비에 후작은 머리를 굴리다가 로벨 로드릭 군이 떠난 방향을 깨닫고 하얗게 질렸다.
“포스트 포레스트 요새가 아니오!”
“그곳이 아니면 어디란 말이오?”
“전쟁물자를 볼탄 반도로 가져갈 것도 아니고...”
자비에 후작은 분노, 경악, 그리고 답답함에 아군 지휘관에게 하면 안 될 폭언을 토했다
“이런 멍청한! 포클랜드 시티요! 우리를 이곳에 잡아두고 에릭 프란시스 공작과 로벨 로드릭 백작이 동시에 포클랜드로 향한 것이오! 빌어먹을! 국왕폐하가 위험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