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183화 (183/605)

183화. 망중한

183화. 망중한

포클랜드 시티.

포비아 왕국 수도이자 동서무역 중심지. 상주인구만 4만 명에 이르는 유라피아 대륙 최대 규모 도시였다.

로벨은 포클랜드 시티와 얽힌 역사를 떠올렸다. 첫 번째 방문은 그랜드 토너먼트에 참가하기 위해서였고, 두 번째 방문은 악마추종자에게 이용당한 빌포이 다이첼 경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다시 올 줄은 몰랐는데...’

로벨은 포클랜드 시티의 웅장한 성문을 올려다보았다. 뜻하지 않은 세 번째 방문에는 성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성벽 위에 뾰족하게 솟은 배틀액스와 할버드 등은 덤이었다. 그 의미는 뻔했다. ‘이 자식들아! 제발 돌아가!’

펄프 대장이 헛기침인지 잔기침인지 모를 소리를 조금 내고 다가왔다.

“숫자는... 100명? 200명이 채 안 되는군요. 생긴 걸 봐서 급하게 고용한 용병 같습니다.”

에릭 프란시스 공작의 남진이 전해진 지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이틀 사이에 세 자릿수 용병을 고용했으니, 과연 금화로 세례하고 은화로 몸을 씻기는 수도였다.

“응. 도시민이 적이 되지는 않았어.”

로벨은 상황을 관망하고 있을 도시의 자유민을 생각했다.

포클랜드 시티는 해운업이 발달했다. 해로가 열린 이상 고사(枯死) 작전은 통하지 않는다. 어찌 보면 불행이고, 어찌 보면 다행이었다. 배를 곯은 자유민은 싸우거나 항복하기 때문이다.

“물론, 저희한테는 다행이죠.”

펄프 대장이 악동처럼 히죽 웃었다. 용병이 싸우는 것은 로벨에게, 아니, 왕제군에게 행운이었다.

“로벨 경! 로벨 경! 어디 있나!”

에릭 공작 이하 왕제파 영주들이 로벨을 부르며 다가왔다. 로벨은 울프 용병단을 뒤로 하고 행렬 밖으로 나갔다. 에릭 공작 일행은 전투마가 없는 로벨을 그냥 지나칠 뻔 하다 화급히 정지했다. 기사가 보병처럼 걸어 다니니 못 보고 지나칠 뻔했다. 로벨은 얼굴을 붉혔지만, 애써 부끄러움을 티 내지 않았다.

“마로드, 이쪽입니다.”

에릭 공작은 로벨과 눈높이를 맞추기를 위해 말에서 내렸다. 에릭 공작의 기사들은 주군이 감히 위에서 내려다볼 수 없어 따라 내려야 했다. 그러자 에릭 공작에게 충성하지 않는 포클랜드 영주들도 슬그머니 땅에 내려왔다. 빛나는 갑옷을 입는 기사가 땅에 서고, 십 수 마리의 전투마가 주인 없이 얼기설기 섞여서 푸르릉- 푸릉- 거렸다. 전쟁터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진풍경이었다.

“로벨 경, 자네 말대로 도착했네. 이제 어찌해야 하나?”

에릭 공작이 조급하게 물었다. 막상 샘 포클의 도시를 눈앞에 두니 긴장이 되는 모양이다.

로벨은 숨을 깊이 들이마신 후 자신도 모르는 자신감을 짜냈다.

“계획대로 진행 중입니다. 병사들을 쉬게 하시고, 야간전투를 준비하십시오.”

“야간? 아, 그렇지. 낮이 아니라 밤이지! 당연히 그래야지!”

에릭 공작은 몸을 돌려 포클랜드 시티를 보았다. 수도를 공격하는 것은 왕국을 공격하는 것과 같았다. 꼭 심리적인 공포가 아니어도, 성벽이 높고 해자가 깊으며 병사와 무기가 풍부하니 걱정되는 것이 당연했다.

로벨은 페르젠 백작 및 여러 기사들이 듣지 못하게 나직이 속삭였다.

“제가 선두에 서서 돌파하겠습니다. 주군은 신호가 올라오기를 기다렸다가 페르젠 백작을 보내어 시가지를 장악하시고, 곧장 왕성으로 진군하십시오.”

“경에게 너무 부담을 주는 것이 아닌가?”

“응당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로벨이 자신감을 보이자 에릭 공작이 안심했다. 에릭 공작의 표정이 밝아지자 에릭 공작의 기사들이 좋아했다. 이제 불안한 사람은 로벨 뿐이었다.

“그럼 경을 믿고 실행하겠네.”

“예스, 마로드.”

에릭 공작이 떨어지자 데이브 왕제가 삐쭉거리며 다가왔다. 로벨은 호칭을 바꿔 인사했다.

“유얼 마제스티(Your Majesty).”

로벨이 허리를 숙이자 데이브 왕제가 두 손으로 어깨를 잡았다.

“아, 아직 아니오. 그리 부르지 마시오.”

데이브 왕제는 곤욕스러워 했다. 전하(Highness)나 공작(Prince)하고 느낌이 달랐다. 로벨이 빙그레 웃자 왕제는 귓불을 붉히고 속삭였다.

“로, 로벨 경, 지난번에 본인이 한 말은 이, 잊어주시오.”

로벨은 왕제가 무슨 말을 했었는지 잠깐 생각해야 했다. 그러자 왕제가 만족했다.

“고, 고맙소. 경은 역시 명예로운 기사요.”

왕제는 기억력 나쁜 로벨을 오해하고 에릭 공작을 따라갔다.

“아아, 왕이 되기 싫다는 거?”

로벨은 본진으로 떠나는 차기 국왕의 꽁무니를 보며 어이없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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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지나가면서 낮도 짧아졌다. 일경이 지나자 어둠이 밀려오고 별무리가 떠올랐다.

계절의 고비에서 더위는 한풀 꺾였지만, 남해가 지척인 항구에는 알게 모르게 열대의 자취가 남아있었다.

“우리도 우리지만, 쟤네가 죽을 맛일걸?”

어쩌면 날씨 탓이 아닐 것이다. 전투를 앞둔 병사들은 긴장과 흥분으로 몸이 달아올랐다. 쇳덩이와 돌덩이, 혹은 불과 기름을 뒤집어쓰고 울부짖게 될 것이다.

로벨은 브릭 경, 마튼 경, 메튜 경을 좌우로 보내 중앙을 엄호하게 하고, 울프 용병단을 직접 지휘해서 포클랜드 시티 성문으로 나아갔다. 이날의 전투는 갑작스러웠다.

포클랜드 시티 수비병은 두 가지에서 의표를 찔렸다. 첫 번째는 공성전에서 좀처럼 수행하지 않는 ‘야습’이었고, 두 번째는 도시의 ‘배신자’였다. 후자의 경우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스파이’라 해야 할 것이다.

“영주님, 성문이 열립니다.”

펄프 대장이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나이 탓인지 즉각적인 반응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기쁨은 젊은 용병들이 표시했다.

“성공이야! 애꾸눈이 해냈어!”

“빌어먹을 애꾸눈! 축복이나 받아라!”

에릭 공작군의 남하소식에 용병을 닥치는 대로 고용한 것이 포클랜드 수비군의 실수였다.

사흘 전, 푸른고래 호와 청새치 호를 타고 포클랜드 항구로 들어온 ‘애꾸눈 용병단’이 사실은 적장 로벨 로드릭이 거느린 울프 용병단의 최정예 제1소대일 줄 꿈에도 몰랐다.

여기서 포클랜드 시티 수비대장을 변호하자면, 옛 신이 지상에 현신해서 귀띔해주지 않은 이상 누구라도 속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타이밍 좋게 나타난 용병을 의심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수비대장 나름대로 신원조사를 실시했다. 그러자 자비에 후작이 고용한 모래폭풍 용병단의 ‘애꾸눈 아바레스트’를 기억하는 용병들이 있었다. 심지어 포스트 포레스트 요새에서 로벨 로드릭 백작을 낙마시키고, 그 대가로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맞은 것도 기억했다. 그런 용병이니 의심할 수 없었다.

그토록 오래전에, 이토록 치밀하게 스파이로 위장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정말 아무도 몰랐다. 심지어 당사자까지 말이다.

‘운명이라고...?’

로벨은 그림 리퍼가 한 말을 떠올렸다.

‘운명이 아니라 음모잖아!’

“영주님?”

펄프 대장이 외팔이들을 조용히 시키고 로벨을 불렀다. 로벨은 파나케아 투구를 쓰고 아론다이트를 뽑았다. 새하얀 칼날이 푸른 달빛을 베어 물방울처럼 뿌렸다.

“전군.”

로벨의 칼이 성문을 향했다. 고작해야 한두 사람 비집고 들어갈 작은 틈이지만, 지금은 10만 대군도 지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돌격.”

“우와아아아!”

이럴 때 모범을 보이는 것이 소대장이다. 외팔이 더치가 손도끼를 치켜들고 고함을 질렀다. 외팔이만큼 목청이 좋지 못한 허풍쟁이 제이콥과 겁쟁이 데비는 닥치고 그냥 뛰었다. 겁쟁이의 경우 무거운 핸드 캐논 때문에 그리 빠르지 못했다. 코골이 바디와 발냄새 베커에게 금방 따라잡혔다.

로벨은 울프 용병단 중간에 섞여서 힘껏 뜀박질했다. 성문 뒤로 애꾸눈과 애꾸눈의 부하들이 보였다. 칭찬, 아부, 농담, 축하 등등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삼켰다. 시간을 아껴야 한다. 성탑 위의 초병이 머리를 내밀고 소리쳤다.

“누가 성문을 열었...!”

파앙-!

크로스보수 다섯 대가 동시에 쏘아졌다. 한 발 빼고 모두 가슴에 명중했다. 초병은 공기 빨아들이는 짧은 비명과 함께 성탑 아래로 추락했다. 사인이 쇼크인지 낙사인지 궁금했다.

“펄프 대장! 2소대와 함께 동쪽으로! 외팔이! 3, 4소대와 함께 서쪽으로! 초병을 제압하면 깃발을 올려!”

“으윽! 서쪽 탑이 제일 멀잖아!”

“시끄럽다! 제2소대! 가자!”

성탑 안에서 투구를 반쯤 걸친 초병이 뛰쳐나왔다. 용감하지만 멍청한 짓이었다. 차라리 안에 숨어 있어야 했다. 로벨은 아론다이트의 칼몸을 잡고 단창처럼 휘둘러 어깨를 찍었다. 기름칠이 덜 된 조잡한 가죽 갑옷이라 일격에 뚫렸다. 동맥이 끊어졌는지 피가 솟구쳤다. 로벨은 파나케아 투구의 힘을 빌려 뒤돌아보지 않고 명령했다.

“애꾸눈! 성문을 전부 열어! 겁쟁이! 코골이! 바리게이트 치우고 핸드 캐논 거치해! 기병이 들어올 거야! 시가지 쪽으로 엄호사격해!”

로벨의 명령이 끝나기 무섭게 수비대 숙영지에서 적군이 뛰쳐나왔다. 그러나 지휘체계가 세워지지 않아 만전의 준비가 된 울프 용병단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콰과광-! 콰광-!

겁쟁이 데비 이하 핸드 캐논 소대가 일제히 발포했다. 도시 전체가 흔들렸다. 용기 내서 건물 밖으로 머리를 내민 수비병은 포성에 기겁해서 도로 숨었다. 이제 더 이상 기습이나 비밀작전이 아니었다. 전면전이었다.

“동쪽 탑에 깃발이 올랐습니다!”

“서쪽 탑에도 깃발이... 에라이, 등신아!”

서쪽 탑에 기수가 적병과 몸싸움에 깃발을 놓쳤다. 여장 너머에서 피 튀기는 비명이 흘러나왔다. 잠깐의 소란 후, 외팔이가 피범벅이 되어서 깃발을 높이 들었다. 이걸로 성문이 완전히 장악되었다.

“에릭 공작, 지금입니다.”

로벨은 초조하게 뒤쪽을 보았다. 너무 빨라도 안 되지만, 너무 늦어도 안 되는 것이 기습 작전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에릭 공작은 충직한 기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두두두두...

땅울림이 기분이 좋게 전해졌다.

“좋아! 본대가 와! 길을 열어!”

로벨은 코골이를 도와 바리게이트를 치웠다. 성문이 뚫려도 왕성까지 후퇴할 시간을 벌기 위해 설치한 바리게이트였다. 아주 크고 무척 무거웠다. 로벨을 포함한 건장한 용병 10명이 힘을 합쳐서 간신히 시간 내 제거할 수 있었다. 마지막 바리게이트가 치워지는 순간, 활짝 열린 성문으로 페르젠 백작 이하 볼탄 반도의 기사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혈기 넘치는 페르젠 백작은 성문을 통과하면서 고함을 질렀다.

“데이브 전하 만세! 프란시스 가문에 영광을! 페르젠 가문에 축복을!”

“...고생한 것은 우리 가문인데?”

페르젠 백작은 뻔뻔하게도 로드릭 가문을 쏙 빼고 시가지로 사라졌다. 오늘 밤에 시청, 항구, 시티가드 본부 등 주요시설을 점거해야 하니 쉴 틈 없이 바쁠 것이다.

“우리 역할은 성문을 차지한 거로 끝났어.”

로벨은 어깨에서 핏물이 꿀렁꿀렁 쏟아지는 병사와 추락한 충격으로 근육이 꿈틀거리는 병사 사이에 앉아 망중한을 즐겼다.

도시 곳곳에서 욕설, 비명, 아기 울음이 울려 퍼졌다. 평화로운 밤잠을 깨워서 미안하지만 사과할 생각은 없었다. 저들은 적어도 양옆에 이름 없는 병사처럼 죽지는 않을 테니까.

“너희도 최선을 다했어. 그러니까 너희한테도 사과하지 않을 거야.”

로벨은 몸을 뒤로 젖히고 하늘을 보았다. 달이 기울고 있었다. 왕위계승전쟁의 막이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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