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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117화 (117/605)

117화. 돼지치기

117화. 돼지치기

해가 지고 달이 떠올랐지만 유령은 나오지 않았다. 로벨은 작별인사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마녀 키르케가 영혼이 아니라 사념체라고 위로했지만 그리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저녁을 먹고, 상처를 치료하니 밤이 깊었다. 로벨과 외팔이 더치는 ‘가벼운’ 타박상이지만, 허풍쟁이 제이콥은 뼈가 부러진 ‘적당한’ 부상이라 손이 많이 갔다.

“그럼 심각한 부상은 뭐예요?”

“팔다리가 하나쯤 잘려야 ‘저거 좀 심각한데?’ 소리를 듣소.”

“으앙! 난 용병 못 하겠어요!”

로벨은 용병의 허세에 피식- 웃고 벽난로에 장작을 넣었다. 여름에 변을 당한 듯 장작이 많지 않았지만, 하룻밤 묵어가는 여행객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로벨은 눈에 보이는 가구를 때려 부숴서 땔감으로 삼았다.

“기사 나리, 남은 식량이 비스킷 뿐입니다요.”

외팔이 더치가 식량 자루를 펼치며 말했다. 그러나 로벨은 걱정하지 않았다. 계절이 좋으니 사냥을 하거나 과일을 찾거나 새알을 훔쳐서 식량을 보충할 수 있었다.

“저나 저 친구나 상태가 안 좋아서 힘듭니다요.”

외팔이 더치가 허전한 팔을 들어보이자 허풍쟁이 제이콥이 지지 않고 부러진 팔을 흔들었다. 그러고 보니 수행원이 죄다 팔이 하나였다.

“...아무튼 그만 자. 아침 일찍 출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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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르르-릉-!

몇 시 쯤 됐을까, 로벨은 하늘이 골골거리는 소리에 깨어났다. 낯선 천장과 낯선 냄새에 당황해서 머리맡에 대거를 움켜잡았다가 간신히 기억을 떠올렸다.

‘아, 농장이야.’

로벨은 여기저기 흩어져서 잠든 일행이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짚더미 위에 새끼 늑대처럼 웅크리고 자는 마녀 키르케, 두 팔 두 다리 활짝 벌리고 코 고는 외팔이 더치, 부러진 팔이 아픈지 신음을 흘리는 허풍쟁이 제이콥이 각 모퉁이에 보였다.

로벨은 벽난로에 장작을 하나 넣고 창문을 보았다. 비바람에 나무창이 덜컹거렸다. 먼 곳에서 번개가 번쩍이고, 잠시 뒤 천둥이 쿠르릉- 쿠릉- 울려왔다. 내일 아침 출발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로벨은 전투마가 괜찮은지 걱정되어 자리에서 농가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을 살포시 열자 번개가 하늘을 두 쪽으로 가르고 세찬 빗줄기가 발아래 후두둑 떨어졌다. 로벨은 일행을 돌아봤지만 조금 전과 차이가 없었다.

“정말 잘 자네.”

로벨은 문을 닫고 빗줄기 사이를 잰걸음으로 뛰어갔다. 고작 30피트 떨어진 헛간을 가는데 머리와 어깨가 흥건히 젖었다. 덕분에 잠이 완전히 달아났다.

로벨은 처마 아래에서 빗물을 털고 헛간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저기에 빗방울이 떨어지나 찬바람을 막을 정도는 되었다. 전투마가 주인의 냄새를 맡고 푸르릉-! 소리를 내었다. 겁 많은 초식동물치고 신경이 굵었다.

‘정작 아야와 이야카는 겁쟁인데...’

로벨은 신이 난 전투마와 뚱한 농마를 꼼꼼히 살핀 후 멀쩡하다 판단했다. 젊고 건강해서 이 정도 추위는 끄떡없었다.

쿠르르- 쿠르르- 콰광-!

머리 위에서 번개가 번쩍였다. 로벨은 강렬한 번갯불에 눈살을 찌푸렸다가 돌연히 둥글게 떴다. 아주 잠깐이지만 그림자가 보였다.

“누구냐!”

로벨은 소드 벨트를 벗어놓고 온 것을 안타까워하며 대거를 뽑았다. 그러나 빛이 사라진 어둠은 고요했다.

‘...잘못 봤나?’

로벨은 칼끝을 조금 내렸다. 그러나 성난 하늘이 똑바로 보란 듯이 크게 호통쳤다.

콰콰쾅-!

번갯불이 튀자 또다시 그림자가 나타났다. 크고, 작고, 두껍고, 가느다란 사람의 그림자였다. 로벨은 포위당하지 않으려고 헛간 벽에 기대어 대거를 수평으로 세웠다.

‘다섯? 여섯인가?’

그러나 과민반응이었다. 헛간 어디선가 깔깔 거리는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린아이의 새된 목소리였다.

“고스트?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어?”

그림자 무리가 로벨 앞으로 다가왔다. 로벨은 대거를 내밀어 위협했지만 소용없었다. 젖은 빗물에 식은땀이 섞여서 흘러내렸다. 그러나 고스트 무리는 위험하지 않았다.

작은 그림자가 불쑥 나와 까치발을 들고 속삭였다.

기사님... 기사님...

“넌...?”

번쩍-

번개가 치자 선명하게 보였다. 사람 좋아 보이는 중년 남자와 허리가 조금 굽은 중년 여자 키가 높고 낮은 청년들이었다.

“농장주인 일가야?”

그림자 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작고 가장 가냘픈 그림자였다.

“내게 무슨 볼일이지?”

그림자는 빙그레 웃었다.

기사님... 기사님... 고마워요... 고마워요...

로벨은 움찔했다. 작은 그림자가 춤추듯 빙글빙글 돌며 말했다. 이어서 큰 그림자가 머리를 조아렸다.

나으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로벨은 대거를 아래로 떨어뜨렸다. 사념체가 아니라 ‘진짜 유령’이었다.

로벨은 마녀 키르케를 데려올까 생각했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유령 가족은 차례로 인사하고 소리 없이 사라졌다. 콰광-! 또다시 번개가 내려쳤지만 더 이상 그림자를 볼 수 없었다.

로벨은 잠이 덜 깨서 헛것을 본 것이 아닐까 의심했다.

“너희도 봤지?”

로벨은 전투마에게 물었다. 그러나 말은 항상 그랬듯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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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간밤에 폭우가 거짓말인양 화창한 하늘이 밝았다. 외팔이 더치와 허풍쟁이 제이콥도 푹 자고 상쾌하게 일어나 아침 인사 했다. 로벨은 신기해서 허풍쟁이 제이콥의 부러진 팔을 툭툭 때렸다.

“...안 아파?”

“어랍쇼? 그렇네요? 별로 안 아픈데요?”

전투마와 농마도 활기차게 걸어 나왔다. 지난 며칠간의 피로가 싹 풀린 태도였다.

‘농장주인의 선물인가?’

원인은 알 수 없지만, 하늘도, 사람도, 짐승도 모두 최상의 상태였다. 외팔이 더치가 쩝! 소리를 내었다.

“먹을 것만 있으면 좋겠는데 말입죠.”

“저기! 저거 봐!”

허풍쟁이가 울타리를 가리켰다. 빗물에 씻겨나간 하얀 나무 아래 울긋불긋한 열매가 가득 맺혀 있었다. 로벨 일행은 설마? 에이 설마? 하면서 다가갔다. 그리고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이거 납작 복숭아잖아?”

“겨울이 코앞인데 복숭아라니?”

“난들 아냐? 벼락 맞고 미쳤나보지.”

외팔이 더치와 허풍쟁이 제이콥은 손바닥만한 납작 복숭아를 따서 한입 깨물고 헤벌쭉 웃었다. 아름답지 못하지만 행복해 보였다.

마녀 키르케가 고르고 골라 가장 잘 익은 것을 따왔다.

“기사님, 기사님도 하나 드세요.”

로벨은 계절에 안 맞는 납작 복숭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시선을 돌려 앞마당을 보았다. 그 거친 폭우에도 멀쩡히 자리를 지킨 무덤이 있었다.

“잘 먹을게.”

로벨은 작은 무덤을 향해 웃어주고 복숭아를 깨물었다. 무척 시원하고 아주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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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운이 좋더니 하루 종일 일이 잘 풀렸다. 농장에서 얼마 안 가 네일 공국으로 이어지는 관도를 찾았고, 점심이 가까운 무렵 돼지 치는 작은 마을을 발견했다. 마녀 키르케가 외팔이 더치 어깨 위로 머리를 내밀고 감탄했다.

“와! 맛있겠다!”

“...쯧. 무슨 늑대 새끼도 아니고.”

“뭐라고요?”

“살아있는 돼지를 보고 맛있겠다 생각하는 게 정상이오?”

외팔이와 마녀가 티격태격 거렸다. 로벨은 복숭아를 한입 깨물고 안장주머니를 뒤적였다. 어린 집사가 싸준 돈이 넉넉히 있었다.

“점심은 돼지고기를 먹을까?”

큰 수행원과 작은 수행원이 동시에 로벨을 보았다. 성격도, 생김새도 딴판인데, 똑같이 침을 주르륵- 흘렸다.

“좋아요!”

“으랴! 가자, 느림보야! 빨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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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촌장을 만나 돼지 한 마리를 통째로 사들였다. 네 사람이 먹기는 지나치게 많지만,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오늘 먹을 부위만 떼어놓고, 남은 부위는 햄과 소시지로 교환했다. 겨울이 가까운 만큼 먹거리가 풍족했다.

외팔이 더치가 짐마차에 식량을 가득 싣고 뿌듯하게 말했다.

“이 정도면 로드릭 성으로 돌아갈 때까지 충분하겠습니다요.”

낡은 마차가 삐그덕거리며 동의했다.

돼지농장은 로벨 덕분에 때아닌 고기잔치를 열었다. 과장 없이 발에 치이는 것이 돼지지만, 돼지고기를 먹는 일은 흔치 않았다. 어쩌다 도축해도 사트로 시티에 내다 팔고 남은 찌거기로 스튜를 끓여 먹을 뿐이었다. 오늘처럼 돼지 한 마리를 통째로 굽는 날은 잔칫날이었다.

마녀 키르케는 돼지다리를 쪽쪽 빨면서 촌장 아들에게 물었다.

“그럼 뭐 먹어요?”

“뭐, 평범합니다. 귀리죽이나 보리죽이죠.”

“이 돼지들은요?”

“절반은 영주님 소유고, 나머지 절반은 마을 공동소유입니다. 배고프다고 함부로 잡을 수 없죠.”

로벨은 갈비뼈를 앞뒤로 돌려서 깔끔히 발라낸 후 물었다.

“이곳 영주가 누구야?”

촌장 아들은 지체 높은 기사 나리가 말을 걸자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말했다.

“무트 모몬트 남작님입니다요.”

“모몬트 남작?”

외팔이 더치와 허풍쟁이 제이콥은 한손으로 힘겹게 고기를 발라내다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제대로 온 것 같습니다?”

“응.”

로벨은 농장에서 수확한(?) 복숭아를 나눠주고 설익은 과일주를 한 병 얻었다. 외팔이와 허풍쟁이는 냄새를 맡고 질색했지만, 마녀 키르케는 입에 맞는지 벌컥벌컥 잘도 마셨다. 로벨은 삽시간에 불덩이가 된 마녀를 걱정하는 한편, 지프 모몬트 경의 정보를 수집했다. 촌장 아들이 순박하게 되물었다.

“작은 영주님 말씀입니까?”

“작은 영주님?”

“아차, 지프 도련님을 그리 부릅니다.”

로벨은 빙그레 웃었다. 옛날에 큰 오빠가 그리 불렸다.

“그 작은 영주님에 관해 알고 싶은데.”

로벨은 영지민을 제물로 바친 하몬 남작이나 군비를 위해 무리하게 징수한 아만다 남작을 기대했다. 그러나 촌장과 촌장 아들의 반응은 뜻밖에 우호적이었다.

“참말로 좋은 분입니다요. 암요. 암요.”

“혹시 충성할 영주님을 찾는 중이면, 우리 영주님이 정말 좋습니다.”

세금을 낮춰주고, 씨 좋은 수퇘지와 건강한 암퇘지를 분양해주고, 판매처도 알아봐 주었다. 천한 돼지치기에게 과분한 배려와 관심이었다.

“우리 기사님하고 똑같네요? 이히힛! 이힛!”

로벨은 얼큰하게 취한 마녀 키르케를 가리키고 재우라는 시늉했다. 외팔이 더치가 씨익 웃으며 뒤통수 때리는 시늉했다. 로벨은 고개를 젓고 정중히 대할 것을 요구했다. 외팔이 더치는 혀를 차고 마녀 키르케를 어깨에 얹었다.

“와! 난다! 난다! 기사님! 제가 날아요!”

“...미안해.”

로벨은 촌장 부자에게 사과하고 대화를 이어갔다.

“까마귀 마을이 어디야?”

촌장 부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가까운 곳의 흉문을 모를 리 없었다.

“여기서 북쪽으로 반나절 정도 가면 도착합니다. 그런데 저기...”

“고블린의 습격을 받았지?”

“예예. 이제 가 봐야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확인할 게 있어.”

로벨은 마녀가 먹고 남긴 과일주를 살폈다. 달짝한 냄새가 역할 정도였다. 내일 숙취로 고생 좀 할 듯했다. 촌장 부자가 서로 눈치 보며 말했다.

“그분들도 그리 말씀하셨지요.”

“그분?”

“엊그제도 귀한 분이 찾아와 까마귀 마을을 물었습니다요.”

“그게 누구야?”

로벨은 술병을 치우고 흐룬팅에 오른손을 올렸다. 촌장은 안 좋은 기억력을 돕느라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옛 신의 사제님이셨습니다. 그, 그, 뭐라더라? 아! 맞습니다! 저스티스! 저스티스 기사단이라 했습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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