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기사단
118화. 기사단
“우웨에엑!”
로벨은 우렁찬 오바이트 소리에 한숨을 쉬었다. 외팔이 더치와 허풍쟁이 제이콥이 못마땅한 얼굴로 마녀 키르케의 등을 두드렸다. 마녀 키르케는 더욱 격하게 쏟아냈다. “꾸우에엑!”
“나참. 술도 약하면서 왜 그리 마시오?”
“마, 맛있으니까...”
마녀 키르케는 지근거리는 머리와 울렁거리는 위장을 가지고 젖은 짚단처럼 수레 난간에 걸쳐졌다. 로벨은 마녀의 고깔모자를 탐내는 전투마를 제지했고, 허풍쟁이 제이콥은 세상사에 초탈한 농마를 재촉했다. 외팔이 더치가 돼지 뒷다리 햄을 큼직하게 썰어 쩝쩝거리며 물었다.
“기사 나리, 모몬트 남작을 먼저 만나야하지 않습니까?”
로벨은 수레로 몸을 기울여 날렵하게 햄을 빼앗은 후 말했다.
“소문이 사실인지 확인해야 해.”
“어떻게 말입니까?”
“글쎄? 가보면 알겠지.”
외팔이 더치는 계획성이 없다고 투덜거렸다. 그러나 로벨은 햄을 뺏겨서 투덜거린다고 생각하고 남은 햄도 빼앗았다.
촌장 부자의 말대로 반나절이 지나자 까마귀 마을이 나타났다. 표지판이 없어도 확실했다. 잿더미가 된 집과 썩어가는 시체가 가득한 마을이 또 있을 리 없었다.
마을 입구에서 광장까지 시체가 즐비했다. 그중 온전한 시체는 하나도 없었다. 늑대가 팔다리를 물어가고, 까마귀가 눈, 코, 혀 등을 파먹어서 남아 있는 것은 몸뚱이뿐인데, 그나마도 쥐가 내장이 헤집어서 보기가 좋지 않았다.
“욱...”
마녀가 수레 밖으로 몸을 돌렸다. 숙취 때문인지, 악취 때문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로벨은 전투마가 시체를 밟지 않게 조심히 몰았다. 불에 그슬린 시체와 구더기가 들끓는 시체 중 어느 쪽을 더 조심해야 할지 의문이었다. 외팔이 더치가 껄끄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시체 수거를 안 했나?”
“고블린이 언제 나타날지 모르니까.”
로벨 일행의 대답이 아니었다. 외팔이 더치가 손도끼를 꺼내 경계했다.
숯덩이가 된 마을창고 뒤에서 몇몇 사람이 나타났다. 정오 햇살에 반짝이는 풋 컴뱃 아머와 새것처럼 깨끗한 메이스가 적어도 도적떼는 아니었다. 만약 도적이라면 갑옷 팔고 땅 사서 소작 붙이는 쪽을 추천할 것이다.
‘저스티스 기사단.’
기사단(Order)은 이름 그대로 수도회(Religious Order) 소속이다. 옛 신의 교단을 등에 업고 있어서 아무리 기사(Knight)라도 상대하기가 껄끄러웠다.
귀밑에 새치가 희끈희끈한 기사단원이 외팔이 더치를 훑어보며 말했다.
“너희는 누구지? 무장을 봐서 용병...”
그러다 고상한 전투마를 탄 곱상한 로벨을 보고 뒷말 삼켰다.
“경은?”
허풍쟁이 제이콥이 잽싸게 소개했다.
“로드릭 가문의 당주, 로벨 로드릭 남작님이십니다.”
“로벨 로드릭 남작... 포비아 왕국 그랜드 챔피언이시군.”
로벨을 기다린 것은 아닌 듯 긴장이 조금 풀렸다. 로벨은 예의상, 그리고 분위기상 마주 질문했다.
“그러는 경은 누구시오?”
“교황 폐하의 명으로 파견된 저스티스 기사단 제2소대장 더글라스 무리엘이오.”
‘무리엘’은 옛 신의 12천사 중 하나이니, 가문 이름일 리 없다. 출신을 버리고 성명(聖名)을 받은 자, 즉 고위사제였다.
옛 신의 교단의 위세가 예전만 못하다하나, 교황의 최측근이면 일개 지방 귀족이 함부로 대할 신분이 아니다. 로벨은 자세를 고치고 신중히 대했다.
‘깁스 자작령의 늙은 사제와 신분이 달라.’
상대방이 어려운 것은 더글라스 경도 마찬가지였다. 옛 신의 위엄이 사라진 시대에 옛 신의 기사는 왕과 왕의 기사들에게 외지인이고 외부인이며 귀찮은 참견꾼이었다.
‘로드릭 가문은 볼탄 반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세력이다. 밉보여서 좋을 것이 없다.’
두 사람의 생각이 일치하니 예의 바르고 정중한 대화가 이어졌다.
“정의와 심판을 수호하는 저스티스 기사단이 그냥 오지는 않았을 테고, 혹시 사악한 자를 쫓는 중이오?”
“그리 짐작하는 것을 보아 우리와 같은 의심을 가진 듯 하오만.”
“악마추종자?”
“제대로 찾아온 것이 맞소.”
이만하면 충분히 부드러운 대화였다. 마녀 키르케의 지팡이와 고깔모자가 등장하기 전까지만 말이다. 더글라스 경의 부하 하나가 컨틀렛으로 수레를 가리키고 비명처럼 소리쳤다.
“마, 마, 마녀닷!”
기사단과 마녀의 피비린내 나는 관계는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저스티스 기사단 3인이 일제히 무기를 뽑았다. 울퉁불퉁한 메이스와 뾰족뾰족한 모닝스타가 무시무시했다. 외팔이 더치와 허풍쟁이 제이콥은 잇소리 내며 핸드 액스와 헌팅 나이프를 뽑았다. 그러나 이곳에 시체를 더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만!”
“멈춰라!”
로벨과 더글라스 경이 동시에 소리쳤다. 외팔이와 허풍쟁이는 즉시 무기를 거뒀지만, 저스티스 기사단은 그러지 않고 머뭇거렸다. 울프 용병단이 저스티스 기사단보다 기강이 잘 잡혀있었다. 더글라스 경은 부하의 태도에 화가 나서 다시 노성을 질렀다. 성직을 수행하는 사람답지 않은 단어와 동작이 오간 후, 간신히 처음 분위기로 돌아올 수 있었다.
“로벨 로드릭 남작, 저 마녀는 무엇이오?”
로벨은 기가 팍 죽은 저스티스 기사단을 애써 외면하고 말했다.
“이 아이는 내 가솔이오.”
“그 복장은... 정말 마녀인 것이오?”
“내 가문의 명예를 걸고 맹세하오. 이 아이와 이곳의 일은 관련이 없소.”
로벨은 흐룬팅 손잡이를 잡았다. 더글라스 경은 로벨의 눈을 가만히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경의 맹세를 믿겠소.”
로벨은 흐룬팅에서 손을 떼고 전투마에서 내렸다. 더글라스 경은 부하들에게 기다리라는 손짓을 하고 로벨 옆에서 걸었다.
“고블린이 불을 다루는 것은 늑대가 양을 키우는 것만큼이나 터무니없는 일이오. 아, 경을 비유한 말이 아니오.”
로벨의 별명을 들은 적 있는 모양이다. 로벨은 부드러운 미소로 괜찮다고 말했다.
“고블린을 부리는 자가 나와 내 주군에게 크나큰 피해를 주었소.”
“무슨 뜻인지 알고 있소. 교황 성하께서도 이곳 일을 의심하시고 계시오. 그래서 우리 기사단이 파견된 것이오.”
“지프 모몬트.”
로벨은 의심 가는 자를 지목했다. 더글라스 경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 자를 지목한 이유가 있소?”
“의심할만한 정황이 있소.”
로벨은 볼프 사트로 후작이나 주드 맥켈런 남작 등의 구체적인 정황은 말하지 않았다. 그래도 더글라스 경은 납득했다.
“이 땅의 주인이 모몬트 가문이니 심증을 둘만 하오. 허나 증거가 없소. 사트로 후작의 봉신을 무작정 심문할 수 없지 않으니...”
“그래서 이곳을 수색 중이셨군.”
“의심만 깊어졌을 뿐, 무엇 하나 밝혀낸 것이 없소.”
로벨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았다. 얼굴 근육을 120% 사용하며 기 싸움하는 울프 용병단과 수레 난간 위로 눈만 빼꼼히 내민 마녀 키르케가 보였다.
“그렇다면 본인이 증거를 모아주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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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지프 모몬트 경을 만나기 전에 한바탕 일을 치러야 한다고 고백했다. 외팔이 더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쉬었고, 허풍쟁이 제이콥은 전쟁만 아니면 괜찮다고 애써 위안 삼았다.
“전쟁 맞아.”
로벨은 흉갑을 고쳐 입고 워 해머와 흐룬팅을 아래로 끌어내렸다. 전투를 준비하는 모양새라 용병들은 덩달아 긴장했다.
“설마? 또?”
“또 라니?”
“이 인원으로 성을 공격할 생각은 아니시죠?”
로벨은 어이가 없어 웃었다.
“그런 짓을 어떻게 해?”
‘그런 짓을 몇 번이나 했잖아!’
허풍쟁이 제이콥은 턱밑까지 올라온 말을 삼키고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졌다.
“그럼요?”
“소문을 낼 거야.”
“소문요?”
“로벨 로드릭이 이곳에 있다고.”
로벨이 사트로 시티로 갈 때 고블린을 모아 삼일 밤낮으로 공격한 악마추종자가 있었다. 마녀 키르케와 허풍쟁이 제이콥은 기억을 떠올리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자가 지프 모몬트 경이라면 이번에도 반응이 있을 거야.”
허풍쟁이는 어떻게 소문을 낼지 고민했으나 쓸데없는 고민이었다. 로벨 일행이 ‘이 사람이 로벨이다!’ 떠들고 다닐 필요가 없었다. 저스티스 기사단원이 흩어져 로벨 로드릭 남작을 보았노라 소문내었다.
옛 신의 기사의 말을 의심할 사람은 많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옛 신과 사이가 안 좋은 악마추종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만 하루가 지나자 까마귀 마을에 고블린 무리가 나타났다.
“이 정도면 악마추종자가 아니라 기사 나리 추종자가 아닐까?”
“기사 나리가 악마일지도... 매번 이러는 것을 보면 가능성이 있어.”
외팔이 더치와 허풍쟁이 제이콥은 담장과 기둥 뒤에 숨어서 속삭였다. 그러나 오래 떠들지 못했다. 고블린 한 마리가 코를 벌렁거리며 다가와 숨을 죽였다.
한편, 마을 창고에 숨은 로벨은 전투마가 소리 내지 않게 살살 달래며 고블린의 숫자를 확인했다.
‘열다섯 마리?’
작은 영지치고 상당히 많았다. 로벨은 영지 경영자로서 의문을 가졌다.
‘평소에 뭘 먹고 사는 거지?’
로벨은 등자를 밟고 안장에 올랐다. 전투마가 싸움을 예감하고 거친 콧김을 뿜었다.
“오늘도 잘 부탁해.”
“푸르릉!”
로벨은 전투마 갈기를 오른쪽으로 빗겨주고 창고 벽에 기대어 놓은 라이트 랜스를 잡았다. 농기구로 급조한 랜스지만, 로벨의 기술과 전투마의 힘이 더해지면 무시무시한 살상병기가 될 수 있었다.
‘우선 한 마리 해치운다.’
“히얏!”
로벨은 전투마의 옆구리를 걷어차며 랜스를 고리에 걸었다. 오랫동안 함께한 전투마는 명확한 지시가 없어도 정확히 표적을 선별했다. 무리 끄트머리에 위치한 얼빠진 고블린을 향해 포효했다.
“히이이이잉-!”
로벨은 상체에 힘을 풀고 하체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창끝을 세심히 조준했다.
랜스 차칭의 위력은 말의 속도와 무게에서 나온다. 랜스를 쥔 기사는 위력이 잘 전달되도록 조정만 하면 된다. 그랜드 챔피언인 로벨은 그 방면에서 달인이었다.
평평하게 펴낸 쇠스랑이가 고블린의 목을 꿰뚫었다. 몸이 가벼운 고블린은 꼬치가 되어서 10여 피트를 끌려가다 목뼈가 부러짐과 동시에 떨어져나갔다. 로벨은 한 번의 격돌로 못쓰게 된 랜스를 팽개쳤다. 그래도 급조한 것치고 훌륭하게 써먹었다. 고블린 무리가 혼란에 빠졌다.
“꾸이잇!”
로벨은 전투마에서 뛰어내려 워 해머와 흐룬팅을 뽑았다.
“꾸잇! 하나! 인간 하나!”
“그렇지 않아.”
로벨은 무기를 좌우로 늘어트리고 느긋하게 접근했다.
“뀌힛! 죽여라!”
가장 용감한 고블린이 공격을 결심할 때였다. 외팔이와 허풍쟁이가 담장을 뛰어넘어 고블린의 뒤를 습격했다. 기선이 제압된 상태에서 배후까지 뺏기자 수적 우위가 쓸모없어졌다. 로벨은 워 해머를 비틀어 뾰족한 가시로 고블린을 패고 흐룬팅으로 목을 잘랐다.
“죽이면 안 돼! 생포해!”
“...우리 기사 나리는 언행일치란 말을 모르나 봐.”
로벨은 외팔이의 불평을 못 들은 척하고 덤비는 고블린을 차례로 도륙했다. 가장 운이 좋은 한 마리만 살아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