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오우거
116화. 오우거
로벨은 하품을 늘어지라 하고 소드 벨트를 찾아 허리에 감았다.
눈을 뜨긴 했지만 앞을 보진 않았다. 의식이 들어왔다 나갔다 반복했다. 흔한 말로 비몽사몽 중이었다.
“으으...”
빈말로도 상쾌한 아침은 아니었다. 고스트와 한 집에서 밤을 보낸 것이 처음이었다. 한밤중에 인기척을 느껴서 깨어나면 허연 것이 머리맡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연히 잠을 잘 수 없었다. 로벨이 부스럭거리자 마녀 키르케가 활달하게 인사했다.
“기사님! 와아, 안녕히 주무셨어요?”
로벨은 마녀 키르케를 부럽게 쳐다보았다. 신경이 굵어서 고스트 일가족이 심야 파티를 벌여도 쿨쿨 잘만 잘 것이다.
“아니.”
로벨은 솔직하게 대답하고 다른 일행을 찾았다.
외팔이 더치는 물을 길어 말들에게 먹이는 중이고, 허풍쟁이 제이콥은 어디서 삽을 찾아와 앞마당을 파는 중이었다. 로벨이 집 밖으로 나오자 모자를 살며시 벗고 인사했다.
“기사 나리, 좋은 아침입니다.”
“어딜 봐서?”
잠을 설친 것은 용병들도 마찬가지였다. 외팔이 더치가 뺨을 긁적이고 말했다.
“출발준비 마쳤습니다. 언제 갑니까요?”
“아침 먹고.”
로벨은 일행을 모아 비스킷 서너 조각과 사과 몇 알로 간단히 끼니를 해결했다. 검소하다 못해 초라한 식단이었다. 오늘 중에 마을을 찾지 못하면 내일은 더욱 초라해질 것이다.
로벨은 사과를 반으로 쪼개 전투마와 농마에게 나눠 먹이고 갈기를 쓰다듬었다. 허풍쟁이 제이콥이 입맛을 다지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꼬마 유령이 안 보입니다요?”
“아침이잖아?”
고스트는 해가 뜨자 소리 없이 사라졌다. 외팔이 더치가 진저리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지금 출발합지요?”
“어디로?”
“그야 모몬트 성을 찾아서...”
로벨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허리를 끊었다.
“그 전에 괴물을 잡아야 해.”
마녀 키르케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러나 이기심과 자기 보신을 세상 사는 지혜로 포장한 용병들이 반대했다.
“그 괴물이 어디 사는지 알고 말입니까?”
“이곳 영주가 할 일이잖습니까요? 저희 일이 아닙니다요.”
로벨은 정의와 대의를 앞세우는 숱한 영웅들이 그러하듯 타인의 의견을 묵살했다.
“잔말 말고 따라와.”
@
로벨 일행은 전투마와 짐마차를 끌고 괴물을 찾아갔다.
괴물은 인간의 눈에 띄지 않는 동굴이나 숲 속에 살기 때문에 찾기가 까다롭다. 그러나 노련한 용병과 신비한 마녀가 함께 있다면 사정이 달랐다.
“땅이 무르고 굴곡이 많으니 땅굴이 있을 겁니다.”
“저쪽이에요. 저쪽에 사념체가 많아요.”
로벨은 컨틀렛과 폴드런을 점검하고 워 해머를 뽑았다.
“조용히 접근하자.”
외팔이 더치와 허풍쟁이 제이콥도 로벨을 따라 단병기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오래 걸리지 않아 의심할만한 땅굴을 찾아냈다. 곰 가족이 오순도순 살 것 같은 구멍이라 못 보고 지나치기가 힘들었다.
“여기 맞아?”
마녀 키르케가 떡갈나무 지팡이를 꼭 쥐고 끄덕였다.
“여기에요. 여기서 망자들이 비명 지르고 있어요.”
괴물의 소굴을 찾았지만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얼마나 깊은지, 얼마나 위험한지 알지 못하니 섣불리 내려갈 수 없었다.
외팔이 더치가 손도끼로 수염을 긁으며 제안했다.
“불을 지를까요?”
허풍쟁이 제이콥이 비웃었다.
“토끼 잡는 것도 아니고 무슨 불이야?”
“그럼 좋은 생각 있냐?”
“살집이 많은 놈을 내려보내서 위로 유인하는 것이 어떻습니까요?”
“나? 나 말하는 거냐?”
두 용병은 시답지 않은 소리를 주고받다가 욱해서 멱살 잡았다. 결국 마녀 키르케가 중재했다.
“아 좀! 시끄럽게 굴지 마요! 괴물이 뛰쳐나오겠네요!”
로벨은 마녀의 말에서 모순을 느꼈다.
“...그럼 좋은 거잖아?”
서로의 멱살을 잡은 용병과 용병 사이에 대롱대롱 매달린 마녀가 로벨을 돌아보았다.
“그렇죠?”
“좋아. 좀 더 싸워. 소란 피우면 밖으로 나오겠지.”
로벨은 계속하라고 손짓하고 땅굴을 관찰했다. 외팔이 더치와 허풍쟁이 제이콥은 막상 싸우라고 하니까 싸울 맛이 안 나는지 슬그머니 멱살을 풀었다. 로벨이 눈살을 찌푸리고 돌아보자 어색하게 소리 질렀다.
“내가 그리 만만하게 보이니? 삐쩍 마른 내 친구야?”
“덩치 큰 게 전부가 아니란다. 곰 같은 소대장님아.”
삼류도 안 되는 어설픈 연극이지만 목소리가 커서 효과가 있었다. 땅굴에서 나지막한 울림이 들리고 땅바닥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크고, 무겁고, 사나운 느낌이었다. 로벨 일행은 당황해서 몇 걸음 물러났다.
“머, 뭐야, 고블린이 아니잖아?”
“설마 트롤인가?”
고블린도, 트롤도 아니었다. 땅굴 밖으로 큼지막한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인간하고 비슷하지만 결코 인간이 아니었다. 황갈색 피부에 누런 털이 가득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거대했다. 엄지손가락 굵기가 손목만 하고, 팔뚝 굵기가 허벅지만 했다.
“거, 거인이닷!”
“아냐! 거인이 아니야!”
“마, 망할! 오우거입니다요!”
머리통이 올라오고, 어깨가 따라왔다. 머리가 작지 않지만 어깨 근육이 지나치게 우람해서 상대적으로 조막만 하게 보였다. 이두박근과 삼두박근이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저게... 오우거라고?”
“우아앗! 정말 괴물이잖아!”
로벨 일행은 크기에 압도되어 뒷걸음질했다. 지상으로 완전히 올라오자 키가 15피트 정도 되었다. 아니, 키도 키지만 부피가 어마어마했다. 성탑이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도, 도, 도망칩시다!”
“어디로? 저 덩치를 따돌릴 수 있을 거 같아?”
로벨은 워 해머를 왼손으로 옮기고 흐룬팅을 뽑았다.
“해치우자.”
“저, 저런 괴물을요?”
“정신이 없잖아. 지금이 기회야.”
로벨의 판단은 정확했다. 오우거는 오랜만에 마주한 햇빛 때문에 눈을 뜨지 못했다. 더불어 막 잠에서 깨어나 움직임이 둔했다.
“간다!”
로벨은 용감무쌍하게 달려가 오우거의 발등을 찍고 앞으로 구르며 발목을 베었다. 눈을 못 떠서인지, 아니면 덩치가 커서인지 반응이 느렸다.
쿠오오오-!
오우거는 피가 뿜어져 나오는 오른발을 번쩍 들고 고함질렀다. 고막이 아플 정도로 커다란 괴성이었다.
“에라이!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젠장! 난 둘 다 싫은데?”
외팔이 더치와 허풍쟁이 제이콥도 달려들었다. 그러나 타이밍이 안 좋았다. 오우거가 앞으로 쓰러지며 오른손을 뻗었다. 기둥이 뿌리째 날아오는 느낌이었다.
“우악!”
외팔이 더치는 바클러를 올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체급 차이를 어쩌지 못하고 붕 떠서 3피트가량 날아갔다.
“더치잇! 이 자식! 더치를 죽이다니!”
“나 안 죽었어!”
허풍쟁이 제이콥은 헌팅 나이프를 빙그르 돌려서 과일 깎듯이 오우거의 손목을 도려냈다. 인간처럼 붉은 핏물이 치솟았다. 오우거는 발작하듯 허풍쟁이를 후려쳤다. 허풍쟁이는 외팔이보다 가벼워서 더 멀리 날아갔다.
“우와아악!”
로벨은 공놀이에서 공을 담당하는 용병들을 안쓰럽게 쳐다보았다. 그러나 도와줄 수 없었다. 오우거가 몸을 웅크린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다.
“하앗!”
로벨은 오우거의 장딴지를 밟고 등으로 뛰어올랐다. 흐룬팅을 반 바퀴 돌려서 역수로 쥐고 근육 사이로 울퉁불퉁 튀어나온 척추를 겨냥했다.
‘기회는 두 번 없어!’
로벨은 체중을 실어 흐룬팅을 박아 넣었다. 오우거의 근육이 아무리 질겨도 로벨의 힘과 흐룬팅을 날카로움을 버틸 정도는 아니었다. 살이 찢어지고 척추가 끊어졌다.
쿠오오오오오오-!
오우거가 몸부림치며 일어났다. 척추가 상하면 쓰러져야 정상인데, 인간과 신체 구조가 다른지 도리어 날뛰었다. 로벨은 오우거 등에 매달려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고작 등인데도 전투마 안장보다 높았다.
‘떨어지면... 위험하겠지?’
로벨은 흐룬팅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오우거의 상처를 후벼 팠다. 오우거는 끔찍한 괴성을 지르며 로벨을 붙잡으려 했으나 과도한 근육 탓에 팔이 등에 닿지 않았다. 외팔이 더치가 끙끙거리면서 한마디 했다.
“저 멍청한 괴물 놈! 그냥 뒤로 누우면 되잖아?”
“쉿! 쉿!”
누가 더 멍청한지 의심되는 순간이었다. 오우거는 잠깐 멈칫하더니 외팔이 더치의 조언대로 몸을 뒤로 기울였다. 로벨은 흐룬팅을 놓고 뛰어내려 재빨리 몸을 굴렸다. 무릎과 어깨가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쿵-!
거목이 쓰러진 것처럼 땅이 울렸다. 로벨은 워 해머를 주워서 달려들었다. 어린아이 주먹만 한 오우거 눈이 보였다. 외팔이 더치와 허풍쟁이 제이콥도 부러진 팔다리를 끌며 필사적으로 덤볐다. 오우거가 쓰러진 지금이 끝장낼 기회였다. 손도끼와 헌팅 나이프가 피를 뿌렸다.
쿠오오-! 쿠오오오오-!
오우거의 비명이 애처롭게 울려 퍼졌다.
@
로벨은 피에 젖은 워 해머를 팽개치고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2~3분 남짓한 싸움에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오우거의 시체는 동산이 되고, 오우거가 흘린 피는 웅덩이가 되었다.
외팔이 더치가 박살난 바클러를 팽개치고 환호했다.
“내가! 내가 오우거를 해치웠다!”
“어허? 우리가 해치웠지.”
허풍쟁이 제이콥이 부러진 왼팔을 움켜쥐고 정정했다. 그러나 흥분한 외팔이 더치는 신경 쓰지 않았다.
“오우거 슬레이어라고! 오우거 슬레이어! 으하하! 어린 집사한테 자랑해야지.”
로벨은 마녀 키르케를 찾았다. 오우거에게 놀란 농마를 달래느라 진땀 빼고 있었다. 수레에 묶인 탓에 멀리 도망가지 못했다.
“내 말은?”
농마는 무사한데, 전투마가 보이지 않았다. 자유롭게 뒀더니 자유롭게 도망쳤다.
로벨은 절뚝거리며 마녀 키르케에게 다가갔다. 마녀가 울먹이며 고백했다.
“기사님, 기사님 말이 사라졌어요.”
“겁먹어서 그래.”
로벨은 콧바람을 불러일으키는 농마를 다독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 멀리 갈기를 휘날리며 뛰어가는 전투마 꼬랑지가 보였다. 잠깐 사이 멀리도 도망갔다.
“...쉴 틈이 없군.”
로벨은 절뚝절뚝 걸어서 1마일이나 도망간 전투마를 잡아왔다. 혼쭐을 내고 싶지만 몸이 아파서 나중으로 미뤘다. 전투마와 농마를 이용해서 오우거의 시체를 뒤집었다. 오우거 등짝에 꽂힌 흐룬팅도 무사히 회수할 수 있었다. 그렇게 뒷정리가 끝나자 어느덧 점심때가 훌쩍 지났다. 로벨 일행은 상처를 치료할 겸 농장으로 되돌아갔다.
마녀 키르케가 절반쯤 허물어진 농가를 향해 두 팔 벌렸다.
“와아! 하루 지냈을 뿐인데 여기가 집 같아요!”
“마녀와 폐가라. 잘 어울리긴 하오.”
몸이 성치 않은 기사와 용병들은 바람만 안 들면 충분하다는 태도로 대충 너부러졌다. 외팔이 더치가 짚더미에 코를 박고 속삭이듯 말했다.
“오우거가 죽었으니까, 유령도 사라졌겠지요?”
“글쎄... 오늘 밤에 알게 되겠지.”
“으으으으...”
로벨은 피로를 떨치고 워 해머와 흐룬팅의 핏물을 닦았다. 무기가 손질되어있지 않으면 불안했다. 그때, 허풍쟁이 제이콥이 갑자기 소리 질렀다.
“세상에! 오우거라니! 이게 말이 됩니까?”
로벨은 얼굴을 찌푸리고 물었다.
“안 될 건 뭐야?”
“볼탄 반도는 본래 몬스터 청정지역입니다요! 아니, 뭐, 아주 안 나온 것은 아니지만, 끽해야 그렘린 정도였죠! 고블린, 구울, 오크 따위가 나온 것도 이상한데, 오우거까지 나타나다니요!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요?”
로벨은 깨끗해진 흐룬팅을 창가에 비추며 말했다.
“악마추종자 때문이 아닐까? 출몰시기가 비슷하잖아.”
“가만, 처음 몬스터가 출몰한 시기가 언제죠?”
로벨도 기억나지 않았다. 3년 전인지 4년 전인지 가물가물했다. 로벨은 흐룬팅을 칼집에 꽂아 넣고 처음 몬스터와 조우한 날을 떠올렸다.
마녀 키르케를 만나러 북쪽 산에 오를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