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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101화 (101/605)

101화. 저항

101화. 저항

로벨은 창자가 반쯤 흘러나온 기사 종자 호그와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아론다이트와 볼살이 파르르 떨리는 볼프 후작의 기사를 번갈아 보고 함정에 빠졌음을 깨달았다.

볼프 후작의 기사가 더듬더듬 말했다.

“이게 무슨...”

“잠깐! 지금 무슨 생각하는지 아는데 오해요.”

로벨은 손을 내밀어 기사의 말을 막았다. 그러나 로벨의 손에는 피 묻은 칼이 들려있었다. 의심은 확신으로, 혼란은 분노로 바뀌었다.

“로벨 로드릭 남작! 감히 후작님의 종자를 살해하다니! 미친 것이오?”

“내가 죽인 것은 맞는데, 내 의도가 아니라, 사실 따지고 보면 정당방위...”

“변명은 집어치우시오! 무기를 버리고 당장 투항하시오!”

기사가 롱소드를 뽑자 병사들도 허둥지둥 숏 스피어와 워 해머를 끄집어 올렸다. 아무래도 말이 통할 것 같지 않았다.

로벨은 짧은 순간 갈등했다.

‘그냥 잡혀줄까?’

볼프 후작의 기사 종자면 명망 있는 가문의 장자일 테고, 시비가 붙으면 쉽게 풀려나지 못할 것이다. 아니,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이곳 검은 성은 악마추종자의 소굴이었다. 감옥 안에서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른다. 생각은 깊지만, 행동은 짧았다.

“미안하오!”

로벨은 사과를 기합처럼 하고 선제공격했다. 이제 빼도 박도 못하게 되었다.

“정녕 미친 것인가!”

기사가 롱소드를 머리 위로 올려 로벨의 수직베기를 막았다. 볼프 후작을 측근에서 모시는 기사라 녹록치 않았다. 그러나 전설의 무기를 가진 전설적인 기사를 막을 수준은 아니었다.

로벨은 아론다이트가 튕겨나가자 반동으로 몸을 비틀며 왼손의 흐룬팅을 휘둘렀다. 기사는 롱소드를 내려 흐룬팅까지 막았으나, 거기서부터 실수했다.

에르나 왕국 그랜드 챔피언과 결투할 때도 그랬지만, 로벨은 무기를 버리는데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

챙!

로벨은 흐룬팅이 가로막히자 그대로 놓아버리고 주먹을 날렸다. 처음부터 그럴 작정으로 휘두른 흐룬팅이었다.

쇠징이 촘촘히 박힌 건틀렛이 기사의 턱을 올려쳤다.

“크억...”

횃불 그림자 위로 작고 하얀 것이 튀어 올랐다. 어금니인지 송곳니인지 궁금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나?’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양손으로 잡고 도끼질하듯 좌우로 휘둘렀다. 지체 높은 기사가 단 3합 만에 나가떨어지는 것을 본 병사들은 기세에 눌려 공격할 시도를 하지 못했다.

로벨은 어정쩡하게 내민 창대를 부러트리고, 횃불을 휘젓는 병사의 배를 펑! 소리 나게 걷어찬 후 외쳤다.

“허풍쟁이! 발가락! 길을 연다! 따라와!”

로벨은 땅바닥을 굴러 흐룬팅을 주웠다. 그때, 이빨 두 개와 아래턱이 박살 난 기사가 정신을 차리고 달려들었다.

“이 노오옴!”

기사는 롱소드를 집어 던지고 몸을 날렸다. 검으로 이길 수 없으니 힘으로 찍어 누르겠다는 생각이었다. 볼프 후작의 기사답게 용맹했다.

“기사 나리! 위험합니다!”

로벨은 기사의 체중에 밀려 뒤로 넘어갔다. 아니, 넘어가 주었다. 로벨은 땅에 누우면서 기사의 겨드랑이를 잡고 사타구니를 걷어차 머리 위로 넘겼다. 기사는 돌진속도 + 로벨의 던지기로 벽에 꼬라박았다. 쿠웅-! 사람이 부딪친 소리치고 웅장했다.

로벨은 기사를 잠재우고 허리 반동으로 벌떡 일어났다. 갑옷 무게를 줄인 탓에 몸이 가벼웠다.

“위험하다고?”

“...저쪽 기사 나리한테 한 말입니다. 인간 같지 않은 우리 기사 나리한테 태클을 시도하다니!”

로벨은 피식 웃고 아론다이트와 흐룬팅을 칼집에 꽂아 넣었다. 병사 중 절반은 기절한 기사를 보살피러 뛰어갔고, 나머지 절반은 로벨을 삼면에서 포위했다.

“여, 여기서 나갈 수 없다!”

“고작 세, 셋이서 후작가와 맞설 작정이냐! 하, 항복해라!”

병사들은 고작 셋에게, 정확히는 로벨 한 사람에게 겁을 먹고 주춤주춤 물러났다. 두어 명 베면 알아서 도망치겠지만, 아무래도 내키지 않았다.

“키르케, 측문 위치 기억해?”

“예? 예예!”

“거기로 도망칠 거야. 잘 따라와.”

로벨은 땅에 떨어진 횃불을 주웠다. 북쪽 탑을 밝히는 유일한 조명이었다. 로벨의 횃불을 높이 들자 병사들이 움찔해서 반걸음 물러났다. 로벨은 병사들의 위치를 눈여겨본 후 횃불을 지하 계단 깊은 곳으로 던졌다. 별빛조차 들지 않는 탑 내부는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맹수와 마주한 심정으로 버티고 있던 병사들은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불! 불을 밝혀라!”

“으악! 누가 쳤어!”

“출구다! 출구를 막아!”

로벨과 울프 용병단은 병사들을 두드리며 길을 열었다. 앞이 안 보이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한곳에 모인 로벨 일행이 산개한 병사들보다 유리했다. 마녀 키르케도 로벨을 돕기 위해 떡갈나무 지팡이를 휘둘렀다.

딱!

“크아악! 누가 뒤에서 때렸어!”

마녀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상하게 허풍쟁이 목소리처럼 들렸다. 혹시나 해서 반대편으로 휘두르자 발가락이 소리쳤다.

“커억! 이놈들이 저항한다! 빨리 나가!”

마녀는 슬그머니 지팡이를 숨기고 출구로 냅다 뛰었다.

@

로벨과 마녀 키르케는 측문 위치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로벨은 전투마를 몰아 한 발 먼저 도착했다. 빗장을 치우고 측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마녀 등을 기다리며 상황을 정리했다.

‘기사 종자 호그도 악마추종자의 일원일까?’

그럴 가능성은 없었다. 기사 종자 호그가 악마추종자라면, 로벨을 북쪽 탑으로 안내하지도, 순순히 내보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럼 왜?’

로벨은 볼프 후작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림 리퍼와 사람을 조종하는 마법, 마녀 키르케의 표현을 빌리면 심령을 제압하는 마법이 있었다.

‘인간을 조종할 수 있다면, 에릭 공작에게 누명을 씌우는 것도 간단했을 거야.’

“기사님! 기사님! 꺄아악!”

마녀 키르케와 울프 용병단이 뛰어왔다. 혼자 오면 참 좋았을 텐데, 외롭지 않게 추격대를 줄줄이 달고 왔다.

“하여간.”

로벨은 전투마 위에 올라 아론다이트를 뽑았다.

“뛰어!”

사람에게 한 말인지, 전투마에게 한 말인지 헷갈렸다. 아무튼 양쪽 다 뛰어서 순식간에 엇갈렸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랜스처럼 쭉 뻗고 기겁하는 병사를 덮쳤다.

콰광!

실제로 난 소리는 ‘퍽!’ 이나 ‘짝!’ 이지만, 머릿속에서 울리는 소리는 천둥하고 비슷했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낮게 휘둘러 엉성하게 내민 창을 후려쳤고, 전투마는 몽둥이나 다름없는 앞무릎으로 병사의 가슴을 걷어찼다. 뜀박질을 잘해서, 혹은 공명심이 많아서 앞장선 불행한 병사는 인마일체 차칭에 붕 떠서 날아갔다. 돌격거리가 짧아 죽지는 않았지만, 부러진 갈비뼈를 맞추려면 한두 달은 요양해야 할 것이다.

“그랜드 챔피언! 저항하지 마라!”

로벨은 앞발을 높이 들고 투레질하는 전투마를 진정시키며 코웃음 쳤다.

“뭔가 착각한 거 같아.”

“뭣?”

“저항은 너희가 해야지.”

로벨은 고삐를 틀어 말머리를 옆으로 돌리며 아론다이트를 휘둘렀다. 로벨의 팔 길이와 아론다이트의 칼날 길이가 합쳐지자 범위가 상당했다. 병사들은 허둥거리며 물러났다.

“저, 저자도 사람이다! 말을 노려라!”

“사람이라면서 왜 말을 노려...”

로벨은 마녀 키르케 등을 힐끔 보고 말머리를 돌렸다. 용감한 병사가 전투마 엉덩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말을 키워본 적 없는 평민이라 가능한 용맹이었다. 말을 다룰 때 가장 위험한 곳이 말꽁무니였다.

“히이이잉-!”

전투마는 ‘감히 나를 노려?’ 의미의 콧소리를 내고 뒷다리를 번쩍 들어 병사를 후려쳤다. 1,600파운드 체중이 실린 발차기였다. 병사는 공성병기에 맞은 것처럼 동료들 품으로 나가떨어졌다. 진형이 와르르 무너졌다. 로벨은 곁눈질로 힐끔 보고 고삐를 아래로 휘둘렀다.

“이럇!”

로벨과 전투마는 마녀와 용병들이 빠져나간 측문으로 포탄처럼 날아갔다. 사트로 후작군은 욕설을 퍼부었지만, 두 발로 네 발을 따라잡기란 역시 어려웠다.

@

성 아래 빈민가는 구획 개념이 없었다. 자리가 나는 곳에 대충 판자를 엮어 집을 지었다. 그 때문에 길이 복잡하고 출구가 여러 곳이었다.

“저리 비켜!”

“길을 열어라!”

로벨 일행은 얄팍한 판자 너머로 들리는 사트로 후작군 목소리를 감상하며 진로를 바꿨다.

“후아... 십년감수 했네.”

허풍쟁이 제이콥이 갑옷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지금까지 별의별 미친 짓을 많이 했지만, 후작의 성에서 탈출하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응. 좋은 경험이야.”

로벨은 전투마를 다독이며 대꾸했다. 뒤통수로 따가운 시선이 날아들었다.

“왜 사람을 죽여가지고...”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요?”

“아니, 그게, 나도 당한 거야.”

로벨은 기사와 병사들에게 못한 해명을 수행원에게 늘어놓았다. 생판 남인 사트로 후작가 사람들과 달리 로벨의 주장을 믿어주었다.

“사람을 조종할 수 있다니, 이거 으스스한데요?”

“그런 힘이 있으면 볼프 후작을, 아니지, 국왕님을 조종하면 되잖습니까요? 그럼 권력이고 재물이고 여자고 다 가질 수 있을 텐데요?”

“글쎄... 아무나 조종 못하나 보지. 아니면 조종하는 시간이 짧거나, 단순한 명령밖에 못 내리거나...”

로벨 등은 유일한 마법 전문가 키르케를 보았다. 마녀는 팔짱을 끼고 손가락을 까닥였다.

“심령을 제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에요. 심지가 굳은 사람한테는 아무 효과가 없어요. 딱 하나 방법이 있다면...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을 때 마법을 거는 거죠. 그런데 인간 정신은 억지로 제압해도 오래 유지하지 못해요. 인간은 고블린과 달리 머릿속이 복잡한 생물이니까요.”

“정신적인 충격이라...”

로벨은 볼프 후작의 그림 리퍼 이야기를 떠올리고 납득했다. 기사를 참수한 것은 수행원의 심령을 제압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기사 종자 호그는 뭐 때문에 충격을 받은 거지?’

로벨의 의문은 당장 풀기 힘들었다. 골목 저편에서 성난 병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쪽이 아니다! 저쪽으로 가자!”

“이놈들! 그냥 보내지 않겠다!”

로벨 일행은 서로를 한번 보고 말없이 진로를 바꿨다. 허풍쟁이 제이콥이 나직이 속삭였다.

“이 시간이면 성문이 닫혔을 텐데요. 어디로 갑니까요?”

발가락 슈미츠가 묘안을 내놓았다.

“바다로 가는 것이 어떻습니까? 배를 타고 빠져나가면 못 잡을 겁니다.”

로벨이 깜짝 놀라 발가락 슈미츠를 보았다.

“너, 배도 몰 줄 알아?”

“전 못 합니다. 마녀 아가씨나 허풍쟁이가 할 줄 알면...”

마녀와 허풍쟁이가 동시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볼탄 반도 토박이들에게 많은 것을 기대했다.

로벨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결정했다.

“여관으로 가자.”

“여관이요? 위험하지 않습니까요?”

“저놈들이 생각이란 것을 할 줄 알면 여관부터 뒤질 텐데요?”

로벨도 그 정도는 짐작했다.

“아까는 말이 안 통할 상황이라 도망쳤지만,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

“어째서 말입니까요?”

로벨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쯤 볼프 후작 귀에 소식이 들어갔을 테니까.”

비슷한 일을 겪은 볼프 후작은 로벨의 진의를 믿어줄 것이다. 그러나 죽은 기사 종자 호그의 가문과 기타 봉신들은 그러지 않을 것이다. 운이 좋으면 피해보상, 운이 나쁘면 결투, 최악의 경우 전쟁도 고려해야 했다.

“기사님이 다시 올 걸 알고 꾸민 함정이에요. 정말 악질이에요. 모오옷된 마법사들!”

“...내 잘못이야.”

그러나 로벨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볼프 후작의 기사 종자가 자신의 명령으로 죽게 둘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로벨이 죽이게 되었지만.

“그럼 여관에서 사람을 기다리죠. 그 후작이란 작자 시원시원하게 생겨서 말귀 잘 알아먹을 겁니다.”

“전 아무래도 좋습니다. 저녁도 안 먹고 뛰어다녀서 죽겠습니다요.”

로벨은 허풍쟁이와 발가락의 투박한 위로를 받고 애써 웃었다.

“응. 일단 밥 먹고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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