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사자
102화. 사자
로벨 일행은 여관 ‘북극성’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막 잠든 여관주인과 주방장을 깨워서 당당히 저녁식사를 요구했다.
여관주인은 이를 갈았고, 주방장은 그보다 더한 칼을 갈았지만, 로벨이 가진 칼이 더 크고 더 무거워서 얌전히 닭 잡는데 사용했다.
여관주인은 졸린 눈을 비비며 식전 맥주를 대령했다.
“이 시간에 어디를 다녀오십니까?”
얼마나 대단한 일이기에 이리 귀찮게 하느냐는 질문이었다. 허풍쟁이 제이콥이 허풍쟁이란 별명이 무색하게 진실만 말했다.
“검은 성에 쳐들어가서 병사를 20명 정도 때려눕히고 도망 나온 길이오.”
“아, 그렇군요?”
여관주인은 대답하기 싫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얌전히 돌아섰다.
창밖으로 검은 성의 병사들이 우르르 달려가는 것을 보았지만, 로벨 일행과 연관을 짓지 않았다.
요리 솜씨는 좋지만 노름에 빠져서 곤란한 주방장이 닭 피를 빼며 투덜거렸다.
“오늘 뭔 날이우? 잠들 안 자고 다들 뭐한다요?”
“그러게 말이다. 어디 도적떼라도 나타났나?”
여관주인은 시끄러운 창문을 닫고 주방 구석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주방장이 방에 가서 자라고 권했지만 손님을 홀에 두고 잘 수 없다며 버텼다. 서비스 정신이 우수해서가 아니라 손님이 도망갈까 걱정해서였다. 그러나 그냥 자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주방장의 말대로 오늘은 이상한 날이 이었다.
로벨 일행이 푸짐한 닭고기를 앙상한 뼈무더기로 바꿔 놓을 때쯤 새로운 손님이 찾아왔다. 말울음이 들리고, 발소리가 다가오더니, 점잖은 노크 소리로 바뀌었다. 똑똑.
“예예! 나갑니다! 나가요!”
여관주인은 싹싹하게 정문을 열었다. 그리고 사신이라도 본 듯 기겁해서 머리를 조아렸다.
“어이구! 후작님!”
로벨은 의자 밖으로 한쪽 다리를 빼고 아론다이트 칼자루를 기울였다. 문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님으로 온 것이 아닐세. 누굴 좀 만나러 왔네.”
“저, 저희 여관에 말입니까?”
“로벨 로드릭 남작이라고, 키가 훤칠하니 잘생긴 기사가... 오! 저기 있군.”
“볼프 사트로 후작?”
허풍쟁이 제이콥과 발가락 슈미츠는 배부른 얼굴로 이를 쑤시다가 벌떡 일어났다. 이렇게 빨리, 그것도 후작 본인이 찾아올 줄은 몰랐다.
로벨은 일행에게 물러가라 눈짓하고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 볼프 후작은 허풍쟁이가 먹다 흘린 부스러기 따위에 개의치 않고 털썩 앉았다.
“그 난리를 치고 태평하게 술을 마시고 있다니, 정말 간이 크시오.”
로벨은 여관주인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여관주인은 맥주잔을 꺼내 공손하게 대령했다. 로벨을 상대할 때와 딴판이었다.
로벨은 여관주인을 흘겨보고 말했다.
“무슨 보고를 받았는지 모르지만, 그건 오해요.”
“알고 있소.”
볼프 후작은 두 손을 테이블에 올리고 진지하게 쳐다보았다.
“그놈들은 인간을 조종할 줄 아오. 필히 함정에 빠졌겠지.”
로벨은 볼프 후작이 우호적으로 나와 안도했다.
“알아주니 다행이오.”
“허나, 모든 이가 알아주지는 않을 거요. 내일 아침 날이 밝는 대로 떠나시오.”
“어디로?”
“가장 안전한 곳으로.”
로벨은 두 눈을 깜박였다. 볼프 후작은 맥주잔을 옆으로 치우고 설명했다.
“기사 종자 호그는 맥케런 가문의 장남이오. 늙은 사자가 가만있지 않을 것이오.”
“멕케런 가문?”
로벨은 어쩐지 익숙한 가문 이름이라 생각했다. 볼프 후작이 한숨처럼 설명을 덧붙였다.
“전대 그랜드 챔피언이오.”
그랜드 챔피언이란 수도 포클랜드에서 개최되는 그랜드 토너먼트 우승자를 가리킨다. 그랜드 토너먼트는 정해진 주기 없이 2~4년 단위로 개최되었다. 현(現) 그랜드 챔피언은 로벨 로드릭이지만, 볼프 후작처럼 전(前) 그랜드 챔피언이 여럿 존재했다.
“청옥성의 기사?”
“그렇소.”
그중 한 명이 주드 맥케런 남작이었다. 전전대 그랜드 챔피언이자, 사파이어 섬이라 불리는 메그람 섬의 주인이었다.
‘풀네임이 호그 멕케런이었구나.’
볼프 후작은 진심으로 조언했다.
“맥케런 경은 황소 같은 사람이오. 평소에는 답답하리만큼 신중하지만, 화가 나면 앞뒤 재지 않고 들이박소.”
“그 말은...”
“경의 영지를 지키시오.”
@
로벨은 고민하고 고심하다가 볼프 후작의 충고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먼 북해까지 와서 아무 소득도 없이 돌아가자니 힘이 빠지지만, 청옥성의 위험을 알고도 성이 비울 수 없었다.
‘악마추종자를 상대하는 것도 힘든데, 청옥성까지 신경 써야 하나.’
허풍쟁이 제이콥이 볼프 후작이 손대지 않은 맥주에 눈독 들이며 말했다.
“기사 나리, 성으로 돌아가기 전에 청어절임을 사가는 것이 어떻습니까?”
“청어 절임?”
“북해 특산품입니다요. 맛도 좋고, 오래 보관할 수도 있죠. 인어의 바다의 물고기와 또 다른 거라...”
“지금 그런 거 살 때가 아니야.”
로벨은 핀잔을 주다가 돌연히 한숨을 쉬었다.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보단 낫겠지만...”
여관주인이 볼프 후작의 맥주잔을 냉큼 빼앗았다. 볼프 후작에게 내준 술을 천박한 용병 나부랭이가 마시게 둘 수 없었다. 그리고 로벨에게 굽신거렸다.
“청어잡이가 가장 활발한 곳이 사파이어 섬입니다.”
“청옥성?”
“예예. 사실 고기잡이 말고는 할 게 없는 가난한 섬입죠.”
볼프 후작이 다녀간 뒤로 여관주인의 태도가 부쩍 공손해졌다. 로벨이 떠돌이 기사가 아니라 볼프 후작과 맞먹는 대귀족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로벨은 테이블을 두드리다가 불쑥 말했다.
“주인장, 잠시 자리를 비켜줘.”
“예예. 그럼요. 편하게 말씀 나누세요.”
여관주인은 ‘어차피 버릴 거면 내 위장에 버려줘!’ 의미의 눈빛을 보내는 허풍쟁이를 외면하고 주방으로 사라졌다. 로벨은 목소리를 잔뜩 낮췄다.
“제이콥, 슈미츠, 너희는 청옥성으로 가.”
“어? 청어라면 여기 시장에도 많이 있는데요?”
“청어 같은 소리하지 마.”
로벨이 타박하자 허풍쟁이는 입모양으로 구시렁거렸다.
“주드 맥케런 경이 전쟁을 준비한다면 필히 용병을 모집할 거야. 거기 지원해.”
허풍쟁이와 발가락이 깜짝 놀라 항의했다.
“저, 저희를 쫓아내는 겁니까요!”
“그럼 기사 나리하고 싸울지도 모르잖습니까?”
로벨은 두 사람이 의외로 순진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미소 지었다.
“그게 아니야. 첩자가 되란 거야.”
“첩자요?”
“그런 거 해본 적이 없는데...”
허풍쟁이와 발가락은 머쓱해 했다. 그리고 곧 열렬한 호응을 보냈다.
“병력이나 보급품 같은 것을 알아내면 됩니까요?”
“작전계획? 진군방향?”
로벨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너희가 아니어도 알 수 있어.”
“그럼 무엇 때문에 첩자가 되어야 합니까?”
“청옥성을 지원하는 귀족이 누구인지 알아내.”
“지원하는 귀족이요?”
“분명 맥케런 경을 부추기는 자가 있을 거야.”
로벨은 확신을 담아 말했다.
“나와 맥케런 경이 싸우기를 바라는 자. 그자가 악마추종자야.”
@
로벨 일행은 사트로 시티에서 갈라졌다. 로벨과 마녀 키르케는 남쪽 로드릭 영지로, 허풍쟁이 제이콥과 발가락 슈미츠는 북쪽 사파이어 섬으로 향했다.
마녀 키르케는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항구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북해는 내해보다 파도가 거칠다는데...”
“두 사람 다 잘 할 거야.”
로벨은 허풍쟁이와 발가락을 믿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용병들이니 제 몸 하나는 어렵지 않게 건사할 것이다. 그보다 걱정되는 것은 볼프 후작이었다.
‘악마추종자 소굴에서 홀로 버텨야 한다니...’
로벨은 혀를 차고 사트로 시티 성문으로 다가갔다. 로벨을 본 병사가 긴장해서 숏 스피어를 꽉 쥐었다. 간밤의 일이 성문 경비병에게도 알려진 모양이다.
“로벨 로드릭 남작님이십니까?”
“응.”
“신원 확인했습니다. 좋은 여행 되십시오.”
볼프 후작이 손을 써둔 듯 붙잡지 않았다. 로벨과 마녀 키르케는 태연하게 사트로 시티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무대에서 내려온 배우처럼 돌변했다.
“좋아. 말에 타”
“이예!”
로벨은 마녀 키르케를 끌어 올리고 품에 안듯이 고삐를 잡았다.
“오래 달릴 거야. 힘들면 말해.”
“전 지금이 딱 좋아요. 히힛!”
로벨은 전투마에 박차를 가했다. 고블린이 쫓아오지 못하게, 그리고 악마추종자가 수작을 부리지 못하게 잽싸게 도망쳤다.
@
여행은 떠날 때보다 돌아올 때가 짧게 느껴진다. 보통은 심리적인 이유 때문이지만, 로벨의 경우 진짜로 짧았다. 나흘 걸린 길을 하루 반나절 만에 돌아왔다. 그 결과 전투마가 녹초가 되었다.
“다 왔어. 조금만 힘내.”
“히이이- 힝!”
중간중간 휴식했지만 충분하지 않았다. 편히 쉬지도, 쓰러지지도 못하게 조련하는 주인이 원망스러웠다. 밀알이 익어가는 추경지와 송아지가 뛰어노는 목초지가 눈에 가득 들어왔다. 로벨의 고향이었다.
“로드릭 성이야!”
로벨의 품 안에서 꾸벅꾸벅 졸던 마녀 키르케가 정신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푸른 언덕 위에 근엄하게 앉아있는 석재성이 있었다. 검은 성에 비하면 갓난아기처럼 작지만, 검은 성에는 없는 생기가 가득했다. 돌과 나무로 만든 성에게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나, 시끄럽고 따뜻하고 포근했다. 마녀 키르케가 졸린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우리 집이네요.”
@
로벨은 언덕 아래에서 속도를 줄이고, 성문 앞에서 마녀 키르케를 내려주었다. 마녀는 장시간 말을 탄 후유증으로 균형을 잡지 못했다.
“컹! 컹!”
아야와 이야카가 가장 먼저 마중 나왔다. 마녀 키르케는 늑대남매에게 손을 뻗었다.
“나 좀 부축해줘...”
“컹!”
아야와 이야카는 손이 없어서 꼬리만 흔들었다. 그리고 손은 있지만 부축하기 싫어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펄프 대장이 전투마 고삐를 잡고 물었다.
“마로드? 이크! 무슨 일이 있습니까?”
로벨은 땅에 내려서 땀에 흠뻑 젖은 전투마를 토닥였다.
“안 좋은 소식이야.”
펄프 대장의 낯빛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설마... 볼프 후작이 죽었습니까?”
“응? 아닌데? 왜 그렇게 생각해?”
“영주님이 가는 곳에는 항상 피바람이 불... 못들은 걸로 해주십시오. 그게 아니면 무슨 일입니까.”
로벨은 피바람을 부정할 수 없었다.
“전쟁이 날 거야.”
전쟁. 무시무시한 단어지만 너무 자주 들어서 감흥이 없었다.
“이번엔 또 어디입니까? 페르젠 백작? 아니면 도트넘 백작입니까?”
“멕케런 남작.”
“그건 또 어디 사는 귀족 나부랭이...”
펄프 대장은 ‘남작’이란 말에 안도하다가 뒷말을 흐렸다.
“설마, 북해의 사자 주드 멕케런 남작입니까?”
“응. 친한가 봐?”
로벨은 펄프 대장의 주름살을 펴기 위해 농담했지만, 농담도 자주 하는 사람이 해야 농담인 줄 알지, 로벨 같은 사람이 하면 역효과였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맙소사! 북해의 사자라니! 그 작자는 9년 전의 영웅이잖습니까!”
“9년 전이면, 에르나 왕국과 싸운 전쟁?”
“그자는 영주님과 비슷합니다. 아니, 영주님보다 더했지요! 그 강대국인 에르나 왕국과 싸워서 지지 않은 것이 주드 멕케런 남작 덕분입니다. 오죽하면 ‘북해의 사자’라 불리겠습니까.”
로벨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농담을 시도했다.
“북쪽에는 바다사자밖에 없는데...”
그래서 펄프 대장의 모멸 찬 시선을 감당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