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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100화 (100/605)

100화. 함정

100화. 함정

로벨은 북쪽 탑에서 머물며 악마추종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싶었지만, 사시나무 떨듯이 떠는 마녀 키르케와 시장을 헤집고 다닐 허풍쟁이 제이콥, 발가락 슈미츠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스콰이어 호그.”

“예.”

기사 종자 호그가 차분히 대답했다. 볼탄 반도를, 어쩌면 포비아 왕국 전체를 뒤흔들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볼프 후작이 친히 종자로 삼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곳은 사트로 후작을 위해하려는 사악한 마법사의 아지트야. 무슨 뜻인지 알겠어?”

“이 시간부터 면밀히 감시하도록 하겠습니다.”

게다가 기사 후보생답지 않게 머리까지 좋았다. 로벨은 고개를 끄덕이고 격려했다.

“내일 정오에 부하들과 함께 올게. 그때까지 잘 부탁해.”

“예. 맡겨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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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마녀 키르케를 잘 달래서 측문으로 나왔다. 마녀는 충격이 컸는지 빈민가를 지나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좀처럼 없는 일이라 생소했다. 로벨은 고민하다가 마녀가 가장 좋아할 만한 일을 떠올렸다.

“말 탈래?”

마녀는 티 나게 움찔했다.

“그래도... 돼요?”

로벨은 예상이 맞아떨어지자 소리 내어 웃었다.

“오늘만 특별히 봐줄게.”

전투마가 당사자 의견도 들어달라는 듯 투레질했다. 로벨은 전투마의 목을 두드리고 앞으로 끌어당겼다. 마녀는 배시시- 웃으며 등자에 발을 올렸다. 그러나 로벨의 신장에 맞춰진 등자라 키가 작은 마녀는 오르기가 쉽지 않았다. 로벨이 허리를 잡고 올려줘서 겨우 안장에 앉았다.

“히히힛!”

마녀는 기분이 좋아진 듯 평소처럼 웃었다. 로벨은 기사 종자처럼 고삐를 잡고 시내를 걸었다. 마녀는 신이 났지만, 로벨은 조금 부끄러웠다.

허풍쟁이 제이콥과 발가락 슈미츠가 헤어진 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래 기다려...”

“아놔아! 이놈의 기사 나리는 왜 아직도 안 와!”

“아셔라. 기사 나리가 제멋대로 구는 게 어제오늘 일이냐?”

로벨은 손을 든 상태로 굳었다. 전투마가 콧소리를 냈지만 뒷담화에 정신 팔린 용병들은 깨닫지 못했다.

“내가 이래서 따라오기 싫었다니까! 지 혼자 말 타고 다니면서 우리한테 저리 가라, 이리 와라, 턱짓만 하잖아!”

“그 심정 잘 알지. 나도 강철성까지 끌려가서 죽을 뻔했으니까. 뿔난 망아지가 따로 없더라.”

발가락 슈미츠가 손가락으로 뿔을 만들고 들이박는 시늉했다. 로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마녀 키르케는 입을 가리고 고양이처럼 실룩거리며 웃었다.

“말이 나와서 말이지만, 난 울프 용병단 원년멤버라고. 이따위로 대우하면 안 되는 거 아냐?”

“원년멤버 꽤 되지 않아? 과묵한 친구랑 코고는 친구도 원년멤버라던데?”

“엄밀히 말하면 걔네는 아니야. 거시기 뭐냐, 정통성 전쟁 중에 고용주를 잃어서 기사 나리가 거둔 얘들이거든. 울프 용병단이 처음 결성될 때부터 함께한 사람은 늙은 대장이랑 외팔이랑 애꾸눈이랑 나밖에 안 남았어.”

로벨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허풍쟁이 제이콥은 몇 안 남은 소중한 초기 멤버였다. 로벨은 저 정도 불평은 너그러이 용서하기로 마음먹었다. 저 정도 불평이면 말이다.

“그런 나를 이리 막 대하다니! 제깟 놈이 기사 나부랭이면 다야? 그랜드 챔피언? 카악- 퉤! 그랜드 챔피언은 배때기에 칼 안 박히나? 기사고 나발이고 푸닥거리 한번 해?”

“...그럴래?”

허풍쟁이와 발가락의 몸이 굳었다. 어쩌면 심장까지 멈췄을지 모른다. 쿵! 소리 이후 조용한 것이 가능성이 있었다.

“이 목소리는...”

“하하... 설마...”

허풍쟁이와 발가락은 전설 속의 골렘처럼 삐거덕거리며 목을 돌렸다.

로벨이 아론다이트 손잡이를 움켜쥐고 노려보고 있었다.

“그 푸닥거리, 지금 할까?”

“히이이이익! 기사 나리!”

“저, 전 아무 말 안 했습니다! 이놈 혼자 떠든 겁니다!”

“뭐야? 이 배신자 놈이!”

로벨은 이성적이고 상식적인 기사라 ‘귀족 능멸죄!’ 부르짖으며 칼을 휘두르지 않았다. 물론, 뒷담화를 웃어넘길 만큼 배포가 크지도 않았다.

허풍쟁이 제이콥은 시퍼렇게 멍든 눈두덩이를 잡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으으윽... 어디 다녀오신 겁니까요?”

“검은 성.”

“거긴 왜 또 가신 겁니까?”

로벨은 전투마 고삐를 허풍쟁이에게 넘겨주었다. 마녀 키르케를 총애해도, 기사가 되어서 고삐를 끄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다.

“여관으로 가자. 설명해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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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일행은 ‘북극성’이란 거창한 이름을 가진 3층짜리 여관에 자리 잡았다. 가격이 조금 비싸지만, 객실이 넉넉하고 마구간이 깨끗하고 저녁식사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만족했다.

여관주인은 손수 맥주를 따라주고, 손님이 없다는 핑계로 옆 가게에 놀러 간 주방장을 잡으러 출동했다.

허풍쟁이 제이콥은 고소한 맛이 강한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의아하게 중얼거렸다.

“술맛 괜찮은데? 왜 손님이 없지?”

“이런 여관은 선원이나 인부가 오지 않아. 귀족 아니면 부르주아가 이용하는데, 요즘 같은 시기에 귀한 양반들이 나들이 다닐 리 없으니까.”

발가락 슈미츠가 툴툴거리며 설명했다. 여러 일을 경험한 용병이라 아는 것도 많았다. 로벨은 맥주잔을 두 손으로 잡고 냉기를 즐겼다.

“소득은?”

“그게... 별것 없습니다요.”

“시장을 구석구석 뒤졌지만 의심 가는 사람이 없습니다. 잉그비아 왕국인을 몇 명 찾긴 했는데 도저히 마법사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페닝이랑 로닝도 구분 못 하는 멍청이한테 그 동안 당한 거면 좀 그렇잖습니까?”

로벨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았다. 허풍쟁이가 멍청이라 평가할 정도면 대충 알만했다. 로벨은 어깨를 으쓱이고 말했다.

“난 소득이 있어.”

발가락 슈미츠는 맥주잔을 비우고 중얼거렸다.

“역시 검은 성에 소굴이 있었군요.”

“역시?”

“비밀을 지키기에는 도시보다 성이 안전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저와 제이콥이 흔적을 찾지 못했으니, 남은 곳은 검은 성뿐이지요.”

로벨은 깜짝 놀라 발가락을 보았다.

“너, 보기보다 똑똑하네?”

“제가 어떻게 보이기에... 아닙니다. 그것보다 정말 괜찮습니까?”

“왜?”

“그 악마추종자란 놈들은 기사 나리가 이 도시에 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들 소굴에 다녀간 것도 알지 않겠습니까?”

로벨은 눈을 크게 뜨고 마녀 키르케를 보았다. 마녀가 전문가답게 설명했다.

“아무리 대단한 마법사라도 사람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아요.”

“거, 옛날이야기에서는 수정구만 문지르면 사람이 보이잖소?”

“그건 동화라서 가능한 거죠. 현실에서 특정 인물을 대상화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에요. 인간의 구성요소는 사실 비슷해서... 아앗!”

마녀 키르케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기사님의 칼이요!”

“내 칼?”

로벨은 아론다이트와 흐룬팅을 앞으로 기울였다. “어느 칼?”

“그 큰 칼은 헤르만 백작님의 칼이잖아요!”

“응. 맞아.”

“기사님이 아니에요! 그 칼의 위치를 탐색한 거예요! 그래서 고블린으로 습격할 수 있었고, 그, 그 끔찍한 탑을 비우고 숨을 수 있었어요!”

로벨은 조금 늦게 아차! 했다. 고블린이 끈질기게 쫓아올 때 의심했어야 할 일이었다.

“그럼 악마추종자는?”

“처음부터 검은 성에 있었어요! 기사님을 지켜보고 있었을 거예요!”

로벨도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때마침 주방장을 잡아온 여관 주인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감히 기사에게 항의하는 만용은 부리지 않았다. 현명한 처신이었다. 로벨은 앞을 가로막으면 몹시 아프게 해주겠다는 얼굴로 여관을 뛰쳐나갔다.

“호그가 위험해!”

“호그? 호그가 누굽니까요?”

로벨은 여관 밖으로 달려나가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마녀 키르케가 태평한 용병들을 두드리며 외쳤다.

“바가지머리요! 뭐해요? 기사님 따라가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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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사트로 시티 대로를 달렸다. 해가 저문 늦은 시간이라 몇몇 가게 빼고는 어둡고 조용했다. 로벨의 전투마를 가로막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낮에 없던 장애물이 생겼다. 검은 성의 성문이 굳게 닫혔다.

로벨은 성문 앞에서 전투마를 급정지시키고 목청껏 소리 질렀다.

“성문을 열어라! 성문을 열어!”

로벨의 목소리는 거인처럼 크고 소녀처럼 낭랑하다. 전장에서도 잘 들리는 목소리였으니, 밤공기가 내려앉은 적막한 도시에서는 말할 것도 없었다. 성벽 위로 사트로 후작군이 머리를 내밀었다.

“누구냐!”

“이 밤중에 무슨 소란이야!”

로벨은 거칠게 소리쳤다.

“난 로벨 로드릭이다! 성문을 열어라!”

“로벨 로드릭? 그랜드 챔피언?”

주간 근무자가 인수인계를 잘 했는지-혹은 그랜드 챔피언을 보았다고 떠벌리고 다녔는지- 즉각 로벨을 알아보았다. 성벽 위의 반응이 한결 정중해졌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십니까?”

“설명할 시간 없어! 문 열어!”

“그건 좀 곤란합니다. 일몰 후에는 후작님 허락 없이 누구도 출입할 수...”

“그 볼프 사트로 후작이 위험해!”

성벽 위가 소란스러워졌다. 이어서 성문 너머가 시끄러워졌다. 보초병에서 수비대장으로, 수비대장에서 시종장으로, 시종장에서 볼프 후작으로 빠르게 보고가 올라갔다.

로벨은 전투마의 땀이 식지 않게 성문 앞을 빙글빙글 돌았다. 잠시 뒤 기다린 반응이 나왔다. 검은 성의 성문이 빼꼼히 열리고 볼프 후작의 기사가 밖으로 나왔다.

“로벨 로드릭 남작, 어인 일로 소란을 일으...”

“이럇!”

로벨은 기사를 무시하고 성 안으로 내달렸다. 큰 무례고, 위험한 돌발행동이었다.

“저, 저, 저자가! 잡아라! 침입자다!”

“잠깐만요! 잠깐만요!”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마녀 키르케와 울프 용병단이 도착했다. 마녀는 숨을 헐떡이며 성난 사트로 후작군을 설득했다.

“북쪽 탑! 북쪽 탑에 괴물이 있어요! 기사님을 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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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북쪽 탑 입구까지 전투마를 몰아 속도를 줄이지 않고 안장에서 뛰어내렸다. 캔터(canter) 속도로 달려온 전투마는 제동을 걸지 못하고 탑을 지나쳤다.

“스콰이어!”

로벨은 아론다이트와 흐룬팅을 동시에 뽑으며 소리쳤다. 포성처럼 쩔렁쩔렁 울렸다. 그러나 대답이 없었다.

“제길!”

로벨은 주저 없이 탑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러나 성급한 행동이었다. 달빛조차 어두운 밤이었다. 조명이 없는 실내는 코앞도 보이지 않았다. 그 때문에 갑자기 날아드는 배틀 액스를 피하지도, 막지도 못했다.

깡-!

“큭!”

로벨은 충격으로 두어 걸음 밀려났다. 갑옷을 갖춘 왼쪽 팔뚝을 때려서 다행이었다. 오른쪽으로 날아왔으면 팔 하나를 잃을 뻔했다.

“정체를 밝혀라!”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휘둘러 어둠을 갈랐다. 눈 감고 휘두른 수준이라 당연히 피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칼끝에서 살을 찢고 뼈를 부수는 감각이 전해졌다. 푹-! 로벨은 오랜 경험으로 직감했다. 치명상이었다.

로벨은 습격자가 싱겁게 쓰러지고 어리둥절했다.

“뭐가 이리 쉬워?”

그때 마녀 키르케와 울프 용병단, 그리고 사트로 후작군이 도착했다. 성에서 근무하는 병사들은 꼼꼼하게 횃불을 챙겨왔다.

“이 탑에 들어가면 3년간 재수가 없다는데...”

“침입자를 놓치면 3년간 감봉이다! 당장 들어가!”

로벨은 아론다이트와 흐룬팅을 늘어트리고 불빛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횃불을 높이 든 병사가 들어오고, 이어서 마녀 키르케와 볼프 후작의 기사가 들어왔다. 그런데 반응이 이상했다.

“으앗! 살인이다!”

“기, 기사님?”

로벨은 왜 저리 놀라는지 의아했다. 마녀 키르케가 로벨의 뒤를 가리켰다.

“그 기사 종자님이...”

로벨은 등골이 오싹하는 불길함을 느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몸을 돌렸다. 로벨을 습격하고, 로벨 손에 죽은 자를 내려다보았다. 기사 종자 호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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