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상혁과 수연은 시내 한복판에 서서 잠시 말없이 서있었다. 간단히 설명해서 지금 상황은 둘에게 꽤나 갑작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둘다 아주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상혁이는 어제 지윤이의 말에 따라 이렇게 될 걸 어느정도 예상하고 있었고, 수연이도 오늘 단단히 마음먹고 온 만큼 생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가버릴줄이야.
적절한 데이트 장소라도 안내해주고 가기를 바랐고, 그렇게 해달라고 말했음에도 이렇게 덩그라니 버려두고 가버릴줄은 몰랐다. 수연은 속으로 울상을 지으며 살짝 옆을 보았다. 상혁이도 마찬가지로 당황스런 표정이었다.
수연이가 남과의 커뮤니케이션이 부족하여 이런 때에 어떻게 해야하는지 모른다면 그것은 상혁이에게도 해당되는 일이다. 어린시절엔 아니었지만 7년전 사고 이후로 방에 틀어박혀 버렸던 경험과, 중학생때는 매사에 부정적인 소년이었을 뿐이다.
윤아와 청이 선배가 아니었다면 고등학교에 와서도 수연이 이상의 아웃사이더가 되었을지 모른다.
정리하자면 상혁이나 수연이 모두 연애초보라는 이야기. 이런 상황에서 유들유들하고 무난하게 일을 진행 시킬만큼 둘은 능숙하지 않았다. 속마음을 감추는데 능숙한 수연과, 남에게서 호의를 받는 것이 익숙치 않은 상혁은 특히나 그랬다.
그렇다고 저번에 갔던 영화관과 공원을 걷자니 뭔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쇼핑을 하자니 방금 전까지 수연이 어머니의 생일 선물을 고르느라 꽤나 지친 상황이었다. 마땅히 할만한 것도 없는데 그나마 생각나는 것은 죄다 하기가 꺼려지는 상황인 것이다.
' 이럴 때 근처에 유원지라도 있으면 좋을텐데...'
수연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한탄했다.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비교적 지방인 이곳은 놀이공원과 같은 유원지를 가기 위해선 최소 버스를 타고 한시간은 가야했다. 그리고 시간도 상당히 애매해서 이제와서 유원지를 간다해도 제대로 즐기기는 무리였다.
' 어떻게 해야하나. 또 카페같은 곳에 들어가기도 그렇고 수연이는 어디를 좋아하려나.'
수연이가 상혁이의 눈치를 살피듯 상혁이도 힐끔힐끔 수연이를 보며 고민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겉으로 들어나는 수연이의 얼굴은 조금도 미동도 없는 무표정인지라 마땅히 뾰족한 수는 생각나지 않았다.
이래선 안되는데...
초조하게 생각에 잠겨있던 수연이는 문득 이 상황을 조금이나마 변화시킬만한 일이 생각났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은 마음을 전하는데에 지금보다 한층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유상혁."
" 네! ...가 아니라 응? 왜 어디 가고 싶은 곳있어?"
얼마나 자신의 생각에 몰입하고 있었는지 상혁이가 화들짝 놀라며 당황한 표정으로 수연이를 바라봐왔다. 그 모습이 못내 우스웠지만 수연은 상혁이의 손을 확 틀어쥐며.
" 가자, 생각난게 있어."
" 어? 가, 갑자기 어딜- 으악!"
갑작스럽게 손을 잡아오는 수연이의 행동에 얼굴을 확 붉히며 당황하던 상혁은 갑자기 앞으로 걷기 시작한 수연이의 행동에 질질 끌려 갈 수 밖에 없었다. 알다시피 수연이의 근력은 상상이상인지라 상혁은 그 힘에 저항할 세도 없었던 것이다.
' 이거 남자 체면이 말이 아니네...'
하하, 하고 작에 웃으며 상혁은 속으로 땀을 삐질거렸다. 그것은 수연이에게 끌려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런 상황에서 리드조차 하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했기 때문이다. 도리어 갑작스럽게 손을 끌고 가는 것을 보면 도리어 수연이가 자신보다 남자답지 않나 싶다고 생각될 정도다.
" 분발해야지..."
" 응? 무슨 소리라도 했니?"
무심코 혼잣말로 중얼거린 상혁이의 말을 들었는지 수연이가 뒤를 돌아보았다. 귀도 무지막지하게 밝은 주제에 이런 말은 제대로 듣지 못했던 모양이다. 상혁은 이상하다는 듯이 자신을 바라보는 수연이에게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수연은 그런 상혁을 잠시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았지만 이내 더욱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수연이가 가려고 했던 곳은 그리 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까 자신들이 들렸던 악세사리 샵이었던 것이다.
" 어라, 아까 뭐 안산거 있어?"
" 아까는 필요 없었지만 지금은 필요할 것같은게 생각났을 뿐이야."
" ...?"
수연은 말없이 상혁이를 끌고 가게안에 들어가더니 잠시 고개를 두리번 거렸다. 그리곤 금방 찾던 물건을 찾은 듯이 그것을 가지고 계산대 앞으로 갔다. 점원은 아까 왔던 둘이 다시 왔다는 것에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이내 웃으며 수연이가 가지고 온 것을 금방 계산해주었다.
' 머리끈?'
악세사리 샵에서 수연이가 고른 것은 그다지 귀엽지도 비싸지도 않은 평범한 머리끈이었다. 갑자기 저런 것을 왜 샀을까 싶은 상혁이었지만 수연은 그것을 가지고 가게 밖으로 나오더니 작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곤.
" 왜 인지는 모르지만 머리를 묶으면 나는 꽤 기합이 들어가."
마치 상혁이에게 설명하는 것처럼 이야기했다. 잠시간 머리끈을 바라보던 수연은 능숙한 동작으로 자신의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었다. 어린 시절의 수연이가 그러했듯이.
그리고 얼마전의 수연이가 그랬던 것처럼.
상혁은 그런 수연이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언제나 자랑스럽게 여기는 흑단같은 생머리를 묶어 올리는 수연이의 모습을. 수연은 머리를 묶은 뒤 방금 전보다 기운찬 모습으로 상혁이를 올려다보았다. 그 얼굴은 확실히 평상시 무표정하고, 무감정한 수연이와 다르게 생기있게 반짝이는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그 눈은 꽤나 익숙한 눈이었다. 몇일전 마치 연기하는 것처럼 다정했던 수연이의 눈도 반짝이고 발랄했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거짓된 연기와 같았던 것이라면 이것은 조금 달랐다. 아마 이 눈을 본 것은 어린 시절의 지윤이나 자신 밖에 없을 거라고 상혁은 자신했다.
이 얼굴은, 저번 서울에 올라갔을때 노래를 부르던 수연이의 눈과 무척 닮아있었다. 사랑스럽고 다정한 마음을 담은 눈동자. 아마 이것이 차가운 수연이의 겉에 감춰진 내면인 것이겠지.
" 어때! 어울리니?"
말투는 다를 것없었지만 어조가 달랐다. 평상시의 평탄한 어조와 달리 지금의 수연이는 누가 뭐라해도 사랑스럽고 발랄한 어조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런 말하기는 조금 그렇지만 방금 전의 수연이와는 전혀 다른 사람과 같았다.
" 물론!"
상혁은 기운차게 웃으며 답했다. 그 단호할정도로 크게 수긍하는 모습에 수연은 새치름한 얼굴로 툴툴거리며.
" 흥, 단지 포니테일이 취향이라서 그렇게 말하는거 아니니?"
" ....분명 그런 것도 있는 것같지만."
" 정말 변태구나. 이럴때는 보통 부정하면서 말하는게 보통이잖아!"
그렇게 말한 수연은 파앗, 하고 작게 웃었다. 그런 수연이의 모습에 상혁 역시 마주 웃었다. 그렇게 서로를 보며 잠시 웃던 둘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없이 발을 맞춰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 하지만 신기하네, 머리를 묶는 것만으로 성격이 달라지거나 하는거냐?"
방금 전과 태도가 완전히 변한 수연이의 모습에 상혁은 신기하다는 듯이 물었다. 수연은 상혁이의 물음에 고개를 살짝 흔들며 살며시 웃었다.
" 아니. 그보단 머리를 묶으면 예전 어린시절의 나의 모습이 버릇처럼 나온다고 해야하나. 자기 최면같은 거라고 생각해. 평상시때보다 내면의 자신을 표현하기 쉬워진다고 생각해."
" 나는 내면의 너도 겉처럼 쌀쌀맞을줄 알았는데."
" 보통 그런건 본인 앞에서 직접적으로 말할만한게 않니라고 생각하는데 말이야! 아무튼 나는 겉도 속도 사랑스런 여자아이인걸."
" 전생까지 알고 있는 나로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이긴 하지만...."
" 17년을 여자로 살면 보통은 이런거야! 이 세계 최고의 TS권위자의 말을 우습게 보지마렴."
자화자찬이야 평상시의 수연이에게도 익숙했지만 저런 말투로 들으니 미묘한 기분이 드는건 사실이었다. 거기다가 명환이와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상혁이로선 지금의 수연이가 속까지 귀여운 여자아이 라고 발언 할때 특히 더더욱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 뭐 아무렴 어때.'
상혁은 피식 웃으며 자신의 옆에 서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는 솔직히 이런 관계가 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여자아이다. 그리고 이런 성격인지도 알지 못했다. 겉으로 보이는 것은 차가운 겉모습에 냉담한 태도.
세상을 부정하는 듯으로 사물을 바라보며 겉도는 행동을 하던 중학교 시절의 자신과 같은 소녀.
" 어디 가는거냐? 또 공원이나 돌려는 것은 아니지?"
" 그럴리가. 나는 누구처럼 여자 손에게 모든걸 맞기고 무능하게 끌려오는 구더기와 다른걸?"
...어조는 발랄하지만 말투는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잊었다. 수연이의 말은 지금까지 와달리 감정이 드러나는 만큼 더욱 신랄했다. 어쩌면 지윤이와 가까울지 모르지만 지윤이는 그 말투에 어울리는 악랄한 얼굴을 하고 말한다면 수연이는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사랑스런 얼굴을 한 체 말한다는게 다르겠지.
" 무능한 사람이라 미안하네.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나는 여자와 단둘히 데이트 해본적도 없는 고등학생이라고. 거기다가...."
" 거기다가?"
생기있는 눈동자를 깜박이며 묻는 수연이의 말에 잠시 헛기침을 한 상혁은 시선을 옆으로 돌리며 볼을 한손가락으로 살짝 긁적이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 네가 보통 예쁜게 아니잖냐. 아마 다른 남자애들이었어도 평범하게 행동할 수 없을걸?"
상혁이의 말에 수연은 순간 할말을 잃고 상혁과 마찬가지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기습이다. 갑자기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반칙이잖아. 약간 놀리는 태도로 일관하던 수연은 그런 상혁이의 말에 말한 본인만큼이나 얼굴을 붉혔다.
예쁘다-라는 말은 수연이에게 있어 굉장히 익숙한 말이다. 예전이라면 상혁이가 그렇게 말해도 수연이는 도리어 '어머나, 내가 예쁜건 당연한 말이지. 너도 참 당연한 소리를 바보같이 하는 구나?'라고 비웃어 줬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저런 익숙하고 별거 아닌 말에도 수연은 심장이 뛰어버리는 것이다. 그만큼이나 저 소년을 좋아하게 되버렸기 때문에.
" 흐, 흥. 바보같긴."
애써 이런 소리를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는게 수연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이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머리를 묶는 것은 정답이었다고 수연은 생각했다.
상혁이에게 말했듯이 머리를 묶게 되면 어린 시절의 자신처럼 말하기가 편해진다. 그것은 딱히 성격이 변하는게 아니다.
도리어 평상시의 자신이 냉정하고 차가운 태도로 일관하는게 이상한 것이다. 알다시피 수연이의 속마음은 결코 겉의 냉정하고 차갑고 무감정해보이는 모습과 달리 명랑하고 발랄하며 다정한 성격이다.
단지 어린 시절의 실패와, 오랜시간 혼자서 만들어온 벽이 수연이를 차갑고 냉정한 모습으로 보이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그것을 표현하는게 어색하여 제대로 할 수 없을 뿐이다. 머리를 묶게 되면 그 벽이 허물어지게 되는 것이다.
간단히 설명해서 자기 최면이라고 하는게 옳다. 어린 시절 착하고 발랄하고 명랑했던 이수연인 자신을 꺼내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저번에 자신이 했던 것은 그것을 이용한 연기였지만 이제는 다르다. 단지, 솔직해질 뿐인 것이다.
" 아무리 생각해도 솔직히 우리가 함께 즐길만한 장소를 생각하는 것은 무리였어."
수연은 담담히 설명하는 것처럼 말했다.
" 그럼? 지금은 어디를 가는거야?"
" 글쌔? 그건 네가 두 눈으로 직접보는게 좋지 않겠니?"
" ...갑자기 쿨한 네가 그리워지려 하네."
" 이미 늦었어!"
혀를 놀리듯이 쏙 내밀며 말한 수연은 아까부터 계속 잡고 있던 상혁이의 손을 꽉 잡았다. 이 손을 놓지 않았다는 것은 가능성이 있다는 걸까. 아니면 단지 자신이 이렇게 손을 잡고 있다는 것을 아무 생각 없이 받아 들이는 걸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수연은 우선 긍정적인 쪽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지금부터 수연이가 가려는 곳은 간단히 말해서 준비를 하는 것이다. 방금 전까지 어떻게 할까 고민했던 자신이 우스워질정도로 지금은 거침이 없었다.
그렇게 시내에서 벗어나 수연이가 도착한 곳은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길이었다.
" 어라, 여긴?"
상혁이도 이곳은 익숙한지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길은.
" 그래, 네가 바보같은 소리로 나를 설득하려 했던 길이야."
" ...바보같은 소리라니 너무한다. 물론 이기적이었다고 생각은 하지만."
곱슬이에게서 벗어나 어찌할 바를 모르던 수연이를 상혁이가 쫓아왔던 길이다. 그때 수연이는 상혁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어쩌면 싫어했던 건지도 모른다.
" 아무 것도 모르는 주제에, 윤아도 할 수 있으니 너도 할 수 있다는 식으로 말했던거 기억나니?"
" ...당연하잖아. 내가 한 말인데."
당시의 수연은 그런 상혁이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지금까지 피해왔는지 조금도 모른체 자신이 아는 경우에 대입해서 저렇게 간단히 말할 수 있는게 싫었던 것이다.
" 하지만 지금은 조금은 알 것도 해. 그때의 너는 윤아-라기 보단 너처럼 결국 좋아하는 사람에게조차 부서지지 않을 벽을 만드는 것을 막고 싶었던 것이겠지."
수연은 윤아로부터 들었다. 윤아는 상혁이가 자신의 고백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7년전의 사건으로 계속 도망치기만 했던 상혁은 중학교때의 일로 결국 윤아를 어렵게 나마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너무 멀리 도망쳐 버린 것이다.
너무 멀리 도망와버려서 돌아갈 길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윤아와 친하고 다정했던 그 시절의 상혁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 마음속에 남은 죄책감이라는 벽을 영원히 부술 수 없었던 것이다.
" 맞아. 사실 말이지, 나는 어렸을 때 아마 윤아를 좋아했던 것같아. 그래서 윤아를 그렇게 만든 자신이 너무 미웠어. 그래서 계속 도망쳤지. 그리고 깨달았을땐 나는 이제 윤아를 좋아할 수 없게 되어버렸어."
상혁이는 내가 자신과 같이 되는 것을 막고 싶었던 것이다. 윤아처럼 다시 누군가를 좋아하고 힘낼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특히 나의 경우엔 친구도 아닌 가족인 아버지였다.
멀어질만큼 멀어진 아버지였지만 나나 아버지나 머뭇거리며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단지 누가 먼저 말을 걸지 고민하고 있었을 뿐이다. 아마 그때의 일이 아니었다면 나는 계속 앞으로도 쭉 아버지를 외면하게 됐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 끝없는 도주 끝에 길을 잃게 되버렸을 것이다.
더이상 아버지를 사랑할 수 없게 되어버렸을지 모른다.
" 그때 쫓아와줘서 고마웠어. 솔직히 네가 한 말들때문에 괜히 혼란스러워져서 지윤이에게 잡혀버렸거든."
곱슬이가 무지막지하게 달려와서 지친것도 있었고, 잠을 제대로 못해 피곤한 것도 있었지만 상혁이가 그런 말을 해서 괜히 머릿속이 복잡해진 것도 하나의 큰 이유였다. 그 모든 상황들이 있었기에, 지윤이는 나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 사실 당시엔 영원히 고맙다는 말따위는 하지 않으려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역시 감사의 말을 전해야 하겠지. 지윤이를 도와줘서 고마웠다고 하는 것은 예전에 했으니 하지 않겠지만."
" 별로. 나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멋대로 했을뿐이야. 네가 화를 내도 당연하다고 생각했어."
그렇게 말한 상혁과 수연은 천천히 길을 따라 올라갔다. 상혁이에게 쫓긴 길을 지나 지윤이와 달렸던 길에 도착했다.
" 설마 정말 잡힐 줄은 몰랐지. 아무리 대단한 나라도 결국 인간이긴 하다는 생각을 했다니까."
아핫, 하고 작게 웃으며 수연은 말했다. 정말 '설마'였다. 지윤이는 어린시절부터 달리기를 하지 못했다. 거기에 자신은 치트라고 생각할 정도로 못하는 것이 없었다. 달리기도 그중 하나였다. 고등학생 중에서 자신을 이기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고, 애초에 지금까지 지쳐본 적이 없던 수연이였다.
그래서 오랜만에 환생이후 처음으로 느껴보던 피로감과 지쳤다는 몸의 상태에 결국 지고 말았던 것이다.
" 확실히 지윤이는 대단한 녀석이라고 생각해."
" 그럼~. 자랑스러운 여동생인걸."
그 어린시절부터 어떤 마음을 가지고 언니를 돕기 위해 힘썼던 것일까. 그것을 생각하면 상혁은 절로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었다. 특히 그 나이대의 자신이 어땠는지를 떠올려보면 특히 그랬다.
" 학교에 들어가볼까?"
" 오늘은 주말이니 수위아저씨가 문을 잠궈뒀으리라 생각하는데..."
" 어머나? 나를 너무 우습게 보는거 아니니?"
수연은 그렇게 이야기하며 교사를 한바퀴 돌며 외딴 곳에 도착해서는 당연하다는 듯이 창문을 드르륵 열었다.
" ....이런 곳은 어떻게 알았데."
" 처음, 너희들과 밥먹기 전엔 이 아무도 오지 않는 장소에서 밥을 먹곤 했었어. 그때 이 창문이 잠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지."
후후후, 하고 음흉하게 웃으며 말하는 수연이의 말에 저것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도 꽤 대단하잖아-라고 상혁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외진 곳에서 혼자 밥을 먹으면 그야말로 외톨이 오브 외톨이가 아닌가.
" 몰래 학교에 들어갔다가 들키면 곧 중간고사라 클날지 모르는데?"
" 그럴땐 수행평가가 있는데 실수로 두고와서 가지러 왔다고 하면 되잖니? 거기다 나는 선생님들에게 평가가 무척 높으니 말이야."
" 이래서 성적 만능주의는 곤란하다니까..."
" 너도 청이 선배가 있잖니?"
" 그런걸 인맥으로 빠져나가면 진짜 나쁜놈 아니냐? 차라리 0점처리 받고 벌을 받는게 낫지."
생각해보니 이거 꽤 위험한 상황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며 상혁은 수연이를 따라 학교에 들어갔다. 하기야 교무실에 몰래 숨어들 것도 아니니 들켜도 약간 훈계정도만 받을 것같기는 했다.
두명은 아무도 없는 복도를 걸으며 천천히 계단에서 발을 멈췄다.
" 이곳은..."
상혁이가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열자 수연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내가 누군가에게 떠밀려 떨어지자 네가 무리해서 나를 받아 바보같이 팔이 부러졌던 곳이지."
" 진짜 너무한다 너."
" 하지만 잘못받으면 나뿐이 아니라 너도 큰일 날 수 있었어. 다음부터는 절대 그러지마!"
수연의 단호한 말에 상혁은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가, 가능하면 말이지...'라고 조그맣게 대답했다. 수연도 또 이런 일이 생겼을때 상혁이가 무시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에 그저 말으로 나마 저렇게 대답하는 것에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정말이지 라노벨 주인공같은 성격은 곤란하다.
그렇게 둘은 학교안을 둘러보았다. 함께 공부하는 교실, 복도. 그리고 인당부의 부실에 들렸다가 옥상으로 올라왔다. 언제나 점심시간에 함께 밥을 먹던 곳.
그리고 건물의 위는 수학여행 때의 사건도 떠올리게 한다.
" 저것 봐 멋진 석양이야."
" 마치..."
" ....굳이 그런 것을 맞춰줄 필요는 없어."
" 나는 또 이 대사를 바라고 그런 말을 한줄 알았는데..."
이건 자신이 너무 그런 네타발언을 자주한 탓이었을까 진지하게 고민하던 수연은 고개를 작게 흔들고 어두워지기 시작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방금 말했듯이 저 멀리에선 아름답게 석양이 지고 있었다. 저것이 사라지면 이제 하늘은 완전히 어두워지겠지.
" 상혁아."
" 응?"
'유상혁',이나 '구더기'라는 식으로 딱 잘라 부르던 평상시의 수연이의 말투가 아니었다. 머리를 묶고 있는 탓인지 도리어 다정한마저 담긴 목소리로 수연은 말했다.
" 너 말이야, 왜 계속 나를 쫓아온거니?"
" 그건-."
상혁은 수연의 말에 마땅히 대답할 말을 생각해내지 못했다. 아니 답은 알고 있지만 선뜻 대답하기가 힘들었다. 수연도 상혁이의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던듯 계속 해서 말을 이었다.
" 처음, 고등학생이 된 뒤에 일주일이 됐을때 너희들은 나를 위해 쫓아와줬지. 그리고 너는 계속 계속 나를 도와주려했어. 계단에서 넘어질때도 무리해서 나를 받아주었고, 수학여행때도 내가 혼자가 되지 않도록 계속 도와줬지."
올해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 수연이에게 언제인지 묻는다면 그것은 수학여행때였다. 전생의 자신과 만나 머릿속이 복잡했던 찰나에 전생의 자신과는 다른 결말을 걸어가는 자기가 아닌 자신의 모습에 화가났다.
질투인지도 모른다.
자신이 그렇게 비참하게 살아야했던 전생이 전부 부정당해버렸기에. 고작 저렇게나 간단히 이겨낼 수 있었던 일에 전생은 그토록 쓸쓸하게 살았던 것이다. 교통사고를 당해 죽는 바로 그 순간까지.
그것이 너무 억울했다. 마음이, 부서질 것만같았다. 이번 생에에서 새 어머니에게서 거부 당했을때 만큼이나 힘들었다. 이젠 정말 모든 것을 부정하고 싶을 정도로. 내가 왜 이세계에 태어났나, 라는 생각을 했을 정도다.
이렇게나 비참한 자신을 알게하기 위해서였나. 아니면 신이 자신을 비웃기 위해 마련한 자리인건가 생각했다.
도망쳤다.
결국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정도였으니 말이다.
똑바로 응시할 수 없어서 결국 자신은 도망쳤다.
" 이젠 정말 어떻게 해야할지 막막했어. '나'가 구원받으면 분명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저렇게 간단히 이겨내니 지금의 나는 얼마나 한심하고 바보같은 존재인가라는 생각마저 들었지."
부서졌다. 그렇게 마음이 부서져가고 있었다.
" 하지만 그때 네가 왔어. 바보같이, 나에게 무슨 할말도 없었을텐데 무작정 바보같이 쫓아온거야."
마치 처음 자신을 쫓아왔던 순간처럼.
" 내 이야기를 듣고, 나를 받아들여주었지. 그리고 이겨내는 것이 아닌, 쓰러지는 나를 넘어지지 않게 받쳐줬다고 생각해. 그래서 나는 힘겹게 나마 어떻게든 걸어갈 수 있게 된거야."
수연이는 그렇게 말하며 상혁이를 향해 돌아보았다. 방금전까지 잡고 있는 손을 놓고 상혁이와 마주 볼 수 있게 섰다. 석양에 붉게 물든 하늘을 등 뒤로 한 체.
상혁은 그런 수연이의 모습이 너무 눈부셔서 똑바로 볼 수 없을 것같았다. 수연이는 언젠가와 같은 환한 웃음을 지으며 상혁이를 향해 말했다.
" 정말, 너는 라노벨 주인공같은 녀석이야. 이렇게 예쁜 나에게 하나씩 하나씩 플레그를 꽂고 말이야. 이것이 미연시 였다면 너는 분명 엔딩을 목전에 둔 주인공이었겠지."
거기까지 말한 수연이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리곤 약간 떨리는 미소로, 석양에 비쳐 붉어진 얼굴로.
" 바보 같잖아. 그렇게 너를 좋아해주는 여자애들도 거절하고 왜 계속 나를 쫓아와 주는 거야. 그러니 이젠 나도 어쩔 수 없어."
그렇게 말하는 수연이의 모습에 비속에서 상혁이를 보내주었던 그때의 미소가 걸렸다. 정말 힘들지만, 안심하라는 듯한 다정한 미소.
아아, 그제야 상혁은 수연이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깨달았다. 자신의 억지같은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지윤이가 왜 자신이 수연이를 좋아하는 것을 막지 않았는지 알 것같았다.
설마 수연이는 나를....
하지만 이것만큼은 자신이 먼저 하고 싶었다. 그래서 수연이가 말하기 전에 입을 열려는 순간. 수연이의 가녀린 검지 손가락이 입술에 닿았다. 상혁이가 눈동자만을 데굴데굴 굴려 아래로 시선을 내리자, 수연은 살며시 고개를 흔들며.
" 건방지긴, 아직 내 말은 끝나지 않았어. 정말, 이런 것은 라노벨 주인공같은 녀석 답게 끝까지 둔감하게 있을 것이지. 쓸데없이 눈치가 빠르다니까."
투덜거리듯 말한 수연이는 작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곤 떨리는 어조로.
" 한번만 말할거야."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수연이의 말에 상혁은 고개만을 살며시 끄덕였다. 그런 상혁이의 태도에 만족한 듯 수연은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곤 집중하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 솔직히 '왜 내가 이런 녀석에게....' 또는 절대 그럴리가 없다고도 생각했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속으로 되뇌인적도 있었어. 하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자각할 수 밖에 없었지. 간단히 말해서."
그리곤 부끄러운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얼굴은 터질 듯이 붉어져 있었고, 눈에는 어쩐지 눈물마저 맺혀있는 것같았다. 그러기를 몇 초. 수연이는 고개를 휙 올려 자신을 바라보는 상혁이의 눈에 정면으로 시선을 마주쳤다.
" 나는, 너에게... '공략당해 버렸다'. 라는 거야!"
마치 연애 게임의 히로인처럼. 자신이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다고는 생각치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은 전생을 기억하고 있으며 남에게 다가가는 것도 익숙하지 못했다. 그런 주제에 멘탈은 약하고 도망치는 것이 장기인 곤란한 인간이었다.
그런 본인이, 정말 곤란하게도 저 건방진 남자에게 노린 것처럼 공략당해 버린 것이다.
" 즉."
부끄러운 말을 억지로 하는 바람에 얼굴이 터질 것같았다. 이런 것을 당당하게 말할만큼 자신은 강한 멘탈의 소유자가 아니었으니까. 아마 두번은 절대로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한번에 여기서 끝낸다는 각오로.
" 나는 너를 좋아한다는 거야!"
크게 소리쳤다.
" 더이상 호감도가 올라갈 곳도 없을만큼 좋아해. 너를 안 시간은 윤아나 곱슬이보다 적을지 몰라도-. 결국 호감도는 똑같이 맥스야. 다 같은거니까 절대 지지 않아!"
누가 누구를 좋아하게 되는 것은 단순히 좋아한다는 것이다. 누가 누구를 더 좋아하고, 순서와 크기에 가치를 두는 것은 바보같은 것이다. 수연은 그것을 곱슬이와의 대화에서 깨달았다.
수연은 그렇게 자신이 할 말을 모두 말하고 숨이 가쁜 듯이 어깨를 들썩였다. 무리를 했는지 머릿속이 이리저리 혼란스러웠다. 사실 당장 등을 돌려 도망치고 싶었지만 어떻게든 참아내고 있는 것이 한계였다.
나 완전 대담해! 각오는 했지만 자신도 이렇게 한번에 다 말해버릴줄은 몰랐다. 이게 바로 분위기를 탄다는 건가. 처음 겪어본 일이지만 스스스로가 참 대단하다고 칭찬할 정도였다.
" 나, 나는...!"
그런 수연이의 기세를 받은 것인지 상혁이도 얼굴을 붉히며 뭐라고 소리치려 했다. 그 말에 수연은 자신도 모르게 양손으로 힘껏 상혁이를 밀었다. 그것은 상혁이의 대답이 무엇인지 듣기 무서웠다는 이유도 있지만 단지 갑자기 상혁이의 말이 들려와서 부끄러움이 폭발했다는 측이 컸다.
아무튼 다시 언급하지만 수연이의 근력은 보통이 아니다. 그것에 힘껏 떠밀린 상혁은 단숨에 몇미터를 굴러갈 수 밖에 없었다. 하려던 말은 비명이 되어 허공에 울려퍼졌다.
그것에 화들짝 놀란 수연이였지만, 더이상 함께 있자니 두근거리는 심장에 죽을 것만 같았다. 무리했다. 무리했어. 내가 이렇게 무리하다니 정말 대견하지만 부끄러워!
" 대, 대답은 나중에 어머니의 생일날 들을게. 곧 중간고사니까 공부 열심히하고! 집가서 오늘 내가 한 말 윤아에게 하면 정말 죽일거야!"
부끄러움에 갈라진 목소리가 옥상 가득 울렸다. 수연은 다시 한번 얼굴을 확 붉힌 뒤에 단숨에 옥상문을 열고 아래로 뛰쳐내려갔다. 아무래도 더이상 상혁이와 함께 있는 것은 무리인 것같으니 집까지 전력으로 달려갈 생각이었다.
반면, 수연이의 힘에 족히 몇미터는 나동그라진 상혁은 끙끙거리며 몸을 일으키곤 허망한 얼굴로 수연이가 열고 가버린 옥상 문을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 그렇다고 이렇게 세게 밀 필요는 없잖냐..."
작게 투덜거리던 상혁은 풀썩 자리에 앉았다. 어느 세인가 완전히 어두워진 하늘에 달이 어슴프레 보이고 있었다. 솔직히 태연한척 하고 있지만 상혁이도 가슴이 계속 두근 거렸기에 조금 쉬기로 한 것이다.
바로 대답을 못한게 아쉬웠지만 수연이 본인이 시험이 끝나고, 어머니의 생일날 만났을때 듣고 싶다고 하니 어쩔수 없겠지. 하기야 본인도 지금 답했다면 남은 중간기사 기간에 똑바로 공부에 집중하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 그래도 기쁜걸."
설마, 설마 수연이가 자신을 좋아했을 줄이야. 거기다 먼저 고백을 하다니. 수연이로선 정말 엄청나게 힘낸게 아니었을가 생각해본다. 상혁은 괜시리 실실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한동안 옥상에 앉아 계속 웃고 있었다.
집에서 왜이리 늦냐고 윤아로부터 전화가 올 때까지, 상혁은 계속 그렇게 웃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다음편은 새어머니 편입니다. 드디에 데이트 편이 끝났군요 만세!
이제 저는 롤을 하러 가봐야 겠습니다. 어쩌면 검은사막에 들어갈지도... 오늘은 글쓰느라 게임을 하나도 못했네요. 흑흑. 아마 내일도 이정도 분량일텐데 벌써부터 걱정입니다. 손가락 아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