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내가 상혁이에게 고백하고 나서, 생각보다 특별한 일은 없었다. 집에 돌아가 한참을 뒹굴뒹굴 거리고 다음날 학교에 갔을때 조금 부끄러웠던 것던 것을 제외하면 평상시와 다를 것은 없었다. 다만 상혁이가 나에게 무슨 대답을 해올지 조금 긴장됐다.
그날 바로 대답을 듣지 않은 것은 중간고사 코앞이었고, 어머니의 생일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간고사야 큰 영향을 미치지 않겠지만 어머니의 생일의 경우엔 상혁이가 나의 고백을 받아들였던 거부했던 분명 영향을 줄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머니의 생일이 끝난 뒤 대답을 듣고 싶었다. 고백을 한 것도 분명 나에겐 대단한 일이지만, 그보다 우선 어머니의 생일에 신경쓸 필요가 있었으니 말이다.
" 제법인데? 우리는 절대 네가 먼저 말하지 못할거라 생각했는데."
" 맞아, 아무래도 수연이는 그런 곳에 약한것 같으니까."
" 어머나~. 역시 청춘이네~~."
상혁이에게는 이야기하지 말라고 해두고선 나는 이 세사람에게 내가 고백했던 일을 이야기했다. 아무래도 윤아와 곱슬이에겐 이야기하는 편이 좋을 것같았기 때문이다. 청이 선배는 어떻게 생각하려나 고민했지만 도리어 즐거운 듯이 웃을 뿐이다. 그리고 선배, 우리와 겨우 한살밖에 차이 나지 않잖아요.
" 그래, 하지만 어머니의 생일이 가까우니까 대답은 그 이후에 듣기로 했어."
" 용캐 그런 인내심이 있다 너. 나라면 바로 듣고 싶었을텐데."
" 그래서 머리도 그렇게 비비꼬아져 있는거란다. 나처럼 이렇게 곧은 마음을 가지렴."
신기하다는 듯이 말하는 곱슬이의 말에 내가 살짝 비웃어줬다. 오늘은 지윤이가 부실에 오지 않았던 관계로 지윤이를 대신하여 내가 곱슬이를 직접 놀려먹는 중이다. 최근 상혁이에게 집중하느라 잊고있었지만 역시 곱슬이는 이리저리 놀리는 맛이 남다르다.
" 수연아."
내가 그렇게 곱슬이와 이런저런 말다툼을 하고 있는데, 옆에서 윤아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 옆에 있는 청이 선배도 그런 윤아를 살짝 응시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 힘들었던 아이야. 앞으로 잘 보듬어주도록 하렴."
청이 선배는 그렇게 말하며 조금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상혁이 만이 아니다. 청이 선배도 아직 그런 마음이 분명 남아있었던 듯, 그 미소는 너무나도 여렸다. 윤아는 그런 청이 선배를 한번 응시 한 뒤 나에게 평상시와 다를 것없는 목소리로.
" 물론, 상혁이가 이상한 짓을 하려고 하면 혼내줄테니까 참지 말고 말해야해!"
아하하, 하고 명랑하게 웃으며 말한 윤아의 말에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분명 계속 좋아했을텐데, 저렇게 웃으며 말하는 윤아는 내가 보기엔 그저 대단하게만 보였다. 만약 나라면 저렇게 명랑하게 웃으며 말할 수 있을까.
아마 무리겠지.
나 자신을 추스리는 것도 힘든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을리가 없다.
" 윤아야."
그랬기에 나는 윤아를 향해 살며시 미소지으며 말했다. 나의 미소에 깜짝놀란듯 윤아가 눈을 등그랗게 떴다.
" 만약 내가 남자였다면 분명 윤아에게 반했을거야. 솔직히 지금의 나는 너를 닮고 싶다고 생각해."
" 수연이가 나의 어딜봐서 닮고 싶다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말해주니 부끄럽네."
진심이었다. 부끄럽다는 듯이 웃는 윤아의 얼굴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나는 윤아처럼 저런 강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었다. 존경한다거나, 동경한다고 할지도 모른다. 분명 윤아가 나와 같은 신체를 지니고 있었다면 모두에게 사랑받는 여자아이가 되었을지 모른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 그러니, 나도 노력해야 하겠지."
" 응? 뭐라고 수연아?"
"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무심코 입밖으로 말을 해버렸던 모양이다. 아무튼 가까이 다가온 중간고사를 제대로 마무리하고 어머니의 생일에 힘내도록 하자. 조금씩 조금씩 힘내서 잘못되었던 것들을 바로잡을 수 있도록.
- - - -
중간고사가 끝나고, 어머니의 생일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지윤이와 상의하여 어떻게 하는게 좋을까 한참을 고민했지만 우리 둘다 상상력이 빈곤하여 떠오르는 것은 결국 전과 같은 깜짝 생일파티 정도였다.
어린시절의 실패해버렸던 어머니의 생일파티.
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걱정되는 마음에 멍하니 창밖의 풍격을 베란다에 서서 바라보는데 옆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요즘 창밖을 바라보는 것에 재미를 들린듯한 아버지가 옆에 서있었다.
" 그래서, 이번에 그 남자아이랑 같이 오는거니?"
어머니의 생일날 한 남자아이를 집에 초대했다고 말했다. 보통 가족간의 생일파티라고 할 수 있는 그곳에 상혁이를 초대한 것은 조금 이질적이었지만 아버지는 상관없다고 말했다.
도리어 '네가 그만큼 그 아이를 의지하고 있다는 거지.'라고 말하며 자신이 의지가 되지 못했다는 것에 조금 쓴 웃음을 지으셨다. 하지만 나는 특별히 아버지를 의지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상혁이가 있으면 어쩐지 이런 어려운 일도 할 수 있을 것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사이가 좋아진 것도, 전생의 트라우마에 쓰러지지 않았던 것도 어찌보면 그녀석과 만나며 할 수 있었던 것들이니 말이다.
" 네."
짧게 대답하자. 아버지는 잠시 말이 없다고 조금 쓸쓸한 어투로 말했다.
" 분명."
" ...?"
" 분명 말이다."
아버지는 언젠가 보았던 눈을 한 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 너의 친 어머니가 살아있었다면 분명 이렇게 말했을거다."
" 어떻게요?"
" '고등학생에 연애라니, 엄마는 반대야.'라고 말이지. 그런쪽은 정말 고지식한 녀석이었으니 말이다."
분명 아버지와 어머니가 만났던 것은 어머니가 아직 학생이던 시절로 알고 있다. 그런데 고등학생은 연애가 안된다니 뭔가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 실제로, 우리가 제대로 연애를 시작한것은 너의 어머니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였으니 그렇게 이상한 말은 아니지."
" 그럼 그동안은 어떻게 했나요?"
" 여러가지 일이 있었지만, 그녀가 학교를 졸업할때까진 만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니 자기와 만나고 싶으면 기다리라고, 그렇게 이야기했지."
우와 뻔뻔해. 친 어머니는 어떤 의미론 정말 대단한 사람이 아닐 수 없었다. 아버지가 자신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순간까지 기다려줄 것이라 확신했던 걸까. 물론 어머니가 보통 아름다웠던게 아니니 기다릴 수도 있겠지만...
" 그러면서 졸업하고 얼마지나지 않아 약간의 연애후 바로 결혼해버렸지. 허들이 높은건지 낮은건지 알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 확실히 애매하긴 하네요."
" 너는 엄마를 많이 닮았으니 걱정이 된단다."
무슨 소릴. 나 허들 초 높은데. 다만 허들을 넘는게 아니라 아래로 기어서 통과하는 녀석이 있을 줄은 몰랐지만...
" 이제 와서 아버지 노릇을 하려는 것도 우습지만, 그래도 아버지다보니 딸 아이에게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하니 꺼림직한 것은 사실이란다."
정확히는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차마 지금의 아버지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이러다가 만약 상혁이가 내 고백을 거절이라도 하면 난 대체 어떻게 해야 되는거야!
" 이번 어머니의 생일에는 아버지도 함께 있어줄테니 힘내거라, 딸."
" ...네!"
전의 생일 파티와 조금 다른점이 있다면 아버지도 함께라는 것일까. 물론 상혁이도 함께지만 말이다. 하지만 역시 가족이라고 해야하나, 아버지가 함께 있어준다고 하니 힘이 나는 것같은 기분이다.
어머니의 생일파티가 성공적으로 마무리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거절당하더라도 전과 같이 힘겹지는 않을 것같았다. 이젠 아버지가 곁에 있고, 지윤이와 상혁이. 그리고 모두가 있으니까. 혼자가 아니니 힘낼 수 있다.
이번이 안된다면, 내년에. 내년에 안된다면 내 후년에 계속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어머니도 징그러운 계집애라고 생각하며 못이기는척 받아들여줄지 모르지. 이것을 너무 늦게 시도하는 내가 바보같지만, 더 늦기전에 도전해보도록 하자.
나는 하늘을 향해 떠있는 달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저 달을 잡기위해 손을 뻗는 것처럼 손을 천천히 움직였다. 가볍게 손을 움켜쥐어보지만 당연하게도 닿지 않았다. 돌아가신 어머니라면 분명 저 아름다운 달과 같은 곳에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지켜봐주세요, 엄마.
수연이, 힘낼게요.
엄마에게 받은 이 바턴.
놓치지 않고 열심히 달리고 있으니까. 응원해주세요.
이 마음이 하늘에 닿기를.
나는 하얗게 빛나는 달을 바라며 기도했다.
- - - -
어머니의 생일날.
나는 친구들과 헤어져 상혁이와 단둘이 우리 집을 향해 걸어갔다. 생각해보니 내가 상혁이를 집에 초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같았다. 하기야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 우리집은 평범한 아파트이니까 기대하면 곤란해."
이런 것은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으니 단호하게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학교에서 나는 어째선지 귀한집 아가씨라는 이미지가 있으니 말이다. 혹여 상혁이가 오해하고 있을지 모른다. 물론 상혁이는 내가 30만원을 잃어버리고 징징거리던 모습도 기억하고 있으니 아니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말이다.
" 설마... 내가 집같은 걸로 특별한 생각이나 하겠냐. 그냥 집이구나 하지."
" 아무튼, 너희 집은 꽤 부유하니 말이야. 보통은 히로인쪽이 부유하고 남자쪽이 평범하던데..."
" ....이런 상황에서까지 서브컬쳐쪽으로 생각하지 말아줘."
" 실례구나? 나는 단지 신경쓰였을 뿐이야."
그러고보니 상혁이의 부모님은 무슨 일을 하기에 항상 집에 없는 것일까. 상혁이의 누나인 상화만 보아도 미국 연구소에서 일하는 인재다. 청이 선배만큼의 재벌은 아니더라도 상혁이의 집크기를 보면 보통 월급쟁이의 봉급으로는 무리라고 생각한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이녀석은 나름 부자집 아들이라는 건가. 역시 사람은 알고 볼일이다.
익숙한 귀가길을 따라 걸어가니 익숙한 아파트 단지가 눈에 들어온다. 상혁이가 사는 주택가나 이런 곳에 비하면 확실히 좀 번잡하지만 이런 느낌을 나는 좋아한다. 어린시절에는 이 골목을 들쑤시고 다니면서 놀았는데 말이야.
사실 나름 그시절의 대장놀이는 재밌긴했다. 내가 워낙 보통 대단한게 아니어서 애들도 줄줄이 따랐고, 옆동내 주택가까지 세력을 넓혔을 정도다.
물론 친구는 없었지만...
너무 대단했던 것도 알고 볼 일이다. 아마 그때의 나를 아는 사람이라면 지금의 나와 전혀 매치시키지 못할 것같다. 분명 중학교나 고등학교나 어린시절의 나를 아는 사람이 있을게 분명한데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엘레베이터를 타기 위해 앞에 서있으니, 상혁이가 내심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 그러고보면 내 주변사람들은 죄다 주택가에 살다보니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타본게 오랜만이네."
이 부르주아 녀석. 그거냐 그거. 도련님이라 지하철이 뭔지도 모르는 그런 상황인거지.
" 혹시 지하철이라는 것은 들어봤니?"
" 그, 그런 의미로 말한게 아니라고! 단지 신기하다는 거야. 묘하게 내 주위사람들은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 없잖아. 명환이네 집에는 아직 못가봤고..."
" 그녀석 집은 아파트야. 그나저나 확실히 신기하긴 하구나."
생각해보면 그건 그렇긴하다. 나를 제외하면 상혁이 근처에 있는 사람들은 죄다 주택에 살고 있지. 곱슬이는 도장이 집이고, 윤아는 상혁이 집에서 살고 있으며 청이 선배는 분명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저택일 것이다.
분명 만화에서나 보던 그런 커다란 정원이 딸린 집일거야. 조금만 멀리나가면 길을 잃어버릴 정도의...
" 그러네. 분명 유연 고등학교가 나름 잘사는 애들이 많기는 해도 기이할 정도로 네 주위에는 부유한 애들이 꼬이는 구나."
이녀석 사실 엄청난 재물운을 타고난 녀석이 아닐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진지하게 들었다. 연애운 뿐이 아니라 재물운까지 가지고 있다니 무서운 녀석!
그런 대화를 하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집에 도착하니 이미 지윤이가 집에서 분주하게 집을 꾸미고 있었다. 오늘은 아버지가 일을 끝내고 오실때 그 근처에 일이 있으신 어머니를 모시고 온다고 하셨으니 아직 여유는 있었다.
우리 학교의 가장 좋은 점은 야자가 자율이라는 점이지. 보충도 그렇고.
...물론 이게 다 엄청난 사교육 열풍때문이지만 말이야. 흥 하지만 그렇게 돈을 들여도 결국 전교 1등은 내 차지이고 나아가 전국 1등도 나의 것이란 말이지. 결국 내가 정말 최고라는 것이다. 이러니 굉장히 재수없는 녀석이 된 듯한 기분이다.
" 언니 왔네. 그리고 구더기 오빠도 어서 오세요."
지윤은 벽에 풍선을 달며 말했다. 뭔가 다르게 꾸밀 방법을 고민했지만 우리의 상상력은 유아시절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모양이다.
" 부디 부모님들이 오신다면 제대로 이름을 불러줬으면 좋겠어."
" 고민좀 해볼게요."
설마 아무리 지윤이라고 해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는데 상혁이를 구더기라고 부를까 싶었지만- 혹시 지윤이라면 모르는 일이다. 나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 방으로 들어갔다. 거디가 괜히 러브코미디 같은 이벤트를 막기 위해 문을 잡궈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아, 그러고보니 방을 좀 치워야 할려나. 보통 이럴때 남자애가 여자아이 집에 방문하면 방을 둘러보며 '이게 여자아이의 방이구나...'하는 이벤트가 왕도적인데.
주변을 둘러보자 지윤이가 정리해서 꽤 깔끔하지만 이런 저런 곳에 꽂혀있는 라이트 노벨과 게임팩, 그리고 휴대용 게임기가 눈에 들어왔다. 나름 귀여운 것을 좋아하기에 침대위엔 고양이 쿠션이나 책상 위엔 이런저런 귀여운 물품들이 있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이리저리 놓여있는 각종 게임기나 라노벨에 비하면 비중이 적었다.
이것만 보자면 '귀여운 물건이 좀 있는 남자 오덕의 방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정도다. 그나마 애니캐릭터 포스터를 붙이거나 하는 취향이 아니라서 다행이지 이정도면 소프트하잖아.
' ...정리해야하나?'
하지만 이것을 정리하면 어머니 생일 준비하는 시간이 부족할 것같았다. 지금으로선 어쩔 수없이 조금만 대충 침대밑에 밀어넣어두는 정도로 만족하자.
옷을 사복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오자 지윤이를 도와 이런저런 장식을 달고 있는 상혁이가 눈에 들어온다.
" 어머니 생일을 준비하는 것을 도와줘서 고마워."
초대겸 도와달라고 부른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저런 모습을 보니 감사를 표해야할 것같아 말하자, 상혁이가 고개를 돌리고 씨익 웃었다.
" 요즘 들어 순순히 고맙다고 말하는걸?"
" 구더기 주제에 말을 하는 재주가 아주 제법이구나."
" ...죄송합니다."
급히 사과하는 상혁이의 모습에 픽 웃자 옆에있던 지윤이가 멀뚱 멀뚱 나를 바라봐왔다. 왜 그러는 거지?
" 왜 그러니?"
" 아니, 그냥 묘하게 구더기 오빠와 있을때는 잘 웃는구나 싶어서."
" 잘-이라고 해봐야 이렇게 가끔 피식 웃는 정도인걸. 과장이 심하네."
" 그래도 조금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하긴 고백까지 한 대상은 다르겠지."
" ...너 그걸 어떻게- 가 아니라 유상혁?"
지윤이에겐 내가 고백했다고 아직 말하지 않았다. 지윤이라면 분명 이리저리 놀려먹을게 분명하고 상혁이를 그다지 좋아하는 것같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대사로 볼 때 내가 아닌 누군가에게 들은 것이 분명한데 그 대상은 윤아나 곱슬이, 청이 선배가 아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 셋은 그런 것을 함부로 이야기할 성격도 아닐뿐더러 내가 지윤이에겐 아직 말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다.
" 죄송합니다."
" 사과로 모든게 끝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니?"
분명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얼굴이 괜시리 붉어진다. 옆에서 지윤이는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크크크, 하고 웃고 있었다. 이 녀석은 요즘 날이 갈수록 남의 속을 긁는 실력이 늘고 있어 언니로서 여러가지 착잡한 마음이 든다.
" 됐어. 이미 말해버린것 어쩔 수없지. 난 음식을 준비할테니 지윤이를 도와 계속 꾸미는 것을 도와주렴."
" 옛썰!"
어설픈 자세로 경례하며 대답하는 상혁이를 뒤로 하고 나는 부엌에 들어섰다. 내가 아직 어렸을때 지금과 같이 어머니의 생일을 준비하기 위해 이곳에 서있었다.
그때의 나는 요즘 자신에게 차가워지기 시작했던 어머니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음식을 만들었다. 책으로 열심히 케이크 만드는 법을 보고 멋지게 오븐으로 빵을 구워 새일 케이크를 완성했었다.
어머니가 기뻐해주시면 좋을텐데.
어쩌면 감동받아 우는 것 아닐까?
괜히 자신이 뿌듯해져서 어머니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어머니가 좋아하는 음식. 어머니가 좋아하는 초를 켜두고 돌아와서 깜짝 놀라는 모습을 상상했다.
어머니를 엄마라고 부르고 싶었다.
우리 수연이 정말 대단하구나! 라고 칭찬하며 안아주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어머니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 결과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달랐다.
열심히 만든 케이크는 거들떠 보지도 않으셨다. 오히려 혐호스럽다는 듯이 시선도 마주치지 않았다. 왜 나는 매번 이런 걸까.
열심히 하면 할수록, 왜 멀어지기만 하는건지.
부모님은 어째서 전생에서나 이번 생애나 나를 봐주지 않는 건지.
돌아가신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나를 계속 사랑해주셨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없어졌고 이젠 모든게 무력해졌다. 이제 다시는 어머니의 생일에 케이크를 만드는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다시 한번 앞치마를 두르고 어머니의 생일 케이크를 만들기 위해 이 앞에 섰다. 어머니가 좋아하는 음식은 지금도 잘 알고 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조금 입맛이 달라진 어머니가 좋아하는 음식도, 선호하는 취향도 알고 있다.
왜냐하면 나는 계속 어머니를 보고 있었으니 말이다. 사이 좋게 될 수는 없어도 계속 지켜봤다. 사랑받는 딸이 될 수는 없지만 딸이 되고 싶어서, 멀리서 나마 계속 응시했다. 어머니는 나를 조금도 봐주지 않았지만 나는 어머니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어머니는 생크림 케이크나 초콜릿 케익보단 귀여운 장식이 들어간 딸기 케이크를 좋아하신다. 이것만은 예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오늘도 밖으로 나간 이유가 어머니의 생일 축하해주는 친구들을 만나러 간 것이며 나가기 전부터 어디에 가는지 무엇을 먹을지 지윤이에게 하나하나 털어두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에게 있어 딸은 지윤이 뿐이었기에 나에게 향해야 했을 사랑까지 모두 지윤이에게 퍼부었다.
그것을 질투하지는 않는다. 내가 있기에 그만큼 지윤이는 어머니에게 비교도 당했고, 마치 꺾어야 할 적처럼 묘사된 적도 흔했다. 도리어 지금의 지윤이가 나를 좋아해주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케이크를 오븐에 넣으며 목에 걸고 있던 어머니의 목걸이를 손에 쥐었다. 역시 조금은 불안했다. 지윤이와 상혁이가 뒤에서 준비를 하고 있음에도 마치 혼자인 것처럼 마음이 차가웠다.
하지만 이제는 도망치지 않는다.
너무 오랫동안 도망쳤다. 수없이 거부했고 마음을 닫고 그것에 대한 생각을 단절시켜 버렸다. 하지만 이젠 그러지 않을 것이다. 나를 위해서라도. 그리고 가족을 위해서.
" 다 됐다!"
" 생각보다 괜찮은거 같지 않아 언니?"
완성 되어 가는 케이크를 장식하고 있으려니 지윤이가 보란듯이 주변을 가리켰다. 그것은 어린시절과 닮았지만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확실히 어설프게 둘이 꾸몄던 것보단 훨씬 그럴듯하고 예뻤다. 너무 유아틱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막상 저렇게 꾸민 것을 보니 생각 이상으로 대단했다.
" 멋지네. 둘 다 수고했어."
" 헤에, 그건 케이크야? 말은 들었지만 정말 이런 것도 만들 수 있구나 대단하네."
내가 만든 케이크를 바라보며 상혁이가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귀엽게 딸기로 장식하며 크림으로 생일 축하 메시지를 적은 예쁜 케이크였다. 그리고 케이크를 만들며 완성시킨 다른 음식들도 식탁에 놓여져 있었다.
" 새삼 정말 너 대단하구나. 이정도로 요리를 할 수 있는 고등학생은 별로 없을거라고 생각하는데."
상혁이가 감탄한 것처럼 말했지만 나는 이 만큼 요리를 할 수 있는 다른 한명을 알고 있었다.
" 곱슬이도 아마 분명 이만큼 할거라고 생각해. 그녀석, 네가 기뻐할거라고 생각하며 계속 요리를 연습해왔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니 왠지 곱슬이에게 미안해졌지만 이런 것은 녀석이 바라지 않을 것이다.
" 그래도 대단한건 대단한거야. 어머니도 분명 기뻐해주실거라고 생각해."
다정하게 말해오는 상혁이의 말에 나는 살며시 미소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차가웠던 마음이 다시 따뜻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래, 실패할지 모르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또다시 울고 충격을 받을지라도 그가 옆에서 위로해줄 것이다.
" 고마워."
" 아니 뭘 이정도가지고..."
내 감사의 말에 상혁이가 얼굴을 붉혔다. 그 모습이 조금 귀여웠다.
" ...흠흠. 큼!"
갑작스럽게 들린 헛기침 소리에 옆을 보자 뚱한 얼굴로 우리를 보고 있는 지윤이가 시야에 들어왔다.
" 갑자기 그런 분위기를 풍기니 적응 안되네요. 그보다 곧 오실 시간이니 마무리 하도록 하죠."
냉정하게 말하는 지윤이의 말에 나와 상혁이는 허둥지둥 남은 것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내가 요리를 하느라 난잡해졌던 부엌을 청소하고 꾸미느라 이곳저것 널려있는 기타 잡동사니들도 마저 정리하자 아버지와 어머니가 집에 오실 시간이 코 앞으로 다가왔다.
" ....."
어쩐지 초조해져서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는데 그런 내 마음을 어찌 알았는지 옆에 있던 상혁이가 나를 바라보며 씩 웃으며 말했다.
" 불안해?"
" ...별로."
" 걱정마.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도와줄테니까."
상혁의 말에 나는 설핏 웃었다. 물론 무슨 일이 생긴다고 한다면 상혁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애초에 나와 어머니 사이에 생긴 일이었고, 벌어질 일이었다. 그것을 제 삼자인 상혁이가 조율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가족인 지윤이나 아버지도 하지 못했던 것이니까.
하지만 그런 말도 안되는 위로라도 위안이 되는 것이 참 신기했다.
우습게도 나는 이녀석을 정말로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만큼.
그 순간, 철컥-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문앞에서 폭죽을 들고 기다리던 우리는 얼굴을 굳혔다. 특히 나는 가슴이 쿵쿵 뛰며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같은 현기증마저 생겼다. 하지만 아랫입술을 깨물고 그 자리에 서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 다녀왔다."
평상시처럼 담담하게 말하는 아버지의 뒤로 어머니의 실루엣이 보였다. 아버지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고 어머니가 집으로 들어온 순간 우리를 제각기 손에 들고 있던 폭죽을 터트렸다.
""어머니(엄마), 생일 축하드려요!!"
"
나와 지윤이가 그렇게 외치며 폭죽을 터트리자 아버지에 뒤이어 들어오시던 어머니가 눈을 크게 뜨며 놀란 듯이 입을 벌렸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이던 그때 이후로 처음이니 충분히 놀랄만 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이런 생일파티는 두번다시 없을 것같았으니 말이다.
" 자자, 아이들이 저번부터 엄마 생일을 준비한다고 노력하더니 아주 멋지게 꾸며놨네. 어서 들어와요."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존댓말을 쓰신다. 이건 새 어머니와 만난 첫만남때부터 그랬던 터라 고치기가 힘들다고 한다.
아버지는 어울리지 않게 과장되게 말하며 벙쪄 있는 어머니의 손을 끌고 집으로 들어왔다. 집은 어머니의 생일을 축하한다는 의미로 멋지게 꾸며져 있었다. 식탁에는 내가 차린 음식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좋아하는 음식, 그리고 어머니의 생일을 축하 한다는 의미의 케이크가 그곳에 있었다.
" 아, 안녕하세요."
뻘쭘하니 상혁이가 들어오는 두사람에게 인사했다. 폭죽을 터트리고 어정쩡하게 서 있던 모습이 영 못미더웠지만 그래도 저렇게 인사라도 한 것은 합격점을 줄만 했다.
" ....이건."
어머니의 입이 열렸다. 어머니는 망연한 얼굴로 식탁을 보고 잇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모든 것이 이질적인 것처럼 그 눈은 과거의 그것과 익숙했다.
" 그, 그리고 어머니 이거..."
저번에 샀던 선물을 쥐고 천천히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어머니의 생일날에 어울리는 탄생석 목걸이였다. 지윤이에게 조금 떠밀리듯 앞으로 걸은 나는 떨리는 손으로 어머니에게 손에 들린 선물을 건냈다.
그 선물에 방황하던 어머니의 시선이 나의 손에 고정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천천히 받아든 어머니는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하지만 그 시선은 결코 다정하지 않았다. 남을 보는 눈, 아니 그 이하였다.
어머니는 여전히 나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 ...왜?"
천천히 어머니는 나를 공허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 저는, 어머니를 사랑해요. 저를 똑바로 봐주셨으면해서..."
떠듬떠듬, 움직이지 않는 입을 움직여 힘겹게 한마디 한마디를 말했다.
" 조금 이상할지도 모르고, 아이답지 않을때도 있지만 저는 이제 고등학생일 뿐인 아이에요. 저는, 어머니에게..."
어머니의 시선에 변화는 없었다. 역시 틀린건지도 모른다. 나는 눈을 꾹 감고 힘겹게 마지막 말을 했다.
" ...사랑받고 싶어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울컥해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자 어머니가 그 눈물때문인지 잠깐 움찔했지만 크게 무언가가 변하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나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지윤이도, 아버지도 그리고 상혁이도 어머니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 -분명 너와 나는 이제 이런 것은 암묵적으로 그만두는 것 아니었니?"
흔들리는 어조로 어머니는 차갑게 말했다. 그리고 공허하게 떠있던 시선을 나에게 똑바로 고정한 체.
" 무리야. 이미 무리라고. 최근 지윤이와 당신의 태도가 이상하더니만 이런 것을 생각하고 있었군요. 할 수 없는것은 할 수 없는거에요. 최근 수연이 네가 이상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어. 지윤이와 사이좋게 지내는 것도 알고 있었고. 대화하지 않던 아버지와 대화하는 것도 알고 있었지."
어머니는 떨리는 음성으로 계속해서 말했다. 어머니의 눈은 더없이 차가워서 커다란 얼음의 벽이 나와 어머니의 사이를 막고 있는 것같았다.
" 너는 이상했어. 아버지와 조금도 대화하지 않으면서 그러면서 너무나 활기차고. 나와 지윤이를 사랑했어. 그것이 이상했지. 그리고 그 이상하다는 생각은 점차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아버지와 전혀 대화를 하지 않는 아이. 어린시절에 어머니를 잃었음에도 사랑하고 사랑받는 법을 아는 아이. 그것은 너무나 기이했고 두려웠다.
" 무엇을 하든 못하는 것이 없었고, 그것은 도무지 아이가 할 수 있는게 아니었어. 절대로. 나는 그래서 네가 무서웠지. 지금도, 계속 두려워하고 있어."
그것은, 알고 있다. 어머니는 조금도 변함없이 나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고 있었다. 그래도 조금이나마 그 마음을 바꾸고 싶었지만-. 무리였던 모양이다.
" 말이 조금 심하-"
아버지가 옆에서 끼어들려 했지만 어머니는 아버지를 보지 않고 나에게 시선을 고정한체 말을 계속해서 이었다.
" 그 날 이후로 너와 나는 서로에게 접근하지 않으며 자신의 위치를 고수했어. 하지만 말이야. 요즘 이상하지 않니. 조금씩 조금씩 지윤이에게 다가가고, 아버지와 대화를 하고 그날 이후 너는 그것들을 그만두기로 했잖아?"
어머니는 생각한 것이다. 내가 점차 어머니가 있을 자리를 빼앗고 있다고. 자신의 친 딸인 지윤이, 그리고 새로운 사랑인 남편까지. 모두 괴물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밀고 있는 것같이 느껴진 것이다.
" 지윤이와 네가 친해지지 않기를 바랐지만 무리였어. 남편도 최근 너에게 신경을 쓰기 시작했지. 그것으로 인해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지."
점점 자신의 편이 없어져, 가족들은 두려워마지 않는 나의 편이 되어버린다. 내가 느껴왔던 고독을 점차 엄마가 느끼기 시작했던 것이다. 집안에서 자신의 편은 없고 오직 고독한 혼자.
어머니는 내가 모든 것을 이렇게 하기 위해 꾸민 것이라 생각했다. 어린시절의 모습이 연기였다고 생각했듯, 이제 더이상 내가 무엇을 하든 그것을 믿지 못하게 된 것이다. 내가 가족들과 점점 사이가 좋아질 수록 어머니는 고립되 왔던 것이다.
" ...엄마."
지윤이가 작은 목소리로 어머니를 불렀다. 어머니는 슬픈 눈으로 지윤이를 보았다. 그리고 등을 돌렸다. 손에 들려있던 선물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 나는, 아무래도 너를 사랑할 수 없겠구나. 이젠 네 모든 행동을 믿을 수 없어. 그저 무섭고 두려울 뿐이야."
굳어있는 나를 향해 어머니는 냉정하게 말하고는 현관문을 열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밖에서 머물 생각인 것같았다. 가족들과 함께 생일을 보내는 것이 아닌 혼자 보내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 오늘 일은 서로 없었던 일로 하자."
그 말을 끝으로 어머니는 문을 열고 사라졌다. 나도, 지윤이도 아버지도. 그리고 상혁이도 그것을 막을 수 없었다. 어머니는 결국 나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반응으로 볼 때 앞으로 계속 이렇게 한다고 해도 나를 이해시킬 수 있을지 두려움이 앞서왔다.
나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은 예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 ...케이크. 맛있게 구워졌는데."
쓸쓸한 얼굴로 어머니의 생일을 축하하는 케이크를 바라본다. 결국 이번에도 어머니가 드실 일은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된거 음식이라도 서둘러 정리하도록 하자.
그렇게 마음 먹고 식탁에 놓인 음식 몇개를 치우려고 하자 나의 행동을 가로막는 손이 있었다.
" 기다려 언니. 내가 어머니를 모시고 올게. 엄마도 갑작스러운 일에 깜짝 놀랐을 뿐이야. 언니가 하는 것을 멋대로 연기같은 걸로 치부하다니 너무해!"
지윤이는 드물게 화가난 얼굴로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지만 그런 나의 행동을 아버지가 막았다.
" 지윤이의 말이 맞다. 결국 이것은 나의 책임도 있는 것이겠지. 나의 행동이 너를 그렇게 만들었고 이런 갈등을 만들었다. 그 사람에게 제대로 설명하고 데리고 오마."
지윤이와 아버지는 저마다 방금 나간 어머니를 따라가기 위해 문을 열려고 했다. 그리고 그에 따라 상혁이도 함께 가려는 듯이 앞으로 몸을 움직였고, 나는 그런 녀석의 소매를 꽉 붙잡았다.
" ...어디가는 거니?"
" 어디가긴, 너의 어머니 모셔오는데 도우러 가는거지."
" 너는 가족도 아니잖아."
" 앞으로 될지도 모르잖아."
나의 말에 상혁은 단박에 반박했다. 그 어이없는 말에 벙찐 나를 상혁은 피식 웃으며.
" 이런 것은 가족이 아니고가 중요한게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딸이 준비를 열심히 했는데 도망쳐버리는 것은 좀 아니잖아?"
그 말은 마치 '누가 너희 어머니 아니랄까봐'라고 하는 것같았다. 친 어머니도 아닌데 그런 곳은 닮은 구석이 있다는 듯이. 하지만 그것은 달랐다. 어머니는 단지 이번일을 없었던 일로 하기 위해서 거부한 것이다. 도망쳤다고 하기엔-.
" 그게 도망친거야. 너와의 일. 앞으로 가족과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도망친거야."
" 그건...."
" 맡겨둬. 가족은 아니지만 누구때문에 도망친 사람을 찾는 것은 이골이 나있거든."
상혁이는 씨익하고 웃으며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당당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나도- 라는 생각에 말을 꺼내려 하자 상혁은 어떻게 알았는지 고개를 흔들었다.
" 이번에는 네가 기다리는 사람이 되는거야. 걱정마, 반드시 너의 어머니를 모시고 돌아올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웃는 그의 모습에 나는 방금전까지 무너질 것같은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나는 언제나 도망치기만 했다. 이것은 그 벌인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그를 믿고 기다려보도록 하자.
" 응, 믿을게."
상혁이의 웃음에 보답하듯 미소지으며 말하자 상혁이가 나의 어깨를 탁탁 두드리고 지윤이와 아버지와 함께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나는 그 모습을 손을 흔들며 배웅해 줄 수 밖에 없었다.
믿고 기다려보자. 그것이 해피엔딩이 아닐지라도, 나를 계속해서 도와준 그를 믿고서.
- - - - - -
상혁은 이렇게 누군가를 찾아가는게 도대체 몇번째인지... 라고 생각하며 달렸다.
수연이의 아버지는 뒤쪽 길로 갔고. 지윤이와 상혁이는 통학로가 있는 방향의 길로 가기로 했다. 본래 따로따로 가려했지만 상혁이만 혼자 수연이의 어머니를 설득하고 모셔오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으므로 함께 가기로 한 것이다.
" 정말 무슨 생각으로 따라온건지 모르겠네요."
지윤이가 투덜거리며 말하자 상혁이가 엷게 웃으며.
" 이래뵈도 네 언니 찾는 것이 특기거든. 혹시 너희 어머니도 금방찾을지 모르잖아? 그건 그렇고 금방 따라 나온 것같은데 안보이네."
그 말처럼 수연이의 어머니가 나가고 얼마지나지 않아 따라 내려온 것같은데 수연이 어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 아무래도 오늘 집에 들어오시지 않는다면 시내쪽으로 가신거 아닐까? 호텔같은데에 묶으실지 모르잖아."
" 확실히 그렇겠죠? 정말 엄마도 너무한 것같아요. 이정도면 언니의 진심을 알만도 한데..."
조금도 언니를 받아들이지 않는 어머니의 태도에 도리어 지윤이가 가슴이 아팠다. 대체 자신의 어머니와 언니는 어디까지 사이가 벌어져있던 걸까.
" 하지만 난 조금 알 것같기도 해. 수연이의 어머니는 어쩌면 지금 수연이의 모습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지 몰라. 하지만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고독하게 있었던 수연이를 내쳐버렸던 것이 되니까, 그것이 죄책감이 되어 지금의 수연이를 더욱 인정하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지."
" 무슨 소리에요?"
" 너희 어머니는 원래 수연이에게도 좋은 어머니가 되고 싶었던 거잖아? 그런데 그날 이후로 그것이 완전히 틀어진거야. 그리고 수연이를 무서워하게됐지. 하지만 이제 수연이가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만은 진짜라고,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보통은 죄책감이 생길거라 생각해. 계속 상처받고 외면하고 있었던 자신을 인정하고 싶지 않을지 몰라."
" 하지만 그건..."
" 그래서 도망친거라고 생각해. 자기 자신도 계속 그곳에 있을 수 없었을테니까."
물론 어디까지나 상혁이 본인의 추측이다. 정말 조금도 수연이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마음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은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도 계속 새 어머니를 사랑하려고 하는 수연이가 너무 슬프니 말이다.
" 아, 저기!"
지윤이가 무언가를 발견한 듯 소리치자. 횡단보도 앞에 서있는 익숙한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수연이의 어머니가 그곳에 서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방금 지윤이가 말한 소리를 들은 듯, 고개를 뒤로 돌린 수연이의 어머니는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자신을 쫓아왔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 엄마!"
지윤이가 어머니를 향해 소리치자, 그녀는 당혹스런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마치 이곳이 횡단보도라는 것을 잊고 있는듯이 도망치려는것처럼 천천히.
" 오지마!"
비명처럼 소리치는 수연이의 어머니의 모습에 다가가던 상혁이와 지윤이도 발을 멈췄다.
" ...왜 이곳에 있는거니? 생일파티는 끝났어!"
" 아니에요! 아직 시작도 하지 못했는걸! 엄마가 없으면 엄마의 생일파티가 아니잖아!"
수연이 어머니의 말에 지윤이가 마주 소리쳤다. 그렇게 둘의 대화를 듣던 상혁은 문득, 수연이 어머니의 몸이 인도에서 밖으로 나가있다는 것과, 옆에서 한대의 자동차가 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 수연이 어머니의 위치에서는 옆에 있는 커다란 자동차 때문에 보이지 않았겠지만 거리가 떨어져 있는 상혁이의 위치에서는 똑바로 보였다.
수연이의 어머니는 그것도 모른체 지윤이가 앞으로 다가갈 수록 조금씩 조금씩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 ....이거 위험하잖아?!'
지윤이와 어머니는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같았다. 상혁은 지윤이가 앞으로 걸어가는 것을 막으며.
" 옆에 차가 오고 있으니 위험해요!"
크게 소리쳤지만 그게 문제였다. 수연이의 어머니는 상혁이가 지윤이를 막자 그것이 기회라고 생각했는듯 등을 돌리고 횡단보도를 재빨리 건너려했다. 하지만 그 순간 옆에서 오는 자동차를 보고 굳을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상혁은 누가 말릴세도 없이 앞으로 달려갔다.
솔직히 거리상 절대 무리였다. 수연이라도 되지 않는 이상 이 거리를 단숨에 달려가 자동차에게 치이기 전에 수연이의 어머니를 구해낸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상혁은 주저하지 않고 앞으로 달려갔다. 그것은 머리로 생각하는 것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던 것이다.
무리다.
달리기를 시작하고, 그제서야 깨달았다. 이 거리는 자신이 죽었다 깨어나도 수연이의 어머니를 구하기엔 무리였다. 거기다가 만약 저기까지 도달해서 수연이 어머니의 앞에 도달한다고 해도 함께 안고 구르거나 자신쪽으로 당길시간은 없었다.
그저 달린 가속도 그대로 밀쳐내는 것뿐. 그렇게 되면 저 자동차에 치이는 것은 자신이 될 것이다.
자신이 그렇게 까지 할 이유는 없었다. 유상혁. 자신은 이제 겨우 고등학교 2학년을 앞두고 있는 소년일 뿐이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과 사이가 좋지 않은 어머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애초에 수연이의 어머니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런 그녀를 위해 목숨을 걸고 구해야할 이유는 조금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상혁은 달리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저기서 수연이의 어머니가 교통사고를 당하고 죽는다면. 수연이는 어떤 얼굴을 할까.
분명 슬퍼할 것이다. 펑펑 울 것이 분명했다. 그 바보, 겉은 그렇게 단단해 보이면서 속은 엄청나게 여린 녀석이니까.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해도 사랑하려고 했던, 그리고 사랑하는 새어머니였다. 어쩌면 겨우 웃기 시작한 지금의 미소도 사라질지 모른다.
그런 것은 싫었다.
그래서 상혁은 한층 힘내서 앞으로 달렸다. 닿을지 닿지 못할지는 둘째다. 자신은 구해야했다. 저기에 당혹스런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수연이의 어머니를 향해.
어리석은 행동인지도 모른다. 남이나 마찬가지인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걸고 달리다니. 하지만 상혁은 지키고 싶었다.
이제야 겨우 웃기 시작한 수연이의 미소를.
그것은 어린 날의 만용인지 치기인지 모른다.
하지만 한번쯤, 좋아하는 여자아이의 미소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다. 라는 것은 나름 상혁이의 로망이었다. 진짜로 그렇게 될 줄은 몰랐지만.
" 우아아아아아아!!"
이렇게 달린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온힘을 다해 달렸다. 하지만 무리, 절대로 차에 치이기전에 자신이 저곳에 도달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주변의 시야가 느리게 보이고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자신은 그곳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무리.
불가능이라는 말이 있는 것이다.
사람이 자동차보다 빠르게 달리는 것은 '불가능'이라고 한다.
그것은 상혁이도 잘 알고 있다. 그래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것은 겨우 '노력했지만 무리였어'라는 것으로 변명할 수도 없는 것이다. 달린다, 그리고 반드시 구해서 수연이에게 데리고 돌아간다. 그런 생각으로 앞으로 달렸다.
불가능.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을 불가능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것을 할 수 있는 경우가 딱 하나 있다.
기적.
기적이 일어난다면.
『 고등학교에 연애는 조금 이르다고 생각하지만.』
누구의 목소리일까. 상혁은 멍해진 정신 속에서 들리는 음성에 귀를 기울였다.
『 여기선 응원을 해줘야겠지. 힘내서 달리는거야. 해피엔딩을 향해서.』
달렸다.
그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상혁이의 몸은 거짓말처럼 수연이의 어머니의 앞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것이 어떻게인지는 모른다. 중요한 것은 상혁이가 수연이의 어머니의 바로 앞까지 달려왔다는 것이다. 자동차에 치이기 바로 전에.
뭐라 말할 시간도, 다른 동작을 취할 시간은 없었다. 그저 온 힘을 다해 차가 오지 않는 반대편 도로 힘껏 밀을 뿐이다.
자신이 이렇게 쌨는지, 아니면 달려온 속도가 붙어서 그런지 수연이 어머니의 몸은 성공적으로 반대편 도로까지 밀려났다.
와. 해냈잖아.
정말 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거친 숨을 헐떡이며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뒤로 돌리자 지윤이가 울 것같은 얼굴로 뭐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저녀석도 저런 얼굴을 할 줄 아는구나. 상혁은 안심하라는 듯이 특유의 어설픈 웃음을 지어보였다. 언제나 제대로 일을 마무리 할줄 모르는 스스로가 생각할때는 완벽하다고 생각할만큼 멋진 마무리였다.
좋아, 나도 할 수 있잖아.
정말 오늘 나는 최고로 멋졌
- -
언제쯤 오려나-.
수연은 점점 식어가는 음식들을 앞에 두고 식탁에 앉아있었다.
어머니의 생일 케이크에 초를 붙이는 것은 역시 무리였다.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옆에 두었던 다른 초들이 하늘하늘 흔들리고 있었기에 나는 그것을 가볍게 불어서 껐다. 언제 올지도 모르니 계속 둬봤자 좋을게 없었다.
녀석이 어머니를 데리고 올것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막연한 믿음이 생겨버린 것이다. 이녀석은 언제나 내가 힘들때 도와줬으니까 이번에도 할 수 있는게 아닐까-하고.
" 빨리 돌아오란 말이야, 이 바보."
툴툴 거리며 목에 걸린 목걸이를 만지고 있는데, 거실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이시간에 전하라니 누구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귀여운 소리를 내며 울리고 있는 전화를 잠시 응시한 뒤 천천히 전화기를 들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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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