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01화
[01.-현대의 무인]>>
도시의 밤은 인산인해였다. 거리에는 화려한 네온사인들이 번뜩였고, 한창 피 끓는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여흥을 위해 밤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하지만 그런 젊은이들과 유독 동떨어져 보이는 20대 중반의 사내가 있었다. 복색도 유행에 뒤떨어진데다, 사내의 얼굴은 즐거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길을 걷던 사내는 대로를 벗어나 어떤 샛길의 골목으로 향했다. 인적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어둡고 음산한 길이었다.
좀 더 깊이 걸어 들어간 사내는 허름한 건물들 중 하나로 발을 들였다. 보기에는 거의 폐가나 다름없는 건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내는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서더니 벽에 걸린 망가진 시계의 추를 잡아당겼다.
끼이이익!
벽 한쪽이 스르륵 밀려나면서 숨겨져 있던 새로운 공간이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은은한 조명과 음악이 흐르고 있는 바(Bar) 형태의 주점이었다.
폐가나 다름없는 건물 안에 이런 장소가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선 사내는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바텐더를 향해 대뜸 외쳤다.
“어이, 의뢰 받으러 왔다.”
바텐더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진저리난다는 듯 투덜거렸다.
“또 네 녀석이냐? 의뢰를 고르는 조건도 까다로운 주제에 질리지도 않고 수시로 찾아오는군.”
“아니, 갑자기 무슨 불청객 취급이야? 지금까지 내가 처리한 의뢰가 몇 건인데.”
“아니까 안 내쫓고 놔두는 거다. 그런 실적도 없었으면 네 녀석을 진작에 퇴출시켰겠지.”
사내의 볼멘 항변을 그런 식으로 받아친 바텐더는 곧 화제를 전환하였다.
“아무튼, 마침 잘 왔다. 좋은 건수가 하나 생겼지.”
“좋은 건수라. 내 원칙은 잘 알지?”
“···그래, 의뢰 대상은 언제나 죽어도 싼 놈들로만 추려 달라, 그거잖아.”
사내의 말에 퉁명스럽게 대꾸하는 바텐더.
이미 몇 번이나 경험이 있었다. 원칙에 맞지 않는 의뢰를 건네줬다가, 사내가 의뢰 도중에 난동을 부려서 그걸 수습하느라 말도 못할 고생을 했었으니까.
그래서 사내에게 의뢰를 주선할 경우 더더욱 신중을 기해 골라주었다. 꽤나 성가신 일이었지만, 그래도 바텐더가 사내를 내치지 못하는 것은 실력 하나만큼은 확실하기 때문이다.
의뢰지를 받아들인 사내가 내용을 죽 훑어 내렸다. 내용이 좀 길긴 했지만 의뢰를 숙지하는 데엔 별 문제가 없었다.
“이 놈이 바로 죽어 마땅한 놈이라 이거지?”
“맞다. 아주 악질적인 놈이지.”
바텐더를 빤히 바라보던 사내가 으름장을 놓았다.
“만일 이게 전부 거짓부렁이면 당신이 먼저 내손에 죽어.”
“하도 들어서 이젠 진부하기까지 한 말이군. 마음대로 해라. 그 외에는 다른 레파토리 없나?”
“칫.”
자신의 말을 가볍게 흘려버리는 바텐더의 태도에 사내는 가볍게 혀를 차고 말았다. 이런 진부한 협박이 먹히기엔 두 사람 모두 서로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여기 적힌 내용의 절반만 맞다 해도 이번 의뢰대상은 천하에 둘도 없는 개자식이었다. 바텐더도 나름 조사를 해봤을 테니, 괜한 허튼 소리를 써놓진 않았을 터.
이제 남은 것은 의뢰를 이행하는 것뿐이다.
“깔끔하게 해치우고 오지. 그때까지 의뢰 대금이나 준비해 둬.”
“그거야 어련히 알아서 챙겨줄까. 해결이나 잘 하고 와.”
바텐더의 말을 뒤로한 채 사내는 폐건물을 나섰다.
* * *
의뢰대상의 이름은 김덕수. 명동에서 제법 큰 사채업을 하고 있는 작자였다. 사채업자는 가장 흔해빠진 타입의 악인이긴 하지만, 이 자는 그런 조무래기 사채업자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돈을 갚지 못한 자들을 붙잡아다 인신매매를 하는 한편, 장기밀매도 서슴지 않고 있었다.
놈이 이렇듯 대담하게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다 믿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휘하에 규모 있는 세력을 갖춘 데다, 중국의 삼합회와도 손을 잡고 있었다.
김덕수에게 삼합회는 매우 좋은 고객이었다. 판로도 확실한 데다, 삼합회와 거래하고 있단 사실 하나만으로도 주변에서 그를 함부로 건들지 못하게 하는 억제력이 되어주었다.
그런데 오늘, 그 김덕수가 바로 의뢰대상에 오른 것이다.
의뢰인이 누군지는 나오지 않았지만, 내용만 봐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피해자들 가족 중에 거물이 있었거나, 아니면 김덕수의 세력이 커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자들이 청부를 내건 것이겠지.’
이번 의뢰에 걸린 막대한 의뢰금은 제아무리 원한이 크다 하더라도 일반인들 따위가 내걸 수 있는 액수가 아니었다. 억 단위를 훌쩍 뛰어넘는 의뢰금을 선뜻 내거는 일은 어느 정도 재력을 가진 자가 아니면 어려울 것이다.
골목을 벗어난 사내는 그 길로 사라졌다. 이제부터 의뢰대상에 대해 조사해볼 때인 것이다.
* * *
“흐음··· 정보는 확실하군.”
사내는 의뢰지에 있던 내용과 자신이 알아본 실제 사실과 꼼꼼히 대조해 보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김덕수의 조직 이름은 양은이파.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이름을 조직명으로 정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조직의 규모나 수준은 이름처럼 우습지 않았다.
어지간한 중견급 이상의 조직으로서 직할 조직원만 해도 무려 300명에 이르고 있었다. 여기에 업소 영업이나 기타 관련인원들까지 포함하면 거의 1000명에 가까웠다.
이런 조직의 우두머리를 일개 청부업자가 건드린다는 건 그냥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저격총이라도 갖고 있어서 원거리에서 저격을 시도한다면 모를까, 항상 수백 명의 건달들에게 둘러싸인 작자를 무슨 수로 건드릴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내가 평범한 청부업자인 건 아니지.’
그는 품속에서 기다란 침 몇 개를 꺼내들었다. 이건 무기가 아니었다. 물론 독을 묻힌다면 이런 침으로도 사람을 충분히 상하게 할 수 있겠지만, 사내는 그런 용도로 사용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꺼낸 침으로 자신의 신체 몇 군데와 얼굴 부위에 깊게 꽂아 넣었다. 어찌나 깊게 꽂았던지, 침의 끄트머리만 간신히 보일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얼굴 표면이 꿈틀대더니 눈매가 더 날카롭게 바뀌고, 입매도 가느다래졌다. 볼은 홀쭉해졌으며 콧망울은 두툼해졌다.
이젠 인상이 확 달라졌다. 좀 전의 그 사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얼굴이 된 것이다.
“진기를 다룰 수만 있다면 이런 번거로운 짓도 필요 없는 건데···.”
사내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역체변용술은 본디 내공을 바탕으로 전개하는 변용술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불가능했다. 21세기 지구에서는 무공을,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내공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정말 살기 좋은 시대가 되었는데, 어째서 진기의 운용만 안 되는 거지?”
이건 단순히 내공심법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다. 기를 다루는 모든 수법들이 말 그대로 무용지물이 되었다.
자연의 기운은 분명 존재하고 있지만, 마치 이것을 활용하는 것 자체가 무언가에 의해 금제된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지 않고서야 무술 자체가 별 볼일 없는 스포츠 형태로 전락했을 리가 없었다.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것들을 상대로 이렇게 번거로운 짓을 해야 한다니···. 옛날이 그립군.”
그는 마음껏 무공을 사용했던 옛 시절을 떠올리며 아쉬워했다.
수백 년 전만 해도 이렇지는 않았었다. 기에 대한 감응력만 충분하다면 누구든지 무공을 익힐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다시 눈을 뜬 뒤에 보게 된 세상은 자신이 알던 그런 세상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생경했다.
무공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믿기지 않을 만큼 놀랍도록 발전된 세상은 입을 다물어지지 못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놀라게 한 사실은 자신이 갓난아이가 되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환생이라니··· 그런 게 정말로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지.”
사내의 이름은 이진운.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현생에서 얻은 이름일 뿐이다.
그는 지금도 잊지 않고 있었다. 자신이 점창제일검이자 천룡검신 천화진이었음을.
환생한지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전생 시절의 기억을 무엇 하나 빠짐없이 모두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전생이 화려했다고 해서 이번 현생까지 그러리란 법은 없었다.
‘확실히 살기 좋고 편리해진 세상이지만, 나 같은 무인이 밥 벌어 먹고 살긴 더 어려워졌지.’
알고 있던 수많은 내가무공들은 전부 무용지물이 되었고, 심지어 고아출신으로 전락하기까지 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가 않았다.
결국 선택하게 된 것이 바로 청부업이었다. 처음에는 흥신소 같은 해결사 노릇을 했지만 그것도 여의치가 않았다.
제아무리 내가무공을 사용할 수 없다 하더라도, 외공으로 다져진 그의 무위는 현대의 상식에서 훌쩍 벗어난 수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드러난 양지 대신 음지를 선택하게 된 것이다.
‘천룡검신이라 불리던 내가 청부업이라니. 날 알던 자들이 들었다면 아무도 믿지 않았겠지.’
청부업은 무림인들이 가장 천시 여기는 업종 중 하나였다. 특히 정파의 무인들은 청부업을 생업으로 삼고 있는 낭인이나 살수들을 경멸시 할 정도니 말 다한 셈이다.
사실 이진운도 이런 처지가 아니었다면 청부업 따윈 절대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대신 한 가지 철칙을 세웠다. 자신이 받는 청부대상은 언제나 악인에 한정하기로.
그것이 이진운이 생각할 수 있는 최후의 마지노선이었다.
“이제 움직여야겠군.”
이제 확인할 것은 다 확인해 본 상태다. 더 이상 수소문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었다.
양은이파의 거점은 명동 거리에 있는 10층 빌딩. 지하에는 나이트클럽이 있었으며, 건물 위층에는 그들의 대외 사업체인 토건과 대부업체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청부대상인 김덕수를 잡으려면 일단 이 안으로 침투해야 했다.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물론 이진운의 실력이라면 정면 돌파도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청부의뢰를 진행 중인 상황에서 너무 소란을 키우면 곤란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일단 들키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는 거라면 방법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지.’
며칠간 양은이파의 본거지를 지켜보던 이진운은 청소업체 직원들이 별다른 제지도 없이 빌딩 안을 드나드는 것을 발견하였다.
신분확인 과정도 그냥 형식적이었다. 목에 걸린 신분증만 내밀어 보이면 건성건성 통과시켜주었다.
‘허술하군.’
이진운은 그 즉시 움직였다. 눈여겨봐둔 청소업체 직원을 몰래 제압한 뒤, 인적이 없는 곳으로 끌고 가 옷을 벗긴 것이다. 그 옷으로 신속히 갈아입은 이진운은 다시 한 번 역체변용술을 사용하였다. 그러자 제압된 청소업체 직원과 영락없이 닮은 모습이 되었다. 이 정도면 어릴 적에 헤어진 쌍둥이 형제라 우겨도 믿어질 지경이었다.
“이 정도면 완벽하지.”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 그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 정도면 부모나 가족이라도 찾아오지 않는 이상 절대 분간하지 못할 것이다.
변장이 끝나자마자 먼저 청소도구함부터 챙겼다. 입고 왔던 옷가지와 물건들을 그 안에 보이지 않게 쑤셔 넣은 뒤, 청소업체 직원과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건물을 향해 다가갔다.
입구를 지키는 건달들의 시선이 그가 있는 쪽을 잠시 향했지만, 목에 걸린 신분증을 가볍게 흔들어보이자 무사히 통과되었다.
이것이 바로 무사안일주의가 낳은 폐해였다.
‘이제 김덕수 그 작자만 찾아 없애면 되겠군.’
무사히 건물 내부로 들어온 이진운은 그 즉시 거침없이 움직였다. 이미 그는 건물의 내부구조부터 시작해서 김덕수가 어디에 주로 머무는지 까지 전부 조사를 마친 상태였다.
그래도 만약을 생각해 신중하게 행동했다. 인기척이 느껴지는 곳은 최대한 피했고, CCTV가 촬영 중인 곳은 사각지대만을 철저히 찾아다녔다.
그 결과 마지막 10층을 목전에 두게 되었다. 이제부터는 더 이상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게 불가능했다.
‘김덕수, 이 자식. 어지간히도 몸을 사리는군.’
10층에 있는 김덕수의 거처는 아무나 올라갈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려면 보안 카드가 필요했고, 비상구나 계단으로 올라가면 쇠창살로 된 문이 가로막고 있었다.
게다가 엘리베이터든 계단이든 10층 출입구마다 조직원들이 경계를 서고 있어서 몰래 침투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놈이 외출할 때를 노릴까 생각도 해봤지만, 곧 기각하고 말았다.
그동안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김덕수는 한번 자신의 거처에 틀어박히면 좀체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 작자였다. 언제 기어 나올지도 알 수 없는 일인데,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도 없었다.
‘그렇다고 건물 외벽을 타고 올라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 방법은 이제 한가지뿐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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