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02화
‘그렇다고 건물 외벽을 타고 올라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 방법은 이제 한가지뿐이군.’
이진운이 염두하고 있는 방법이란 바로 정면 돌파였다. 어떻게 보면 무식하면서도 무모하기 짝이 없는 짓이었지만, 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일이다.
제아무리 내가무공을 사용할 수 없는 처지가 됐다 해도, 일개 조직원들 따위가 그의 상대가 될 리 없었다.
그는 우선 복장과 얼굴 생김새부터 바꾸었다. 지금 이 모습으로 김덕수를 처리했다간, 그 모든 혐의를 청소업체 직원이 뒤집어쓰기 때문이었다.
청소도구함 안에 있던 옷가지 중 하나로 재빠르게 갈아입은 뒤 다시 역체변용술을 사용했다. 이번에는 청소업체 직원이 아니라 전혀 생소한 인물로 변모하였다.
설령 이 얼굴이 세상에 알려지거나 수배명단에 오른다 해도 상관없었다. 이 얼굴은 이 세상에 실제 하지 않는 인물의 것이었으니까.
‘이 얼굴도 간만이군.’
그는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그가 하고 있는 얼굴은 바로 이진운의 전생 시절인 천화진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거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진운으로 살아온 세월도 벌써 24년이나 되다 보니 이젠 전생의 모습도 조금은 낯설게 느껴졌다.
비상계단을 따라 올라가자, 10층의 문이 보였다. 굵은 쇠창살로 만든 문이었는데, 인간의 순수한 완력으로 이 문을 강제로 연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고작 이 따위 걸 믿고 방비를 허술하게 하고 있었다 이거지?”
이진운은 차갑게 웃었다. 어지간한 자였다면 쇠창살 문 앞에서 포기했을 것이다. 아니, 다른 방법을 찾는다 해도 기껏해야 자물쇠를 따서 여는 정도겠지.
그렇지만 이런 하찮은 문 따윈 그 앞에선 가벼운 장애조차 되지 않았다.
장갑을 낀 그의 두 손이 쇠창살을 붙잡았다. 그리곤 낮은 기합성과 함께 양손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흡!”
그러자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엄지손가락 두 개를 합친 굵기의 쇠창살이 눈에 띌 정도로 휘어지는 것이 아닌가.
이젠 사람이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벌어진 쇠창살은 더 이상 본연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 정도면 인간의 근력이 아니었다.
“이 썩을 몸뚱이도 나름 단련하면 이 정도는 되는군.”
사실 이진운의 육체적 자질은 썩 좋지 못한 편이었다. 전생의 천화진이었던 시절과 비교하면 범재 축에도 못 들었다.
근골은 평범 이하였고, 기맥조차 튼튼하지 못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약골의 전형이었던 것이다.
그런 범속한 육체로 이만한 괴력을 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피나는 노력 덕분이었다.
내가무공은 아니고 육체 자체에만 한정된 외가무공으로 이룬 결실이지만, 이 정도만 해도 현대에서는 적수를 찾을 수 없을 정도다.
휘어진 쇠창살 문 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벌어진 틈이 좀 비좁긴 했지만, 지나가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문턱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자, 삐딱하게 서 있는 조직원들이 보였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일 경계를 서다 보니 다들 마음이 헤이해진 것이다.
“뭐, 뭐야? 이놈은!?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거야?”
“못 보던 놈이다! 습격인 건가?”
이진운이 모습을 드러내자 화들짝 놀란 조직원들. 그들은 난데없는 침입자의 등장에 허겁지겁 대응하려 했지만, 이미 때늦은 뒤였다.
이진운은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즉각 쏘아져나갔다. 제대로 된 내가무공은 다룰 수 없지만, 외공으로 단련된 그의 육체는 기억 속의 보법절기를 재현해내고 있었다.
“헉!”
눈 깜짝할 사이에 다가선 이진운의 모습에 조직원들이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10미터의 거리를 단 한걸음으로 좁혀 다가오다니! 인간의 몸으로 이런 움직임이 정말 가능하단 말인가?
당황한 그들이 주먹을 들고 대응하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이진운의 양손이 기이한 형태의 궤적을 그렸다. 그것은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는 것이었다.
아차 하는 순간, 눈으로 쫓을 수도 없는 그의 손속이 먼저 조직원들의 급소를 두들겼다.
“컥!
“끄으······.”
조직원 다섯의 육신이 맥없이 바닥 위로 허물어졌다. 급소를 정확하게 가격당한 이상 건장한 사내들이라 해도 버텨낼 수 없었던 것이다.
제압을 끝낸 이진운이 가볍게 툴툴거렸다.
“아무리 내공이 없어도 그렇지, 이런 놈들을 상대로 나후산수(羅喉散手)까지 꺼내놔야 한다니. 정말 한심한 일이군.”
나후산수는 점창의 일절로 알려진 상승절기 중 하나. 이런 상승무학을 일개 조직원들을 상대로 펼쳐야 한다는 사실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다른 조직원들이 눈치 채기 전에 놈들을 기습적으로 제압하려면 확실한 절기를 사용하는 수밖에 없었으니까.
“이 다음은 수호대라는 놈들 차롄가?”
조사 내용에 따르면 김덕수는 자기 자신의 안위를 무엇보다 최우선시 하는 전형적인 소인배적 위인. 그래서 수호대라 이름붙인 정예 조직원 스무 명을 항시 자신의 곁에 대기시켜두고 있다고 하였다.
‘그놈들만 제압하면 바로 김덕수까지 일사천리겠군.’
다른 곳이 조용한 걸 보면 다른 조직원들은 아직 이곳 상황을 눈치 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문제일 것이다.
복도 이곳저곳에는 CCTV까지 빈틈없이 설치되어 있는 상태. 모니터링 하는 놈들이 제아무리 업무태만을 일삼는다 해도 이곳 상황을 눈치 못 챌 리 없었다.
이 건물의 조직원들이 전부 이곳으로 들이닥치기 전에 일을 끝마쳐야 했다.
그리고 제압된 녀석들은 일단 이대로 놔두기로 했다. 어차피 다음날까지는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이다.
이진운은 즉시 김덕수가 있는 곳을 향했다. 복도를 따라 이동하자 가장 크고 두터운 철제문이 보였다. 안에서 열어주거나 특별한 보안키 없이는 강제로 열 수 없는 문이었다.
그는 망설일 것도 없이 문을 힘껏 걷어차 버렸다.
쾅!
굉음과 함께 두터운 철제문이 단숨에 찌그러지며 활짝 열어젖혀졌다. 그리고 감춰져 있던 내부의 정경이 드러났다.
“으헉!”
“갑자기 뭔 난리야, 이게?”
의자에 앉아 빈둥거리던 조직원들이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설마 침입자가 이곳까지 들이닥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해서였다.
“이 새끼, 뭐 하는 물건이야?”
“대체 여기까지 어떻게 들어온 거야? 이 문짝은 또 무슨 수로 부순 거지?”
옆에 있던 쇠파이프와 강목을 집어든 조직원들이 경계어린 표정으로 이진운과 그 주변을 탐색했다. 같은 패거리가 또 있나 싶어서였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다른 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이놈이 다야. 다른 놈은 없어.”
“뭐? 혼자서 여기까지 쳐들어왔다고? 제정신인가?”
조직원들이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동료가 있는 것도 아니면서 조직의 중심부인 이곳에 단신으로 뛰어들다니······.
여기까지 어떻게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무모함에도 정도가 있었다.
잠시 기가 막힌다는 듯 바라보던 조직원 중 누군가가 쇠파이프를 겨누면서 물었다.
“미친 건지 대담한 건지 모르겠군. 너 뭐하는 놈이냐? 어느 조직에서 보낸 킬러라도 되냐?”
이진운이 픽 웃었다. 그냥 무심코 던진 질문이었을 테지만, 그 내용은 자신의 목적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킬러라··· 아주 틀린 말도 아니군. 내가 여기 온 것도 다 김덕수 그 개자식의 멱을 따기 위해서니까.”
“뭣이!?”
“이 새끼가 어디서 그런 망발을!”
“더 볼 것도 없다! 반쯤 죽여! 그 뒤에 어느 놈이 사주했는지 제 입으로 다 토해내게 해주마.”
이진운이 내뱉은 그 대답에, 이 자리에 있던 조직원들이 발칵 뒤집어졌다. 김덕수는 조직의 우두머리였으며, 소규모 조직이었던 양은이파를 지금의 위치까지 끌어올린 뛰어난 리더였다.
자신들의 보스를 해하겠다고 하는데, 더 이상 참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대응도 그만큼 살벌해졌다. 일부 과격한 성격의 조직원들은 고이 갈아둔 회칼까지 꺼내들고 있었다.
‘확실히 끝장을 보겠다는 건가?’
하지만 이진운에게는 그 모든 게 가소롭게만 보였다. 제대로 검을 다뤄보지도 못한 것들이 회칼을 든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도 없었다.
“죽어!”
성질 급한 조직원 중 몇이 흉기를 들고 달려들었다. 선두에 있던 녀석은 무슨 무술이라도 배웠는지, 제법 그럴 듯한 동작으로 쇠파이프를 휘둘러오고 있었다.
하지만 이진운의 눈에는 그 모든 게 어설프기만 하였다.
슬쩍 고개를 젖히는 것만으로 쇠파이프의 일격을 피해낸 그가 한발 앞으로 내딛었다. 단 일보의 전진이었지만, 그의 신형은 어느새 상대의 품속 깊이 파고들어가 있었다.
투웅!
가볍게 내뻗은 주먹이 상대의 명치에 닿았다 떨어지는 순간, 눈으로 볼 수 없는 무지막지한 충격이 내부를 관통하고 지나갔다. 흔히 1인치 펀치라 불리는 촌경(寸勁)의 진수였다.
“컥! 커으······.”
입에서 허연 거품을 뿜으며 그대로 허물어지는 조직원.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온 쇠파이프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첫 상대를 무력화시킨 이진운의 눈은 이미 다음 상대들을 노리고 있었다.
좌측과 우측에서 동시에 덤벼드는 두 명의 조직원들. 자신을 향해 각기 회칼과 장도리를 휘둘러오고 있었는데, 그 기세가 자못 흉험해 보였다.
흉기를 휘두르는 움직임 자체가 예사롭지 않았다. 동작 자체는 투박해 보여도, 치명적인 급소만을 노리고 있었다.
게다가 놈들에게서 묻어나오는 진득한 살기.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적어도 사람을 몇 번 쯤은 죽여 본 녀석들이군.’
이진운의 눈도 자연 차갑게 가라앉았다. 처음에는 적당히 제압만 할 생각이었지만, 이젠 사정이 달라진 것이다.
그의 손이 일순 벼락처럼 뻗어나갔다. 눈으로 시인하기도 어려울 만큼 빠르게 뻗어나간 주먹은 가장 먼저 흉기를 쥔 손을 부숴버렸다.
“끄어어!”
“으아악, 내 손!”
하지만 이진운의 공격은 그 정도에서 그치지 않았다. 이왕 손을 쓰는 김에 확실히 끝장내겠다는 건지, 고통을 호소하는 그들을 향해 잔혹한 응징이 내려졌다.
우득, 우드득!
뼈마디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소름끼치게 울려 퍼졌다. 이진운이 벼락처럼 내지른 권격이 그들의 관절을 잇따라 망가뜨리는 소리였다.
조직원 둘이 순식간에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관절이 부서진 그들의 사지가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다른 조직원들이 깜짝 놀라 외쳤다.
“아니, 만식이가!?”
“이 자식이!”
암경의 힘이 더해진 권격이 놈들의 관절을 철저히 박살내 버렸다. 제아무리 현대의학이 발달했다 하더라도 산산이 부서진 관절을 다시 멀쩡하게 회복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아마 앞으로 기운 쓰는 일은 절대 불가능하겠지.
하지만 고작 조직원 서넛 쓰러뜨렸다고 해서 끝난 게 아니었다. 아직도 열일곱이 남아 있는 상황.
동료의 처참한 모습에 격노한 조직원들이 성난 황소처럼 달려들었다. 그 기세가 자못 흉험했지만, 이진운은 움츠러들기는커녕 외려 놈들의 간격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러자 그 순간부터 주변이 온통 느리게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시간의 흐름이 정체된 듯한 초현실적인 광경이었다.
허나 실제로 시간 자체가 느려진 건 아니다. 단지 주변을 인지하는 그의 의식이 가속화되면서 나타난 부가적인 현상일 뿐이었다.
‘단숨에 끝낸다.’
이진운의 두 눈이 차갑게 가라앉은 순간,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모든 것이 거북이처럼 느려진 시간 속에서 오직 그만이 정상적인 시간의 흐름을 타고 있었다.
이진운은 느리게 다가오는 공격을 피하고 놈들의 급소를 가격했다.
놈들도 머리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어서, 그의 사각지대를 노리고 급습하기도 했지만 전부 소용없는 시도였다.
공기를 갈라오는 주먹질과 흉기의 기척이 이진운에겐 전부 생생하게 느껴졌다.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아도 전부 알 수 있었다. 범인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발달된 오감과 육감은 이미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의 움직임을 낱낱이 읽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마치 사전에 합이라도 맞춰둔 것처럼 종이 한 장 차이로 놈들의 공격을 피해냄과 동시에 인정사정없는 철권을 꽂아 넣었다.
그 결과 손목이 꺾이고, 팔꿈치가 박살났으며, 무릎까지 뒤틀리면서 본래의 형상에서 완전히 벗어나 버린 상태.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박살이 났으니, 앞으로는 평범하게 걸어 다니는 것조차 힘겨울 것이다.
조직원들 중 하나가 경악에 차 부르짖었다.
“마,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