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0.-프롤로그]
나는 한때 꽤 잘나가던 인물이었다. 아니, 잘 나간단 표현으로 부족할 정도로 뛰어났다.
중원의 10대 상가 중 하나로 꼽히는 부잣집의 장손으로 태어나 엄청난 재력을 한 손에 쥐고 있었고, 재능마저 뛰어나 3살 때 천자문을 떼고, 다섯 살 때는 사서삼경을 읊었다.
심지어 무에 대한 재능도 뛰어났는데··· 어느 날 우리 상가를 방문했던 태원진인의 눈에 띄어 그 분의 제자가 되었다.
내 스승이 되신 태원진인은 9대 문파 중 하나인 점창파의 차기 장문인으로서, 문파 내에서도 그 무위가 손에 꼽는 실력자였다. 평소 우리 아버지와 친분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자식 자랑하며 날 인사시킨 덕분에 하필 그 분의 눈의 띄게 되었다. 태원진인은 날 보더니 무슨 전설상의 천무지체(天武之體)라던가 뭐라던가? 아무튼 무(武)를 위해 하늘이 내려준 신체라면서, 아버지를 삼일 밤낮을 적극 설득한 끝에 날 제자로 들이셨다.
아마 내 기억이 맞다면 그때가 내 열 살 생일 때였다. 그동안 누렸던 많은 것들을 두고 떠나려고 하니 얼마나 서러웠던지··· 아마 그때 쏟은 눈물만 한 바가지쯤 되지 않았나 싶었다.
그렇게 해서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점창의 제자가 된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승님이 점창 장문인 자리에 올라서면서 많은 이들이 부러워하는 적전제자의 위치로 급상승하게 되었다.
물론 처음에는 많은 문도들의 시기와 질투가 쏟아져서, 곤란한 일도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모든 것을 실력으로 떨쳐냈다.
날더러 천무지체라고 했던 스승의 말이 허튼소리는 아니었는지, 무공을 배우면서 경이적인 속도로 익힐 수 있었던 것이다.
내 몸은 말 그대로 최상이었다. 토납법을 배우자마자 기감을 일깨웠고, 3일 내에 기운을 축적해 단전의 토대를 이뤘으며, 한 달이 지나지 않아 소주천(小周天)을 이루어 냈다. 이 모든 게 개정대법이라도 받은 듯, 작은 노폐물조차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깨끗한 내 신체 덕분이었다.
그리하여 불과 반년 만에 점창의 기본공인 열양공과 삼절검의 요체를 터득해 소성을 이루었고, 그 후 또다시 반년이 지난 이후엔 대성해 버렸다. 처음 입문한 문도들이 기본공을 가지고 족히 4-5년을 수련해야 소성을 이룬다는 걸 생각하면 가히 경이적인 진척속도였다.
이러니 본문의 웃어른들이 입에 거품을 물고 나를 감싸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덕분에 나는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은 채, 무공에 전념할 수 있었다. 이때는 너무 쉽게 익혀지는 무공 자체가 너무도 재미있어서, 다른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리하여 14세가 됐을 무렵에는 점창의 절정무공들은 모두 섭렵하게 되었고, 무위도 일류급 수준에 도달해 버렸다. 15세 때엔 검명을 터뜨리고 검풍을 일으킴으로서 고수가 되었음을 입증했으며, 17세 때엔 검기를 뽑아내고 점창의 대표적인 7대 검공을 완벽하게 선보임으로서 이름난 약관(20세)의 후기지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20세가 되었을 때엔 검강을 뽑아내는 초절정 고수가 되어 후지지수의 수준을 아득히 넘게 되었고, 장문인과 그 다음 대 차기 장문인만 익힐 수 있다는 일양지(一陽指)와 천룡대라삼검(天龍大羅三劍), 천룡신공(天龍神功) 등의 비장의 절기들을 배울 수 있었다.
그 이후로 내 무위는 더욱 급격히 성장했다. 그동안 배워 온 점창의 절기들의 수준은 결코 낮지 않았지만, 내 재능에 비한다면 격이 맞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야 비로소 내 재능에 맞는 절기를 배우게 되어서인지, 무위의 성장속도가 그야말로 무시무시해졌다.
불과 24세에 절대지경이라 일컫는 화경까지 오르게 되었으니, 나 스스로조차도 놀랄 정도의 급성장이었다. 이미 이때에 나는 60세를 넘긴 스승과 동등한 경지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그 이후로 나는 강호행을 하면서 스스로를 갈고닦았다. 더 이상 본문에서 배울 것이 남지 않아서였다. 스승마저도 나를 가르쳐줄 수 없는 이상 실전과 세상을 통해 보다 높은 경지를 깨우쳐야 했다.
그래도 그 결정이 헛되진 않았는지 27세가 될 무렵에는 어검술(御劍術)을 터득했고, 29세가 되어서 강호행을 마칠 무렵에는 심검(心劍)의 경지를 엿보면서 화경의 끝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제 내게 남은 것은 현경(玄境)에 오르기 위한 마지막 관문뿐이었다.
더 이상의 강호행보다는 조용히 내면을 갈고 닦아야 할 때가 왔음을 깨달은 나는 본문으로 되돌아와 면벽수련에 들어갔다. 맛없는 벽곡단을 주식으로 삼으며 3년의 지루한 면벽 수련을 버틴 끝에 나는 드디어 현경의 벽을 돌파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기적이었다.
수련을 마치고 복귀하니, 스승의 연세는 이미 70세를 넘긴 상태였다. 아직 정정하셨지만, 내 경지가 당신을 크게 웃도는 것을 아시고는 장문인의 자리를 넘겨주려 하셨다.
하지만··· 나는 이를 거절했다. 중원을 아우르는 9대 문파의 장문인 자리는 큰 권력을 누릴 수 있는 위치지만, 나는 그보다 무공을 수련해 더 높은 경지를 추구하는 것이 더 즐거웠던 것이다.
내가 완강히 거부하면서 그 자리는 사제의 몫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는 점창제일검이란 명목상의 직분을 얻게 됨으로서 자유롭게 수련에만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나도 수련만 하고 살 팔자는 못되는 모양이었다. 장문인 자리까지 포기했건만, 때마침 생각지도 않던 일이 터져버렸다. 정말 재수 없게도 근 100여년 만에 천마신교가 발호하면서 정마대전이 벌어진 것이다.
이를 막기 위해 무림맹이 결성되었고, 나는 점창의 대표로서 문도들을 이끌고 참가했다.
하지만 천마신교는 너무도 강했다. 아니 그 중에서도 유독 천마 그 자식은 우라질하게 강했다. 나도 현경에 올라서면서 더 이상 적수가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이 자식은 그 이상이었다.
간신히 현경에 입문한 나와 달리, 녀석은 이미 현경의 끝에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내가 감당해내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당대의 천마 또한 나와 같은 천무지체를 타고났으며, 나이 또한 62세로서 나보다 수련해온 세월이 훨씬 길었기 때문이다. 재능이 비슷하면 오래 산 녀석이 더 강한 게 당연하지.
결국 무림맹은 천마신교에게 처참할 정도로 패했고 나 또한 천마의 손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져 후퇴했다. 사실 이것도 기적에 가까웠다. 아마 날 구하기 위해 목숨을 던졌던 무인들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결코 살아남지 못했겠지.
무림맹의 사람들이 날 구하기 위해 이렇게 서슴없이 몸을 던졌던 건, 정파에서 그나마 천마와 맞상대가 되는 유일한 현경의 고수였기 때문이다. 비록 간신히 버티다가 패하긴 했지만, 다른 문파의 최고수들은 불과 10초지적도 되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나 외엔 천마를 상대할 수 있는 이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후퇴 후, 무림맹의 모든 문파들은 최후의 결단을 내렸다. 천마를 꺾지 않고선 천마신교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내게 최대한 지원을 해주기로 강수를 둔 것이다.
헌데 그 지원이란 게 놀랍게도 각 문파의 비전들을 전부 내게 공개한다는 거였다. 자신들의 숨겨진 절기까지 공개함으로서 내 무위를 천마를 상대할 수 있는 수준까지 끌어올리겠다는 의도인 것이다.
물론 나 이외에는 볼 수도 없고, 후대에 전수할 수 없다는 조건이 붙었지만 그거야 당연한 일. 나는 이를 받아들였고, 각 파의 비전들을 무제한으로 열람할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그들이 불법적인 경로로 입수한 온갖 사공과 마공, 주술까지 모두 말이다.
그 결과, 나는 수많은 무공과 무리(武理)들을 섭렵하면서 내가 배워왔던 무공들을 다시 새롭게 정립하는 데 성공했다. 천룡신공은 천룡무상신공으로, 천룡대라삼검은 천룡무상검법으로, 그동안 몇 가지 부작용 때문에 사용 못했던 본문의 비전 중 하나인 북명신공은 만유합원신기(萬有合原神氣)로 재탄생시키는 쾌거를 이룩한 것이다.
또한 무위도 천마와 동등한 현경의 극에 도달하면서 이제 싸워 볼만하다는 자신감까지 생겼다.
허나 내가 이렇게 수련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 중원 무림은 그야말로 암흑기를 맞이했다. 놈들은 중원무림이란 세계 자체를 장악하기 위해 무림인들을 억압하고 갖은 압제를 펼치고 있었다.
그런 와중 내가 수련을 마치고 모습을 드러내자, 그동안 천마신교의 눈을 피해 숨어서 세력을 보전했던 각 문파들이 분연이 들고 일어섰다. 무림맹의 재결성이었다.
현경의 끝에 이른 내 무위를 앞세워 천마신교를 파죽지세로 밀어붙였다. 본래 천마를 상대할 현경 급 고수가 없었을 뿐, 세력 그 자체만으론 수많은 문파들의 연합체인 무림맹이 더 우위였던 것이다.
그 결과, 두 세력은 최후의 결전을 벌이게 되었다.
당연히 세력 간의 격돌이 되겠지만, 그 핵심은 나와 천마가 벌일 대결의 승패였다. 나는 놈과의 대결에서 이번엔 근소하게나마 우세를 차지했다. 정파가 가진 비전을 열람하면서 나는 수많은 종류의 무리에 달통하게 되었고, 상대의 공격에 대응할 수 있는 폭도 그만큼 넓어진 덕분이었다.
나는 이런 우세를 유지하면서 천마를 궁지로 몰아갔다. 놈의 기운을 빼놓는 한편 단번에 결정적인 순간을 노릴 작정이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 천마 이 새끼가 나하고 같이 죽자며 동귀어진의 수로 달려드는 게 아닌가?
천마신공. 마(魔)를 초월한 신공이라 불리는 무공이었지만, 결국 마공은 마공이었던 모양이었다. 잠재된 마성을 폭발시키자 갑자기 무위가 몇 배로 치솟았다.
물론 그건 단 한순간에 불과했지만, 서로의 실력 차라고 해봐야 본래 종잇장 한두 장 차이밖에 나지 않는 상황에선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놈의 성명절기인 지존천마수(至尊天魔手)의 파황무종인(破荒無踪印)이 백색 광채를 발하는 순간, 목숨을 건 기나긴 대결도 끝을 맺고 말았다.
파황무종인은 심의경(心意勁), 즉 검공으로 따진다면 심검지초(心劍之招)에 해당하는 수법인 만큼, 같은 심검으로 대응하지 않는 한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었다. 마성을 폭발시킨 덕분에 위력이 급증한 파황무종인의 위력은 내 호신강기를 간단히 허물고 밀려와 심장을 터뜨려 버렸던 것이다.
설마 이렇게 죽게 될 줄이야. 무인으로서 언제고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 왔지만, 막상 죽음을 눈앞에 두고 나니 모든 게 허망해졌다. 대체 무엇을 위해 죽자고 무공을 익혀오다가 이 지경에 이른 건지··· 36년 동안 살아온 인생이 그저 덧없기 그지없었다.
이제 목숨이 끝날 순간이 되어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초탈해져서일까? 나는 죽음 앞에서 깨달음의 끝자락 한편을 보게 되었다.
현경의 극에 도달한 이후 그렇게나 도달하고 싶었건만, 거대한 벽을 느끼고 포기했던 그 경지였다.
초월의 영역, 반선지경. 그것이 오롯이 내 앞에 진의를 드러낸 것이다.
깨달음의 환희도 잠시 뿐··· 의식이 차츰 가물가물해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갑자로 환산할 수 없는 방대한 내공을 가졌어도 죽음의 순간을 약간 늦출 수 있을 뿐, 심장이 심검에 의해 박살난 이상 다시 복원할 길은 없었다.
간신히 몸을 가눈 나는 승리를 확신하고 있던 천마를 향해 흐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질 것 같으니까 치사하게 마성을 폭발시켰다 이거지, 천마 이 자식.”
“···본좌의 파황무종인에 심장이 박살나고도 아직 죽지 않았다니, 대단하군. 역시 천룡검신인가. 그래도 다시 되살아날 수 없겠지. 네놈의 그 태을단목신공도 심검에 박살난 심장을 되살려주진 못한다.”
놈은 아직 죽지 않은 내 모습에 조금 놀란 듯 보였지만, 금세 냉정하게 결론지었다. 하긴 내가 생각해봐도 되살아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반선지경의 깨달음 한 자락을 얻었지만, 그걸 수습하기 전에 죽게 될 테니까.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거야 나도 잘 알지. 죽어가고 있다는 걸 아주 확실하게 느끼고 있으니까. 하지만 말이야······.”
그렇게 말끝을 흐린 뒤, 죽음에서 간신히 날 연명시켜주던 모든 힘을 끌어올렸다. 이것이 반선지경의 힘. 인세를 초월한 영역의 극치였다.
전신에 걸친 상중하단전이 하나로 연결되고, 신체 자체가 거대한 단전으로 화한다. 여기서 영성을 키워 성장시키면 원영신이 완성되어 필멸과 윤회를 벗어난 진정한 반선의 영역에 들겠지만··· 내겐 그럴 시간이나 여유는 없었다.
그저 이 막대한 힘을··· 저 원수 같은 놈을 쳐 죽이는 데에 사용할 뿐이다.
천마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하긴 녀석도 명색이 현경의 고수인데, 지금 한 차원 높아진 내 존재감과 힘을 느끼지 못할 리 없었다.
지금 나는 삼라만상의 무궁무진한 힘을 몸 안에 품은 상태. 말 그대로 표현하자면 당장이라도 폭발하기 직전의 화산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 힘은 설마!? 네놈! 네놈이 어떻게!!?”
“앞으로 부귀영화를 누릴 네놈을 두고 나 혼자 억울하게 죽긴 싫더군. 그러니 너도 여기서 죽어줬으면 좋겠다. 어디 나하고 같이 한번 죽어보자, 천마야!”
“이런 미친 자식이!?”
천룡무상검법(天龍無上劍法)
제 8식. 천룡무상(天龍無上)
극의. 천룡무진광(天龍撫振光)
순간, 무한(無限)에 가까운 무진장(無盡藏)의 힘이 나를 중심으로 하여 사방으로 번져나갔다.
이것이 바로 내가 추구한 극한의 무리 중 하나인 천룡무진광.
생검과 살검의 이치를 담아 내 마음이 닿는 곳에 존재하는 모든 이들의 생사를 결정짓는 내 마지막 수였다.
이 지고한 한수 앞에선 그 무엇도 생사입멸의 갈림길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것은 천마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나는 그 결과를 볼 수 없었다. 이미 죽음에 이른 내 시야는 벌써 어두워진 상태였던 것이다.
‘젠장, 이렇게 죽긴 싫었는데.’
지금까지 평생 무공만 익히다가, 여자 한 번 못 만나보고 죽게 될 줄이야. 무공을 익힌 것을 후회하진 않지만, 다음에 또 다른 생이 있다면 인세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누려보겠다고 굳게 다짐하였다.
이젠 끝이 다가와서인지, 생각하는 것조차 힘들어진다. 흐릿해진 내 의식은 곧 깊은 나락으로 떨어져 내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