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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226화 (226/231)

226화

“로리아나는 좋은 여잡니다. 엘버그의 그 어떤 이보다 쓸모가 많아요. 그녀는 가치 있는 사람입니다. 에나님. 그녀는 지킬 가치가 있는 인재예요.”

“더는 못 들어 주겠군!”

“에이가… 이제 그만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티옹이 에이가의 앞을 막으며 그녀를 만류했다.

“그녀는 생명을 구해서 돌아왔습니다. 기꺼이 먼 곳까지 달려가 매짐을, 귀한 생명을 구해 이곳까지 달려왔습니다. 그녀는 창녀이지만 또한 생명입니다. 그녀를 따르는 이들 역시 우리와 같은 곳에서 나고 자란 엘버그인입니다. 에나님. 부디 자비를 베푸세요.”

그러나 에나는 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몸을 돌려 더는 듣고 싶지 않다는 의중을 명확하게 드러냈다.

“에나님. 자비를 베푸세요.”

에이가는 포기하지 않고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그래야만 언젠가 당신도 자비를 구할 수 있어요.”

마지막 문장이 에나의 귀를 거슬렀다. 경거망동도 유분수이지, 감히 누굴 협박하나 싶어 그는 매서운 눈초리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제아무리 겉모습이 정정하기로서니 그녀 역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이 아닌가. 감히 망령든 노인네가 어디다 대고.

“듣자 하니 본래 당신의 주인은 카르낙 발투만의 손에 죽었다지.”

“…….”

“그것이 당신이 말한 자비인가? 주인을 죽이고 그 하녀를 갈취한 것? 하기야. 당신에겐 자비일 수 있겠지. 덕분에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을 이 성전에 들어와 감히 이 에나에게 훈수를 둘 수 있으니.”

빈정거리며 에이가의 심기를 자극하려 하였으나 그녀는 무감했다. 오히려 동정하는 듯한 눈빛으로 그를 주시했다. 그녀의 뒤편에 검은 인영이 드리웠다. 그것은 괴물처럼 거대해지더니 종국에는 방 안을 모두 삼켜 버렸다. 투로의 병사들이었다. 베오르토는 눈을 깜빡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티옹이 숨을 들이켜고는 비명을 지르려 입을 벌렸다.

그러나 채 소리를 내기도 전에 그의 머리가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붕, 하고 허공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사태를 파악하기는커녕 제 신변에 일어난 변화조차 베오르토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다만 허리 아래쪽이 뜨끈했다. 그는 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기다란 칼날이 제 배를 꿰뚫고 있었다. 완전히 박혔던 것이 조금씩 빠져나가기 시작하자 뜨끈한 핏물이 아래로 흘러내렸다.

핀이 들어와 칼로 자신의 배를 쑤셨다고 느꼈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난 이후였다. 베오르토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황망한 눈동자가 하루살이처럼 떨렸다. 핀의 새하얀 얼굴에 알알이 박힌 주근깨조차 그의 시야에는 얼굴에 튄 선명한 핏방울처럼 보였다. 냉랭하고 무자비한 낯빛이었다.

“베오르토, 내가 너를 이 자리에 앉혔다.”

“…….”

“그때 내게 한 말 기억해? 발투만 왕을 위해 네 몸과 마음을 바치겠다 했지.”

그 말을 믿고 너를 택했다. 뒷배도 없는 아둔한 네놈이 그래도 신의는 있을 거라는 오판이었다. 너도 그저 뻔하디뻔한 엘버그의 인간이란 것을 잠시 망각이라도 한 모양이지.

“그러니 억울해하진 마. 네가 약속한 대로 왕을 위해 네 몸과 생명을 거두어 가는 것이니.”

애초에 네 힘으로 올라간 곳이 아니었다. 내 손으로 너를 올렸으니 너를 끌어내리는 것도 내 손으로 하겠노라, 진작 결심한 바였다. 핀은 베오르토의 몸에서 생명이 사라져가는 것을 알알이 제 눈에 새겨넣었다.

“이렇게 죽는 것을 차라리 행운으로 여겨라, 베오르토. 너는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놈이니까.”

베오르토는 형형한 핀의 뒤에 서 있는 에이가를 보았다. 노인은 여전히 침착하고 서글픈 눈빛을 하고 있었다. 자비를 베풀라는 그녀의 말은 경고였던가. 혹은 죽음을 벗어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던가.

창녀를 받아 주겠노라 허락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까. 아니면 에이가를 향한 힐난과 빈정거림을 참았더라면 죽는 날이 오늘은 아니었을까. 믿을 수 없어. 믿을 수 없다. 신의 지붕 아래에서 죽다니. 이 성스러운 성전에 핏물이 번지는 것이 보였다. 새하얀 제 의복을 타고 핏물이 새하얀 바닥에 흘렀다.

“하늘이… 하늘이, 무… 무섭지 않은가…”

베오르토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물었다. 에이가는 답하지 않았다. 그녀에게선 후회도 죄악감도 보이지 않았다.

아아, 그래 결국 당신도 투로에게 물든 건가. 그 버러지를 닮아 당신도 검게 변한 거다. 핀이 완전히 칼날을 뽑아냈다. 그는 앞으로 고꾸라져 머리부터 바닥에 떨어졌다. 눈앞이 까무룩 해졌다. 두근거리는 박동이 느려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아. 눈앞이 흐렸다. 온통, 온통 까만 빛이었다, 붉은빛 다음엔 빛 하나 들지 않는 어둠. 그뿐이었다.

핀은 제 턱에 튀어 오른 핏물을 닦아 내며 루이스에게 명령했다.

“가서 로리아나와 매짐을 데려와.”

***

“에취!”

말리가 부르르 떨며 연신 재채기를 해 댔다. 아무리 북쪽도 불의 영향을 받아 얼음이 녹고 있다지만 홑겹의 의복만 걸친 노인이 버티기엔 여전히 추운 날씨였다. 로리아나는 매짐의 병상을 지키는 그녀의 어깨에 두꺼운 모포를 덮어주었다.

“저리 치워, 로리. 이건 네 담요잖아.”

말리가 퍽이나 박정하게 모포를 거부했으나 로리아나는 고집스레 담요를 꼭 말아 주었다.

“덮어요. 당신마저 앓아누우면 보살펴 줄 사람도 없어. 그리고 난 젊잖아요. 당신은 늙었고.”

말리는 흥하고 코웃음을 쳤다.

“젊은것들은 젊음이 벼슬인 줄 알지. 한철 피어났다 지는 꽃이야. 아주 보잘것없는 꽃.”

툴툴거리면서도 야무지게 담요를 갈무리했다. 로리아나는 안도한 듯 웃으며 매짐을 내려다보았다.

“너무 오랜 여행을 해서 그래. 곧 일어날 거야. 얘는 젊잖아. 너처럼.”

걱정스러운 그녀의 시선을 읽은 말리가 답했다. 부상자만이라도 성전에 들여보내 주면 좋으련만. 매짐은 철을 다루는 기술자이지 창부가 아닌데.

“신의 대리자라는 놈이 옹졸하기 그지없어. 조만간 불벼락을 맞을 거야. 두고 봐.”

로리아나가 작게 웃었다.

“그건, 생각이에요? 아니면 예언이에요?”

말리는 답하지 않고 주름진 입술을 고집스레 오물거렸다. 욕이라도 씹어 삼키는 모양이었다. 성전의 사병들은 눈이 쌓인 곳부터는 단 한 발자국도 들어올 수 없다고 했다. 함께 온 모든 이들이 그녀와 같은 창녀에 투로는 아니라고 몇 번이고 설득해 보았으나 허사였다.

일찌감치 성전으로 피난 온 이재민들 속에 섞여 있었던 이들 중에서도 검은 피부의 여인들은 모두 쫓겨났다. 신분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세상이 바뀌어도 약자의 처지는 언제나 똑같았다. 살기 위해 캘던을 떠나 결국 길거리로 나앉은 여인들을 챙겨 준 것은 근위대장인 핀과 보수적이고 대쪽 같기로 유명한 에이가였다.

“염병할! 추워 죽겠네!”

험한 소리를 내뱉으며 천막 안으로 불쑥 루이스가 들어왔다. 군화에 묻은 눈 뭉치를 털어 대며 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리쿠스에게 부탁한 약병은….”

로리아나는 인사도 생략하고 텅 빈 그의 두 손을 번갈아 살피며 미간을 구겼다. 이 미련한 덩치가 설마 빈손으로?

“됐어. 약병은. 짐을 꾸려. 매짐을 데리고 성전으로 들어갈 거야.”

“성전으로?”

“그래! 에나 놈이 뒈졌거든!”

“…….”

죽었어? 그가 죽었다니 더는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로리아나는 치맛자락을 붙잡고 천막 밖으로 뛰어나가 부나비의 짐꾼들을 불렀다.

“짐을 챙겨! 서둘러!”

하여간 말리. 정말로 용하다니까.

북쪽으로 사람들이 줄을 지어 이동했다. 벽처럼 에워싸고 성전으로 향하는 길목을 막고 있던 에나의 사병들은 어느 때부터인가 보이지 않았다. 더는 통행을 방해하는 이들이 없자 사람들은 앞다투어 눈을 밟았다. 그것만으로 살았다며 안도하고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

“에나가 죽었답니다.”

몇몇 사람들을 헤치며 정보를 캐묻던 고프리가 푸르게 질린 얼굴로 다가와 멍하게 고했다. 테이먼은 말 고삐를 팽팽하게 말아쥔 채 되물었다.

“뭐?”

“에나가….”

고프리도 믿기 힘든지 좀처럼 뒷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도리질을 했다.

“갑작스레 사병들이 사라지니 뜬소문이…. 뜬소문이 도는 것 같죠? 그렇죠? 한데, 여기 발투만의 군대가 와 있답디다. 캘던의 시민들과 함께….”

“…….”

그놈들은 다 캘던에서 뒈진 게 아니었어? 전부 성채가 폭발하며 같이 산산조각 난 게 아니었냔 말이야!

“만일 그들이 먼저 이곳에 도착했다면…. 테르조 님, 발투만의 군대라면….”

고프리는 그들의 잔인함을 잘 알고 있다. 그치들이라면 장소가 어디건, 상대가 누구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괘념치 않고 도륙한다. 그러니 어쩌면 에나도, 아니 확실히 에나도 그렇게 죽일 수 있다. 거침없고 무자비하게.

안장 위에 떨구어진 고프리의 두 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이대로 모든 게 끝난 것 같았다. 낭패다. 더는 갈 곳이 없다.

“…성전으로는 갈 수 없습니다. 테르조 님. 그곳에 가면…우린….”

죽을 거다. 반드시 죽임을 당할 거다. 이미 성전이 투로에게 먹혔다면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당치 않은 소리.”

테이먼은 엄하게 그를 꾸짖었다.

“그곳은 성전이야. 마땅히 내가 차지해야 할 곳이다. 투로가 아니라.”

“하지만 이미 그곳은….”

“아마네스 님은 내 편이야. 고프리! 내 곁에 있으려거든 무엇보다 의심하지 않는 법부터 배워라!”

“…….”

테이먼의 눈에는 자기 확신이 가득했다. 그것이 고프리를 더 암담하게 만들었다. 아마네스가 그의 편이라면 카르낙 발투만은 캘던에서 진작에 뒈졌어야지. 불길은 빗물에 멎었어야지. 투로들이 성전을 차지하기 전에 먼저 당도했어야지. 파니릴리 알기어스가 그의 곁을 떠나지 말았어야지. 모든 정황이 그를 의심하게 만드는데 멍청이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를 확신할 수 있겠는가.

“성전의 사제들과 에나의 사병들이 날 기다리고 있을 거다.”

구심점을 잃고 방황하고 있을 게 분명해. 그러니 그들을 추슬러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마지막 일전을 벌이면 된다. 아마네스 님은 나의 편이니 분명 나를 성전으로 인도해 주시리라. 테이먼은 호령을 하며 말의 엉덩이를 채찍질했다. 고프리는 딱딱하게 굳은 낯빛으로 그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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