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오코가 지쳐 가기 시작했다. 말의 속도가 늦어짐과 동시에 그를 추격하는 롬비의 병사들은 더 가까워졌다. 또한 그들이 가까워짐과 동시에 불길의 속도와 부피도 더더욱 커져 갔다. 가는 길마다 화살이 비처럼 날아들었다. 카르낙은 검을 들어 제 위로 쏟아져 내리는 촉들을 쳐냈다. 자파의 말이 뒷다리에 활을 맞고 쓰러졌다. 그가 바르시를 껴안고 바닥을 굴렀다. 히히힝, 말이 날카롭게 울었다.
“구스!”
릴리가 비명을 질렀다. 자할이 고삐를 당겨 말 머리를 돌렸다. 그는 나무를 덧대 만든 조악한 방패를 들어 자파와 아이에게 쏟아지는 화살 비를 막아냈다. 카르낙도 말을 세웠다. 릴리가 망설임 없이 뛰어내려 아이의 곁으로 갔다.
“괜찮니?”
바르시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낙은 고개를 돌려 사방을 살폈다. 숨을 곳이 마땅치 않았다. 말을 타지 않고 달아나기도 쉽지 않았다. 하는 수 없었다. 그는 칼을 빼 들고 닥쳐오는 추격대의 숫자를 셌다. 족히 50은 넘어 보였다. 절로 이가 물렸다. 어지간히 겁이 났나 보지. 사내 셋을 잡는데 장정을 오십이나 보내다니.
“자파, 아내와 아이를 지켜. 할 수 있지?”
“너야말로 할 수 있겠냐?”
자신이 물러나면 단둘이었다. 장정 단둘이 오십을 상대해야 했다. 카르낙은 삐뚜름하게 웃었다.
“안 되면 이대로 뒈지는 거지.”
그 말에 자할도 따라 웃었다. 오래전 사막에서 유반 하게너의 장자를 죽였을 때, 그때 카르낙은 목숨을 내놓았고 그를 따라 자할도 자파도 죽음을 각오했다. 그 이후로는 덤으로 얻은 삶이었다.
그렇게 덤으로 얻은 삶은 유흥거리로 즐겼다. 배가 터지도록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고 왁자지껄 술에 취해 떠들다 카르낙이 필요로 하면 다시 전장에 나가 생을 담보로 칼을 휘둘렀다. 이제 와 달라질 것이 무언가. 여전히 카르낙을 따라 내놓은 목숨이었다.
적이 코앞에 당도했다. 그들은 긴 창과 검을 곧추세우고 전속력으로 돌진했다. 기괴한 함성이 그들을 뒤따랐다. 카르낙은 오코의 배를 차 앞으로 달려 나갔다. 가능한 아내와 아이에게서 먼 곳에서 그들을 맞이해야 했다.
쏜살같이 달려 나가 몸을 숙여 날카로운 칼끝을 피하고 곧바로 검을 모로 휘둘렀다. 놈의 허리가 두 동강 났다. 멀리서 다시 활들이 날아들었다. 빗줄기에 시야가 제대로 확보되지 않아 되는 대로 검을 휘둘렀다.
사방에서 둘 셋이 검을 치켜들고 달려들었다. 결국 날아드는 검 하나를 막아 내다 카르낙은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히히힝, 하고 오코가 앞발을 들며 울었다.
“칼!”
릴리는 자파의 뒤에서 무기력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다 비명을 질렀다. 무엇이라도 해야겠다 생각했다. 이대로 넋 놓고 그가 위험에 처하는 것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치맛자락을 붙들고 뛰쳐나가려는 그녀를 자파가 붙잡았다.
“어디 가! 당신 남편이 여기 꼼짝 말고 있으라고 했잖아! 잊었어!?”
“이대로 두 손 놓고 있을 순 없어요!”
“카르낙이 당신을 지키라고 했어!”
더는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의 손발을 묶는 짐 덩어리가 되고 싶지 않았다. 릴리는 자파를 뿌리치고 뛰었다. 기함을 하며 자파가 악을 쓰는 소리가 들렸으나 무시했다. 그녀는 바닥을 기어 카르낙이 두 동강 낸 시체의 등에서 활시위를 낚아채고 다시 반대편으로 뛰었다. 그들이 무수히 쏟아 내 땅에 박힌 활들을 뽑아내 활에 걸고 시위를 당겼다. 자파는 잠시 그녀가 미친 건가 생각했다. 그러다가 그녀가 쏘아 올린 활이 상대의 목덜미를 정확하게 꿰뚫어 버리자,
“이런 씨발….”
험한 감탄사를 내뱉고야 말았다.
“카르낙!”
자할이 뒤에서 그를 불렀다. 막 한 놈을 베어 내고 뒤를 돌자, 누군가가 칼을 치켜들고 그에게 뛰어들고 있었다. 핑- 하고 날카로운 것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고 검이 그의 몸을 베기 전에 놈은 아래로 무너져 내렸다. 엎어진 그의 등에 화살이 꽂혀 있었다. 카르낙은 고개를 치켜들어 그것이 날아온 방향을 보았다.
…릴리.
자파가 헐레벌떡 다가와 물었다.
“야! 네 마누라 검은 쓸 줄 아냐?”
“…아니. 가르친 적 없어.”
카르낙이 얼떨떨하게 답했다. 자파가 욕설을 내뱉었다.
“야이 병신 놈아! 그걸 왜 안 가르쳤어! 그것부터 가르쳤어야지!”
“…….”
어차피 활도 그가 가르친 것이 아니다. 핀이 가르친 것이지. 번번이 요구하던 것을 거절했다. 핀이 곤란해하는 것을 알면서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저 소중하기만 해서. 온실 속의 꽃처럼 아껴 주고만 싶어서, 어여쁜 손에 생채기가 생기는 것도 싫어서. 언젠가 무언가 헤쳐 나가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제 품에 폭 안겨 있기만 했으면 싶어서.
너무했나. 그녀를 너무 과소평가했나. 진작 검이라도 좀 가르칠 걸 그랬나. 그녀를 너무 무르게 대했다.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인데, 여자라는 껍데기에 너무 가두고 있었단 생각이 들었다. 이제라도 그것을 깨달은 것을 다행이라 여겨야 하는지 아니면 이제 와 깨달아 불행이라 여겨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추격대는 활을 쏘아대는 릴리를 발견했다. 금방이라도 검을 겨누고. 활시위를 당길 것같이 형형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으나 결국 몸을 돌렸다. 자파는 처음엔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이내 깨달았다. 놈들은 이 새하얀 알기어스를 무서워하는구나. 이 여자를 죽이는 걸 두려워하는 거야. 그렇다면…
자파는 구스를 파니릴리의 뒤에 세웠다.
“야! 꼬마! 너 왕비 곁에서 벗어나지 마라! 알겠냐!”
그녀에게 붙어 있다면 네 목숨은 건질 수 있을 테니. 자파는 아이의 손에 릴리의 치맛자락을 쥐여 주고 앞으로 뛰어나갔다.
자파가 손을 보탰지만 그들은 점점 수세에 몰렸다. 아무리 베어도 여전히 그만큼의 병사가 남아 있었다. 자할은 뒷걸음질 치다 시체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카르낙이 그에게 달려드는 장정 셋을 베어 냈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칼이 날아들었다. 숨이 가쁘고 팔이 무거워졌다. 균형을 잡기 힘들어 몇 번이고 비틀거렸다. 머리 위로 붕, 하고 검이 스쳤다. 카르낙은 그것을 피하려다 바닥으로 쓰러졌다.
이번엔 치켜든 검이 포물선을 그리며 그에게로 떨어졌다. 쏜살같이 옆으로 몸을 굴렸다. 퍽, 하고 칼날이 모래 바닥에 박혔다. 검은 그림자가 그의 위를 덮쳤다. 기다란 창이 아찔하게 치켜올려진 채였다. 카르낙은 팔을 휘둘러 그것을 동강 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옆구리를 무언가가 푹 찔렀다. 칼날이었다. 으으으으, 하고 카르낙이 어금니를 물고 신음했다.
“칼!”
멀리, 릴리가 비명을 지르는 것이 들렸다.
“자파…”
카르낙이 친우를 찾았다. 자파가 저 멀리 검을 휘두르는 것이 보였다. 안 돼. 자파. 도망가. 릴리를 데리고….
“자파!!!”
마지막 힘을 쥐어짜 소리쳤다. 달려드는 놈을 발로 차 밀어내고 반 바퀴 몸을 굴려 팔꿈치를 바닥에 댔다. 일어나야 하는데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다시 몸을 반대로 뒤집었다. 끝인 것 같았다. 날아오는 화살들이 보였다. 장대비에 섞여 날카롭게 빛났다.
죽을 땐 죽더라도 얼굴엔 안 박혔음 좋겠다는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삽시간에 눈앞이 까매졌다. 황천길에 들어섰나 했다. 그러다가 곧 그것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웬 시커먼 놈이었다. 제 앞을 가로막은 까마귀처럼 새까만 망토가 뺨과 콧등을 후려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카르낙의 앞을 가로막고 쏜살같이 움직였다. 짐승인가? 닥치는 대로 부딪혀 바닥으로 엎어 버리는 것은 짐승과 다를 바 없는 몸놀림인데 그들의 품에서 검을 빼앗아 드는 손이 있는 것을 보니 사람이었다.
대체 저 새끼는 무언가, 그런 생각을 카르낙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자할도 릴리도 그를 넋놓고 지켜보았다. 그가 카르낙을 돌아보았다. 새까만 눈동자와 마주하자 비로소 카르낙은 그를 기억해 냈다.
“…너….”
오래전, 하게너의 영지에서 그를 본 일이 있다. 어느 남자의 손에 개처럼 끌려와 처형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 가족을 몰살시킨 이 노예 놈을 죽여 달라는 남자의 청에 카르낙은 그 대신 그 남자를 두 동강 냈다. 그놈이었다. 말 한마디 않던, 이름도 없는 놈. 형형한 눈으로 짐승처럼 저를 쏘아보던 놈.
“일어나.”
사내는 투박한 목소리로 말하며 카르낙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카르낙이 넋이 나가 손을 내어 줄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그는 억지로 카르낙을 일으켜 세웠다. 꿰뚫린 옆구리에서부터 격통이 번져 체통 없이 앓는 소리가 났다. 자파가 시체를 치우며 다가왔다. 그는 놈을 알아보지 못했다. 다만 저와 같은 외형을 가진 투로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듯했다.
“도와준 건 고마운데 형제여. 제 발로 황천길에 들어선 거다. 우린 곧 뒈질 예정이거든.”
“검.”
“…….”
짧고 어그러진 발음으로는 당최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카르낙도 자파도 미간만 찌푸리고 있자 그는 카르낙의 손에서 검을 빼앗아 들었다.
“어, 야,”
자파는 식겁했다. 감히 카르낙 발투만의 검을, 그래 봬도 왕의 검인데. 게다가 그의 검은 카르낙이 아니면 누구도 제대로 다룰 수 없는 억세고 무거운 것인데. 사내는 카르낙과 자파를 뒤로 물리며 붉게 달아오른 검 끝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에게 뭔가가 있다고 느꼈다. 이 짐승 같은 사내는 분명 무언가를 알고 있다고. 그때 그가 바위를 내리쳤다. 무거운 날붙이에 그에 준하는 쇳덩이 같은 힘이 실려 굉음이 났다. 번쩍, 불꽃이 삽시간에 튀어 오르고 곧바로 화르륵 검에 불이 붙었다. 푸른 불꽃.
아아악! 하고 자파가 멍청하기 짝이 없는 고함을 질렀다. 사내는 주변의 모든 것을 내리쳤다. 바위, 땅, 나무, 꽃, 풀들. 검 끝이 스치는 곳마다 불길이 일었다. 추격대와 그들 사이에 타오르는 장벽이 쳐졌다. 돌진하던 말들이 앞발을 들며 비명을 질러 댔다. 뜨거움에 질식할 것 같아 자파는 헉헉대며 뒷걸음질 쳤다. 보통의 것이 아니었다.
보통의 불길보다 수천 배는 더 뜨거운 열기를 내뿜으며 맹렬히 타올랐다. 커다란 나무가 삽시간에 잿더미로 변하는 것을 제 눈으로 똑똑히 목격하고 나서는 더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게 되었다. 사내는 불꽃이 이는 검을 카르낙의 손에 다시 들려 주었다. 전해 주는 그의 살결에 화상으로 일그러지고 부풀어 오른 것이 보였다.
“대체….”
“앞으로 간다.”
“…….”
“당신은 맨 뒤.”
“…….”
토막 난 단어를 내뱉고 그는 쏜살같이 몸을 움직였다.
“카르낙! 가까이 오지 마라! 알겠어!?”
자파가 질겁을 하며 그의 뒤를 따랐다. 자할과 릴리는 그들이 다가오는 것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영문을 모르긴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고 싶었는데 아무도 답을 몰랐다.
“동굴. 저기.”
사내는 릴리의 곁을 스치며 손가락으로 쿡, 왼편을 가리켰다. 자할에게 구스를 안아 들게 하고 파니릴리는 활시위를 제 어깨에 멘 채 그의 뒤를 따랐다. 자할과 자파가 바지런히 그녀의 뒤를 따라붙었고 맨 마지막으로 카르낙이 그를 뒤따랐다.
“이봐!”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사내를 불렀다. 너무 뜨겁잖아! 멋대로 불을 붙여 놓고 이걸 그냥 쥐여 주면 어떻게 해! 불을 끌 요량으로 검을 앞뒤로 흔들어도 보고 좌우로도 흔들어 보았지만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았다.
“어이! 이거, 이거 뭘 어떻게.”
이대로 버릴 수 없다. 삽시간에 사방의 모든 것을 불태울 테니. 하지만 그렇다고 이것을 들고 돌아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다. 조만간 이 뜨거움에 그의 장기조차 말라비틀어질 지경이었으니까 말이다.
“이거 대체 어떻게 끄는 거야!”
그러자 사내는 카르낙을 돌아보며 배를 툭툭 두드렸다.
배? 내 배? 내 배를 뭘 어쩌란 거야. 그러나 그게 다였다. 남자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모두 영문을 모른 채 눈을 굴리고 있는데 퍼뜩, 릴리의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경악한 눈빛으로 그녀는 카르낙을 돌아보고 고개를 저었다. 아내의 얼굴을 보고서야 카르낙은 그가 말하는 바를 깨달았다.
“…안 돼요.”
릴리가 신음하듯 내뱉었다. 카르낙의 얼굴에 기이한 빛이 띠었다. 잘못 본다면 뭔가 신기한 것을 발견한 천진한 어린아이의 낯빛과 착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