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 발 아래 은빛 눈-225화 (225/231)

225화

파니릴리를 추슬러 왔던 길을 되돌아오니 오코가 멀지 않은 언덕에서 초조하게 그를 기다렸다. 카르낙은 불안해하는 놈의 콧등을 한번 어루만져주고 파니릴리를 먼저 말 위에 올렸다. 그녀는 여전히 혼란스러워했다. 자신이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이렇게 하는 것이 옳은지 계속해서 갈등하는 듯 보였다.

조금이라도 틈을 주면 말에서 뛰어내려 다시 불길 속에 몸을 던지려 할 것 같아 카르낙은 서둘러 자리를 빠져나갔다. 릴리는 달리는 내내 불길을 돌아보았다. 어느 정도 멀어지자 몸 위에 빗줄기가 떨어졌다. 카르낙은 릴리가 한기를 느끼기 전에 제 망토를 벗어 그녀에게 둘러 주었다.

조금이라도 그녀의 미련을 떨궈 내고자 하는 의도도 들어 있었다. 멀리, 빗줄기를 피할 수 있을 만한 커다란 나무 아래서 자할과 자파가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다시 동료들과 합류한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었다. 세가 많아지면 파니릴리도 더는 혼란스러워하지 않으리라.

“왕비님!”

파니릴리를 발견한 바르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오른쪽 발이 물웅덩이에 잠시 잠겼지만 아이는 개의치 않았다. 내내 시름시름 앓던 아이답지 않게 목소리에는 생기가 넘쳤다.

“구스.”

그녀로서는 뜻밖의 만남이었다.

“…네가 어떻게.”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아이는 롬비에 있었다. 테이먼의 그늘 아래, 조부의 본성에 갇혀 있는 것이 바르시와의 마지막 조우였다. 그런데 지금은 성 밖으로 나와 있다. 그것도 투로와 함께.

“자할, 자파.”

“왕비 전하.”

릴리로서는 오랜만의 조우였다. 언제나 깍듯하게 저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치들 만 보다가, 경칭을 붙이면서도 비웃듯 삐딱하고 어색하게 발음하는 그들을 보자 유쾌하여 웃음이 났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유쾌하고 기쁠 수 있다니, 사람이란 정말 신기한 동물이 아닌가.

카르낙은 파니릴리를 안아 말에서 내려 주며 답했다.

“브리다스가 아이를 내게 보냈어.”

“브리다스가요?”

“응.”

“…….”

브리다스가 하나뿐인 외손을 자신의 적에게 보냈단 말인가?

“널 쫓아 롬비에 잠입했거든. 네가 어디 있는지 알려 준 것도 그 노인이야.”

“…….”

이해할 수 없어. 그를 이해할 수 없다. 그사이 브리다스의 심중에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인지 파니릴리는 짚어 낼 수 없었다. 아이는 제 혈육을 떠났음에도 조금도 슬퍼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슬픔을 감추고 있을지도 몰랐다. 어느 경우건 가여웠다. 그가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도 참으로 무겁구나 싶었다. 릴리는 제 품에 뛰어든 바르시의 등을 말없이 토닥였다.

“이대로 성전까지 달려야 해.”

카르낙은 물을 채우기 위해 수통을 꺼내, 물웅덩이에 담갔다. 자할과 자파는 어느새 바짝 다가온 화염을 보며 입술을 짓씹었다. 자할이 물었다.

“쉬지 않고?”

카르낙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쉬지 않고.”

“…말들이 견딜 수 있을까?”

“견딜 거야. 달리지 않으면 곧 죽음이란 걸 놈들도 알 테니까.”

“얼마나 걸릴까?”

“모르지. 하지만 확실한 건 가능한 한 빨라야 한다는 거야…. 빌어먹을.”

카르낙이 짧게 욕설을 내뱉으며 제 검집을 옆구리에서 풀어냈다. 그러고 보니 그의 낯빛이 별로 좋지 않았다. 혹시 롬비를 헤쳐오며 상처를 입은 것일까. 자파는 걱정스레 그의 몸을 위아래로 훑었다.

“왜 그래? 다친 거야?”

“검이…”

그는 검집에서 검을 빼냈다. 칼날의 끝이 붉었다. 꼭 식지 않은 숯덩이처럼 선명한 빛을 발하며 달아오른 채였다.

“뭐야 저게.”

기묘한 광경에 자할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뭐냐고 물어도 영문을 모르긴 카르낙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르겠어.”

갑자기 옆구리가 델 듯 뜨거웠다. 파니릴리를 불길 속에서 빼내 온 이후로 조금씩 열이 오르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통증을 느낄 정도로 데워져 있었다. 검을 불길에 집어넣은 적이 없으니 달궈질 일도 없는데 마치 수 시간 화로에라도 집어넣었다 뺀 듯 검은 잔뜩 독이 올라 있었다.

“…칼. 당신의 검은 웬만한 불로는 달구지 못하는 것 아니었어요?”

스코크에게 분명 그렇게 들었다. 왕의 검은 달구어 제련할 수 없노라고. 그래서 릴리는 성전의 기록물을 본 이후로 계속해서 의심해 왔다. 카르낙이 가진 저 검이 혹시 용의 어금니를 갈아서 100년 동안 만들었다던 그 검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카르낙은 검을 식힐 요량으로 그 끝을 물웅덩이에 담갔다. 그러자 삽시간에 물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부글부글 소리를 내며 방울이 튀어 올랐다. 자할은 믿을 수 없어서 제 눈을 비볐다. 저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왔다.

“이런, 염병할.”

“…….”

세상이 미처 돌아가니 이제 생명이 없는 것까지 미쳐 돌아가는 것일까. 카르낙은 이상 증세를 보이는 제 검을 바라보며 멍하니 이것을 버려야 할까 고민했다. 그러나 아주 잠시였다. 멀리 요란한 말발굽과 기합 소리들이 들려왔다. 자파가 목을 길게 빼고 발원지의 동태를 살폈다.

“…롬비의 병사들이야.”

카르낙은 식지 않은 검을 다시 검집에 추슬러 넣고 허리에 찼다. 릴리가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겠어요?”

“견뎌야지. 지금으로선 달리 방법이 없어.”

오랫동안 손에 익숙해진 이 검을 대신할 것이 없다. 게다가 이토록 급박한 상황에 무기를 버리는 멍청한 짓을 할 수도 없고 말이다.

“이리 와, 꼬맹이.”

자파는 파니릴리의 품에 딱 붙어 있는 아이를 덜렁 들어 제 말 위에 얹었다. 카르낙도 서둘러 릴리를 오코의 등에 태웠다. 자할이 선두에 서서 말의 가슴을 찼다. 히힝, 하고 짧게 운 뒤 놈은 지면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고 그 뒤를 자할과 카르낙이 따랐다. 말이 움직일 때마다 달구어진 검집이 카르낙의 허벅지와 정강이를 때렸다. 릴리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카르낙의 면부를 살폈다. 빗물에 뒤섞여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는 것 같았다.

기이한 기분이었다. 죽음으로부터 달아나고 있건만, 어쩐지 점점 더 죽음의 가까이로 다가가는 느낌이 들었다.

***

베오르토는 창가에 서서 붉게 달아오른 서쪽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는 근래에 편히 잠을 이룬 적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발투만의 군사가 캘던의 시민들을 데리고 성전에 도착한 이후로 그랬다.

그의 병사와 그의 사람들이 성전에 왔건만, 정작 왕은 보이지 않았다. 그의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찝찝한 것은 그 이유를 물어도 모른다고만 할 뿐, 누구 하나 제대로 답하는 이가 없다는 것이었다.

저를 경계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또한 저를 경계한다는 것은 암묵적으로 그들 모두가 저의 배신을 알고 있다는 이야기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는 커다란 딜레마에 빠졌다. 제 안위를 지키려거든 분명 발투만의 군사와 그의 친우들을 모두 제거해야 옳았다.

그러나 그는 에나였고 이곳은 성전이었으므로 그들을 죽일 수 없었으며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제 목숨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었다. 이럴 땐 에나라는 직책이 짐 덩어리였다. 안전을 위해 그들을 제거한다면 그는 신임과 명예를 잃고 말 것이다. 그리고 신임과 명예를 잃어 에나의 자리에서 끌어내려지는 순간, 저는 죽은 목숨이었다. 발투만의 군사들이 그의 사지를 도륙할 것에 틀림 없기 때문이다.

분명 여신의 집이고 그리하여 제집이건만 베오르토는 어쩐지 감옥에 갇힌 것처럼 제 침실에만 틀어박혔다. 괜스레 엄한 곳에서 투로의 병사를 만나 목이 베이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좀처럼 밖으로 나설 수가 없었다.

그놈들은 믿음도 없고 명예도 없으니. 언제 어디서든 두려움 없이 검을 휘두를 것이다. 저와는 처지가 매우 달랐다. 그 점이 혐오스러우면서도 또 한편으론 부럽기도 했다. 믿음이 없어 자유로운 그들이 처지가.

마침, 그의 심복 티옹이 침실로 들어왔다. 요즘 같은 때에 제 손발이 되어 주는 것은 성전의 사제들, 그중에서도 티옹처럼 충성스러운 이들뿐이었다. 베오르토는 반색했다.

“티옹.”

“에나님.”

그러나 티옹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그리고 에나는 곧 그 표정의 이유를 알게 되었다. 뒤이어 에이가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방에 들어섰다. 베오르토는 잔뜩 미간을 구겼다. 감히, 에나의 방에 여인이 치마를 끌며 들어오다니.

“대체 이게 무슨 무례요!”

베오르토가 고함치자 티옹이 진땀을 쏟았다.

“거듭, 거절했습니다만….”

에이가는 그의 말을 자르고 제 말을 이었다.

“거듭되는 면담 요청을 계속해서 거절하시니 달리 방도가 있나요.”

에나는 휙 몸을 돌렸다. 무시할 작정인 듯했다.

“로리아나 일행에 관해 다시 한번 에나님의 자비를 청하고자….”

하지만 에이가가 그 계집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자 베오르토는 무시하지 못했다. 늘 그렇듯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곳은 성스러운 땅이요! 에이가! 어떻게 계집을, 그것도 그 더러운 창녀를!”

“…아마네스 님도 여인입니다. 잊으셨어요?”

“아마네스 님은 어머니요! 여인과 어머니는 엄연히 달라! 이 제단은 그분의 첫아들의 시신 위에 지어졌소! 그 이후로 이곳을 지키는 것은 늘 사내들의 일이었어! 어머니이기에 사내들이 지키는 것이요!”

“성전에 들인 캘던 시민의 절반이 여인이에요. 신의 자비 앞에 성별과 지위가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그 계집은 투로에! 창녀야! 감히 여신의 재단에 창녀를 들일 순 없어!”

“그녀는 제 목숨을 구해 주었어요! 로로의 목숨도, 근위대장의 목숨도, 그뿐만 아니라 그녀는 여러 차례 폐하와 비전하의 목숨도 구했습니다. 그녀는 폐하의 더 없는 친우이며 또 은인이에요!”

“창녀야! 더러운 창녀! 그 무엇도 그 사실을 가릴 순 없어! 그 무엇도 그녀가 더러운 몸을 굴렸다는 사실을 덮을 순 없어! 그 계집은 더러워! 더러운 자를 성전에 들일 순 없어! 내 땅을 더럽힐 순 없어! 그딴 천박한 계집을 난 용납 못 해!”

“…….”

변한 걸까. 발투만 왕의 곁에 있으며 자신이 너무나 많이 변한 걸까. 에이가는 좀처럼 에나의 고집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딱딱하고 옹졸한 신념을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원해서 선택한 일이 아닙니다. 그녀가 원해서 창녀가 된 것이 아니에요. 엘버그가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녀에게 창녀가 되라 강요했습니다. 그녀를 그렇게 만든 건 우리예요. 에나. 우리의 선입견이, 우리의 이기심이, 우리의 끝없는 증오가,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어요. 단지 검은 머리를 가졌다는 이유로, 어두운 피부를 가졌다는 이유로, 우리는 그녀를 창녀로 낙인찍고 멸시하고 천대했어요.”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했다. 악착같이 버텨서 자신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에 도달했다. 안다. 그래 보았자 창녀라는 것을. 그러나 그녀를 그곳까지 밖에 도달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그녀가 아니다. 그녀를 그곳에 머물도록 강요한 것도 결코 그녀가 아니다. 우리다. 우리들이야.

“…전 모르겠습니다. 에나님. 아마네스 님은 사랑과 자비의 어머니이시지요. 그런 분이 어째서 증오와 저주를 말하실까요. 그런 분이 어째서 우리들의 마음에 그런 부정한 감정을 품도록 허락하신단 말입니까. 세상의 모든 것을 품는 분께서 어째서…. 에나님, 그것을 이상하다 생각하신 적이 없으세요?”

“에이가!”

“한 번도 그를 의심해 본 일이 없으십니까?”

“어찌 그런 부정한 소리를! 이곳이 신의 집임을 잊으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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