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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224화 (224/231)

224화

바르시를 품에 안은 자파가 가장 꽁무니를 따랐고 그 앞에 자할이 있었다. 그리고 카르낙은 너무나 앞서가 그 모습이 보이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오코는 평지와 다름없는 속도로 산을 올랐다. 제 주인을 닮아 괴물 같은 체력을 가진 것이 틀림없다. 물론 가장 빠를 땐, 살기 위해 도망칠 때겠지만.

“카르낙!”

자할이 제 종마의 배를 차 속도를 올리며 성마르게 소리쳤다. 사방에서 불길이 일었다. 너무 가까이 왔다. 어느 지점부터 말들은 더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았다. 아무리 채찍질을 해도 자꾸만 뒷걸음질 칠 뿐이었다.

“더는 못 가!”

품에 안긴 바르시가 쌕쌕거리며 기침을 하기 시작하자 자파는 아예 추격을 포기했다.

“물러나야 해, 자할. 안 그러면 애가 질식할 거야.”

“…….”

자할은 어쩌지 못하고 제자리를 맴돌았다. 불 속으로 뛰어든 카르낙에게도 미련이 남았고 아이가 화염에 질식하여 죽는 것 또한 원치 않았다.

“젠장!”

그는 신경질적으로 욕설을 뱉어 낸 뒤 말머리를 돌렸다.

“거리를 벌리자고, 자파! 물가를 찾아!”

불길에서 멀어져 카르낙이 제 아내를 무사히 데리고 돌아오길 바라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놈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달아나야 한다. 달아나 로로가 있는 성전에 합류해야 한다. 놈이 남긴 허여멀건 꼬마 놈 하나를 데리고.

비정하더라도 하는 수 없다. 본디 생존이란 그런 것이 아니던가. 소중한 것들을 하나씩 떨구고 단념하는 것. 그건 누구보다 카르낙 발투만 그놈이 더 잘 알고 있으리라. 자할은 속도를 붙이기 위해 발을 굴렀다. 암말은 갈퀴를 휘날리며 좀 더 빠른 속도로 불길에서 멀어졌다.

카르낙은 자신이 갈 수 있는 한, 또 오코가 버틸 수 있는 한 가장 가까운 곳에 다다라 끊임없이 주변을 탐색했다. 불길은 새까만 연기를 토하며 땅 위의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빗물에 뒤섞인 매캐한 연기가 지독한 내음을 뿜어 댔다.

“릴리!”

카르낙은 몇 번이고 제 아내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를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녀를 지나쳤을지도 모르고, 이미 그녀를 찾기에 너무 늦었을지도 몰랐다. 눈물이 났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자신의 목숨을 포함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기도 했다.

이 땅 위에 벌어진 이 비극 하나하나가 전부 자신의 잘못인 것 같았다. 사막 위를 기어 다니며 살지 못한 죄, 감히 왕좌를 탐한 죄, 감히 사랑을 하고, 미래를 꿈꾼 죄, 무엇보다 릴리를 엘버그에 들인 죄가 가장 사무쳤다.

너를 데려오지 말걸. 네가 그라타에 있었다면, 그랬다면, 너는 지금쯤 그곳에서 행복했을 텐데. 이곳에 와 네가 겪은 일이라고는 온통 인내하고 견디고, 자신을 희생해야 하는 것들뿐이었다.

분에 넘치는 짓이란 걸 알았을 때, 분수에 맞지 않는 여자란 것을 알았을 때, 그때 너를 보냈어야 했다. 네가 그라타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을 때, 그때, 너를 욕심 내지 말고 너를 보냈어야 옳았다.

네가 원하는 것은 언제나 옳았지, 릴리.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은 언제나 틀렸어. 언제나 잘못된 것만을 원했어. 아니. 아니야. 난 무엇도 원해선 안 되었어. 너를, 너를 원해선 안 됐는데.

나 때문이라면, 이 모든 비극이 나로 비롯된 것이라면, 그렇다면 내가 죽으면 끝날까. 그러나 릴리가 없다면 이 비극의 유무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릴리가 없다면 삶도 죽음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내게 거창한 명분 따위는 없어. 난 너처럼 선하지 않고, 너처럼 삶을 사랑하지 않고, 너처럼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도 않아. 내게 있어 의미가 있는 건 오로지 너뿐이었어. 너를 위해선 모든 것을 버릴 수 있건만, 릴리, 그것도 네가 없으면… 다 무슨 소용인가.

몇 번이고 쏟아지는 눈물을 닦아 냈다. 이대로 포기 하고 불길에 뛰어들까 말 고삐를 말아쥐었다가 놓는데 멀리 하얀 인영이 보였다. 열기에 사방이 일렁이는 가운데 하얀 실루엣이 좌우로 울렁거리다가 곧 쓰러졌다.

“릴리!”

카르낙은 오코에서 뛰어내렸다. 히히힝, 하고 오코가 신경질적인 울음소리를 냈다.

쿨럭쿨럭, 파니릴리는 가쁜 기침을 내뱉었다. 더는 눈을 뜰 수도 숨을 쉴 수도 걸음을 옮길 수도 없었다. 세차게 소나기가 내리고 있음에도 몸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없었다. 화염에 내리는 빗물마저 모두 증발하는 것이다. 멀리서 누군가 저를 부르는 것 같았다. 거센 화염이 만들어 낸 환청인 모양이었다. 릴리는 제 가슴팍을 뒤져 리쿠스가 조제해 준 오피움 물약을 꺼내 들었다. 더듬거리며 코르크 마개를 떼어 내고 입에 가져다 대는데 무언가가 그녀의 몸을 잡아챘다. 아주 거대한 산짐승과 부딪혔나 싶었더니 단단한 악력이 제 어깨를 잡아 벌떡 일으켰다.

“릴리!”

안 돼! 릴리는 발작하듯 몸을 비틀었다. 물약을 먹어야 했다. 물약을 먹고 감각을 마비시키고 불길 속에 뛰어들어야 했다. 언젠가 부르테가 꾸었던 꿈처럼. 그 안에 춤을 추며 사그라들어야 했다.

“릴리!”

카르낙의 목소리가 한 번 더 그녀를 불렀다. 릴리는 그것을 현실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모든 것은 환영이고 환청이라 여겼다. 물약을 먹지 않았음에도 뜨거움을 이기지 못해 정신 착란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발악했다. 몸을 비틀고 비명을 지르며 반항했다.

“놔!”

할 만큼 했어. 견딜 수 있을 만큼 견뎠어. 억울할 때도, 발악을 하고 싶을 때도, 울고 싶을 때도, 도망치고 싶을 때도 전부 견뎠어. 언제나 옳은 선택을 하기 위해 애썼어.

늘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려 노력했다. 늘 참고 견디며 그것이 결국 행복이고 그 안에 희망이 있을 거라 믿었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어. 사람들의 기억에 따듯하고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었어. 그렇게 평생 기억되고 싶었어. 그러면 죽어서도 행복할 것 같았어. 그러면 죽을 때조차 행복할 것 같았어.

그러니 놓아 줘. 그동안 애썼잖아. 이제 그만할래. 이제 그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곁으로 갈래. 올라가 있는 곳으로, 카르낙이 있는 곳으로, 세일린이 있는 곳으로. 이제 그만 편안해지고 싶어.

“놔 줘…. 놔 줘…”

릴리는 애걸하며 울음을 터트렸다. 죽음에 목마른 자처럼, 죽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처럼, 그것에 홀린 것처럼 처절했다.

“그럼 나도 같이 죽어!”

카르낙이 그녀를 흔들며 소리 질렀다.

“…….”

릴리는 눈을 깜빡였다. 그제야 조금, 현실감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네가 불 속으로 뛰어든다면 나도 같이 뛰어들 거야!”

“…….”

“그러니까, 죽을 거면! 그럴 거면 차라리 같이 죽어! 나랑!”

비로소 그가 보였다. 환영도 아니고 환청도 아니었다. 저를 흔들며 분노하듯, 혹은 단념한 듯,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소리를 지르는 그는 분명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릴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몇 번이고 입술을 벌렸다 다물었다. 확신할 수 없어 망설이다 그를 불렀다. 마음 한편으론 늘 믿었는데. 당신이 사실 죽지 않았을 거라고. 어딘가에 살아 있을 거라고. 그런데도 믿을 수 없다니. 당신을 눈앞에 두고도 헛것이라 생각하다니. 믿고 있었는데. 정말로, 정말로 그랬는데.

“칼…”

그러자, 카르낙이 와락 제 아내를 껴안았다. 격정에 빠져 눈물이 났다. 하염없이 그랬다.

“같이 살 수 없다면 그렇다면 차라리 함께 죽어. 차라리 같이 여기서 모든 것을 끝내자, 릴리. 너와 함께라면, 그렇다면, 나는 더는 무서울 것도 바랄 것도 망설일 것도 없어.”

하지만 릴리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 와 이런 저가 충격적일 이유가 없음에도 마치 그런 듯.

“그건 안 돼요. 그럴 수 없어요. 칼. 당신은…”

“어차피 네가 없으면 난 아무것도 아니야!”

카르낙이 다시 그녀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러나 전처럼 거세지 않았다. 오히려 연약하고 처연했다.

“알잖아, 릴리. 내 인생은 네가 전부란 걸. 너도 알잖아.”

“난… 난, 못 해요.”

못해. 당신을 끌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짓 따위. 내 손으로 그를 죽이는 것 따위는 할 수 없어. 하지만 내가 죽지 않으면, 그러면 어떻게 당신을 살릴 수 있지? 어떻게 저 불길을 멈출 수 있지?

“칼! 내가 왜 이러는지 알잖아요. 내가 아니면 누구도, 누구도 저 불길을 끌 수 없어요. 들어 봐요.”

릴리는 저를 억세게 잡은 그의 손을 타이르듯 어루만졌다. 그 못지않게 그녀도 절박했다.

“누군가는 살아야 해요. 누군가가 살 수 있다면, 그렇다면 살아야 해요. 모두가 다 죽을 순 없잖아요. 당신은… 아마네스에게 굴복하지 않는 투로잖아요. 당신은 운명에 순응하지 않는 사람이잖아요. 그러니까 살아서, 투쟁해야죠. 칼. 살아서…”

아니야.

“칼, 당신은 혼자가 아니잖아요. 당신을 바라보는 투로의 형제들이 있잖아요.”

아니야!

“당신은 죽을 이유가 없어요. 고통받는 건 나 혼자로 족해요. 나 하나로 충분해요. 그러니 제발…. 살아요. 살아서 부디 내 희망이 되어줘요. 당신이 있어야, 그래야 내가 행복해요.”

“넌 못 죽어! 넌 행복하게 죽을 수 없어! 나도 죽을 거니까!”

“칼!”

“그러니까 살아!”

“…….”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죽어도 난 상관없어! 엘버그 대륙이 전부 불타도 난 상관없어!”

“칼, 하지만….”

“내가 아마네스 여신에게 굴복하지 않는댔지! 맞아! 난 마지막까지 그 여자의 편에 서지 않을 거야! 마지막까지 발악할 거야! 살아서! 그 여자가 이 엘버그 대륙 전체를 불태우고 도륙한대도, 나는 그 마지막 한 줌의 땅 위에서라도 살아 있을 거야!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살아서 그녀를 비웃을 거야!”

지상이 모두 불타면 바위 위에서, 그마저도 모두 녹아 버리면 끝없는 바다에 빠져서라도, 그렇게 가라앉아 결국엔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절대로 당신의 불길 아래에서는 죽지 않겠노라고, 마지막까지 당신 뜻대로 내 목숨을 내어 주지 않겠노라고. 그게 투로였다. 그게 카르낙 발투만의 투쟁이었다.

“릴리,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당신과 함께이길 바라는 사람도 있어. 죽는 순간까지 함께이길 바라는 사람이.”

“…….”

“나와 같이 가. 발투만의 여자답게. 릴리, 투로의 아내답게 끝까지 운명에 맞서자. 그러다가 죽어. 같이. 나와 같이 죽어. 릴리.”

흑, 하고 파니릴리가 울음을 터트렸다. 두려움에 떨리는 그녀의 몸을 카르낙이 다시 한번 와락 안았다. 괜찮아. 모든 짐을 당신 혼자 짊어질 필요 없어. 신이 정말로 당신을 사랑한다면, 그녀가 정말로 사랑과 자비의 여신이라면 당신을 이렇게 끔찍한 고통 속에 내버려 둘 리 없어. 만일 그렇다면 내가 함께할 테니까. 내가 그 고통을 나눠 가질 테니까. 그러니까 당신은 혼자일 필요 없어. 내가 곁에 있어. 내가 늘 당신 곁에 있겠어. 기꺼이 너를 위해 죽고 기쁘게 너와 함께 죽겠어. 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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