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테이먼 테르조가 분명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롬비를 포기하라고 했다. 목을 빼고 저만 바라보는 영지민들이 죽는 것을 그저 방관하라고만 했다. 기실 그에게 자신의 목숨 이외의 것은 중요치 않아 보였다. 그 외에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보였다. 당신이 곧 엘버그 그 자체라고 분명,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익숙한 광기였다. 알기어스 왕은 자신이 곧 신이라고 하였다. 그땐 그런 알기어스를 사랑했다. 그가 가진 혈통과 역사와 아름다움에 눈이 멀었다. 그러나 지금은, 지금의 테이먼 테르조에게는 그럴 수 없었다. 참으로 지독한 사랑이지 않은가. 결국 브리다스 그가 택한 것은 알기어스였다. 결국 그 아름다움에 눈이 멀어 다시 그 핏줄을 택하고야 만다. 파니릴리 알기어스. 브리다스는 그녀를 택했다.
“아무것도 모르겠네. 이젠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어. 어쩌면 지금의 선택을 후회할지도 모르지.”
“…….”
“하지만 그래도 지금은, 이럴 수밖에 없어. 이런 선택뿐이야.”
언젠가 정신을 차려 이 모든 상황을 복기했을 때 어쩌면, 어쩌면 피눈물을 흘릴지도 모르겠다. 다시금 맹렬히 복수심을 태우며 이베트가 그런 것처럼 발투만을 죽이고야 말겠다며 길길이 날뛸지도 모른다. 그래도 지금은 이것이 최선이었다. 옳은 결정이라 믿는 대로 행할 뿐이다.
브리다스는 자신의 손주를 일으켜 카르낙의 품으로 밀었다.
“데려가.”
“…….”
“내 손주를 보살펴 주게.”
“…….”
“아이는 당신들 손에 있는 것이 훨씬 더 행복할 테니.”
카르낙은 눈을 가늘게 떴다. 우습게도 노인의 모습에서 그는 로레인 하게너를 보았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모든 것을 내주었던 그 여자도 이런 얼굴을 했었다. 하나뿐인 몸종 에이가를 부탁하며 딱 저런 목소리를 했었다.
확신할 수 없는 희망, 확신할 수 없는 정의, 확신할 수 없는 미래에 주사위를 내던지듯, 딱 그렇게. 하는 수 없지. 카르낙은 바르시를 제 어깨에 둘러멨다. 아이는 인형처럼 소리도 없었다.
“비켜, 이 고철 덩어리들아.”
자할이 경고했다. 사람들은 주춤거리며 더 뒤로 물러섰다. 브리다스는 성문까지 그들을 안내했다. 바르시는 크리벳의 마차에 올랐을 때조차도 꿀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닫고 있었다. 작별의 인사도, 조부를 향한 애틋한 눈빛도 없었다.
애초에 남이었던 듯 멀거니 바라보다 멀어졌다. 떠올려 보니 한 번도 아이는 그를 향해 ‘할아버지’라 부른 적이 없었다. 브리다스 또한 아이를 살갑게 대하지 못했다. 이베트의 핑계를 대기도 민망했다.
메말라 가는 아이를 돌아보지 않았던 것은 그 역시 이베트와 닮았기 때문이었다. 핏줄을 향한 의무와 책임은 알아도 사랑은 몰랐고, 그런 아비에게서 자란 이베트는 그 모든 것이 부재한 성인이 되어 버렸다.
브리다스는 카르낙을 배웅한 뒤 성벽에 올랐다. 멀리 불꽃이 보였다. 열을 지어 달아다는 영지민들의 뒤로 마치 그것은 물감을 풀어놓은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문득 제 발아래 모든 풍경들이 덧없다고 느껴졌다.
“브리다스 님!”
고프리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의 얼굴은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모두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누구 하나 제정신으로 이겨낼 수 없는 때이니 당연하다 생각하면서도 혼란스러웠다. 모두가 미쳐 돌아가는데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지 가늠할 수가 없다,
“…테이먼… 테이먼 테르조가….”
브리다스는 텅 빈 눈으로 그를 보았다. 자식을 잃고 핏줄을 카르낙의 손에 들려 보내며 모든 것을 자포자기한 듯했다. 암담했다. 숨을 쉬는데도 이미 죽어 버린 노인을 붙잡고 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가 오고 있어요. 그를, 죽이셔야 합니다, 브리다스 경. 그를….”
그를 죽여야 해. 이왕 이렇게 된 거 차라리 완전히 반역을 저질러야 한다. 그래야 목숨을 보전할 수 있다. 어쨌든 이곳의 영주는 브리다스다. 에나가 테이먼의 뒤를 봐준다지만 그는 지척에 있다.
그러니 이곳 롬비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 못할 것이다. 숨기면 된다. 위장하고 덮어씌우고 덧칠하면 에나도 진실을 알 수 없을 것이다. 브리다스만 결심한다면 세상은 모두 그의 편일 것이다. 브리다스가 변절하면 테이먼은 이곳에서 세가 없으니 아주 손쉽고 간단하게 그를 처리할 수 있다.
“내 신념은 내 신앙을 뛰어넘지 못하네.”
브리다스가 멍하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내 신앙은…….”
브리다스는 성벽의 아래를 멍하게 바라보며 잠시 말을 멈추었다. 허무했다. 쓴웃음이 났다.
“내 두려움을 이겨 내지 못했어.”
툭, 뱉어내고 그는 아래로 낙하했다. 어떻게 손을 쓰기도 전에 그는 갑자기 풍경에서 사라져버렸다. 성벽 아래로 몸을 던지는 데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쿵, 하고 바닥에 부딪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고프리는 히익, 숨을 들이켜며 서둘러 성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브리다스의 웅크린 시신 밖으로 붉은 핏물이 번져 갔다.
“…….”
힘이 풀려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눈 앞이 까마득하여 중심을 잡을 수가 없었다. 성벽에 몸을 기댄 채 그는 말을 잃었다. 뒈졌어. 저 멍청한 늙은이가 자신이 저지른 일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몸을 던진 거야. 믿을 수가 없다.
어떻게 해야 하지? 이베트도, 브리다스도 모두 죽어 버렸다. 그럼 난? 그럼 내 목숨은? 차라리 파니릴리 알기어스를 따라나섰어야 했나? 아니야. 그 여자는 어차피 죽으러 간단 말이야. 빌어먹을! 차라리 처음부터 카르낙 발투만의 편에 붙을걸! 정말 우스운 일이다. 이런 순간 그 투로 놈의 곁이 가장 안락해 보인다니 말이다.
“브리다스!”
성난 테이먼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프리는 흠칫 몸을 떨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 보였다.
“감히! 어떻게 감히 내게!”
카르낙 발투만이 성에 침입했다면 당연히 제게 먼저 알렸어야 했다. 납작 엎드려 그의 동태를 알리고 그의 결정을 기다려야 맞는 것이다. 그러나 브리다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제 멋대로 사태를 수습하고 제멋대로 그를 살려 성을 빠져나가게 만들었다.
이것이 반역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도 저를 지척에 두고 그 코앞에서 그를 배반했다.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일이다. 제 손으로 찢어 죽여도 분이 풀리지 않을 일이었다.
“…브리다스 경은….”
그러나 단죄해야 할 그는 그 자리에 없었다. 대신 망설이며 비키는 고프리가 성벽 아래를 가리켜 보일 뿐이었다. 그곳에 브리다스가 있었다. 피를 흘리며 아이처럼 웅크린 채로.
“내가 구원해 줄 거라 했잖아….”
테이먼은 저 혼자 중얼거렸다. 내가 엘버그를 구원할 것이라고. 한데 너는 그걸 믿지 못했지. 나를 믿지 못해서 파니릴리 알기어스를 내보냈어. 그 잠시의 망설임조차 너는 인내할 줄을 몰랐지. 그러고선 바르시를 카르낙에게 보냈어.
내가 아닌 그 작자의 손에 네 핏줄을 맡겼어. 천적에게, 죽여 마땅할 작자에게 너는 그렇게 네 마지막 희망을 걸었어. 내가 아닌, 그 하찮은 투로 놈에게.
그의 시체 곁으로 병사들이 몰려들었다. 주인을 잃은 개처럼 얼굴이 파랗게 질린 채 그들은 제자리를 서성였다. 잠시의 말미를 두고 성벽 위에도 병사들이 모였다. 혼란스럽고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그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놈이….”
기세를 잡아야 한다. 롬비의 병사들이 제 주인의 죽음에 동요하기 전에 먼저 이들을 포섭해야 한다. 본디 군중이란 아둔한 것이다. 목청이 높은 쪽으로 자연히 그 의식이 흐르게 되어 있다.
“카르낙 발투만이 이베트 코리넬리오를 죽이고 장차 롬비와 모웨나의 주인이 될 바르시 코르넬리오를 데려갔다! 놈을 찾아! 놈을 찾아 너희들의 주인을 찾아와라! 바르시 코르넬리오를 데려와!”
롬비는 관습적이고 보수적인 영지이다. 당연히 그 안에서 나고 자란 롬비의 군인들 역시 영지민들과 마찬가지였다. 태생적으로 투로를 혐오했다. 태생적으로 엘버그의 신분제를 신봉하였으며 그것에 복종하며 살았다.
그러니 그들을 구워삶기란 쉬웠다. 몇몇이 동요하여 분노하면 곧 그 감정은 불길처럼 번졌다. 그 이후엔 제아무리 브리다스의 마지막을 목격했다 하여도, 그가 스스로 제 장손을 투로 놈의 손에 넘긴 것을 보았다 하여도 바로잡을 수 없었다. 감정 앞에서 이성은 절대로 힘을 쓰지 못한다.
“놈을 찾아!”
“투로 놈을 찾아라!”
병사들은 금방 동요했다. 우왕좌왕하는 몇몇을 밀치고 성이 난 병사들은 칼을 치켜든 채 성벽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그 모습을 보며 테이먼은 쓰게 조소했다. 브리다스의 곁엔 그의 뜻을 헤아리고 따라 줄 측근들이 없었다.
아둔하고 욕심 많은 딸아이를 거둔 덕이었다. 이베트는 제 아비의 곁에서 쓸모 있는 보좌진들을 모두 쳐 냈다. 그게 저와 제 부친을 고립시키는 줄도 모르고. 이게 브리다스 가문의 말로였다. 비장한 최후 이후에도 그 누구도 뜻을 헤아려 주지 않는 것.
“이제 네가 섬길 주인은 나뿐이구나. 고프리.”
고프리는 테이먼의 차가운 벽안이 응시하는 것을 보았다. 붉은 화염. 빗줄기 아래에서도 사그라들 줄 모르는 그 새빨간 지옥. 테이먼은 시선을 옮겼다. 화염이 옮겨붙은 듯 그의 눈동자는 온통 붉었다. 다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아득해졌다.
“너는 나와 함께 성전으로 간다. 즉시.”
병사들은 상관없다. 영지민이 어찌 되건 그 역시 상관없다.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이 세상 모두가 타 죽어도 상관이 없다는 눈빛이었다. 모든 것이 하찮았다. 세상도, 사람도. 테이먼 테르조에게 중요한 것은 테이먼 테르조뿐이고, 그의 세계에 가득한 것 역시 오직 테이먼 테르조 뿐이라는 것이 그의 눈에서 너무나 선명하게 읽혔다. 소름이 끼쳤다. 그럼에도 고프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주군….”
배신과 배신과 배신이 거듭될지라도, 어제의 적이 오늘의 주인이 될지라도 단 1분 1초라도 더 생명을 연장하는 것. 고프리의 영혼은 오직 그것만을 위해 움직였다. 과거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하듯이 미래 또한 그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