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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222화 (222/231)

222화

“네가 내게 했던 것처럼 네 창녀 같은 아내는 사내들 아래에서 헐떡거리다가 내가 갈갈이 찢어서, 악!”

카르낙은 더 듣지 않고 그녀의 머리채를 쥐어 당겼다. 순식간에 그의 앞에 붙들려 온 채 목젖에 날카로운 칼이 겨누어졌다. 등뒤로 카르낙의 단단한 가슴이 오르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헐떡였으나 다만 숨을 고를 뿐, 분노한 것은 아니었다. 카르낙이 팔뚝으로 이베트의 목을 죄어 감은 채 속삭였다.

“사내들 아래에서 헐떡거린 건 당신이잖아, 코르넬리오 부인. 아직도 그때를 잊지 못하는 모양이지?”

“이 더러운… 아윽.”

욕을 뱉어 내려 했으나 목이 죄여 뒷말을 잇지 못했다.

“카르낙!”

콰당, 하고 몇몇 장정이 쓰러진 뒤 자할과 자파가 방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온몸에 피가 흥건했다.

“병사들이 몰려오고 있어!”

“네 아내는 코빼기도 안 보인다고! 여기에 있는 거 맞아?”

이베트가 표독스레 답했다

“뒈졌다니까!”

자파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좁은 방 안으로 삽시간에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카르낙은 이베트를 붙잡은 채 몇 발짝 뒤로 물러섰다. 칼끝은 여전히 그녀의 목을 겨냥한 채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행동했다.

곧 브리다스가 헐떡이며 방안으로 들어섰다. 바르시도 함께였다. 아이는 충격으로 입을 벌렸다. 제 어미의 처지보다 카르낙 발투만이 살아 있다는 사실에 넋이 나간 듯했다. 씨근덕거리며 바르시는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그의 곁에 파니릴리가 있었다면 아마도 아이의 어깨를 꼭 감싸 안아 주었으리라.

카르낙은 다시 한번 침착하게 물었다.

“내 아내. 어디 있어.”

“뭐 해! 어서 죽여!”

이베트가 날뛰었다. 그녀의 목덜미에서는 어느새 피가 흘렀다. 제 분에 못 이겨 이리저리 몸을 비튼 결과였다.

“내 말 못 들었어? 어서 죽여! 이 벌레를 죽이라니까!!”

“빌어먹을 계집. 주둥이 좀 닥쳐. 귀청 떨어지겠으니까.”

자파가 미간을 찌푸리며 신음했다. 차라리 카르낙이 어서 여자의 목을 그어 주었으면 했다. 그럼 조용해질 테니까.

카르낙이 칼끝에 힘을 주었다. 칼날이 피부를 파고드는 느낌이 섬뜩했다. 이베트는 비명을 질러 댔다. 눈이 뒤집혀 길길이 날뛰던 기세는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이베트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장검에 묻은 것이 그녀의 피부를 타고 흘러내리는 것인지 붉은 핏물이 그녀의 목줄기를 타고 앞섶을 적셨다.

바르시가 발작적으로 몸을 떨었다. 그날의 악몽이 다시금 재현되는 듯했다. 히끅, 히끅, 아이가 곧 기절이라도 할 듯 가쁘게 숨을 들이켰다.

그때는 동요하지 않던 장면이었다. 그때의 바르시는 카르낙 발투만에게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코르넬리오도, 그의 지조 없는 아내도, 그리고 그의 어린 아들도 모두 적이었다. 그뿐이었다.

지금의 바르시는 카르낙에게 구스였다. 파니릴리가 모든 것을 감내하고 살려 보낸 생명. 카르낙에게 그것은 원죄 같은 거였다. 들키고 싶지 않던 치부였고 그러면서도 늘 인정받고 싶은 아픔이었고 그리고 지금은 그조차 자신의 역사였고 또한 사랑하는 아내의 일부였다.

“당신의 아내는 여기에 없소.”

브리다스가 나섰다. 강파르고 지친 얼굴에 주름이 가득했다. 한없이 피곤하여 적대감도 분노도 놀라움도 심지어 두려움조차 읽히지 않았다.

“파니릴리 알기어스는 이곳을 떠났어.”

“…어디로?”

“…….”

“어디로!”

카르낙이 소리 질렀다. 이베트의 목을 타고 더 많은 피가 흘렀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하셨어.”

“…….”

“그분은 당신이 죽은 줄 알지.”

“세일린, 세일린은?”

그녀는 이곳에 있을까? 아니면 함께 떠났을까?

“…죽었어요.”

바르시가 울먹이며 말했다.

“그분은 죽었어요…. 왕비, 왕비님을 지키려다… 제가, 제가….”

카르낙은 칼을 거두고 이베트를 밀쳐냈다. 현기증이 왔다. 눈앞이 삽시간에 아득해져 그는 머리를 집고 뒤로 주춤 물러섰다.

어디로. 어디로 간 거야. 너를 찾아 이곳까지 왔는데 네가 없다면….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해? 숨이 막히고 귀에서 이명이 들렸다. 사고가 정지해 버렸다. 무엇도 할 수가 없어서 그는 제자리에 서서 비틀거릴 뿐이었다.

자할과 자파가 위태로운 그의 앞을 철옹성처럼 막았고 바닥에 엎어진 이베트는 병사들의 부축을 받아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브리다스는 두려움에 휩싸인 카르낙 발투만을 잠자코 지켜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분은 서쪽으로 갔소.”

“…….”

“당신만이 불길을 끌 수 있다고 생각하시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어. 지금 서두르면 그녀를 붙잡을 수 있을 거요.”

“아버지!”

이베트가 고함쳤다. 아비를 이해할 수 없다.

“어서 저 작자를 붙잡아요! 어서요! 당장 잡아서 죽이란 말이에요!”

더는 인질도 없고 머릿수도 적다. 지금 작정하고 달려들면 분명 놈을 잡아 죽일 수 있다. 개인적인 복수는 차치하고서라도 부친에게도 분명 그는 평생에 걸친 원수였다. 알기어스 왕을 죽이고 그 자리를 차지한 반역자였다. 죽일 이유가 마땅하다. 충분하다. 차고 넘친다.

그런데, 그런 자를 앞에 두고 어째서 알려 주지 않아도 될 이야기를 흘리고 있는가. 당장 붙잡아 그대로 칼을 내리꽂아도 시원치 않을 판에 어째서 그와 거리를 벌리고 원한도 살기도 없이 멍청하게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일까.

이럴 수는 없어. 부친이 나서지 않는다면 저라도 나서야 한다. 그런 생각으로 이베트는 아무 병사의 칼이나 빼앗아 들었다. 무모한 짓이었다. 그러나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아무도 나서 주지 않을 것 같았다.

“안 돼요!”

바르시가 비명을 지르며 이베트의 허리를 껴안았다. 감히! 이베트는 역정을 내며 제 아이를 후려쳤다. 바르시는 악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간신히 아물었던 입가가 다시 터졌다. 피가 질질 세었다.

“감히! 누굴 막아! 투로 놈과 내내 붙어 있더니 놈의 개라도 된 게지! 제 어미가 어떤 일을 당했는데! 어떻게! 어떻게 그걸 잊어! 어떻게 그년과 붙어먹어! 어떻게 내 앞에서!”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너를 낳아 길러 준 것이 누군데, 너를 지금의 그 자리에 있게 해 준 것이 누군데, 너를 왕으로 만들어주려 그토록 애를 썼건만, 네놈은, 어째서 내가 아닌 파니릴리 알기어스를 더 닮아서, 내가 아닌 그 여자를 더 좋아해. 너마저. 너마저 어떻게 내게….

그럴 바엔 차라리 없는 것이 나아. 차라리 아예 없으면 그러면 더는 너를 보며 분노할 일이 없다. 이베트는 칼을 치켜들었다. 분명 아들을 향한 살기였다. 바르시는 바닥에 주저앉아 눈을 껌뻑였다. 브리다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이베트!”

눈 깜짝할 새에 벌어진 일이었다. 생살을 찢고 가르는 소리가 들렸고 핏물이 후드득 튀어 올랐다. 바르시의 얼굴에 핏물이 쏟아졌다. 그때와 같았다. 모웨나에 처음 발투만이 들이닥쳐 제 어미를 죽이라 칼을 쥐du 주던 때처럼 아이는 덜덜 떨며 핏물을 뒤집어썼다.

어미의 것이었다. 그때와 같았다. 어미는 저를 향해 칼을 들었던 모습도 꼭 같았다, 제 얼굴에 쏟아진 것이 어미의 피인 것 또한 같았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어미에 배를 가르고 들어간 것은 제 손에 들린 검이 아니었다. 카르낙 발투만의 것이었다. 제게 드리운 것은 어미의 그림자가 아니요, 발투만의 그림자였다. 그가 말했다.

“네가 죽인 것이 아니다, 바르시.”

“…….”

“네 어미는 내가 죽였다.”

“…….”

그러니 이것은 너의 죄가 아니라고. 자신이 짊어져야 할 죄악이라고. 아이는 떨리는 입술을 질끈 문 채 눈물을 쏟아냈다. 분명 눈앞에서 모친이 쓰러져 가는데 이상하게도 그가 느낀 것은 해방감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모친의 죽음보다 카르낙 발투만이 저를 지켜 주었다는 사실이 크게 와 닿는 것은.

“열어 줘.”

브리다스가 자포자기한 듯 명령했다.

“…그에게, 그에게 길을 열어 줘라.”

그래… 이젠 모든 것을 포기했다. 노인은 머리를 털며 신음했다. 평생에 걸쳐 지켜 왔던 것이 조금씩 균열했다. 믿었던 신념, 정의, 도덕. 종국에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형체조차 기억할 수가 없었다. 무엇이었을까. 내가 지키려던 것. 내가 지켜야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널브러진 제 딸아이의 시체와 연약한 몸을 떨며 울고 있는 제 손주를 몇 번이고 번갈아 바라보았다. 무엇이었든 이제 의미가 없는 일이다. 소망했던 모든 것들은 결국 자신의 손을 빠져나가고 말았으니.

“엘버그를 지키고 싶었다네.”

그는 말했다. 사랑해 마지않던 것들. 선조들에게 물려받아 대대로 지켜왔던 땅, 왕가에 충성함으로써 얻었던 드높았던 긍지와 명예. 다만 그를 지키고 싶었다. 원한 것은 오직 그것 하나였다. 브리다스는 쓰게 웃었다.

“이젠… 내가 무엇을 지키려 했는지조차 모르겠어.”

그러나 엘버그란 더는 과거의 모습이 아니었다. 세상은 그가 믿었던 것처럼 정형되어 있지 않았다. 언제나 그 모습을 유기적으로 바꾸는 거대한 흐름이라는 것을 몰랐다. 어쩌면 애써 무시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채로 다만 자신을 지키기 위해 고집스럽게 신념을 지켰다. 그 신념에 스스로가 매몰되는 줄도 모른 채로. 그러다가 눈을 떠 주변을 돌아보니 모든 것이 어긋나 있었다. 이상이라 믿었던 사내는 더는 예전과 같은 이상을 좇지 않았고 사랑으로 기른 여식은 야욕과 복수에 눈이 멀어 제 속으로 낳은 자식에게조차 칼을 치켜들었다.

모든 것이 미쳐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할 때 유일하게 파니릴리 알기어스만이 정상이었다. 그녀만이 사랑이 있었고 그녀만이 자비로웠으며 그녀만이 자신만이 아닌 모두를 위한 희망을 이야기했다.

브리다스 저조차 보살피지 않은 손주를 찾아가 안아 주며 네가 나의 희망이라 이야기했다. 그때 모든 것이 암담해졌다. 무엇을 지키려 했는지 알 수 없어졌다.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파니릴리 알기어스가 가지고 있는 것이 그가 원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발투만과 함께하며 소중히 지켜 온 것이 브리다스가 바라던 엘버그의 명예와 긍지였던 것이다.

“길을 열어, 어서.”

브리다스가 다시 한번 엄하게 명령했다. 주인의 명령이었다. 기사들은 영문도 모른 채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 길게 문까지 길을 열었다.

“…….”

카르낙이 그를 쳐다보았다. 알 수 없는 묘한 표정. 브리다스는 그 안에 담긴 뜻을 읽고도 남았다.

“알아. 반역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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