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넋을 놓았는지 아니면 종일 생각할 것이 그리 많았는지 멍하게 침대 발치에 앉아만 있는 파니릴리의 옆에 조용히 쟁반이 놓였다. 묽은 수프와 잘게 다진 고기를 넣어 만든 파이가 정갈히 담겨 있었다. 파니릴리는 내용물을 확인하고 고개를 들어 인영을 확인했다.
“고프리.”
어떻게 들어왔는지 묻지도 않았는데 그는 눈치 빠르게 먼저 답했다.
“엘버그인이라면 누구나 전하에 대한 호의를 가지고 있지요.”
“…….”
“심지어 문 앞을 지키는 브리다스의 군인들조차 전하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경박하고 신의가 없는 자. 파니릴리는 그를 그렇게 정의했다. 제 목숨을 한 번 구해 주었다는 것이 이유인가. 모르겠다. 그런 자까지 저에게 친절을 베푸니 이것이 호의인지, 아니면 멸시인지. 아니, 이제 와 어떻든 기실 상관이 없나.
“테르조 경이 지난밤, 전하께 몹쓸 짓을 하려 했다지요. 그것을 말리려던 전하의 친우가 그의 손에 죽었고요.”
“…….”
“모두가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
“제 아내까지 죽인 사내라니 남의 목숨은 파리보다 못하겠지요.”
기회가 있었을 때 그를 죽였어야 했다. 카르낙이었다면 망설임 없이 죽였을 것이다. 그러니 그가 테르조의 목숨을 내게 맡기겠다 하였을 때 그때 곧바로 그를 죽였어야 했다. 인정에 휘둘려 판단력이 흐려졌다. 결국 모든 것이 욕심이었다. 그를 살린 것, 세일린을 그와 결혼시킨 것. 속죄할 길이 없다. 세일린은, 그 여리고 고운 아이는 이미 용서했노라 그렇게 이야기할 것이 뻔하니.
파니릴리는 그녀의 마지막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고통도 원한도 억울함도 없어 보이던 그 표정을. 너는 무엇에서 해방된 거니, 세일린. 나에게서? 아니면 삶에서? 나도, 삶도 너에겐 결국 고통이었을까. 그렇다면 왜 나를 지키려 했어. 이깟 몸뚱이, 죽어 버리면 그만인 것을. 네 목숨과 맞바꿀 만큼 귀한 것도 아닌 것을. 어차피 사그라들 것을.
“고프리.”
“…예.”
“대륙이 불타고 있어요.”
“압니다.”
온갖 곳에서 불이 난다는 것은 그도 잘 알고 있다. 신이 하사한 천재지변 앞에서 인간은 무기력했다.
“곧 브리다스 님의 명으로 롬비의 모든 사제들이 성안으로 몰려올 겁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신께 기도하며 기적을 바라는 것뿐이지요.”
“난 멈출 수 있어요.”
“…예?”
“테이먼은 믿지 않지만 난 불을 끌 수 있어요.”
“…….”
“아마네스가 원하는 건 나예요. 내 목숨이요. 그러니 고프리, 날 내보내 줘요.”
“하지만 저는….”
“날 내보내 주지 않으면 곧 모두 죽을 거예요. 전부 다 불길에 타 버리고 말겠죠. 그때 후회하기엔 늦어요. 나 하나로 모두를 살릴 수 있어요.”
파니릴리는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녀에게 그것은 진실이리라.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고프리에겐 힘이 없었다.
주인으로 섬기는 이베트는 울퍼만큼 욕심이 많았으나 그 작자만큼 멍청하지는 않아서 마음대로 휘두를 수 없었다. 테이먼 테르조는 또 어떤가. 자칫 그의 눈에 띄었다가 무슨 사달이 날지 모를 만큼 저에게 적대적이다. 그리하여 그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제 목숨을 부지하는 것만으로도 현재로선 벅찼다.
“쉬십시오. 식사는 꼭 하십시오.”
고프리는 작게 목례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모웨나의 소식으로 이베트의 심기는 여전히 불편할 것이다. 테이먼은 저를 상대하려 하지 않을 테고 혹 브리다스라면. 그라면 파니릴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그는 몸을 돌려 브리다스의 집무실로 향했다.
브리다스는 마뜩잖아했으나 롬비의 화재에 관련된 이야기라 하니 그를 안으로 들였다. 고프리는 깊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과장된 목소리로 감사를 표했다.
“미천한 놈이 롬비의 주인과 독대를 하게 되어 영광스럽기 그지….”
“본론만 말해라. 고프리.”
고프리는 침을 꿀꺽 삼키고 다시 예를 갖춰 말했다.
“감히 주인님의 시간을 많이 빼앗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꼭 드려야 할 말씀이 있어서 이렇게 뵙기를 청했습니다.”
브리다스는 종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무엇을 쓰고 있는지 그의 주름진 손에는 검은 잉크가 잔뜩 묻어 있었다. 다만 떨리는 손끝이 그가 얼마나 불안하고 초조한지를 알려 줄 뿐이었다.
“파니릴리 알기어스 전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제야 브리다스는 종이에서 눈을 뗐다. 잔뜩 찌푸려진 미간이 생각만 해도 심기가 불편한 듯 보였다. 다른 무수한 이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파니릴리 알기어스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를 적으로 여겨야 할지, 아니면 같은 편으로 여겨야 할지. 그녀를 적대적으로 대해야 할지 아니면, 마음을 다해 극진히 모셔야 할지. 그녀에게 죄를 물어야 할지 아니면 아마네스의 아이로 신성히 받들어야 할지.
그래서 지난밤 테이먼이 한 짓이 더욱 못마땅했다. 제 아내의 앞에서 다른 여인을, 그것도 파니릴리 알기어스를 겁탈하려다 조강지처를 죽이다니. 폭군이었던 알기어스조차 저지른 적이 없는 미친 짓이었다.
그로 인해 파니릴리에게 끔찍한 죄를 지었단 기분이 드는 것이 싫었다. 혹여 성 사람들이 그녀를 동정하여 자칫 성안의 민심이 그녀의 편으로 기울까 걱정되기도 했다, 아름답고 신비한 외형에 타고난 핏줄만으로 그 여자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충분한 힘을 가졌다.
정말이지 골치 아픈 일이다. 테이먼 테르조를 떠올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 아둔한 사내가 아니었는데. 근래에 그가 하는 짓을 보고 있자면 곧게 자라던 나무가 어느 순간부터 비틀려 버린 것 같았다. 아마 더 많은 야욕을 쫓기 때문이리라. 파니릴리 알기어스도 분명 그중 하나겠지. 왕좌뿐 아니라 알기어스라는 트로피 역시 갖고 싶은 것이다.
“알기어스에 대한 이야기라면 내가 아니라 테르조 경과 나눠야 할 거다. 이미 당신의 여자라 생각하시는 것 같으니.”
“그렇기에 브리다스 님에게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것은 그러니까… 롬비의 안위와 관련된 문제라서….”
롬비의 안위? 브리다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건방지게 멀루아에서 온 근본 없는 시정잡배 놈 주제에 그 주인인 내게 롬비의 안위를 논하겠다? 바르시를 구해 온 공을 치하하여 지금껏 성에 살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건만 주제넘은 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
“감히 너 따위가….”
“전하께서 당신이 불을 끌 수 있다 하셨습니다.”
“뭐?” 하고 브리다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멸시와 적대로 가득했던 표정이 일순 의심과 놀라움의 빛으로 뒤바뀌었다.
“어떻게?”
“저도 모릅니다만… 여신께서 원하는 건 당신의 목숨이라 하셨으니…. 유추해 보건대, 화마에 몸을 던지려는 게 아닐까 합니다.”
고프리의 말에 브리다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돼, 알잖아. 테르조 경이 그것을 용납할 리가 없어. 파니릴리 알기어스를 이 성에서 내보내는 것조차 용납하지 못할 거네.”
“테르조 경이야 이곳이 제 영지가 아니니 그저 화마를 피해 안위만 챙기면 그만이시겠지요. 하지만 브리다스 님께는 다르지 않습니까. 파니릴리 알기어스는 거짓말을 하는 여자가 아닙니다. 그것만은 제가 장담할 수 있습니다.”
브리다스는 제 입술을 사리물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다. 사제들을 본성으로 불러 모으는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 뭐라도 좋다. 이 재앙을 비껴갈 수만 있다면. 테이먼 테르조만 아니었다면 망설일 필요도 없다. 기꺼운 마음으로 그녀를 불에 던졌을 것이다.
“안 돼.”
그러나 브리다스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한번 부정했다.
“난 이미 테르조 경을 거역했었다. 만일 한 번 더 그랬다간….”
영지가 불타는 거나 마찬가지다. 처형당하는 것은 물론 토지와 작위도 빼앗길 것이다. 어느 쪽이라도 끔찍했다.
“왜 그분에게 쩔쩔매십니까? 이곳은 브리다스 님의 영지이고, 이곳의 모든 기사와 종들은 모두 브리다스 님의 것입니다. 그에 반해 테이먼 테르조 경은 오직 건강한 육신 하나만 지니고 계시는데요.”
브리다스는 눈을 부릅떴다. 그를 호되게 질책하려 하였으나 마음 한편이 걸렸다. 그의 말도 일리가 있단 생각이 그를 붙잡은 것이다. 그는 머리를 흔들어 생각을 떨쳐 내려 했다.
“우린 대대로 왕을 위해 헌신해 온 가문이야. 그 충절로 이 자리까지 왔어! 감히, 고프리 네놈이 한 말은 우리 브리다스 가문에 오명을 씌우는….”
“상왕이 되실 수도 있습니다.”
고프리가 그의 말을 자르고 반박했다. 브리다스의 핀잔은 다시 소강되었다.
“왕에게 헌신하는 귀족가가 아닌, 왕가 그 자체가 되실 수도 있단 말씀입니다.”
“…….”
“알기어스가 없고, 테르조가 없다면 과연 엘버그의 왕좌는 누가 차지해야 마땅할는지요,”
그러나 브리다스는 답하지 않았다. 대신 다시 책상 위에 머리를 처박고 서걱, 서걱 깃털의 끝에 잉크를 묻혀 무언가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고프리는 아주 잠시 그곳에 더 서 있다가 곧 방을 나왔다. 답하지 않아도 뜻을 알고 있다. 늙은이에게도 분명 야욕이 있었다. 전통과 미덕이란 것을 들먹이며 짓누르려 할 뿐이지만.
브리다스는 고프리가 다녀간 이후 결국 펜을 내려놓았다. 뜨거운 공기에 질식할 것만 같아 연거푸 포도주를 들이켰다. 쓰고 달큼한 것이 쉼 없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도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는 결국 테이먼을 찾았다. 성에서 가장 크고 화려하며 좋은 방을 그에게 내어 주었다. 연회소의 가장 상석도 그의 차지였다. 고프리의 말처럼 이 성의 주인은 자신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테이먼의 것이 되었다. 적어도 테이먼 테르조는 그렇게 여기고 있었다. 엘버그의 모든 땅이 자신의 것이라고.
그는 알기어스의 광증을 떠올렸다. 왕이 미쳐 버렸을 때에도 우린 그를 배반한 일이 없다. 테이먼 테르조를 배반했던 것도 그가 죽었으리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가문의 긍지가 있어. 우리에겐 가문의 명예란 것이 있어. 우린 주군을 배반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가 가진 돈이 필요했다. 만일 롬비가 잿더미가 된다면, 그 잿더미 아래에서 다시 도시를 일으킬 자금은 반드시 필요했다.
“파니릴리 알기어스가 불길을 멈출 수 있단 것이 사실입니까?”
느닷없이 찾아가 묻자 테이먼은 손에 쥔 포도알을 장난스레 허공에 던져 입으로 받아먹으며 그의 태도를 가늠했다.
“어디서 들었지? 그런 말은?”
“…시종에게 들었습니다. 파니릴리 알기어스가 그런 말을 했다더군요.”
“헛소리야.”
“…하지만 듣기로 파니릴리 알기어스는 한 번도….”
“이 세상에 재앙을 다스릴 수 있는 자가 있다면 그건 바로 나야. 브리다스.”
어조가 엄격했다. 신념인 건지 아집인 건지 모를 태도였다. 테이먼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지금 내게 의구심을 품는 건가? 내 존재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