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작금의 상황이….”
“그래서 서둘러 성전으로 향하려는 것이 아닌가. 이 비극을 끝내려거든 내가 성전에 가 다시 한번 여신의 빛과 조우하는 수밖에 없어.”
“…….”
“상황이 이런데 쓸데없이 사제를 불러 제를 지내겠다니.”
쯧, 하고 혀를 찼다. 브리다스는 그를 향해 인상을 구기지 않으려 무던히 애썼다.
“재앙이 덮쳐 오는 것을 그저 두고 볼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영지민들도 불안해하니 달래 줄 겸….”
“쓸모없는 짓이야.”
“…….”
“무지렁이 같은 목숨들 아닌가. 신이 나를 살리셨듯, 그들도 죽어 마땅한 거야.”
브리다스는 할 말을 잃었다. 소름이 끼쳤다. 본디 이런 자였던가. 왕이 되려는 자가 사람에 대한 애정은 고사하고 가엾게 여기는 마음조차 없단 말인가.
바르시는 이렇지 않다. 이베트는 그저 제 잘난 맛에 자라 제 것만 챙긴다지만 그 아들인 바르시는 다르다. 아직 무르고 약하나 녀석은 기본적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진중하고 애틋하게 대한다. 그 인간다운 감정은 아마도, 그래. 아마도 카르낙 발투만에게 사로잡혀 있을 때 배운 것 같았다. 근위대 기사의 종자로 진창을 구르며 배운 것이다.
“브리다스 님! 브리다스 님!”
방 안으로 병사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브리다스는 정신을 차리고 그를 돌아보았다. 새파랗게 질린 채 그는 허공을 쿡쿡 찔러 가리켰다. 서쪽이었다.
“부, 불길이!”
그는 숨을 고르느라 뒷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나 누구나 쉽게 예감할 수 있었다. 브리다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어디야! 어디에!”
“서, 서쪽 광산입니다! 서쪽 산등선 너머에서! 불길이 치솟습니다!!”
브리다스와 테이먼은 서둘러 창가로 다가갔다. 산등성이는 아직 고요했다. 다만 저 멀리에서 붉은 핏빛이 공기를 물들이고 있었다. 시커먼 연기를 내뿜으며 거대한 화마는 조용히 숨 고르기를 하는 듯했다. 숨이 막힐 정도로 무서워 브리다스는 하마터면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벌써, 벌써 이곳까지. 기어이 저 높은 산맥을 넘어 이곳까지. 새까만 연기 때문인지, 아니면 저 붉은 빛에 눈이 멀어 사방이 어두운 것인지 평소보다도 하늘은 더 어두침침한 색을 띠고 있었다. 테이먼은 멍하니 창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러고는 곧 희열에 차 말했다.
“봐, 브리다스. 봐라!”
테이먼의 말을 따라 브리다스도 창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툭. 투툭. 손등을 때리는 차가운 감촉.
“비야. 비다.”
“…….”
브리다스는 테이먼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콰광, 하고 천둥이 쳤다. 새까만 먹구름이 집요하게 모여들었다. 곧 우지끈 번개가 치고 거센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테이먼은 하하하하하,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봐! 보라고! 아마네스 여신이 누구를 택했는지!”
바로 나다. 나야! 아마네스 여신이 택한 자는 바로 나, 테이먼 테르조다! 전능해진 것 같았다. 아마네스 여신을 등에 업으니 곧 그 자신이 아마네스가 된 것 같았다.
“…하지만… 하지만 테르조 님….”
그러나 그도 잠시였다. 한동안 멍한 눈으로 불길을 바라보던 브리다스는 얼떨떨한 얼굴로 다시 서쪽 능선을 가리켰다.
“불길이… 잦아들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비바람에 더 거세지고 있었다. 멀리서 펑, 하고 무언가가 불길을 이기지 못하고 터졌다. 그 위용에 브리다스는 신음을 내며 주춤 뒤로 물러섰다. 테이먼도 마찬가지였다.
“…보내야 합니다….”
브리다스가 넋이 나가 중얼거렸다. 두려움에 오금이 저렸다.
“알기어스를, 그녀를 보내야 해요.”
아니야, 그 여자를 보낸다 해도 아무 소용 없어. 테이먼은 브리다스의 말을 부정했다. 그 여자가 불길을 멎게 할 리가 없어. 절대로.
하지만… 하지만, 만약 정말로 파니릴리 알기어스의 목숨으로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렇다면 자신은 틀린 것이 된다. 테이먼은 두려웠다.
그는 언제나 옳아야 했다. 자신이 말하는 대로 이루어지고, 그 어떤 경우에도 모든 것은 그의 의지대로 행해지고, 그의 뜻대로 이루어지며, 오직 자신만이 아마네스 여신이 선택한 절대적인 선이어야 했다. 그러니 선택할 수 없다. 파니릴리를 보내느냐, 아니면 보내지 않느냐. 어느 쪽이라도 오답이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테이먼은 입을 다물었고, 브리다스는 그의 답을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이제는 화마가 롬비를 집어삼키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자신과 혈육의 생명이 달린 문제였다. 브리다스는 비틀거리며 문을 박차고 나가 곧장 파니릴리에게로 향했다. 마침 불길에 혼비백산하여 달려오던 이베트가 영문도 모른 채 제 아비의 뒤를 쫓았다.
문 앞에 당도하기도 전에 문을 열라고 소리치고는 그는 숨조차 고르지 않고 물었다.
“정말 불길을 꺼뜨릴 수 있겠습니까?”
“가야만 해요.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이에요.”
“…….”
이베트는 아비의 뒤에서 영문도 모른 채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말을 준비해. 파니릴리 님을 성 밖으로 내보내라.”
“아버지!”
시종에게 명하는 브리다스를 보며 이베트가 비명을 질렀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어느새 달려온 고프리가 그녀를 만류했다.
“이베트 님, 그녀를 보내야 합니다.”
“저 여자를 왜! 그것도 사지 멀쩡히 목숨 붙여 내놓겠다고? 누구 좋으라고? 테르조 경이 가만히 있을 것 같아?”
테르조와는 상관없다. 저 여자를 저렇게 온전히 풀어 준다는 것을 납득할 수 없었다. 고프리는 조용히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어차피 죽은 목숨입니다. 보내십시오.”
“그렇다손 치더라도 사지 멀쩡히는 안 돼!”
“이베트 님.”
“목숨만 붙어 있어도 상관없다면 사지라도 자르라고요!”
아니면 눈이라도 도려내든가, 혀라도 뽑든가. 카르낙 발투만이 저에게 했던 것처럼 고통스럽게 유린당해야만 한다. 산송장으로라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분이 풀릴 것 같았다. 그래야 복수다운 복수를 했다 자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길길이 날뛰는 이베트를 향해 파니릴리는 고요히 답했다.
“마음대로 해요.”
두려움도 망설임도 없어 보였다. 진실로 자신의 사지가 잘리든 눈알이 뽑히건 상관없는 듯 모든 것에 초연했다. 정말로 죽으려는 것이었다. 그 태도 때문이었다. 그 태도 때문에 역설적으로 브리다스는 그녀에게 흠집을 낼 수 없었다.
“여신께 바치는 제물이다. 흠집을 낼 수는 없지.”
브리다스는 그렇게 결론 내렸다. 신의 제물이라 하니 이베트도 더는 억지를 부릴 수 없었다. 다만 제 어금니를 사리물며 분에 치를 떨 뿐이었다.
바르시 방의 창은 동쪽으로 나 있었다. 하늘의 먹구름, 세차게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를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끔뻑거리며 보았다. 사람들이 뛰어다니며 고함치는 소리가 연신 들려왔다. 또 무슨 난리가 난 것일까 굳게 닫힌 문을 주시하고 있으니 곧 벌컥, 문이 열렸다. 바르시는 몸을 움츠리며 침대 깊이 몸을 숨겼다. 아직 분이 덜 풀린 모친이 들어와 다시 악다구니를 쓸까 잔뜩 겁을 먹은 채였다.
“구스.”
그러나, 방 안에 들어온 이는 모친과는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바르시는 벌떡 몸을 일으켜 인영을 확인했다. 혹 자신이 바람이 만들어 낸 환영은 아닐까. 쉽사리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가와 제 얼굴을 만지는 이는 분명 파니릴리였다. 다정한 손길에 눈물이 왈칵 나왔다. 뒤따라 들어오는 조부의 굳은 얼굴은 미처 담지도 못했다.
“…누가 이런 거야?”
“…어머니… 어머니가….”
“…….”
파니릴리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아이의 뺨과 눈에는 실핏줄이 터져 있었고, 볼은 사탕이라도 문 것처럼 잔뜩 부어오른 채였다. 엉망인 것은 비단 얼굴뿐이 아니었다. 아이의 팔과 다리에도 멍들고 터진 자국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포로로 잡혀 종자 노릇을 할 때에도 당하지 않았을 처참한 구타. 구스는 울음을 터트렸다. 이제야 열 살배기 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죄송해요, 왕비님. 저는… 저는 왕비님이 아프실까 봐 그랬어요. 테이먼 님이 또, 또 전하를 아프게 할까 봐… 그래서…. 설마, 설마 그럴 줄 몰랐어요. 그렇게, 그렇게 세일린 님을 그렇게….”
바르시로서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결과였다. 좋아서 함께 있고 싶었고, 좋아서 다치지 않길 바랐다. 그저 좋아서 한 모든 행동들이 늘 최악의 결과만을 가져왔다. 아이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늘 비극으로 끝나는 선택을 하는 자신이 싫었다. 겁이 났다.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아플 만하다고. 그래도 싼 존재라고. 어머니의 호된 매질도, 원망 섞인 욕설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저의 운명이라고.
“네 잘못이 아니야.”
“하지만 저 때문에….”
“구스, 넌 좋은 주인이 될 거야.”
파니릴리는 아이의 금빛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이는 눈을 깜빡였다. 그럴 때마다 무구한 눈물이 구슬처럼 뺨을 굴렀다.
“넌 네 아비와도, 어미와도, 조부와도 다를 거야.”
“…….”
“약속해, 구스.”
새끼손가락을 내밀어 아이의 손에 갈고리처럼 걸었다.
“자비롭고 현명한 통치자가 되겠다고.”
“…….”
바르시는 그녀의 말을 선뜻 이해할 수 없었다. 난 통치자가 될 수 없어요, 왕비님. 난 자격을 갖추지 못했는걸요. 어느 누구도 나 같은 아이에게 그런 큰일을 맡기지 않을 거예요. 난 멍청하고 늘 잘못만 저지르는걸요.
“구스. 내가…. 내가 희망을 걸 수 있는 건 너뿐이야.”
모두가 사라졌다. 카르낙도, 세일린도, 에이가도, 핀도, 루이스도, 로로도. 아끼던 모든 이들이 불꽃이 되어 발화했다. 대의를 위한 명분이 아니라 작고 이기적인 명분이 필요했다. 가령 너 같은. 삶이 무한히 지속되어야 마땅할 가치 같은 것. 그러니까 희망 같은 것. 세상은 아직 살 만하다는 증거 같은 것.
“그러니 약속해. 구스. 언제나, 무엇이든 사랑하겠다고.”
“…….”
호소하는 얼굴이 애처롭고 절박하여 바르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그럴게요, 왕비님.”
파니릴리는 안도했다. 그녀는 생채기가 가득한 바르시의 몸을 꼭 안았다.
“잊지 마, 구스. 넌 내가 본 중 가장 따듯하고 착한 아이야.”
“…….”
“절대로, 절대로 그걸 잊으면 안 돼. 네가 내게 얼마나 좋은 친구였는지, 얼마나 나를 행복하게 해 줬는지 절대로 잊으면 안 돼.”
바르시에게 그것은 꼭 주문처럼 들렸다. 잊지 말라는 말은 그러니까 꼭 그 말 이외에는 모든 것을 잊으라는 말 같았다. 아픔도. 괴로움도. 고통도. 모친에 대한 원망이나 죄책감도.
어째서 왕비님의 품은 이토록 따듯할까. 왜 그녀가 주는 사랑은 어머니의 것보다 더 크고 깊고 더 심장에 가까울까. 바르시는 그녀의 옷자락을 꼭 말아 쥐었다. 눈을 꼭 감고 아이는 간절히 바랐다. 왕비님이 자신의 엄마였으면 좋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