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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218화 (218/231)

218화

화재를 피해 도망 온 접경 지역 마을 사람들이 롬비로 몰려온 것은 캘던의 화재가 있고 난 사흘 뒤부터였다. 이미 불에 집과 땅을 잃은 이도 있었고, 화마가 두려워 집과 땅을 미리 버리고 온 이도 있었다.

오막이란 사제는 전자에 속했다. 그는 식솔 셋과 건장한 노예 셋을 데리고 도시에 입성하였고, 롬비의 2교구는 그의 딱한 사정을 전해 들은 후 기꺼이 그들을 자신의 사저로 모셔 극진히 대접하였다.

“참으로 아름다운 마을이었는데….”

2교구의 사제 크리벳이 정찬 앞에 놓인 포도주 잔을 들며 혀를 찼다. 오막은 빵을 잘게 찢으며 그저 웃었다. 설마 그토록 순식간에, 그리도 허무하게, 자신이 평생 헌신할 거라 여겼던 마을과 교구가 사라질 줄은 그 역시 꿈에도 몰랐다.

“이게 다 그놈 때문이오.”

크리벳은 혐오스러운 것을 떠올렸는지 인상을 찡그렸다.

“그 투로 놈 때문에 아마네스 여신께서 노하신 게 틀림없어.”

그의 말에 오막은 몸을 움츠리며 주변을 살폈다. 노예로 위장하였으니 감히 식당에는 발을 들일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혹여나, 왕이 나타나 그 장검을 휘두르는 것은 아닐까 덜컥 겁이 났다.

크리벳은 상상도 못 하겠지. 자신이 욕하고 있는 자가 실은, 제집 어느 구석에 처박혀 이를 갈고 있다는 것을.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언성을 높였다.

“캘던이 불탄 것을 보라고. 선대왕이 계실 때까지는 그토록 번성했던 엘버그의 수도가, 투로가 왕좌를 차지한 지 단 3년 만에 잿더미가 되었어. 이것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냔 말이야.”

“그, 그래도 롬비는 이토록 평화롭지 않습니까? 아마네스 님이 아주 사랑하시는 땅이 틀림없어요,”

오만이 화제를 돌리자 크리벳은 자부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크게 웃었다.

“당연하지! 롬비만큼 아마네스 님의 유산을 아끼고 사랑하는 땅이 없네, 우린 늘 그분께 헌신하고, 그분이 남기신 족적을 따르려 노력하지. 게다가….”

크리벳이 몸을 낮추고 속삭였다.

“본성에 파니릴리 님이 계시네.”

“…예?”

오막이 의아하여 되물었다. 누가 있다고?

“파니릴리 알기어스. 알기어스 왕의 마지막 혈육 말이야.”

“왕비 전하가….”

“그래. 그분….”

아. 그랬구나. 그래서 왕이, 그 사람이 롬비로 숨어들었구나.

“이 역시 아마네스 님의 뜻이 아니고 뭐겠어? 투로 놈을 캘던과 함께 불사르고 테르조 경과 당신의 딸을 이 땅에 보낸 이유는 너무나 뻔하지 않은가. 투로의 씨를 말리고 그 흔적을 모두 없앤 뒤 바로 이 롬비의 땅 위에서 새로운 엘버그의 역사를 만들라는 계시가 아니겠는가.”

테이먼 테르조라는 이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다. 아무리 정세와 동떨어진 외딴 마을에 살고 있다 하여도 왕가의 몰락과 투로의 반란 그리고 그와 적대적인 세력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더 힘드니.

“…하지만, 제가 알기로 테이먼 테르조는 발투만 왕에게 패한 뒤 캘던성에 갇혀 있다고….”

“아니. 그분은 롬비에 와 계시네. 알기어스까지 데리고 캘던을 탈출해 롬비 본성에 계시지. 모르겠는가? 오막? 이 미련한 친구여. 테르조 경의 뒤엔 에나님이 계셔.”

“…….”

“그분께서는 막대한 권한과 자본으로 테르조 경의 뒤를 물심양면 돕고 계시지.”

“…하지만 크리벳 님. 사제는 어떠한 경우에도 정쟁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아니. 아니야. 오막.”

크리벳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히 부정했다. 빈 와인 잔에 시종이 포도주를 채웠다.

“우리는 신의 제자들이네. 이것은 정쟁이 아니야. 불의를 향해 투쟁하는 것은 신을 따르는 그녀의 제자로서 당연한 일이네. 이것은 시대의 소명이야. 우린 반드시 따라야 해.”

“…하지만….”

하지만 크리벳, 투로는 죽지 않았어요. 그는 살아 있단 말입니다. 아마네스 여신이 정말로 투로를 벌하려는 것이었다면 어째서, 발투만 왕은 죽지 않고 멀쩡히 살아 이곳에 와 있단 말인가. 그것은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다. 오막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을 반박하고 또 의문을 제기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다.

“크리벳 님….”

그러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운을 뗐는데 갑작스레 밖이 소란하였다. 쿵, 쿵, 단단한 양 문이 몇 번이고 무언가에 부딪혀 격렬한 소리를 내다가 우지끈하고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크리벳이 위험을 감지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찰나 벌컥, 문이 열리고 바닥으로 어두운 그림자가 길게 드리웠다. 오막이 멍하게 중얼거렸다.

“…투… 투로….”

스르릉, 차가운 돌바닥에 날카로운 쇠붙이가 끌려가는 소리. 뚜벅, 뚜벅 둔중하고 느린 발소리. 크리벳은 비죽, 샌들 밖으로 비어져 나온 발가락부터 툭 튀어나온 복숭아뼈, 불거져 있는 정강이뼈와 종마의 것처럼 단단해 보이는 허벅지를 차례로 훑어 올라가 엘버그인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크고 굵고 기다란 육체. 붉은 노을빛 아래에 초콜릿처럼 매끄럽게 빛나는 피부를 보았다.

제집의 경비병들의 것이 틀림없는 핏물을 잔뜩 묻힌 채, 저를 노려보는 달빛처럼 시린 라일락 빛 눈동자.

“바… 발투만….”

그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세상에 그 눈동자를 가진 이는 딱 하나뿐이라고 하였다. 붉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파랗고. 파랗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붉은 그 눈동자를 한 이는 오로지, 오로지 카르낙 발투만뿐이라고 말이다.

“어, 어떻게… 다… 당신이 어떻게….”

그가 어떻게 내 집에 있는가. 나는 그를 집 안으로 들인 적이 없다. 집의 높은 돌벽을 대체 어떻게… 그러다가 생각이 났다. 오막이 데려온 노예 셋. 잿빛 망토를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쓴 채 커다란 짐을 옮기던 그 건장한 사내들. 크레벳은 고개를 돌려 오막을 보았다. 한일자로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그의 얼굴이 잿빛이었다. 크레벳은 분노했다.

“어떻게 당신이! 당신이 어떻게 내게 이럴 수가!”

나는 선의를 베풀어 너를 내 집으로 들였건만, 신을 따르는 그녀의 추종자가 어떻게 투로 놈과 작당을 하고 나를 속일 수가 있는가. 배신감에 치를 떠는데 목젖에 날카로운 것이 닿았다. 선득한 핏물이 줄줄 흐르는 장검의 칼끝이었다.

카르낙은 느리게 제 눈가에 묻은 핏물을 닦아 냈다. 사람을 베는 데 익숙하다 못해 이골이 난 모습이었다. 어느새 식당의 문 앞으로 무장을 한 경비병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들은 각자의 창과 칼을 겨눈 채 잔뜩 약이 오른 모습이었다.

“물려라.”

“…….”

“전부.”

“…….”

카르낙이 더 힘주어 칼끝을 눌렀다. 크리벳은 움찔 떨며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그럼에도 마치 풀로 붙여 놓은 듯 목젖에 붙은 칼끝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는 침을 삼키려다가 그대로 목이 꿰뚫릴 것 같아 그만두었다. 입가로 주르륵, 침이 흘렀다.

“물려.”

카르낙이 한 번 더 말했다. 살기가 가득한 눈동자에 기이한 빛이 일었다. 끔찍했다. 크리벳은 경비대를 향해 손을 들었고 주인의 뜻을 알아들은 이들이 뒷걸음질 쳐 식당 밖으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때를 기다린 자할과 자파가 문을 닫았다. 카르낙은 검을 거두지 않은 채 식탁 위에 차려진 와인 잔을 집어 들었다. 방금 시종이 따른 차갑고 신선한 포도주를 그는 단번에 들이켠 후 말했다,

“앉아. 크리벳. 너에게 부탁할 것이 있으니.”

부탁이라니. 그 말에 크리벳은 평소처럼 실소하지도 못했다. 비정한 투로가 쓰기엔 너무 고상한 단어였다.

***

아침부터 성안으로 비보가 날아들었다. 모웨나가 불탔다는 소식에 이베트는 발작을 하듯 비명부터 질러 댔다.

“그럴 리 없어! 모웨나는 항구 도시야! 바다가 인접해 있는데 어떻게, 어떻게 도시가 불탈 수 있어! 그럴 리 없어!! 강과 호수가 도처에 깔려 있는 도시인데, 그럴 리가 없어!!”

브리다스는 비명을 지르는 딸아이를 착잡한 얼굴로 바라보며 서신을 구겼다, 낭패였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있다. 땅도. 사람도. 대체 이놈의 불길은 어디까지 엘버그의 땅을 집어삼키려는가. 엘버그의 왕좌가 문제가 아니었다. 다스릴 땅과 사람이 없다면 왕관도 무의미했다. 대체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지 회의감이 들 정도다.

“모웨나까지 화마가 닿았다면 롬비도 무사하진 못하겠군.”

테이먼이 상석에 앉아 손잡이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는 곧바로 생각에 잠겼다. 정말로 이 불길은 잦아들지 않는 건가? 파니릴리의 말처럼? 그녀가 아니라면 누구도 불길을 꺼뜨리지 못한다는 말이 정말로 사실일까?

브리다스의 말을 무시할 수 없다. 모웨나까지 소실되었다면 정말로 롬비도 코앞이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사시사철 다른 곳보다 더운 롬비이지만 근래에 부는 바람은 평소와도 좀 달랐다. 단지 더운 정도가 아니라 숨이 턱턱 막힐 만큼 건조했다.

브리다스가 말했다.

“모웨나를 잃었는데 이곳까지 잃을 순 없습니다. 테르조 님. 이곳은 우리 브리다스 가문의 뿌리이자 저의 근본입니다.”

그는 이곳을 버릴 수 없었다. 이 땅은 그의 모든 것이었다. 땅이 없으면 그는 더 이상 영주일 수 없었고, 영주가 아닌 그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무의미한 삶이다. 아니 사는 것 자체가 죄악일 수도 있었다. 그는 손자를 떠올렸다. 바르시. 마땅히 가져야 할 땅을 잃어버린 가엾은 녀석.

파니릴리 알기어스를 도왔다는 이유로 끔찍한 매질을 당했다. 물론 알고 있다. 이베트로서는 본인이 먼저 선수 쳐 아이를 엄벌하는 것만이 테르조의 분노에서 아들을 지키는 길이었으리라.

그것이 모정에서 비롯된 행동이 아니었음은 잘 안다. 이베트에게 바르시는 자신의 명줄이었다. 가문의 장자가 있어야만 그 역시 코르넬리오가의 안주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으니 어떤 식으로든 아이의 숨은 붙여 놓아야 했다.

이베트는 아이의 헌신을 원했다. 어미가 자식에게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자식이 자신을 위해 목숨을 내놓고 헌신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브리다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시 재가를 해 아들을 보지 않는 한, 그에게도 유일한 피붙이는 이베트와 바르시뿐이었다. 그들도 필요했고 또, 이 땅도 지켜야 했다.

“무슨 수로?”

테이먼이 물었다.

“번지는 불길 아래 무슨 수로 이 땅을 지킬 수 있어?”

“…….”

사람의 힘으로는 그 거대한 화염을 꺼뜨릴 수 없다. 오직 신만이, 신이 허락한 빗줄기만이 그것을 소멸할 수 있다. 그러니 지키고자 하는 열망만으로, 버릴 수 없다 부정하는 고집만으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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