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뭐?”
세바스탠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세일린에게 되물었다. 그녀는 바짝 긴장한 채 분명히 답했다.
“떠날 준비를 하세요. 은밀하게. 폐하의 명령이세요.”
오늘 아침 일찍 이재민들은 근위대의 호위 아래 캘던성을 빠져나갔다. 그러니 그와 관련된 일은 아닐 터.
“바다를 건널 거예요. 비 전하와 함께.”
“…….”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 바다를 건넌다고?
“어디로?”
“카스티 제도로요.”
“…….”
“당신 역시 전하께서 아끼시는 분이니… 폐하께서는 누구든, 비 전하가 아끼시는 분이라면 동행토록 하라 하셨어요.”
스탠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건… 마치 나라를 버리고 도주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
세일린은 답하지 않았다. 그의 말은 진실이었으니.
“비 전하께서는 이 일을 아시나? 아니. 알고 계십니까?”
이제 세일린은 테이먼가의 안주인. 더는 시녀를 대하듯 그녀를 대할 수 없어 스탠은 말미를 고쳐 물었다. 그러자 세일린은 어색하게 고개를 저었다. 파니릴리는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비 전하도 모르게 그분을 데리고 이곳을 떠난단 말이에요?”
그렇게 묻자 이번엔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적 여유가 그렇게 많지 않아요.”
“나 말고 또 누가 동행해요? 스승님도 같이 가십니까?”
“…네. 누구든 전하께 필요한 분이라면….”
“무슨 일이 있는 건데요? 아무 이유 없이 비 전하를 카스티 제도로 도주시킬 리는 없잖아요.”
“…전 몰라요. 전 그냥 폐하의 명대로 할 뿐이에요. 전하의 귀중품은 제가 은밀히 챙겨 두었어요. 그 분이 시키신 대로요. 그러니 세바스탠, 당신도 필요한 귀중품을 미리 챙겨 놓도록 해요. 가져갈 수 있는 짐이 그리 많지는 않으니 신중하게 챙겨요.”
“…그럼 당신의 남편은?”
“…….”
내내 바닥으로 향해 있던 세일린의 눈이 그의 시선과 맞닿았다. 세일린은 식을 올린 이후 내내 어두운 낯빛을 하고 있었다.
듣기로 테이먼은 남편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 들었다. 단둘이 있을 때야 어떤지 몰라도 남들이 보기에 그는 자신의 아내를 정중하고도 다정하게 대했다. 그런 테이먼의 배려에 목석처럼 구는 이는 오히려 세일린이었다. 인질은 테이먼이고 그의 감시인은 세일린일 텐데 어쩐지 입장이 바뀐 듯이 말이다.
“그도… 함께… 갈 거예요. 폐하의 명이시니….”
카르낙 발투만 없이 파니릴리를 홀로, 그것도 테이먼 테르조와 함께 보낸다. 이건 대체 누굴 원망해야 하나. 카르낙 발투만인가, 아니면 앞으로의 처지도 모르고 총애하는 시녀와 혼인을 시킨 파니릴리 발투만인가.
“…네 인생도 참….”
세바스탠은 혀를 찼다. 인생이 매듭과도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얼마가 꼬여 있든 공을 들이면 풀 수 있는 것이라면 말이다.
카르낙은 아까부터 분주하게 성안을 돌아다녔다.
“이봐.”
그는 지나가는 시녀 누구나 붙잡고 물었다.
“릴리 못 봤어?”
“아… 예, 폐하. 저는….”
시녀가 고개를 저으며 더듬거리자 그는 뒷말을 듣지 않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멀리 회랑에서 에이가가 보였다.
“에이가!”
그는 종종걸음으로 다가가 물었다.
“릴리 못 봤어?”
“…침실에 안 계신가요?”
“없어. 정원에도 없고.”
“못 뵈었어요. 저는 예배당에서 돌아오는 길이라…. 대장간에 계신 것 아닐까요? 세일린이 그곳에 있단 이야기는 들었으니…. 함께 계시지 않을까 하는데.”
“숨바꼭질도 아니고 원….”
카르낙이 투덜거렸다. 에이가는 그런 그를 보며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요새 부쩍 전하 꽁무니만 쫓아다니시네요.”
“…….”
사실이었기에 별다른 반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네가 내 마음을 어떻게 알겠느냐, 그런 생각뿐. 그는 말꼬리를 돌렸다.
“에이가야말로 요새 부쩍 예배당 출입이 잦군. 게드릭이랑 무슨 작당인 거야?”
그녀는 낯빛을 구겼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진저리가 난다는 표정이었다.
“걸핏하면 부르세요. 캘던성 안의 일이라면 하나도 빠짐없이 아셔야 하는 모양이에요. 바닥에 떨어진 먼지 한 톨에 대해서도요.”
“누가 보면 그치가 왕인 줄 알겠군.”
“왕의 고문이시니…. 별도리가 있나요. 저야 성심껏 도와드릴 수밖에요.”
“…….”
“어쩔 생각은 마세요.”
“내가 뭘?”
에이가가 왕을 흘겨보았다. 뭘 어쩐다니.
“전적이 있으시잖습니까.”
“내 코털 하나라도 건들지만 않으면 돼. 그나저나 안됐군. 게드릭에게 제의실을 빼앗겨서.”
머리가 복잡해지면 늘 그곳에 숨어들어 안정을 취하곤 하던 에이가였다. 모르겠다. 분명 지금의 예배당이 그녀가 꿈꾸던 본래의 모습일 텐데. 과연 지금도 그녀가 바라는 일인지는.
에이가는 미간을 찌푸리며 손부채질을 했다. 그러고 보니 안색이 별로 좋지 못했다. 상태를 살피는 듯 카르낙이 그녀를 위아래로 훑자 에이가가 말했다.
“근래에 날씨가 유독 더워서 그래요.”
“옷을 좀 덜 껴입어.”
“…….”
“머리쓰개도 좀 벗고. 언제까지 그러고 다닐 건데? 엘버그 땅을 벗어나서도 그러고 살 생각이야?”
고집스레 침묵하던 에이가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눈을 굴리며 되물었다.
“제가 엘버그 땅을 벗어날 일이 뭐가 있어요. 그냥 지금까지 살아온 듯 앞으로도 계속 살 거예요. 늙은이한테는 그게 편해요.”
“글쎄.”
카르낙은 혀를 차며 뒷말을 아꼈다. 머지않아 그녀는 파니릴리처럼 영문도 모른 채 엘버그를 떠나는 배편에 오르게 될 것이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대륙과는 닿을 수 없을 만큼 멀어진 때이리라.
그때가 되면 그녀는 자신을 원망할까. 죽더라도 자신이 살던 땅에서 죽게 내버려 두었어야 한다며.
“난 당신이 좀 불편하더라도 오랫동안 건강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에이가.”
“…….”
에이가가 눈을 홉떠 그를 흘겨보았다. 수상쩍다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왜요? 또 늙은이를 놀리지 못해 그러시죠?”
카르낙은 그저 웃어 보였다. 좋은 왕 같은 것은 되지 못한다. 파니릴리만큼 사랑과 자비가 넘치지도 못하고 에이가처럼 엘버그의 문화와 역사를 사랑하지도 못한다. 다만 아끼는 이들만은 행복했으면 좋겠노라고. 그들만은 불행의 그늘에서 멀어져 그저 평안하게 살아갔으면 좋겠노라고. 그가 가질 수 있는 자비와 사랑이란 겨우 그 정도뿐이었다.
에이가와 짧은 담소를 나눈 뒤 카르낙은 대장간으로 향했다. 에이가의 말대로 그곳에라면 파니릴리가 있겠지 했는데 세바스탠과 스코크 모두 입을 모아 세일린은 보았어도 파니릴리는 보지 못했다 답했다.
그러고 나니 어쩐지 불안한 마음에 속이 울렁거렸다. 정원에도, 침실에도. 살롱에도, 안뜰에도. 회랑에도, 대장간에도 예배당에도 없다면, 대체 그녀는 어디에 있는 걸까. 복도를 지나 카르낙은 막사로 향했다. 그곳에 없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하여 왔던 길을 되짚어 가던 중이었다.
노라는 세일린을 도와 왕비의 옷가지와 귀중품을 날랐다. 틈이 날 때마다 조금씩, 은밀하게 치마폭에 감추어 막사로 날랐다. 그러면 루이스나 핀이 나오거나 그의 명령을 받은 근위대병이 나와 조용히 그것을 받아 가곤 했다. 대부분의 일이 밤중에 이루어지곤 했으나 최근에 들어서는 밤낮을 가리지 않게 되었다. 서둘러야 한다며 세일린이 조바심을 낸 까닭이었다.
“귀중품은 이게 답니까?”
루이스가 작은 봇짐을 받아 들며 물었다. 세일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에이가 님의 짐도 미리 챙겨 놓으라 했으니, 곧 그분의 시종들이 짐을 챙겨 가지고 올 거예요.”
거기까지가 세일린이 해야 하는 일이었다. 에이가에게는 귀중품이 없고 가지고 있는 의복과 살림은 단출하였으니 더 챙길 것도 아마 없을 것이다. 짐을 루이스에게 넘기며 세일린은 긴장을 풀 요령으로 긴 한숨을 토해 냈다. 요새 그것이 습관이었다. 종일 긴장을 풀기 위해 끊임없이 호흡하지만 늘 뜻대로 되지 않는다.
“세일린.”
카르낙의 목소리가 들렸다. 세일린에게 있어 그의 목소리는 아무리 멀리 있어도 늘 또렷하여 쉽게 구분할 수 있었다. 움찔 몸을 떤 후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숙여 왕을 맞이했다.
“폐하.”
인사를 하고 올려다보는데 그의 표정이 그다지 좋지 못했다. 무슨 일인가 걱정이 앞섰다.
“무슨 연유로….”
“릴리 못 보았어?”
“…비 전하 말씀이십니까?”
“그래.”
세일린은 눈을 굴리며 파니릴리를 마지막으로 보았던 때를 되짚었다.
“비 전하와는 아침에 이재민들을 배웅하고 난 뒤로는 계속 뵙지 못하였는데….”
내내 바빴다. 남은 짐들을 챙겨야 했고 세바스탠과 리쿠스, 그 외에 엘버그를 떠나는 데 필요한 이들에게 짐을 꾸리라 일러두느라 바빴다.
“…저는 내내 폐하와 함께 계시는 줄 알았는데요.”
요 근래 부부는 한 몸처럼 붙어 다녔다. 성안이 여러모로 소란한 가운데에도 둘 사이는 전에 없이 다정하여 세일린은 오늘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함께하려니 생각했었다.
“노라.”
“네.”
세일린의 불음에 노라가 공손히 답했다.
“…오늘 혹시 비 전하를 보았니?”
“…아니요. 저도 오전에 한 차례 뵌 것이 전부입니다.”
“…….”
불안한 마음에 세일린은 왕을 바라보았다. 그의 면부에도 숨길 수 없는 불안함이 서렸다.
“폐하! 국왕 폐하!”
그때 멀리서 누군가 소란하게 왕을 불렀다. 종이 하나를 들고 헐레벌떡 달려오는 시종의 모양새가 자못 급박했다. 그는 숨을 고르며 왕에게 인장이 찍혀 있지 않은 서신 하나를 공손히 건넸다.
“…시녀 하나…. 하나가… 이것을….”
“이게 뭐야?”
“비 전하께서 해가 지고 나면 폐하께 전해 달라 부탁을 하셨다고….”
해가 지고 나서야? 카르낙은 황급히 서신을 받아들었다. 시종이 말을 덧붙였다.
“폐하께서 계속 전하를 찾고 계신 것이 마음에 걸려 제가 얼른 가져왔습니다.”
카르낙은 서둘러 실링을 뜯어 내용을 살폈다. 정갈하고 유려한 필체는 분명 파니릴리의 것이었다.
칼, 북쪽으로 먼저 가 있을게요.
그것이 다였다. 작은 서신에 적힌 전언이라고는.
“빌어먹을.”
카르낙은 저도 모르게 욕을 짓씹으며 서신을 구겨 쥐었다. 눈치챘어. 눈치를 채고 있었던 거야. 그 여자가 얼마나 똑똑한지 잊지 말았어야 했는데.
“…폐하?”
세일린이 침을 삼키며 불안하게 그를 불렀다. 카르낙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질려 있었다. 그는 허무한 어투로 말했다.
“달아났어.”
“…예?”
“가서 내 말을 가져와!”
세일린이 사태를 미처 다 파악하기도 전에 카르낙은 몸을 움직였다. 시종은 왕의 명령에 따라 쏜살같이 마굿간으로 뛰었고 카르낙은 큰 소리로 루이스를 찾아 댔다.
“루이스! 루이스!”
막사에서 그가 허겁지겁 튀어나왔다. 얼굴엔 짜증이 가득했다.
“성문을 열어!”
“…뭐, 예?”
“파니릴리가, 그 여자가 달아났어!”
“…뭐요…?”
이 빌어먹을 여자. 가만두지 않을 거야. 화가 치밀어 올라 가슴이 들썩거렸다. 생전 처음 느껴 보는 분노였다. 아니 이것은 차라리 공포에 다 가까울까.
때마침 성벽에서 긴 나팔 소리가 들렸다.
“폐하!”
망루 너머 누군가 성밖을 가리켰고 헐레벌떡 병사들이 뛰어 내려와 왕에게 자신이 본 것을 전했다.
“…자할, 자할과 자파가!”
뭐?
“자할과 자파가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카르낙은 얼이 빠진 채 한동안 미간만 구기고 있었다. 브리다스를 쫓으라 했건만, 어째서, 어째서 여기에? 숨통이 조였다. 뭔가 단단히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