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파니릴리가 이재민들의 피난에 섞여 든 것은 행운이라고 할 수도 혹은 운명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강보를 뒤집어쓴 채 여인들 무리에 섞여 성을 벗어나 캘던의 거대한 성벽을 벗어날 때까지도 근위대를 포함해 그 누구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녀는 수도를 벗어나서도 한동안 얼굴을 푹 숙인 채 화물칸의 바로 뒤에 바짝 붙어 걸었다. 혹여나 자신이 목표했던 지점에 이르기도 전에 이재민을 호위 중인 근위대원에게 걸려 그 자리에서 캘던성으로 다시 끌려갈 수 있으니 긴장을 풀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일행이 멀루아 근방에 이르러 잠시 휴식을 취하자 파니릴리는 기회를 노렸다가 조용히 무리에서 이탈했다. 여전히 머리에 강보를 뒤집어쓴 채 쓰러질 듯 조슈아나무 아래로 기어들어가 간신히 휴식을 취하는데 누군가 그녀의 곁에 다가와 털썩 주저앉았다. 그 바람에 파니릴리는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여전히 둘둘 말린 강보 사이 별빛 눈동자가 당혹감에 뒤섞인 채 사내의 옆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혼자 어딜 가시게요?”
“…매짐.”
릴리가 신음하듯 그의 이름을 뱉었다. 양친이 계신 고향 마을이 지척이었다. 그 곳을 앞두고 대체 그가 왜…. 파니릴리는 마치 그 거리를 가늠이라도 해 보려는 듯 부질없이 멀루아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째서, 어째서 이곳에….”
“그러게 말입니다, 전하. 전하께서 어째서 이곳에 계십니까?”
“…매짐, 폐하께서 양친을 모시고 성전으로 가라 명령하셨잖아요. 무리에서 이탈을 하면 안 돼요.”
“전하께서는 어디로 향하던 중이셨는데요?”
릴리는 대답하는 대신 입을 꾹 다물었다. 누가 보아도 수상한 모양새였다. 매짐은 캘던성을 떠나올 때부터 진작 그녀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있었다. 다만 그녀가 무엇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 가만히 내버려 두었을 뿐이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이상해져 가는 그녀의 행동을 그저 두고 볼 수만은 없어서 그녀를 쫓아 무리에서 빠져나왔다. 그녀가 침묵하는 한 매짐은 그녀가 하는 행동의 의도나 목적을 알 수 없을 터였다.
“매짐, 늦지 않았어요. 지금이라도 무리로 돌아가요. 부모님을 모셔야죠.”
릴리가 침착한 어투로 애원했으나 매짐은 그 어느 때보다 단호했다.
“어머니 아버지에겐 서로가 있으십니다. 하지만 전하께선 혼자이시잖습니까. 전하를 홀로 계시게 둘 순 없어요.”
“…….”
“어디로 가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디든 저와 함께 가셔야 할 거예요.”
어투와 표정이 너무나 분명하여 파니릴리는 더는 그를 설득할 수 없으리라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매짐은 제 옆구리에서 가죽으로 만든 수통을 꺼내 릴리에게 건넸고 그녀는 말없이 그것을 받아 들었다. 뜻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뭐든 계획대로 되는 일이 없는 것 같았다. 이 또한 모든 것이 운명이려나. 파니릴리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
성안으로 들어온 자할의 말 뒤에 등이 굽은 늙은이가 보였다. 카르낙의 복잡한 표정에 반짝 반가운 빛이 떠올랐다
“로로!”
“폐하.”
검버섯이 성성한 그의 손을 잡아 말에서 내리기를 돕자 로로는 주름진 얼굴로 활짝 웃어 보였다.
“그간 별일 없으셨습니까?”
“어떻게 된 거야?”
“캘던에 불이 났단 소식을 듣고 걱정이 되어서요.”
자할이 훌쩍 말에서 뛰며 그의 말을 이었다.
“하게너 영지가 전소되었다. 화재의 규모가 점점 더 커지고 있어.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해.”
“자할….”
카르낙은 반가운 기색 뒤 아연하고도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그의 이름을 부른 뒤 곧바로 말했다.
“내가 브리다스를 쫓으라고 했잖아.”
“누구?”
자파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자할과 시선을 주고받는 것이 영 모르는 눈치였다.
“서신을 받지 못했나?”
“…무슨 개소리냐, 카르낙.”
자할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
분명 성전에서 그에게 서신을 보냈다. 브리다스를 쫓아 롬비로 가라고. 그들을 추격하여 가능하면 롬비에 닿기 전에 처리하라고.
그런데 서신을 받지 못했다고? 그렇다면 중간에 서신을 갈취당한 건가? 그것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혹시 처음부터 전해지지 않았던 걸까?
“브리다스를 쫓으란 건 무슨 이야기야?”
자파가 아무것도 모르는 듯 물었다. 자할과 자파가 브리다스를 쫓지 않았다면 그들은, 영지인 롬비로 무사 귀환했을 거다. 거대한 산맥으로 둘러싸인 롬비는 천해의 요새로 그곳에 똬리를 틀고 있다면 여간해서는 함락시키기 불가능한 난공불락의 성이다.
그러니까 이건, 그들에게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세력을 키울 수 있는 기회를 준 거나 다름이 없다, 거의 다 죽어 가던 불길에 기름을 부어 버린 것이다. 브리다스를 놓치다니. 명분도, 땅도, 세력도 있는 그 늙은 여우를. 이것은 정말이지 뼈아픈 실책이다.
“이봐, 카르낙. 대체 무슨 소리냐니까.”
자할이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러나 카르낙은 얼이 빠져 있었다. 눈치가 빠르지 않은 자라도 무언가 잘못되었음은 분명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카르낙이 갑작스레 몸을 돌리며 검집에서 칼을 빼 들었다. 다급한 발걸음으로 안뜰을 가로지르는 그를 나머지 사람들은 영문도 모르고 뒤쫓았다. 회랑을 건널 때쯤 에이가와 마주했다. 로로를 발견한 그녀는 반갑게 인사하고자 했으나, 잘 벼린 날붙이를 든 채 씨근덕거리는 왕을 보고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그러다가 그가 향하는 곳이 예배당임을 눈치챈 이후엔 그녀 역시 치맛자락을 붙잡고 그의 뒤를 쫓았다.
게드릭은 제의실에 있었다. 그곳에서 시종들과 함께 하루에 두 번, 여신의 제단에 놓을 성물과 은잔을 비단으로 닦느라 여념이 없었다. 깨끗이 닦은 잔 안에 각진 얼음과 맛 좋은 과일주를 담는데 벌컥, 제의실의 문이 열렸다. 무심히, 문을 바라보던 게드릭의 얼굴은 왕의 손에 들린 날붙이를 보자마자 퍼렇게 굳었다.
“구… 국왕, 폐하… 께서….”
국왕은 예배당도 제의실도 잘 찾지 않는다 들었다. 게드릭이 캘던으로 온 이후로도 그랬다. 카르낙은 한 번도 예배당을 찾은 적이 없었다. 그런 그가 장검을 손에 들고 제의실에 들어왔을 때에는 그만큼 큰일이 났다는 방증이었으므로 게드릭은 말을 더듬을 수밖에 없었다.
“페하께서… 여긴 어쩐 일로….”
“목적이 뭐냐, 게드릭?”
“…예?”
에이가가 사람들을 비집고 제의실로 들어서서 왕의 말을 들었다. 아연한 표정의 게드릭과 카르낙을 번갈아 바라보며 그녀는 카르낙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인지 유추하려 애를 썼다.
“베오르토가 널 캘던으로 보낸 목적 말이다.”
“…….”
게드릭은 입만 뻥긋거렸다. 에이가는 왕에게 집중된 사람들의 시선을 느꼈다. 불안한 기운에 피가 차갑게 식어 버린 듯 손끝이 떨려 왔다. 더 분위기가 험악해져 왕이 제의실에서 검을 휘두르기 전에 상황을 중재해야겠다는 생각에 그녀는 앞으로 나서기 위해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그때였다. 무장한 근위병 하나가 제의실로 뛰어 들어왔다. 평소라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폐하! 크, 큰일 났습니다!”
그 말에 일제히 모두가 근위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는 흐르는 땀을 닦으며 굳은 낯빛으로 말했다.
“대, 대장장이… 대장장이 스코크가! 죽었습니다! 칼에 찔려…. 테이먼이, 테이먼 테르조가 그를, 그를 찌르고 도주했습니다! 그를….”
숨에 차 허둥거리는 병사의 말을 들은 카르낙의 눈동자에 불길이 어렸다. 그는 노기가 가득한 얼굴로 게드릭을 향해 다시 몸을 돌렸다. 게드릭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변명할 말을 떠올리진 못하는 것 같았다. 있다 하여도 들을 리 없겠지만 말이다. 이제 이해가 되었다. 베오르토가 게드릭을 이 성에 보낸 이유, 자할과 자파에게 서신이 당도하지 못한 이유. 성전에 테이먼을 두고 가지 않겠느냐 권유했던 이유.
카르낙은 지체 없이 검을 휘둘렀다. 둔중한 것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나더니 곧바로 사방에 피가 튀었다. 게드릭이 들고 있던 붉은 색 비단은 바닥으로 낙하하였고 깨끗하게 닦아 과일과 얼음을 담았던 쟁반과 성물들에 모두 핏물이 흩뿌려졌다.
게드릭은 종잇장처럼 바닥으로 스러졌으며 시종들은 입을 틀어막으며 비명을 질러 댔다. 에이가는 곧바로 현기증을 느꼈다. 카르낙이 또다시 사제를 죽였다. 그것도 예배당에서. 그 생각에 눈앞이 노랬다. 비틀거리는 에이가를 잡은 것은 세일린이었다.
거침없이 칼부림을 한 카르낙은 검에 묻은 피를 바닥에 나뒹구는 게드릭의 의복에 닦아 낸 뒤 검집에 밀어 넣었다. 분노와 좌절이 한대 뒤섞인 얼굴로 뒤를 돌자 세일린이 저와 같은 낯빛으로 에이가를 껴안은 채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카르낙은 아내와 안전을 잃었고 세일린은 남편과 명분을 잃었다. 시린 섬광 같은 것이 둘 사이를 지나갔다. 뼈마디가 찡할 정도로 아픈 기운이었다.
자할은 제 발끝까지 흘러내리는 게드릭의 핏물을 바라보다 고개를 들어 그를 불렀다.
“…카르낙.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
로로도 말없이 그를 보았다. 캘던으로 돌아오자마자 이게 대체 무슨 난리인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그러나 카르낙이 느끼는 불안과 공포만은 똑똑히 느끼는 듯한 표정으로.
“에나가 우릴 배신했다.”
카르낙의 말에 에이가가 세일린의 품에서 신음했다. 어쩌먼 흐느끼고 있는지도 몰랐다.
“테이먼은 도주했고, 브리다스는 롬비에 있어. 그리고 내 아내는….”
그 지점이 가장 뼈아팠다. 그녀가 도망갈 구실을 줘 버렸다. 멍청하게 어떻게 그녀를 속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까. 언제나 제 기대와는 빗겨 가던 여자인데도. 그러나 그 외에 그녀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은 달리 무엇이 있지? 그녀를 이곳에서. 내 품에서 떨어뜨려 놓을 수 있을 방법 따위가.
“핀은 어디에 있지.”
카르낙은 절망한 목소리로 멍하게 물었다. 병사는 그가 대장간에 있노라 고했다. 거기까지 듣고 카르낙은 몸을 휘청였다. 자파가 손을 뻗어 그를 잡았다. 카르낙은 허리를 숙이고 고개를 떨구고 손으로 무릎을 짚은 채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그는 금방이라도 몸을 떨며 바닥으로 추락할 듯 위태로웠다. 지키고자 했던 것들은 모두 제 손에서 달아났다. 이제 무엇을 할 수 있지. 내가. 파니릴리가 없는 내가. 그녀가 사라진 지금 이곳에서 내가 과연 무엇을.
“핀을… 핀을 불러와.”
카르낙은 멍하게 제 친우를 찾았다. 그대로 정신을 놓아 버려도 이상할 것이 없는 얼빠진 목소리였다. 가쁜 호흡은 금방이라도 절명할 듯 사나웠다. 눈을 뜨고 있음에도 보이는 것은 온통 암흑이었다. 그는 부질없이 아내의 얼굴을 떠올렸다. 제 품에서 달아난 작은 새를. 아름다운 나비를. 빛나는 별빛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