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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197화 (197/231)

197화

불에 타 죽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특히 테이먼 테르조 같은 고귀한 신분의 엘버그인이라면 더욱 그랬다. 시체를 다시 꺼내 도륙 낸다 해도 이보다는 덜 고통스러운 죽음일 터였다.

“놔!”

그는 있는 힘껏 사지를 뒤틀었다.

“내가 누군 줄 알고!”

그러나 발투만의 근위병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제 주군을 닮아 무자비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기야, 어떻게 그의 병사를 향해 엘버그의 전통을 거들먹거리며 동정에 호소할 수 있단 말인가. 애초에 그들은 먼 타지에서 온 전통과 상식이라고는 모르는 외지인일 뿐인데.

화로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뜨거움에 숨이 턱턱 막혔다. 두꺼운 갑옷으로 무장한 숙련공들이 다가왔다. 불에 익을 대로 익은 뜨거운 철판이 일렁였다.

“이놈을 화로에 집어넣어라.”

근위대가 명령했다.

“난 테이먼 테르조다! 여신과 조우한 엘버그의 첫 인류란 말이다! 그런 날 감히! 감히 어떻게!”

“아아, 그래, 그래. 그러니까 태초의 모습으로 한번 돌아가 보자고. 불덩이 속에서 살았다며.”

테이먼이 고함을 치자 근위병 하나가 이죽거렸다. 아니야! 불덩이가 아니라! 바위라고! 갑옷을 입은 숙련공들이 손을 뻗었다. 지글거리는 철판이 살갗에 닿을 듯 가까웠다. 벌써부터 타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알겠어! 알겠다고!”

더는 버틸 수 없어 테이먼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말했다. 파니릴리를 향한 외침이었다.

“해! 하겠어! 그 결혼, 한다고!”

테이먼이 태세를 전환하자 파니릴리는 명령을 물렸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근위병에게 질질 끌리다시피 부축을 받아 그는 다시 파니릴리 앞에 섰다. 진이 빠진 듯 그의 얼굴빛이 파리했다.

“좋은 남편이 되어 주시리라 믿어요.”

“…….”

왜…? 좋은 남편이 되지 못하면 그땐 정말로 화로에 집어 던지기라도 하게?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넋이 나간 테이먼은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파니릴리 역시 딱히 그의 대답을 원한 건 아니었는지 서둘러 그의 퇴장을 명령했다,

“그를 방에 데려다줘요.”

“네.”

테이먼은 그대로 대장간에서 질질 끌려 퇴장했다. 파니릴리는 이윽고 스코크와 세바스탠에게 다가갔다. 그들은 하던 것을 멈추고 왕비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소란을 피워서 미안해요.”

“그럴 리가요. 이곳의 주인은 왕비 전하이시니 언제든, 어떻게든 전하 마음대로 쓰시면 됩니다.”

스코크가 손사래를 치며 답하자 파니릴리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 모습을 세바스탠이 골똘히 쳐다보다가 말했다.

“피곤해 보이십니다, 전하.”

“아주 긴 여행이었으니까요. 이곳에 와 이렇게 두 사람을 보니 이제야 집에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 조금 드네요.”

스코크는 기쁘게 웃었다.

“왕비 전하께서 돌아오시니 이제야 성안이 꽉 찬 느낌이 듭니다.”

“그건 그렇고. 저자가 테이먼 테르조로군요?”

세바스탠의 물음에 파니릴리가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가 테이먼이죠.”

“생각보다 곱상한 청년이라 놀랐어요. 폐하의 천적이라기에 조금은 우락부락할 거라 생각했는데.”

“그냥 엘버그의 전형적인 귀족인 게지.”

제자의 말에 스코크가 답했다. 엘버그의 귀족들은 모두 저렇게 생겼다. 곱상하고 기다랗고 뽀얗다. 알기어스 왕 역시 그랬다. 아름다운 얼굴에 길고 늘씬한 체격이었다. 물론 사내답게 벌어진 어깨와 단단한 골격은 가지고 있었지만 카르낙 발투만에 비한다면 그 역시 연약했으리라.

“그나저나, 저는 전하께서 그를 정말 화로에 집어넣으시는 줄 알았어요.”

세바스탠은 그렇게 말하며 웃음을 흘렸다. 설마 이 착하고 상냥한 왕비님께서 그렇게까지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대장장이들한테는 그런 전설이 있거든요. 명검을 만들고 싶으면 산 자를 쇠와 같이 용광로에 넣으라고. 이왕 이렇게 된 거 진짜 그 쇳물로 검이라도 한 개 만들어야 하나 고민했지 뭡니까.”

세바스탠의 말에 파니릴리도 결국 난처한 낯빛으로 웃고 말았다.

“살려 두려면 그가 가진 오만함을 꺾어야 했어요. 그에게는 누구도 자신보다 우위에 설 수 없다는 확신 같은 게 있더라고요.”

“그렇다면 제대로 하신 것 같네요.”

다리에 힘이 풀려 장정들에게 붙잡힌 채 끌려가던 테이먼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세바스탠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더 오만을 떨긴 힘들 거다. 언제든 파니릴리가 저를 쇳물에 담가 버릴 수 있다 여길 테니 말이다.

***

파닐릴리가 대장간에서 나와 제 남편을 찾아갔을 때, 카르낙은 멀리서 제 왕좌를 쳐다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왕좌의 위에서 타오르고 있는 거대한 불덩어리를.

파니릴리도 그를 따라 하늘을 보았다 그 까마득한 높이를 따라 들린 목은 한참이고 뒤로 꺾여야만 했다. 먼 거리임에도 불꽃의 열기가 느껴졌다.

“에나의 일기에 그런 건 안 적혀 있었어? 저 불을 꺼 버리는 방법 같은 거.”

카르낙이 아내의 기척을 눈치채고 먼저 말을 걸었다. 릴리는 희미하게 웃으며 답했다.

“네. 애석하게도요.”

그럼 아무도 저 불을 끄는 방법을 모른다는 이야기다. 대체 누가, 어떻게 저 불을 가져와 저 위에 매달아 둔 것일까. 사다리를 타고 올라도 닿지 않을 높이인데. 허공을 날지 않는 한 저 불꽃을 저 위에 매달아 놓을 방법이 없다. 심지어 녹지 않은 저 쇠줄들은 또 어떠한가.

돌이켜 보니 모든 것이 쉬이 해결되지 않는 의문투성이였다. 자신과 파니릴리의 존재 역시 그러하겠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또 어떻게 끝날지 누구도 알지 못한다. 우린 어디로 흘러갈까. 어디든, 그곳이 네게는 평화이길. 카르낙은 그렇게 염원하며 무심히 손을 뻗어 아내의 손을 꼭 쥐었다.

늦은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들었으나 세일린은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아 뒤척거렸다. 잠들기에는 생각이 너무 많았다. 말똥말똥 눈을 깜빡이며 침대에 누워 있다가 캐시가 잠이 들자 그녀는 곧 방에서 빠져나왔다.

한밤중에도 성의 이곳저곳은 횃불로 환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무장을 한 근위병들이 성안을 돌았다. 그녀는 본성의 안뜰을 지나 숲으로 향했다. 어둡고 무성하고 그나마 인적이 뜸한 곳에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생각에 잠기고 싶은 까닭이었다.

그러나 멀리서 인기척이 들렸다. 늦은 밤 왕비의 정원에서부터 천천히 걸어 나오는 세바스탠과 딱 마주하고 만 것이다.

“세일린?”

세바스탠은 손에 든 작은 등잔을 치켜들며 그녀의 실루엣을 확인했다.

“뭐야? 왜 여기 있어?”

“그러는 세바스탠이야말로 늦은 시각에 어쩐 일이에요?”

“왕비님의 정원에 유리 공예품을 좀 달아 둘까 하고.”

“이 시간에요?”

“낮에 오기엔 좀 그래서.”

아, 그렇지. 날이 밝을 때면 왕비님의 정원에는 수많은 시종이 드나들었다. 왕비님의 정원이 시들지 않게 성안의 시녀들은 틈틈이 물조리개를 가져와 정원의 식물에게 물을 주고, 잡초를 뽑고, 가지를 치며 자신의 안주인에 대한 경의와 애정을 표했다. 그러니 그 많은 여인들이 드나드는 곳에 세바스탠이 홀로 들어서긴 무척이나 어려웠을 것이다.

“햇빛이 비치면 아름답거든. 후에 정원을 거닐면 조금이라도 즐거워하시지 않을까 해서.”

“그러실 거예요. 비 전하를 생각하는 마음이 정말 깊으시네요.”

“뭐….”

세바스탠은 말끝을 흐리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다가 화제를 돌렸다.

“소식은 들었어. 테이먼 테르조와 결혼한다고.”

“아….”

“축하를 해 줘야 하는 건지, 뭐 어째야 하는 건지….”

세바스탠은 이 성안에서 에이가를 제외한다면 유일하게 세일린의 연정에 대해 아는 사람이었다. 또 그것을 부정하거나 비판하지도 않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본인이 원하던 짝은 아니겠지만 전하께서 큰 뜻이 있으신 걸 테니 너무 심란해하진 말아.”

“그런 것 아니에요.”

세일린은 세바스탠의 짐작을 부정했다.

“그런 게 아니면 뭔데? 결혼을 앞둔 신부가 이 야밤에 잠 못 이루고 정원을 서성일 이유가.”

물론 결혼을 앞두고 만감이 교차하는 것은 사실이다. 오랜 시간 카르낙 발투만을 보지 못함으로써 그에 대한 자신의 연정도 퇴색했으리라 생각했다. 에이가가 세일린을 왕비와 떨어뜨려 놓은 것도 분명 그런 이유였을 테고 말이다.

그러나 무용지물이었다. 보지 못한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때론 무심한 듯 잠들어 있기도 했지만, 결국엔 기지개를 켜며 깨어났다. 육신이 죽지 않는 한, 분명 이 마음도 끊어지진 않으리라. 그러나 그뿐이다. 그 마음이 다시금 움트기 시작했으니 다른 남자와는 결혼하지 못하겠노라 고집을 부릴 마음은 없었다. 카르낙 발투만이 사랑하는 이는 파니릴리 알기어스고, 또 그녀야말로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것을 단 한 순간도 망각하거나 부정해 본 일이 없다. 감히 그럴 수도 없었다.

늦은 밤 자꾸만 잠 못 들게 하는 상념은 사라지지 않는 연정에 대한 미련이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카르낙 발투만이 저에게 남긴 말이 그녀를 심란하게 했다. 조용히 왕비의 짐을 챙기라는 말, 너는 곧 그녀와 엘버그를 떠날 거라는 말.

그가 말한 것은 ‘우리’가 아니었다. 분명 ‘자신의 아내’와 ‘그녀의 전담 시녀’만을 지칭했다. 어째서일까. 무엇 때문에 왕비 몰래 그녀의 짐을 챙겨 놓으라는 것일까. 그리고 또 어디로 떠나야 한다는 것일까.

그렇게 왕비 전하를 모시고 이 땅을 떠나고 나면, 그러면 그는? 그는 무엇을 하려는 걸까. 사랑하는 여인을 어딘가로 보내려는 그의 모습에서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침착하고 부드러운 명령이었지만 세일린은 거기에서 공포를 느꼈다. 꼭… 꼭 죽음을 앞두고 있는 사람처럼 보여서 두려웠다.

그러나 그것을 세바스탠에게 말할 수는 없다. 국왕이 은밀히 진행하라 하였으니 그의 명을 타인에게 발설해서도 또한 들켜서도 안 된다.

“그냥… 그냥 잠이 안 와서.”

마땅한 핑곗거리를 찾지 못해 말을 얼버무리자 세바스탠은 고개를 털며 웃었다.

“이 결혼은 전하께서 저를 신뢰하시기에 결정하신 일이란 걸 알아요. 그러니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 거예요.”

잘 안다. 이 결혼은 테이먼 테르조에게 채운 족쇄 같은 것이란 걸. 자신의 임무는 부인으로서 남편을 공경한다기보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왕가의 눈과 귀가 되어야 한다는 걸.

파니릴리는 그러한 역할을 자신에게 맡겼다. 왕가의 가장 큰 적을 그녀의 손에 쥐여 준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믿음의 징표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세일린은 그러한 왕비의 믿음에 보답하고 싶었다. 온 마음을 다해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이 엘버그 땅에, 이 캘던성 안에 발투만 왕가가 계속 존재하여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그녀 역시 이 안에 머물며 그들의 심복으로 남을 수 있다면 말이다.

계속해서 카르낙의 말이 그녀를 괴롭혔다. 떠나라는 말. 그 말이 꼭 발투만 왕가를 사라지게 만들 것 같았다. 대체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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