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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196화 (196/231)

196화

“그럴 리가 없어….”

테이먼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이베트는 신음하듯 말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분명… 분명 그때 눈더미에 파묻혀서….”

그러나 롬비의 사제는 고개를 저었다.

“그분은 살아 계십니다. 에나님께 받은 서신에 분명 그렇게 적혀있습니다.”

“…그 서신을 보여 다오.”

브리다스가 마른침을 삼키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사제는 완강히 그의 청을 거부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브리다스 경. 에나님은 서신을 다른 이와 공유하길 원치 않으십니다. 이해 부탁드립니다.”

“…….”

브리다스는 상석에 앉아 있는 자신의 외손자를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는 화려한 황금빛 의자에 앉아 무구한 눈만 깜빡이고 있을 뿐이었다. 제 어미에 의해 엘버그의 왕으로 추대되었음에도 그 모든 상황에서 동떨어진 듯 아이는 일련의 대화에도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딸을 쳐다보았다. 황망한 얼굴로 몇 번이고 입만 벌렸다 다무는 그녀에게 브리다스는 물었다.

“이제 어쩔 테냐.”

“…….”

부친의 물음에도 이베트는 입만 벙긋거릴 뿐이었다. 그녀 역시 대책 같은 건 없었다. 그저 믿기지 않아 다시 물었다.

“정말인가요? 정말, 그자가, 테이먼 테르조가 정말로 살아 있단 말인가요?”

“에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사실입니다, 이베트 님. 에나님은 거짓을 고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카르낙 발투만의 수하잖아요. 우리에게 거짓을 고해서….”

“테이먼이 살아 있다는 거짓을 뭐 하러?”

브리다스가 사제를 대신해 따져 물었다.

“그 거짓이 그놈에게 무슨 이득이 있어서? 또, 그 사실을 어째서 에나에게 흘려 롬비로 전한단 말이야?”

“…….”

이베트가 아무런 답을 하지 못하자 브리다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영주의 모습에 사제는 눈치껏 홀을 빠져나갔다. 사제가 자리를 다 비키기도 전에 브리다스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딸을 힐난했다.

“나는 위험을 감수하고 네 말에 따랐다. 그리고 그 결과 나는 주군을 배신하고 자신의 잇속이나 챙긴 비열한 신하가 되었다. 이게 네가 바라던 그림이냐, 이베트?”

“그런! 제가 언제 강요라도 했단 말인가요? 제가 그랬듯 아버지도 테이먼 테르조가 죽었다 생각하셨잖아요! 그래서 바르시를 왕으로 추대하자는 제 의견에 동의하신 거고요! 그래 놓고 이제 와 제 탓이라니! 그러면 지금 상황이 달라지기라도 하나요?”

브리다스는 건틀릿을 착용한 손으로 쾅, 하고 의자를 내리쳤다. 우지끈 부러지는 듯한 소리에 홀 안의 사람들이 흠칫 몸을 떨었다. 이베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브리다스는 말 그대로 진노했다.

“이 일에 책임을 져야 할 거다, 이베트! 어떻게든 대책을 마련해야 할 거야! 어떻게든 이 상황을 수습할 방도를 찾아 놔! 그래야 너도, 나도 목숨을 연명할 수 있을 게다! 알아들었어?”

딸을 향해 한껏 고함을 친 후 그는 성난 걸음걸이로 홀을 빠져나갔다. 이베트는 찬물을 얻어맞은 듯 잔뜩 얼어 버린 채 그런 부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부들부들 떨리는 그녀의 손을 바르시가 걱정되는 듯 잡았다. 그러자, 이베트는 완강히 그의 손을 쳐 냈다. 자식의 손길을 거부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그야말로 비정하였다.

“어… 어머니.”

바르시가 더듬거렸다. 그가 당황한 것처럼 이베트 역시 당황한 티가 역력했다. 의식적으로 그를 밀어낸 것은 아니었다. 그저 본능적인 뿌리침일 뿐이었다. 물론 그것이 바르시에겐 더욱 잔인할 테지만 말이다. 그 순간을 모두가 목격하고 되새김질을 하고 난 이후에야 이베트는 잘 꾸며진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무렇지 않은 듯 부드러운 미소는 장미처럼 화려했다.

“넌 그냥 그 자리에 앉아 있기만 하렴. 그럼 된단다. 이 어미는 그 이상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아무것도. 그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

철이 철을 들이박는 날카로운 굉음이 불규칙적으로 일었다. 때마다 불꽃이 튀었고 때마다 찬물에 그것이 식어 가는 소리가 났다. 붉다 못해 노란빛을 띠는 불꽃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이글거림에 눈이 멀 것만 같았다. 스탠은 그 불길을 피해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불꽃을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돌려 멀리, 파니릴리를 주시했다.

“세바스텐.”

그의 시선을 읽어 낸 스코크가 주의를 환기하자 세바스텐은 다시금 망치질에 집중하려 애썼다. 그러나 뒤이어 들어온 다른 사내 때문에 다시금 신경이 흐트러졌다.

새하얀 피부에 밝은 블론드 헤어. 훤칠한 키에 눈부신 외모를 자랑하는 저 사내는 소문대로라면 테이먼 테르조가 확실했다. 옛 왕가의 혈통을 이어받아 엘버그의 진정한 왕으로 추대받았다던 자. 그리고 지금은 불행히도 카르낙 발투만의 손에 옴짝달싹하지 못한 채 옥살이를 하고 있는 자.

궁정 안에서 발 없는 말은 가장 뛰어난 종마보다도 그 속도가 빨랐다. 이미 성안에는 테르조와 세일린의 결혼 소식이 파다하여 그 이야기가 이 구석진 대장간까지 들이친 상태였다.

“세바스텐.”

스코크가 다시 한번 자신의 애제자를 불렀다. 세바스텐은 눈을 굴리며 변명했다.

“궁금하잖아요.”

“네가 궁금해야 할 것은 네가 두드리는 쇠의 단단함 뿐이다.”

“당신이 가장 아끼시는 시녀의 결혼이잖습니까. 아무리 정략적 선택이라 해도 뭔가 특별한 것이 있겠거니 싶어서….”

그 말에 스코크는 시선을 돌려 테이먼 테르조를 힐긋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아무 일 없는 듯 잘 달군 쇳덩이를 반복적으로 두드렸다.

그러나 세바스탠은 그러지 못했다. 그는 테이먼 테르조의 조각 같은 얼굴을 계속해서 훔쳐보았다. 과연 잘생긴 사내였다. 태어날 때부터 비단을 두르고 태어난 탓인지 기품이 철철 묻어났다. 왕의 숙적이자, 포로의 신분이라는 것을 제하고 보자면 외형만으로도 세일린에게 과분한 상대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세일린은 원치 않는 결혼일 것이다. 그녀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사내가 누구인지 그는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래서 궁금했다. 파니릴리는 과연 그것을 알고 있을까. 그것을 알고서 한 선택일까. 아니면 아무것도 모른 채 이것이 모두를 위한 최선이라 생각하여 내린 결정인 걸까.

근위병에게 둘러싸여 저에게 다가오는 테이먼을 바라보는 파니릴리의 얼굴은 더없이 차분하고 온건했다. 불길 속에서 그녀는 평화를 느끼는 반면 테이먼의 태도는 그렇지 못했다. 평온함을 가장하려 했어도 그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는 결코 가려지지 않았다. 테이먼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제 사촌누이를 바라보았다.

“이 넓은 캘던성 안에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장소가 수없이 많을 텐데 굳이 이곳을 선택한 이유가 뭐야? 지아비에 대한 애끓는 충정이라도 표현하는 건가?”

“난 엘버그 사람들과 달리 불을 좋아해요.”

그 뼈대 하나하나, 몸을 타고 흐르는 피 한 줄기 한 줄기에 올올이 엘버그가 박혀 있다. 그런 여자가 엘버그인과 자신 사이에 선을 긋다니 우스웠다. 한편으로는 그 고귀한 혈통에 대한 자부심이 없는 그녀가 안타깝기도 했다.

“파니릴리. 너는 신이 빚어 놓은 가장 완벽한 엘버그인이야. 그 점을 늘 기억하고 있었으면 좋겠다.”

파니릴리는 희미하게 웃고 대답했다.

“만일 발투만 왕가에 다른 혈육이 있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을 거예요.”

흥미로운 서두였다. 테이먼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의 말을 유추해 보려 애썼다. 그러나 그가 희미하게 그것을 집어 보기 전에 릴리가 말했다.

“그러나 우리에겐 혈육이 없고 내가 오라버니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내가 가장 아끼는 친구인 세일린뿐이죠.”

“…그게 누군데?”

“내게 가장 충성스러운 시녀요.”

“…….”

테이먼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직 그만이, 자신의 결혼 소식을 제대로 듣지 못한 채였다.

“내겐 혈육과 다름없는 소중한 아이이니 부디 아껴 주세요.”

“…지금 내게 화친을 위해 혼인을 하라는 건가?”

“당신에게 베풀 수 있는 내 가장 큰 친절이에요.”

“…….”

테이먼은 기가 차 말문이 막혔다.

“당신도 언제까지 서쪽 탑에 갇혀 있는 것은 싫으시겠죠.”

“…내게 네 시녀와 혼인하여 발투만 왕가의 종비로 살란 말이야?”

“내 사촌이자, 친우로서 발투만 왕가의 충실한 가족이 되어 달라는 거예요.”

“말도 안 돼!”

그는 분노했다. 정색을 하느라 그 자리에서 펄쩍 뛰기까지 했다. 테이먼은 마른 입술을 축이며 신경질적으로 제 금발을 쓸어넘겼다.

“난, 난 한 번도. 한 번도, 단 한 번도 너 이외의 아내를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릴리가 펄쩍거리는 그를 향해 건조하게 답했다.

“난 단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는데요.”

“파니릴리.”

“우습군요, 테이먼. 아직 자신의 처지를 깨닫지 못했어요? 다시 돼지 오물 속을 뒹굴게 해 줘요?”

“파니릴리!”

모욕적인 언사에 테이먼은 언성을 높였다. 분에 그의 가슴팍이 한껏 부풀어 있었다. 긴장감으로 창을 쥔 근위병들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당신은 이제 왕이 아니에요. 당신은 세력을 잃었고 싸움에서 졌어요. 형편에 맞지 않는 오만함은 사치일 뿐이죠. 이건 내가 당신에게 베푸는 마지막 자비라는 걸 명심해요.”

“넌 날 등질 수 없어.”

테이먼은 확신에 차 말했다. 그 눈동자가 너무나 굳건하여 보는 이를 아연하게 만들 지경이었다. 무엇을 믿고 저리 말하는가. 파니릴리는 그 자신감의 근원을 알고 싶었다. 대체 무엇이 제 처지까지 망각하게 하는가. 그러다가 생각은 한 곳에 다다랐다. 어처구니없게도 말이다.

“…그건 환상이에요.”

그가 보았다는 그 푸른 불빛. 분명 거기였다. 성전에서 멀어졌어도 그는 여전히 그 환영 안에서 헤어나오지를 못한다.

“테이먼, 거기서 이제 그만 빠져나와요. 그래야 당신은 살 수 있어요.”

그러나 테이먼은 멍하게 고개를 저었다. 생각하며 고개를 흔드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본능적으로, 자신이 늘 품고 왔던 신념이 무의식적으로 거부하도록 만들었다.

“당신을 죽이고 싶지 않아요.”

릴리는 진심으로 호소했다. 그를 죽이고 싶지 않다. 무엇이든 생명을 가진 것은 해하고 싶지 않다. 여전히 그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니 정신을 차려요. 내 손으로 내 혈육을 끊어 내지 않도록 도와줘요.

“선택은 내가 하는 게 아니야. 아마네스 님이 하시는 거야.”

테이먼 역시 물러섬 없이 답했다. 더는 접점이 없었다. 더는 그를 설득할 말도 없었다. 파니릴리는 멀리 불타오르는 화로를 보았다.

캘던의 가장 어둡고 깊은 곳에 있는 그것은 장정 두셋은 집어삼키고도 남을 만큼 컸고 그 뜨거움은 마치 용광로와 같아 대장장이들조차 두꺼운 천과 단단한 무쇠 갑옷으로 무장을 해야만 다가갈 수 있었다. 사시사철 꺼지지 않는 그 화로는 이 캘던성의 모든 불길을 주관했다. 타오르되 꺼지는 법은 없었다. 왕좌에 달린 그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그를 집어넣어요.”

끔찍한 명령을 하면서도 그녀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테이먼은 크게 놀란 얼굴로 파니릴리의 옆얼굴을 바라보았으나 명령은 반복되지 않았다. 잠시 망설이던 근위병들이 양쪽에서 그의 팔을 잡았다. 강한 완력으로 버티려 해 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테이먼의 두 발은 무력하게 허공에서 바둥거렸다.

“파니릴리!”

그는 다급하게 사촌누이의 이름을 외쳤다. 그러나 릴리의 낯빛은 변함이 없었다. 죽이려는 거야. 정말 날, 날 산 채로 불에 태워서. 정말로 날 죽이려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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