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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198화 (198/231)

198화

“흐읍!”

릴리는 숨을 삼키며 번쩍 눈을 떴다. 잠결에 계속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더니 다음 순간 찌릿한 전율이 척추를 후려쳤다. 릴리는 눈을 뜨고 나서야 남편의 성기가 제 안으로 들어왔음을 깨달았다. 카르낙은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아내의 몸 위에 올라가 그녀의 도톰한 귓바퀴를 혀로 핥았다. 릴리가 신음하며 침을 꼴깍 삼켰다.

“칼….”

릴리는 카르낙의 형체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움직일 때마다 시야는 반복해서 흐려졌다. 카르낙은 가슴부터 골반까지 조밀하게 접붙인 채로 여체를 더 바짝 껴안았다. 지난밤에도 수차례 사랑을 나누었다.

진이 빠져 행위가 어떻게 끝났는지도 모르게 잠이 들었는데, 잠에서 제대로 깨어나지도 못한 채 다시 시작이었다. 카르낙은 붙은 골반 사이로 제 손가락을 집어넣어 부풀어 오른 릴리의 클리토리스를 부드럽게 굴렸다.

아… 하고 신음하며 릴리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맞닿은 밀부가 더할 나위 없이 매끄러웠다. 그의 8할은 카르낙이 그녀의 안에 흘려 넣은 정액일 것이다. 릴리는 약간의 현기증을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목말라요.”

아내가 칭얼거리자 카르낙은 손을 뻗어 머리맡에 놓아둔 와인 잔을 쥐었다. 그러면서도 행위는 멈추지 않았다. 릴리는 손을 들어 제 눈가를 비비기 시작했고 카르낙은 제 입안에 와인 한 모금을 머금은 뒤 릴리의 입술 안으로 흘려 넣어 주었다. 꿀꺽, 힘겹게 삼키는 보드라운 입가에 넘쳐 버린 액체가 한 줄기 흘러내렸다.

카르낙은 흐트러진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찰나의 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맹렬한 기세였다. 그녀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다.

카르낙은 그 말이 오후에 있을 테이먼의 혼인이라던가, 하루 동안 살펴야 하는 국왕의 직무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런 것들을 빌어 호소할 정도로 자신이 그녀의 심신을 괴롭히고 있다는 것 역시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쩐지 조바심이 나 틈만 나면 그녀의 냄새를 맡고 살갗을 비비고 체액을 섞고 싶었다. 오래 지속되지 않을 평화였다. 이렇게 온전한 부부로서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도 그리 길지 않으리라.

그래서였다. 힘에 겨운 아내의 허벅지 안쪽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알면서도 카르낙은 계속해서 몸을 움직였다. 틈을 주지 않고 몸을 붙이고, 흘러내린 체액이 시트를 흥건하게 적셔도 다시금 그 안으로 파고들어 계속해서 자신의 것을 쏟아 냈다.

낭창거리는 허리를 붙들고 카르낙은 아내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정확하게 파니릴리의 맥박이 뛰는 곳에 입을 맞추고, 맥동할 때마다 흩뿌려지는 그녀의 향기를 맡았다. 고양된 감각에 릴리는 몸을 뒤트는 대신, 소리 내어 흐느꼈다. 이대로 모든 것이 멈추어 버렸으면. 카르낙은 헛된 소원을 빌며 아내의 몸속 깊은 곳에 파정했다.

제대로 갈무리되지 않은 침대 위에서 조금 늦은 아침을 먹은 파니릴리가 의복과 머리 손질을 마칠 때쯤 에이가가 그녀를 찾았다. 추밀원이 꾸려지고 게드릭이 예배당을 차지했으니 한결 마음이 편할 법도 한데, 얼굴은 전보다 더 어두웠다. 파니릴리와 함께 안뜰을 거닐며 그녀는 말했다.

“폐하께서 그를 베어 죽일까 두려워요.”

“게드릭을 말인가요?”

에이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에나님께서는 폐하의 성정을 아시면서 왜 그런 자를 보낸 것인지…. 말하는 데에 거침이 없는 사람이더군요.”

“그래요?”

“폐하께 자문을 해 주어야 할 위치인데, 사사건건 의견 충돌만 일어날 것 같아요. 그러다가 어느 날 폐하께서 분을 못 이겨 칼이라도 휘두르신다면….”

에이가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끔찍한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미 캘던에서 사제 하나를 죽였다. 그것도 성스러운 결혼식 날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일을 덜기는커녕 혹 하나를 더 붙인 기분이다. 차라리 예전처럼 예배당을 비워 두고 로로가 그의 곁에 있었으면, 하고 바랄 때도 많았다,

“저도 충분히 보수적인 사람이지만, 발투만 왕가의 기조는 사제들이 받아들이기엔 지나치게 진보적인 모양이에요.”

“그 이야긴 저도 들었어요. 창녀들이 글을 배우는 것을 반대한다고요.”

“글은 사제와 귀족들의 전유물이었으니까요. 그들의 시각에서 우리는 위험한 반동분자일 수도 있어요.”

“이제 세상은 변했어요. 앞으로의 엘버그는 결코 지금과 같지 않을 거예요.”

그 지점에서 에이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는 더없이 혼란하고 복잡한 표정으로 파니릴리를 바라보았다.

“폐하께선 우리가 캘던을 버리고 북쪽으로 떠나야 한다고 말씀하세요. 이유는 제대로 여쭤보지 못했습니다만 만일의 불상사에 대비하기 위함이라 하시더군요. 곧 다시 불길이 번질 거라고 하시면서요.”

“네. 맞아요.”

“이제야, 왕국이 조금 안정을 찾아가나 했는데….”

에이가는 절망적인 낯빛으로 제 이마를 짚었다. 로레인이 하게너성의 성문을 열어 주며 꿈꾸던 세상은 필시 이런 모습은 아니었으리라. 이젠 무엇을 위해 여기까지 달려온 건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고, 바로 그 점이 에이가를 두렵게 했다.

“세상이 멸망해 가는 징조일까요.”

“…….”

“…우리가 너무 많은 목숨을 앗아서….”

파니릴리는 빙그레 웃으며 에이가의 손을 잡았다.

“그렇지 않아요, 에이가. 세상이 멸망할 일은 없어요.”

“…….”

“한차례 이 고난이 지나가면 세상은 달라질 거예요. 분명히요. 새로운 왕가와 함께 새로운 세상이 열릴 거예요. 장담해요.”

모든 것은 알기어스가 저지른 죄악. 그 죄악의 사슬을 끊어 내면 모든 것은 새로 시작될 것이다. 더는 천대 받는 투로가 없고, 더는 피부색과 머리색으로 사람을 나누는 일도 없는, 발투만 왕가가 치세하는 세상. 더는 글을 쓰고 읽는 것이 귀족들만의 전유물이 아닌 세상이 분명 올 것이다. 릴리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를 위해 자신이 이 땅에 온 것이니까.

릴리는 다정하게 에이가의 팔짱을 끼며 걸음을 옮겼다.

“나와 함께 정원을 둘러봐요, 에이가. 더는 근심하지 말고요.”

그렇게 릴리는 에이가와 함께 자신의 정원으로 향했다. 메마르고 건조한 성안의 다른 곳과는 달리 시종들의 정성스러운 손길 아래 왕비의 정원만은 꽃과 초록색 풀잎들이 만개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맑은 풍경 소리가 났다. 느티나무 가지마다 세바스탠이 달아 놓은 유리 풍경들이 볕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였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파니릴리는 기쁨에 겨워 감탄했고, 에이가 역시 그 광경에 넋을 놓고 미소 지었다. 꿈같은 평화였다.

***

테이먼과 세일린의 결혼식은 간소했다. 게드릭의 진행하에 에이가와 왕 내외만 증인으로 참석한 예배당에서 조용히 치렀다. 식장에서야 처음 서로를 대면한 신랑 신부는 식이 진행되는 내내 굳은 얼굴로 좀처럼 서로를 마주 보는 일이 없었다. 심지어 혼인의 증표로 입을 맞출 때조차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다.

간단한 만찬 이후 세일린은 먼저 주성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신방으로 향했다. 갓 결혼한 부부를 위해 침대 위에는 향긋한 장미꽃이 놓여 있었고, 작은 테이블 위에는 간단한 요깃거리와 질 좋은 포도주가 차려져 있었다.

“부인.”

공손한 말투로 시녀가 말했다.

“탈의를 도와드리겠습니다.”

“…아….”

세일린은 어색하게 몸을 돌렸다. 평생 안주인의 탈의를 돕기만 했지 단 한 번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탈의를 한 적이 없는 탓이었다. 평생 누군가를 ‘부인’이라 부르기만 했지 자신이 ‘부인’이라 불리는 날이 올 줄이야.

왕비의 명령이니 그저 지고지순하게 따라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하루아침에 자신의 처지가 이렇게 바뀔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더는 춥고 어두운 성의 뒷방이 아닌 크고 아늑한 침대와 볕이 잘 들이치는 창이 달리고, 폭신한 카펫과 맛있는 음식이 사시사철 준비되어 있는 방에서 지낼 수 있었다. 그것도 시종들을 부리며 귀부인처럼, 아니 귀부인으로서 말이다.

세일린은 문득 의문이 생겼다. 이것이 왕비 전하의 의도일까. 처음 만난 순간부터 몸종이 아니라 친구라고 말하던 그녀였다. 단지 신뢰하기에 정적을 감시할 목적으로 이루어진 혼인이 아닌, 친우로서 그녀에게 그에 걸맞은 지위와 명예를 선물해 주고 싶었던 걸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코끝이 찡하게 울렸다.

자신은 평생 파니릴리의 친구가 될 수 없으리라, 세일린은 생각했다. 대등하게 눈을 마주하고 손을 맞잡는 순간이 와도 언제까지나 자신은 그녀의 충실한 종일 것이다. 경외하고 존경하고 숭배하는 마음 이외에 그녀에게 또 어떤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시녀는 세일린의 올림머리를 풀어 정성스레 빗질을 한 번 해 준 뒤 방에서 나갔다. 방을 환히 밝히는 촛불 아래 그녀는 와인을 한 잔 들이켰다. 손등으로 입을 한 번 훔치고 다시 잔을 채울 때쯤, 테이먼이 방 안에 들어섰다. 얇은 슈미즈 위에 숄 하나를 두른 세일린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차갑고 냉담했다.

“부인.”

그러고는 정중한 말투로 과하게 예의를 차리며 인사했다. 그의 처지에 대한 자조인지 아니면 세일린을 향한 조롱인지는 알 수 없었다.

테이먼은 비틀거리며 화려한 자수가 놓인 더블릿의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결혼을 축하하기 위한 연회라지만 전혀 즐겁지 않았다. 지금껏 먹어 본 것 중 가장 풍족하고 화려한 정찬이었으나 입 안의 음식은 모두 모래알이나 고무를 씹는 것 같았다.

모든 게 낯설고, 무엇 하나 마음에 들지 않았으며, 결혼식 당사자이건만 전혀 주인공 같지도 않았다. 결혼식이라기보다 차라리 초상집에 더 가까웠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술을 들이켜는 일뿐이어서 그는 연거푸 포도주 잔을 비웠다.

그는 옷을 벗어 침대 위로 집어 던지며 경계하듯 벽에 바짝 붙어 서서 저를 주시하는 세일린을 바라보았다. 어찌 되었든 아내였다. 사제의 집행 아래 격식과 예의를 갖추어 치른 정식 결혼이었다. 테이먼은 엘버그의 전통과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

원치 않았다 하더라도 법과 관습대로 맺어진 여자라면 남편으로서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해야 했다. 테이먼은 천천히 아내를 향해 걸어갔다. 빗어 내린 머리에는 윤기가 흘렀다. 오랜 시간 노동으로 가꾸어진 몸은 귀부인의 것 못지않게 낭창했으며, 피부는 갓 피어난 처녀의 것 그대로 뽀얗고 촉촉했다.

“어쨌든 우린 부부야.”

“…….”

테이먼은 손끝으로 잔뜩 겁을 집어먹은 순진한 처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파르르, 세일린의 입술이 떨렸다.

“최대한 당신을 존중하도록 노력하지.”

“…….”

“그러니 부디 당신도 순종적인 아내가 되어 주길 바라.”

다음 순간 테이먼은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 침대로 던졌다. 세일린은 터져 나오는 비명을 참기 위해 제 입술을 사리물었다. 신혼의 밤이었다. 밤은 그토록 허망하게 깊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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