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오랫동안 알기어스 왕가는 이 풍습을 지키지 않아 왔던 것 같아요.”
“그래서 내가 나타난 건가? 불길과 함께?”
기록에 따른다면, 그러니까 자신은 알기어스 가문의 아이들을 잡아먹어 태어난 귀신이란 말이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엘버그인들이 저를 끔찍하게 여기는 이유를 충분히 납득하고도 남는다.
“어떤 미친놈이 자신의 갓 태어난 아이를 산 채로 불에 태운단 말이야.”
그걸 바라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그걸 거역했다고 이 산지옥을 만들고 있단 말이야? 사랑과 자비의 여신이?”
“에나가 걱정한 것은 엘버그의 재앙이 아니라 알기어스 왕가의 파멸이었어요. 검은 사람이 나타날까 두려워한 이유도 그가 나타나면, 알기어스 가문에 더는 아들이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이고요.”
“결국 내가 알기어스 가의 장자를 죽였어. 죽여서 불에 태웠단 말이야. 그렇다면 그녀가 원하는 대로 된 것이 아닌가?”
“이젠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거겠죠.”
“사람은 미치면 죽이면 그만이지, 신이 미쳐 버리면 그 여자는 대체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거야?”
카르낙이 혀를 내둘렀다. 이건 답도 없었다.
“분명 원하는 것이 있을 거예요.”
릴리는 그렇게 말하며 카르낙의 손에서 필사본을 부드럽게 빼앗더니 둘둘 말아 제 가슴팍에 넣었다.
“이 땅의 태생 자체가 글러 먹은 거겠지. 원하는 대로 해 주자고.”
대륙을 다시 불태워 먹든, 갈아 마시든, 아마네스 당신이 관장하는 것이 이 땅이라면, 그렇다면 이 땅이 멸망했을 때 당신도 더는 신일 수 없겠지. 그러니 다 같이 사라져 버리자고. 다만 바람에 따라 흩어져 언젠가 누군가에게 ‘그런 땅이 있었다’ 정도의 설화로만 남아 버리면 그만이다. 당신이 원하는 것이 그것이라면.
“방법을 찾을 때까지 사람들을 북쪽으로 대피시켜야 해요, 칼. 다시 불길이 일기 전에요.”
당장, 이 캘던 안의 모든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글을 읽지 못하니 공공장소마다 사람을 배치해 왕령을 음성으로 선포하도록 해야 했다.
“좋아.”
카르낙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모두 가만히 앉아 송장이 될 순 없으니 당신이 말한 대로 해 보지. 성안의 이재민들이라면 당장 대피시킬 수 있을 거야. 그 사람들부터 성전으로 보내야겠어. 그 전에 전령을 보내 베오르토에게도 준비할 시간을 줘야겠군.”
카르낙은 아내의 이마에 다정하게 입을 맞추고 짧은 은빛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긴 여행이었어, 릴리. 나머진 나에게 맡기고 푹 쉬어.”
파니릴리가 남편을 향해 희미하게 웃었다. 카르낙은 그녀의 뺨을 한 번 더 쓸어 주고는 방을 나섰다. 문 앞을 지키는 보초병 사이에 세일린이 보였다. 카르낙은 그녀를 향해 다가오라 손짓했다. 세일린은 빠른 걸음으로 그의 앞에 섰다.
“세일린.”
“예, 폐하.”
“왕비 모르게 그녀의 짐을 싸 두도록 해.”
“…예?”
“너는 곧 왕비와 함께 엘버그를 떠날 거다.”
“…….”
영문을 몰라 세일린은 눈만 깜빡였다. 그러나 이유를 알지 못한다 해도 그것은 왕의 명령이었다. 그러니 따라야 한다.
“예, 폐하.”
“서두르되 은밀해야 한다.”
“예.”
카르낙은 그녀의 대답을 들은 뒤, 예배당으로 향했다. 핀이 그의 뒤를 따랐다.
“사람을 시켜 사막의 동태를 살펴야겠다, 핀.”
“발 빠른 놈으로 골라 보내도록 하지. 맡겨 둬.”
“성안의 이재민들을 북쪽으로 호송할 병사들도 필요해.”
그의 말에 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성안의 골칫거리였는데 좋은 방법이었다. 예배당 앞의 보초병이 그들을 보고 문을 열어 주었다. 제의실 안에서 히스테릭한 사내의 고함이 들려왔다. 카르낙은 지체 없이 그곳으로 향했다.
베오르토가 캘던의 사제로 추천한 그의 이름은 ‘게드릭’이었다. 엘버그인 특유의 푸른색 눈동자를 가진 그는 머리카락은 몇 가닥 없었으나 수염만은 풍성하여 머리카락 대신 황금빛 수염을 두 갈래로 땋아 묶고 있었다.
잘 먹고 잘 자 건장하고 피둥피둥한 체구의 그는 아까부터 무엇이 그토록 화가 나는지 에이가를 향해 연신 언성을 높였다. 그 앞에 죄인처럼 옹송그린 에이가를 보고 있자니 부아가 치밀어 올라 카르낙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에이가가 제의실로 들어온 카르낙을 발견하고 허리를 숙였다. 평소보다 과한 것이 그의 등장을 반기는 듯 했다.
“폐하.”
카르낙은 에이가의 옆에 서서 미간을 잔뜩 구긴 채 게드릭을 향해 물었다.
“뭐가 문제야?”
게드릭도 예를 갖춰 고개를 숙였으나 그 성난 기세만은 변함이 없는 소리로 답했다.
“창녀가 글을 배우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앞뒤 없는 말에 카르낙의 한쪽 눈썹이 위로 날카롭게 들렸다.
“…그런데?”
“대체,”
기가 막힌 듯 게드릭은 말까지 더듬었다.
“대체, 엘버그의 수도인 캘던에서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지…. 엘버그의 성스러운 말과 글은 귀하게 쓰여야 합니다. 아마네스 님을 위해 지식을 탐구하고 그분을 섬기기 위해 쓰이는 것도 부족한 마당에 시정잡배만도 못한 천것들이 글을 배운다니. 이게 대체 말이 되는 소리인지!”
“왜?”
“예?”
“엘버그의 모든 이들은 아마네스를 섬긴다 들었다. 그러니 천것들 역시 그녀를 섬기는 데 말과 글을 쓰겠지. 그러니 귀하게 쓰여야 한다는 네 말은 이유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창녀입니다! 폐하! 몸을 팔아 배를 불리는 천하디천한 잡것들입니다! 그들이 글을 배우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더 똑똑해지겠지.”
“…그들은 성스러운 언어로 이 엘버그의 수많은 선량한 이들을 타락시킬 겁니다!”
“이미 허락한 일이다 게드릭.”
“폐하.”
“고작 창녀가 글을 배우느니 못 배우느니, 그런 쓸데없는 일로 지금껏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단 말이야?”
“이것에 어떻게….”
카르낙은 눈을 치켜뜨며 게드릭의 말을 잘랐다.
“창녀니, 투로니, 왕가니, 귀족이니 그런 거지 같은 것들은 사라진 지 오래다. 내가 왕이 된 그 순간부터. 그러니 개똥만도 못한 계급을 들먹이며 시간을 낭비하려거든 내 땅에서 나가.”
조용한 음성이었지만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 저를 노려보는 눈은 금방이라도 제 목에 칼을 들이밀듯 서늘하여 게드릭은 연신 침만 꼴깍 삼켜 댔다.
“이제 다른 이야기를 좀 해 보지. 쓸모 있는 것들 말이야.”
카르낙은 아무 의자에나 털썩 주저앉아 제 목덜미를 주물렀다. 핀도 그를 따라 그의 옆에 앉았다. 아주 잠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가 에이가가 입을 열며 걷혔다.
“화재로 인해 많은 가축을 잃었습니다. 특히나 돼지의 경우는 겨울 내내 캘던 사람들의 먹거리가 되어 주던 것으로 피해가 막심합니다. 다행스럽게도 리오의 상인들과 에나님의 도움으로 이재민들의 구제나, 당장 부족한 세수는 메웠습니다만…. 앞으로가 문제예요. 피해가 복구되기 전까지는 세금을 걷을 수 없을 텐데…. 그 막대한 세수 부족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는지.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나앉게 되었으니….”
“아무래도 당분간 이곳을 버려야 할 것 같아, 에이가.”
“예?”
갑작스러운 카르낙의 말에 에이가가 아연실색해 되물었다.
“이곳을 버리다니요? 캘던을 버린단 말씀이세요? 이 성을요? 어째서요?”
“…….”
카르낙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에이가에게 말해야 할까. 노쇠한 그녀가 자신과 릴리가 알고 있는 모든 진실들을 감당할 수 있을까. 진실을 말한다 한들, 그것을 믿을 수는 있을까. 말하면 그러면 무언가 달라지기는 할까.
카르낙은 입을 꾹 닫고 있는 게드릭에게 시선을 돌렸다. 고집스러운 낯빛의 사내는 저항이라도 하듯 침묵을 지켰다. 모든 것이 허례허식이다. 이런 때에 추밀원장이 되는 것도, 추밀원을 소집하는 것도, 누군가를 결혼시키고 미래의 세금을 걱정하는 것도 다 무슨 소용인가. 죽음 앞에서는 모두 헛될 뿐인데.
이 재앙은 비켜 갈 수 없다. 비켜 갈 수 없는 절망에 앞서, 하루라도 더 미래에 대해 꿈을 꾸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모든 것을 단념하고 하루하루 비통에 빠져 헛되이 살아가는 것이 나을까. 차라리 미래를 꿈꾸는 것이 더 행복한가. 죽음을 맞닥뜨리고 절명하기보다는.
참으로 나약한 존재이다. 살아 숨 쉬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 죽음 앞에서 행복이란 무용한 것을 논한다. 단 하루뿐일지라도, 혹은 헛될지라도 희망을 말하며 그 가치를 찾는다. 망각일 뿐인데도 그것을 잡으려 이토록 고민하고 있지 않은가. 쓰고 비린 자각이다.
“화재가 계속될 테니까.”
“…하지만… 비가 왔으니….”
“불씨는 다시 날아올 거야. 에이가. 그리고 다음번에는 어쩌면, 비로도 꺼지지 않을 수도 있어.”
“…….”
“만일의 불상사를 대비해 모두가 북쪽으로 향할 테니 서둘러 떠날 채비를 해 둬.”
카르낙은 더는 볼일이 없는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다 아참, 하며 게드릭을 향해 말했다,
“아. 그리고 이틀 뒤 세일린과 테이먼의 결혼식이 있을 테니 그렇게 알고 있도록 하고.”
“예? 세일린이요?”
이번에도 아연실색한 얼굴로 에이가가 되물었다. 어째 저 입에서 나오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이렇게 벼락같은가. 테이먼에 관한 이야기는 게드릭을 통해 들었다. 놈이 살아 있고 지금 이 캘던성 서쪽 탑에 구금되어 있다는 것 역시 성안의 시종이 귀띔해 주어 알고 있다.
테이먼 테르조는 카르낙 발투만의 적이니 에이가의 적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전주인이던 로레인 하게너의 핏줄이기도 했으니 그를 향하는 에이가의 마음은 제법 복잡했다. 동시에 카르낙 발투만에 대해 혼란스럽기도 했다.
그녀가 아는 카르낙이라면 진즉, 테이먼 테르조를 죽였어야 맞거늘, 그가 어째서 테이먼을 살려두었는지 에이가는 알지 못했다. 또 그를 살려두어 어찌하려는지 역시 생각할 수 없었는데 난데없이 결혼이라니, 그것도 세일린과. 설마 이 생각이 카르낙 발투만의 머리에서 나왔을까?
“왕비의 명이야.”
아연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에이가를 향해 카르낙이 답했다.
아아. 하고 에이가는 그제야 납득하게 되었다. 파니릴리 아가씨라면 가능한 생각이었다. 그래. 테이먼 테르조와는 혈육이니 그를 죽이기보다 가능한 한 자신의 편으로 두고 싶었으리라. 그리고 카르낙 발투만은 그런 파니릴리를 위해 테이먼을 죽이지 않았을 테지. 정적을 향한 증오보다 사랑하는 아내를 향한 마음이 더 깊었으리라.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폐하.”
진심을 다해 내뱉은 말이지만 카르낙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로서는 갑작스러운 이야기일 터였다. 왜 저래? 하는 눈빛으로 그는 에이가의 면부를 살폈다.
“술을 좀 줄이도록 해. 에이가.”
“안 마셨어요.”
미간을 구기며 뾰족하게 대꾸했다. 그러자 비로소 안심이 되었는지 카르낙은 헛웃음을 터트리며 제의실을 빠져나갔다. 핀이 소리 죽여 웃으며 그 뒤를 따랐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임에도 하나만은 확실했다. 드디어 그가 돌아왔다. 변한 듯 변하지 않은 천덕꾸러기의 모습 그대로.
에이가는 안도하였다. 늘 제 마음을 졸이며 화병을 불러일으키던 존재임에도 그가 돌아왔다는 사실에 분명 그녀는 큰 안도감을 느꼈다. 그는 왕이었다. 모두의 왕일 뿐 아니라 에이가, 그녀의 왕임에도 틀림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