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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194화 (194/231)

194화

파니릴리가 지도와 편지를 접어 에이가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성전에서 사제를 모셔왔어요.”

“사제요?”

“에나의 권유에 따라 폐하께서 추밀원장으로 추대하시겠대요.”

“세상에!”

에이가는 반색했다. 그렇다면 드디어 추밀원이 갖추어지는 건가! 텅 빈 성안의 예배당에도 드디어 주인이 생기는 건가! 무엇보다 드디어 캘던의 막대한 책임과 살림살이를 떠넘길 사람이 생긴 것이다. 세상에 아마네스 여신님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어서 추밀원장님을 모시고 추밀원을 소집해야겠군요!”

그렇게 말하는 에이가의 낯빛이 너무도 환해서 곧 모두가 캘던을 버리고 북쪽으로 피난을 가야 할 것 같다는 이야기는 차마 꺼낼 수가 없었다.

“폐하께 잔소리할 생각에 설마, 추밀원장님을 모시고 올 줄이야 생각도 못 했지 뭐예요! 이럴 때가 아니죠! 어서 가서 인사라도 드리고 와야겠어요! 소집원을 구성하려면 성안의 관리 감독인들에 대한 설명도 해 드려야겠네요!”

에이가는 호들갑을 떨며 방안을 나섰다. 그녀가 저토록 활기찬 발걸음으로 뛰어나가는 것은 정말이지 오랜만이라 세일린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릴리는 한숨 돌렸다는 듯 푹신한 안락의자에 앉아 반질반질한 팔걸이를 매만지며 세일린을 향해 물었다.

“셰일린은 별일 없었나요? 한방을 쓰는 친우도 그대로이고요?”

“아, 네. 전하, 캐시는 아주 잘 지내고 있습니다. 여전히 향신료 창고에서 일하고 있고요.”

“노라는 보이지 않는군요.”

“노라는 이재민들을 돕기 위해 지하에 있어요. 이재민을 수용하기에는 예배당이 너무 작아서 하는 수 없이 지하 감옥을 치워 그곳에서 지내게 하고 있거든요.”

“큰일이군요.”

세일린의 말에 릴리의 낯이 어두워졌다. 사원이라면 나름대로 쾌적한 환경이겠지만 지하 감옥이라면 사지가 멀쩡한 사람도 오래 버티기 힘든 곳인데….

“에이가 님이 노인과 아이가 있는 부녀자들은 대부분 사원에서 지내도록 하셨어요. 감사하게도 리오의 상인 길드에서 계속해서 먹을 것을 보내 주고 있고요. 혹독한 계절이지만 틀림없이 잘 견뎌 낼 수 있을 거예요.”

특유의 온화한 말투로 세일린이 조곤조곤 대답하자 릴리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오랫동안 그리운 목소리였다. 여행하며 오롯이 혼자 모든 것을 감당해야 했던 때와는 다르다. 카르낙에게는 미안하지만 역시 남편 하나에 의지하는 것보다는 여러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 좋았다. 특히 부드럽고 상냥해 위로가 되는 여인들.

“따듯한 말 고마워요. 하지만 좀 더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할 것 같네요. 이들을 언제까지 성안에 가두어 둘 순 없으니까요.”

잠시 후 덜컥 방문이 열리더니 목욕을 마친 카르낙이 가운 차림으로 슬리퍼를 끌며 침실로 들어섰다. 세일린이 낯빛을 붉히며 뒤로 물러났다. 카르낙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물었다.

“에이가는?”

“예배당에 갔어요. 폐하께서 모셔온 사제분께 인사를 드리겠다고.”

“아하.”

그는 시종이 막 와인을 따라 건네준 은잔을 받아 들고는 에이가가 미리 준비해 둔 다과를 살폈다. 세일린은 테이블을 훑는 그를 피해 조금 더 구석으로 물러났다. 카르낙은 대추야자를 하나 골라 들어 제 입으로 던져 넣고는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고는 아내를 향해 잔을 내밀었다.

“마시겠어?”

파니릴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카르낙은 아내의 보드라운 뺨을 다정하게 한 번 매만지고는 세일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파니릴리의 한쪽 어깨에 손을 하나 올린 채였다.

“그래서”

카르낙이 서두를 떼었다. 세일린은 한껏 몸을 낮췄고 카르낙은 와인을 한 모금 더 마신 뒤 말을 이어갔다.

“세일린.”

“예, 예 폐하.”

“혹시 따로 마음에 둔 남자라도 있어?”

“…예?”

뜬금없는 물음에 세일린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고는 가운 사이, 카르낙의 단단한 가슴팍을 본 뒤 곧바로 다시 고개를 숙였다.

“물론, 시녀의 혼사는 왕비의 소관이지만, 이제 너도 결혼할 나이가 된 것 같아서.”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릴리 역시 카르낙을 올려다보았다.

“세일린에겐 이미 정해 둔 혼처가 있어요.”

“벌써?”

카르낙은 눈가를 찌푸렸다. 캘던으로 돌아온 것은 오늘이니 돌아와서 생각한 것은 아닐 테고, 그럼 돌아오며 생각한 건가?

세일린도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인지 눈만 깜빡거렸다.

“세일린에게도 조만간 이야기할 생각이었어요.”

오오? 카르낙은 흥미롭다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들고 와인잔을 뱅글뱅글 돌렸다.

“그래? 가장 아끼는 친우이니, 아무 남자나 고르진 않았을 테고.”

엘버그의 법에 따라 영주 성에 속한 시종들의 혼처는 성의 안주인이 정했다. 시종들은 적당한 나이가 되었을 때, 안주인이 정한 적당한 배필과 결혼하여 아이를 낳는다. 그렇게 해서 시종이 낳은 아이 또한 영주에게 귀속되어 세를 늘리는 것이다.

그렇지만 설마 파니릴리가 벌써 세일린의 결혼 상대를 결정했을 줄은 몰랐다. 그녀는 엘버그의 법도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였고, 세일린을 누구보다 아꼈으니까, 언젠가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그때 결혼을 주선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일린이 원한다면 강제로라도 말이다.

카르낙은 그 남자가 내심 세바스텐이길 원하며 물었다.

“누구와?”

“테이먼 테르조요.”

“누구?”

파니릴리는 태연한 얼굴로 덧붙였다.

“테이먼 테르조요. 제 외사촌 오빠 말이에요.”

테이먼 테르조? 뜬금없이 릴리의 입에서 나온 이름으로 놀란 것은 카르낙뿐이 아니었다. 세일린 역시 너무 놀라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는 죽었다고….”

세일린이 더듬거렸다. 분명 캘던에 떠도는 소문으로는 그가 죽었다고 했다. 북쪽 성전에서 감히 칼을 들어 평화를 헤쳤다는 이유로 아마네스 여신의 엄벌을 받았다고 하였다. 그 후 남은 잔당들이 어찌 되었는지는 아직 듣지 못했다. 아마도 전부 전멸했거니, 그렇게만 생각했다.

“아니. 죽지 않았어요. 생포되었죠. 지금은 이 성안 어딘가에 구금되어 있을 거예요. 폐하의 명에 따라서.”

아. 물론 그렇지. 놈은 생포되어 성탑에 갇혀 있지. 언젠가 당신이 갇혔던 그 탑에 말이야.

세일린은 눈만 깜빡거리다 이내 순종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무엇이든, 전하께서 명하시는 대로 저는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고마워요, 세일린.”

돌아가는 꼴이 퍽이나 우스워 카르낙은 와인 잔을 내려놓으며 세일린에게 명령했다.

“세일린. 자리를 비켜 줬으면 하는데.”

“아… 예. 폐하.”

세일린이 공손히 답하고 방문을 나섰고, 방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한 카르낙은 황당하다는 듯 릴리에게 되물었다.

“테이먼 테르조? 진심이야?”

“네.”

“어째서?”

“전략적인 판단이에요.”

“난 당신이 세일린을 끔찍이도 아끼는 줄 알았는데?”

“당연히 아끼죠. 그녀는 제 벗이라고요.”

“그런데 테이먼과 결혼을 시키겠다고? 성탑에 갇힌… 당신의 표현대로라면 언제 돌아 버릴지 모르는 놈과?”

“그는 테르조 가문의 장자예요. 자신의 영지와 작위를 가진 귀족이잖아요.”

“그거야 그렇지. 하지만 지금은 포로 신세잖아.”

“그렇다고 그의 지위가 박탈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저 발투만 왕가에 복속되어 있을 뿐, 그는 여전히 테르조 가문의 사람이에요.”

사내로서 테이먼 테르조는 나쁘지 않다. 잘생기고 훤칠한 청년이며 무엇보다 뛰어난 가문과 기름진 영지를 가진, 이 엘버그에서 왕가만큼의 권력과 명성을 지닌 귀족.

지금이야 적에게 잡힌 포로 신세이지만 원래대로라면 그는 감히 세일린이 쳐다보지도 못할 위치의 사람이었다. 그러니 남녀의 사정을 차치하고서 이 결혼이 누구에게 이로운 결혼인지를 따지자면 분명 세일린에게 더 이로운 결혼이었다.

파니릴리의 말대로라면 세일린은 테르조 부인이 되는 거다. 더는 일개 시녀가 아닌 귀부인이다. 그녀가 아이를 낳는다면 그가 장차 테르조 가문의 주인이 되는 것이고. 만일 테이먼이 죽어도 세일린은 그의 영지와 가문을 그대로 이어받을 거다.

“릴리….”

카르낙은 신음하듯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이 얼마나 영악한 사람인가.

“테이먼을 왕비가 가장 아끼는 시녀와 결혼시킴으로써 당신은 자비를 베푼 왕이 될 거예요. 에나 역시 이에 경의를 표하겠죠.”

“난 얼떨결에 자비로운 왕이 되고.”

“테이먼을 버린 코르넬리오는 신의와 명예를 잃고요.”

“언젠가….”

카르낙은 무언가를 말하려다 얼버무렸다.

“그래. 어쨌든 그를 가까이에 두는 것이 여러모로 좋겠지.”

그는 핏줄을 중시하는 엘버그의 남자이니 파니릴리만은 진심으로 아낄 것이다. 그래서 카르낙은 그가 미치지 않고 가능한 오랫동안 살아 있어 주길 바랬다. 그라면 분명 릴리를 보살펴 줄 거다.

만일 진실로 이 왕국이 망해 가는 거라면, 그러면 분명 아내의 이다음 삶을 생각해야만 한다. 저를 대신해 그녀를 돌봐줄 강인한 누군가가 그녀에게는 반드시 필요하니까.

“세일린이 마음에 둔 남자가 없음을 감사하게 여겨야겠군.”

“순수하지만 현명한 아이예요. 무엇이 자신에게 더 이득일지는 알 거예요. 테이먼은 우리에겐 적이지만 분명 좋은 남자예요. 비록 강요된 결혼일지라도 자신의 아내에게는 신의를 지킬 거예요. 그렇게 하도록 교육받았을 테고요,”

그래. 그가 아주 보수적인 엘버그의 문화 속에서 자라났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 또, 그렇다 한들 무슨 소용인가. 어쩌면 이 엘버그의 모든 것들이 재가 되어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는데. 파니릴리만 지켜 준다면 그는 어찌 되어도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러니 이후의 일은 이후에 생각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그것보다 더 급한 문제가 있어요.”

릴리가 화제를 전환했다. 카르낙이 물었다.

“무엇?”

“캘던의 화재요.”

“아아.”

“당신이 보아야 할 것이 있어요.”

릴리는 제 가슴팍에 계속 간직하고 있던 종이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기록소에 있을 때 몰래 필사해 온 것들이에요.”

카르낙은 와인잔을 놓고 그녀에게서 꾸깃꾸깃한 종이를 받아 들었다. 가는 필체로 써진 내용을 살피느라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릴리는 글씨를 읽어 내려가는 그의 표정을 살피며 침을 꿀꺽 삼켰다.

“검은 사람.”

그 역시 파니릴리가 멈추었던 부분에서 멈추어 되뇌었다.

“나로군.”

“…….”

카르낙의 얼굴에는 점점 더 비소가 새겨졌다.

“그러니까, 이 빌어먹을 모든 것이 이 여자의 장난질이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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