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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186화 (186/231)

186화

릴리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테이먼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엘버그의 역사가 얼마나 긴데. 그런 오래된 증거가 지금껏 존재할 리가 없잖아. 하지만 여기서 제대로 딱 하나, 아는 것은 있다.

“뭔가 대단한 것을 알고 싶다면 말이야, 파니릴리.”

테이먼의 은밀한 목소리에 릴리는 책 속에 처박혀 있던 시선을 들었다.

“여기선 얻을 수 없어.”

“그러면요?”

“성전의 가장 아래까지 내려가야지.”

가장 아래? 릴리는 베오르토의 말을 떠올렸다.

“에나께서 아직 누구도 그곳에 가본 적이 없다고……”

“당연한 거야. 파니릴리.”

테이먼은 호쾌하게 웃었다. 눈에는 자신감과 유쾌함이 가득했다.

“그들에겐 그럴 자격이 없으니까. 하지만 너와 나라면, 우린 자격이 충분하지.”

“…하지만 대체 거길 가려면 어디까지 내려가야….”

테이먼은 무슨 흰소리를 하냐는 듯 말을 끊었다.

“끝까지지. 파니릴리, 끝까지.”

그러고는 파니릴리의 손목을 잡고 방을 나섰다. 가파른 계단을 그에게 붙들려 내려가느라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테이먼!”

릴리는 넘어지지 않기 위해 제 치맛자락을 붙들고 비명처럼 그의 이름을 불렀으나 테이먼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자라면서 매일 들었던 이야기야, 파니릴리. 북쪽 성전의 가장 아래층엔 이 세상 어떤 금은보화로도 값을 치를 수 없는 엘버그의 가장 위대한 역사가 잠들어 있다고! 엄청난 보물이라고 했어!”

지하로 향할수록 점점 더 계단은 어두워졌다. 무언가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에 릴리는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계단을 밝히는 횃불조차 없었다.

“테이먼! 너무 어두워요! 이러다가 넘어지겠어요!”

그러자 테이먼이 왔던 길을 돌아가 벽에 걸린 횃불 하나를 손에 집어 들었다. 지쳐 헉헉거리는 릴리와 다르게 그는 숨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있었다. 그저 모든 것이 신나고 재미있어 보일 뿐이었다.

얼마나 더 계단을 내려갔을까, 더는 내려갈 계단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더는 내려갈 수 있는 계단을 만들어 놓지 않았다. 계단은 거기에서 끝이 났고 그 외에는 모두 하얗고 투명한 얼음벽만이 끝없이 아래로 이어지고 있었다.

“…여기가 끝인가?”

테이먼이 혼자 중얼거렸다. 그는 몇 계단을 더 올라가 마지막 기록소의 문 앞에 섰다.

“여기가 가장 끝 방인가?”

“…….”

릴리는 그의 뒤에 서서 헐떡거리며 호흡을 골랐다. 뛰어 내려온 계단을 다시 올라갈 생각을 하니 눈앞이 아득했다. 오늘 하루 안에 저 많은 계단을 다 올라갈 수나 있을까, 왜 가장 바닥까지 내려간 에나가 없었다고 하는지 그녀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연세로 여기까지 내려왔다면 올라갈 일이 얼마나 까마득했겠는가. 젊고 창창한 자신조차 다시 올라갈 생각을 하니 그저 주저앉고만 싶은데 말이다.

“잠깐…”

파니릴리가 숨을 헐떡거리며 말을 더듬었다.

“잠깐 비켜 봐요,”

테이먼이 냉큼 옆으로 비켜 주었다. 릴리는 제 옷소매에서 베오르토에게서 받은 열쇠를 꺼내 문을 땄다.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육중한 문의 경칩이 움직였다. 테이먼은 기다리지 못하고 릴리를 밀어낸 후 문을 열었다. 끼이이이익, 시끄럽고 요란하고 녹슨 소리를 내며 문은 단번에 활짝 열렸다.

기록소 안에는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이게 뭐야.”

테이먼은 눈살을 찌푸렸다. 다른 기록소와 다를 것이 없는 풍경. 사방을 둘러보아도 온통 책뿐이었다. 다만 그 가짓수가 현저히 적은 것만 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유물은? 엘버그의 가장 위대한 역사는? 금은보화로도 값을 치를 수 없다는 그 보물은?

그러나 릴리의 표정은 무척이나 환했다. 그녀는 입구의 작은 촛대를 집어 와 테이먼이 든 횃불로 불을 붙였다.

“이왕 온 것이니 책을 모두 살펴봐야겠어요.”

확실히 그의 말대로 무척이나 오래된 고서들만 즐비했다.

“테이먼, 하얀 책들만 좀 빼내 주시겠어요? 엘버그의 역사부터 보죠.”

“…전부 책뿐이라고?”

말도 안 돼. 기대한 것은 이게 아닌데. 라미레스 가문에 대대로 전해져 오는 이야기는 분명 이곳에 보물이 숨겨져 있다고 했다. 설마 그 보물이 이 책들이란 말인가? 이런 별것도 아닌 오래된 책이?

릴리가 그러했듯, 테이먼도 한쪽 벽면에 위치한 아무 책이나 잡아 꺼내 들었다. 낡아서 조금만 문질러도 손안에서 바스러질 듯 얇고 건조했다.

“…어.”

릴리가 알 수 없는 소리를 냈다. 책을 펼쳐 든 후 테이먼은 그 원인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고대어로군.”

분명 같은 언어임에도, 수백 년 전의 엘버그 문자는 현재의 언어와는 전혀 달랐다. 읽기도 어려웠지만 읽어 내도 그 뜻을 이해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어려웠다. 그러니 보고 있으면 까막눈이 된 것이나 진배없었다.

“…읽을 수 있겠어요?”

릴리가 미간을 구기며 아연한 얼굴로 물었다. 테이먼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

릴리는 제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이러면 곤란한데. 매우 곤란한데. 릴리는 책을 테이블 위에 펼치고 초를 아주 가까이 가져와 미간을 잔뜩 구기고 글자 하나하나 읽어 내 보려 애를 썼다.

“‘타초예 려신께소… 말싸미… 이르로되 하냔얀데… 여미….’ 아. 이건 알겠어요. ‘타초예 려신께소 말싸미’, ‘태초에 여신께서 말씀하신’이란 뜻 아닐까요?”

“…….”

테이먼은 그저 인상만 쓰고 있었다.

“‘하냔얀데… 여미’.”

…이건 대체 무슨 말이람. ‘하난얀데’…?

“다시 상층으로 돌아가면 고대어 사전이 있을지도 몰라요. 그것으로….”

“이건 말도 안 돼.”

테이먼이 납득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게 전부일 리가 없다. 이 알아듣지도 못하는 오래된 책들이 보물일 리가 없어.

“금은보화로도 값을 치를 수 없는 역사가 잠들어 있다면서요. 여기 있는 그 책들일 수 있잖아요. 역사란 것은 원래, 금은보화로도 살 수 없는 것….”

“아니야.”

테이먼은 확신에 차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런 말이 아니었어. 분명 내가 부친께 들은 이야기는…. 그런 뜻이 아니었어. 값을 따질 수 없다는 것은 그저 비유가 아니었어. 이런 것이 아니야, 파니릴리.”

“…하지만 여기가 마지막 방인걸요.”

“성물이라고 하셨어, 성물. 이런 책이 아니라 정말로 귀중한….”

어머니께서 분명 그렇게 말씀하셨다. 아마네스 여신님을 기리기 위한 성물을 담은 금 궤짝을 보시면서도 말씀하셨다.

“테이먼, 알고 있느냐, 북쪽 성전의 지하에는 이보다 더 귀하고 아름다우며 눈이 부신 성물이 있단다. 자격이 있는 사람만이 볼 수 있지.”

그러나 방 안 어디에도 성물은 없었다. 반짝이기는커녕 허름한 나무 테이블과 의자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의 말이 거짓일 리가 없다. 어머니는 그 말씀을 할아버지께, 할아버지께서는 그 말씀을 선대 에나께 들었다고 했다. 테이먼은 횃불을 들고 뚜벅뚜벅 방 밖으로 나갔다.

“테이먼!”

릴리는 어딘가 넋이 나간 것 같은 그가 걱정스러워 촛대를 들고 그의 뒤를 따랐다. 멍하게, 계단이 끝난 낭떠러지를 바라보다가 그는 난데없이 횃불을 그 안으로 집어 던졌다.

“테이먼!”

릴리가 경악하며 소리 질렀다. 한참 동안 새까만 구멍 안으로 붉은빛이 보이더니, 이내 까맣게 사라졌다. 기가 막혀 릴리는 새하얀 벽면을 집고 몇 번이나 테이먼과 그 새까만 어둠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잘하는 짓이네요! 이제 우린 저 위까지 이 작은 촛불 하나만 들고 올라가게 생겼어요. 부디 다 올라가기 전에 촛대가 녹아 없어지지 않기만을 바라야겠군요!”

그러나 갑작스레, 테이먼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그녀의 어깨를 쥐었다. ‘흡’ 하고 릴리가 숨을 삼켰다.

“바… 방금… 방금 봤어?”

“…뭘요?”

“방금, 방금 저기에….”

그는 새카만 어둠을 가리키며 더듬댔다.

“방금 저기에서 불꽃이….”

“네?”

“…푸른색 불꽃이….”

“…….”

뭐? 릴리는 그를 따라 어둠을 바라보았다. 잠잠한 가운데 날카로운 바람 소리만 났다. 웅웅, 허공을 울리는 소리.

“…….”

“도대체 뭐가 있단 거예요. 아무것도 안 보인단 말이에요.”

“분명 아까, 아까 봤어. 분명히.”

릴리는 오래전 그라타에서 부르테가 해 준 말을 떠올렸다.

“…어둠을 너무 오래 들여다보면 환영을 봐요, 테이먼.”

그러나 그는 고개를 저었다. 릴리는 한숨을 쉬며 눈을 굴렀다. 그녀는 벽을 짚으며 몸을 돌렸다.

“다시 기록소로 들어가요. 가서 아까 보던 책이라도 들고 올라가야겠어요. 여기까지 내려온 것이 아까우니까…”

“봐!”

테이먼이 다시 소리 질렀다. 그는 다급하게 손으로 어둠 속을 가리켰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에 흥분으로 눈가가 붉어졌다, 어둠 속에 그것이 보였다. 동그랗고 푸른 빛. 깜빡이듯 몇 번이나 점멸했다. 그러나 분명 그것이 보였다. 환하고 눈부시고 선명한 푸른 불꽃을. 릴리가 그를 따라 몸을 돌렸다,

“…….”

그러나 분명 암흑. 아무리 기다려도 새까만 암흑이었다. 릴리는 고개를 기울여 그를 골몰하였다. 그러고는 걱정스러운 듯 그의 팔뚝을 잡았다.

“테이먼.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이젠 자꾸만 이러는 그가 무서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테이먼은 고개를 저었다.

“못 봤어? 파니릴리?”

“무엇을요?”

“불꽃!”

“…무슨 불꽃 말이에요? 저긴 어둠뿐이에요.”

“아니야. 난 분명……”

“테이먼.”

“저 안에 있어.”

“테이먼.”

“저 안에 모친께서 말하신 그 보물이 있어. 자격을 가진 이만이 볼 수 있다는! 난 분명 봤어!”

“테이먼!”

“가져올 거야.”

“테이먼!”

“나라면 가능해, 파니릴리. 나라면.”

너도 보지 못하는 것을 분명 나는 보았다. 그러니 난 가능해. 오로지 나만이 가능해. 이것을 가져와야 해. 보았으니, 분명 내 두 눈으로 보았으니 내 것이다. 내가 쟁취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 전세는 역전될 거야. 누구도 내가 엘버그의 왕위를 되찾는 데에 토를 달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설령 너라 해도, 그 역겨운 투로 놈이라 해도. 이것을 찾아 왕좌를 되찾고 파니릴리 너를 되찾을 거다.

“…테이먼….”

릴리는 경고하듯 그를 불렀다. 그러나 테이먼은 망설임 없이 새까만 어둠 안으로 몸을 던졌다. 그의 몸은 새하얀 상아, 차갑고 녹지 않는 그 얼음덩어리를 타고 미끄러져 까만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테이먼!”

릴리는 거기 서서 소리 질렀다. 새까만 어둠을 가르고 그녀의 비명이 메아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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