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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185화 (185/231)

185화

긴 밤, 먼 하늘을 바라보며 어떻게 하면 그들에게 지금과 같지 않은 세상을 열어 줄 수 있을까, 고민해 본 적도 있었다. 지금의 자신이라면 어쩌면, 그런 세상을 열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여전히 이 땅 위의 모든 것을 파괴하고 싶으신가요?”

릴리의 물음에 그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젠 네가 있잖아.”

네가 여기에 있으니까, 너에게 걸맞은 가장 근사한 곳으로 만들어 주고 싶다. 어디서나 꽃이 피고, 어디서나 발길이 닿는 곳에 나비가 날고, 어디에서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 그래서 네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네르아와 꼭 닮은, 아니 그보다 더 아름답고 천국 같은 곳으로. 네가 살아갈 땅이니까.

“네가 원하는 건 뭐든 이루어지는 곳이었으면 좋겠어.”

그가 이어 말했다.

“닭살 돋아 못 참겠네.”

핀이 그의 뒤에서 궁시렁댔다.

“상석에 같이 앉지 못해 심통이라도 났나 보군.”

카르낙이 포도주를 마시며 빈정거렸다. 핀은 옆자리에 앉은 에나는 듣지 못하도록 몸을 숙여 이를 갈아댔다.

“어차피 새하얀 사제복이나 입은 늙은이들뿐인데 내가 왜 여기서까지 당신의 뒤를 지켜야 할까요, 발투만 폐하.”

카르낙도 그에게 똑같이 속삭여 주었다.

“에나의 땅에 왔으면 그의 법도를 따르는 게 예의니까. 근위대장. 본분을 망각하지 말라고.”

좌중들과 떠들썩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에나가 릴리를 향해 고개를 내밀며 물었다.

“음식은 좀 어떠신가요? 왕비 전하? 입맛에는 맞으신지요?”

릴리는 한껏 미소 지으며 답했다.

“네. 아주 근사해요.”

“언제든 원하는 것이 있으시면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전하. 무엇이든지요.”

“…….”

릴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조심스레 입을 떼었다.

“그럼. 에나 님.”

“예, 전하. 말씀하십시오.”

“혹 성전에 있는 고서들을 볼 수 있을까요?”

“고서요?”

“네. 이곳에는 아주 오래된 책들이 아주 많다고 들었어요.”

“아아.”

에나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녀는 알기어스 왕의 핏줄. 거기에 모친은 로레인 하게너이니 누구보다 이 성전과 아주 가까운 존재였다. 오랫동안 이 엘버그 땅을 떠나 있었다 하니 그녀는 자신의 뿌리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아주 많으리라. 베오르토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라면,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연회가 끝난 후 에나는 그녀를 성전의 가장 중심부로 안내했다. 다른 성들과 다르게 이곳은 가장 중심에 다다를수록 아래로 깊어진다고 하였다. 보통은 중심에 가까울수록 높아지는데 말이다. 아무리 봐도 신기한 곳이었다. 벽면에는 끝없이 책들이 들이차 있었고 유기적으로 이어진 기둥은 모두 상아처럼 매끄럽고 단단했다. 새하얗고 높고 동굴처럼 동그란 천장을 바라보며 파니릴리는 물었다.

“이 건물은, 어떻게 지어졌는지 혹시 아시나요?”

에나는 그녀를 따라 천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역시 이 기묘한 건물을 누가 만들었나 늘 궁금했더랬다.

“아니요, 아마네스 여신님의 첫 번째 아이가 잠든 곳에 성전을 지었다고만 알지, 누가 어떻게 지었는지는 저 역시 알지 못한답니다.”

“그렇군요.”

“어쩌면. 왕비 전하께서 그 물음에 답을 아실지도 모르겠군요.”

“제가요?”

에나는 어느 커다란 문 앞에서 그녀에게 열쇠를 건넸다.

“지하로 갈수록 더 오래된 고서들이 비치되어 있을 겁니다.”

“아.”

“이곳의 어떤 사제도 그 가장 아래쪽까지 당도해 본 일이 없지요.”

릴리는 열쇠를 받아 들고 그를 향해 갸웃거렸다.

“어째서요?”

“글쎄요. 신에게 선택받은 이만이, 다다를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에나 님께서도 가장 아래층에 간 적이 없으신가요?”

“예. 저 역시 아직까지는 그렇습니다. 이제 막 에나가 되었으니 그만한 자격이 갖추어졌을지도 모르겠네요. 비 전하께서는 누구보다 아마네스 님과 가까운 분이시니 기꺼이 다다르실 수 있을 겁니다.”

릴리는 겸연쩍게 웃으며 글쎄요, 작게 말했다.

“혹, 그리 된다면 저에게도 말씀해 주십시오, 과연 그곳에는 무엇이 있는지.”

베오르토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게요.”

“열쇠는 기록 보관소를 지키는 열쇠지기 율마 사제에게 주시면 됩니다.”

“네.”

“이곳의 사료들은 모두 색으로 구분합니다. 하얀 줄이 있는 것은 신과 엘버그 대륙에 대한 이야기. 금색 줄이 있는 것은 사람들과 자연에 대한 실용서들입니다, 파란색은 과학, 초록색은 예술, 붉은색은 음악과 구전에 관한 이야기들이지요.”

“아, 네.”

“물어보고 싶으신 것이 있다면 곳곳에 사료를 정리 중인 사제 아무나 붙잡고 여쭈어 보시면 될 겁니다.”

“네. 고마워요.”

“그럼 마음껏 둘러보십시오.”

에나는 그녀를 향해 공손히 머리를 조아리고는 보관소를 빠져나갔다. 그는 카르낙과 나눌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이제 에나가 되었으니 비로소 베오르토는 자신만의 사병들을 갖게 되었을테고, 이 거대한 성전의 모든 재산도 그의 손에 들어갔을 터였다.

그러니 카르낙과는 나누어야 할 이야기가 많을 것이다. 거대한 자금과 군사력으로 분명 국왕을 도와야 할 테니까. 그러기 위해선 자신의 역할이 중요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의 몸에 흐르는 피가 중요한 것이었다. 이 성전과 카르낙을 이어 줄 오작교 같은 역할이니까.

“좋아.”

릴리는 저 혼자 결심을 굳히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책이 너무나 많았다. 이 방대한 양의 책 중에 무엇을 보아야 할까. 그녀가 알고 싶은 것은 카르낙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의 태생에 관한 것. 아무도 모르는 그것을 어쩌면, 이곳에서는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그렇다면 무엇부터 찾아보아야 할까. 구전…? 아니면 인간에 대한 이야기? 아니면…. 역시 신앙과 대륙일까. 파니릴리는 근처에 있는 하얀색 책 하나를 집어 들어 목차를 훑었다. 대부분 그녀가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그 옆의 책도 펴 들어 보았다. 마찬가지였다. 역시 이곳엔 없겠지. 릴리는 베오르토가 알려주었던 대로 지하로 통하는 문의 열쇠 구멍에 열쇠를 밀어 넣었다. 찰칵, 하고 오래된 경첩이 돌아가는 소리가 둔중히 울렸다.

***

테이먼 테르조는 오늘도 변함없이 말똥을 치웠다. 이놈의 말들은 왜 이렇게 똥을 처싸 대는지.

그뿐인가, 말똥을 다 치우고 나면 다른 말단 사제들을 도와 소똥을 치우라고 하고, 소똥을 다 치우고 나면 이번에는 돼지 똥을 치우라고 했다. 돼지 똥을 다 치우고 나면 다시 말똥을, 말똥을 다 치우고 나면 소똥을, 그러다가 치울 것이 없으면 닭똥이라도 치우라며 닭장으로 처넣었다. 그러고 나면 병사들의 심부름을 하며 그들의 옷을 빨고 군화를 닦아 주어야 했다.

잠시 쉴 틈도 없이 종일 일했다. 새벽같이 일어나면 다시 새벽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땅에 엉덩이를 붙여 본 일이 없다. 그러다 보면 종일 파니릴리의 부름만을 기다렸다. 그녀가 불러 주는 시간만이 유일하게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그나마 먹을 만한 것들로 배를 채울 수 있는 시간이었으니 말이다.

테이먼은 말똥을 치우다 말고 멀리 저를 감시하듯 앉아 있는 매짐을 바라보았다. 대장간에서 일하던 녀석이라고 그는 기사들의 부탁을 받아 그들의 판금 갑옷을 손보고 그들의 단도 따위를 날카롭게 갈아 주는 일을 도맡아 하며 신뢰를 샀다. 저는 종일 한자리에 앉아 한가롭게 도검류나 만지고 있으면서 자신에게는 이딴 거지 같은 일이나 시키다니. 한낱 불 따위나 만지던 천하디천한 것이. 내가 이곳을 탈출해 제자리를 찾아가면 가장 먼저 저놈부터 죽여 버리리라. 테이먼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이봐! 굼벵이!”

멀리서 누군가가 테이먼을 불렀다. 매짐이 그를 그렇게 부른 이후로, 모두가 그를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다. 테이먼은 한숨을 쉬며 아주 느리게 눈을 돌렸다. 거구의 사내는 귀찮은 듯 거푸집 같은 손을 까딱거렸다.

“…….”

테이먼은 느릿느릿 삽을 놓고 느릿느릿 걸었다. 그러자 거구는 손을 뻗어 그의 귓불을 잡았다.

“오라면 빨리빨리 올 것이지 느려 터져서는!”

꽉 잡은 것을 힘껏 잡아당기자 테이먼이 바닥에 엎어졌다. 사내는 콱, 테이먼의 옆구리를 찼다.

“일어나! 굼벵아! 왕비 전하가 너를 찾으신다!”

아아. 감사합니다. 테이먼은 발에 차여 욱신거리는 옆구리는 아랑곳 않고 신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테이먼은 거구의 남자에서 이후에는 사제의 안내에 따라 성전의 기록소에 당도했다.

그곳은 성전의 가장 중앙에 위치해 있으며 아주 오래된 고서와 유물들이 즐비하다는, 그야말로 이곳의 심장부와 같은 곳으로 테이먼은 일찍부터 이곳에 대해 들으며 자라왔다. 언젠가 왕이 되면 이곳의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가 보리라 꿈만 꿔 온 터였다.

그곳에 가장 비천한 신분인 노예가 되어 당도하다니. 운명이란 정말 기묘한 것이다. 사제는 그를 기록소의 지하층으로 안내했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테이먼.”

계단을 대여섯 개 정도 내려갔을까, 환히 열려 있는 문 안에 서적에 파묻힌 파니릴리가 눈을 들어 그를 불렀다.

“…….”

테이먼은 멍하게 그 모습을 쳐다보았다. 본래 이곳에 여자들은 들어올 수 없다. 성전 기록소의 지하층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은 분명 왕위를 가진 남자만이 가능했다. 그런데 파니릴리는 그 안에 있다. 그것도 왕과 성전의 허락된 사제들만이 드나들 수 있다는 기록소의 지하층에.

하기야 지금에 와서 그런 규범들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알기어스 왕에게 남은 핏줄이라고는 그녀 하나일 텐데. 오히려 카르낙 발투만이 아닌 그녀가 이곳에 들어와 있음을 다행이라 여겨야 하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파니릴리에겐 이곳에 들어올 자격이 있으니까. 테이먼 테르조 저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잘 왔어요. 기록물을 좀 찾고 있는데 혼자의 힘으로는 여력이 안 되어서요.”

테이먼은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와 그녀가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고서 하나를 들어 올려 제목을 살폈다. <엘버그 왕국의 지배자들>.

“…뭘 찾고 있는데?”

뭘 찾을 땐 찾더라도 음식과 음료는? 잘 차려진 과일과 달콤한 포도주는? 아무리 기록소에는 음식물을 가져올 수 없다 해도 너는 왕비인데. 좀 가져다 놓으면 어때서? 어쩐지 목이 타 테이먼은 꿀꺽 침을 삼켰다. 릴리는 책을 뒤적이며 답했다.

“인종에 대한 기록이요.”

“인종?”

“네. 태초에 엘버그에 정착했던 자들에 대한 것들이요.”

“…그런 것들이라면… 이미 다 알고 있잖아. 태초에 아마네스 여신이….”

“아니요. 그런 것 말고요. 최초로 붉은 머리를 가진 사람이 언제 나타났고 누구이고, 금발을 가지고 태어난 자는 누구이고, 그런 것들이요.”

언제부터 신의 아이가 여러 종류로 나뉘어졌냐를 알고 싶다는 건가?

“그걸 왜 알고 싶은데?”

“설명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서 알고 싶으니까요. 이 세상이 불타고 있었다는 신화가 있었다면 그 증거에 대해 알고 싶어요. 무엇으로 그것에 대해 알 수 있는지, 어째서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 여신의 첫 번째 아이가 불을 끄고 이곳에 잠들었다면 그렇게 여기게 된 이유도 증거도 찾아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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