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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187화 (187/231)

187화

릴리는 촛대를 들고 계단을 올랐다. 행여 불이 꺼질까 뛰어오르지도 못하는데 마음만 조급했다.

“누구 없어요!”

파랗게 질린 채 그녀는 계속해서 외쳤다. 누군가 제 목소리를 듣고 어서 이 곳으로 내려와 주길 간절히 바랐다.

“누가 좀, 누가 좀 도와줘요!”

얼마나 계단을 오르며 외쳤을까, 늙은 사제 하나가 횃불을 들고 나타났다.

“왕비 전하…?”

그를 보자 마음이 놓인 릴리가 벽을 짚으며 울먹였다.

“테이먼…. 사람이, 사람이 구덩이에 빠졌어요.”

“예?”

쉽게 설명되지 않는 일이었다. 이곳의 누구도 기록소의 가장 아래층까지 가 본 적이 없다고 하니 그 구덩이의 존재도 알지 못하리라.

“…사람들을 좀 불러줘요. 로프… 로프를…. 로프를 준비해야 해요.”

“…….”

“어서요!”

릴리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사제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움직였다. 다리가 후들거려 릴리는 벽에 기댄 채 아래로 미끄러졌다. 계단에 털썩 주저앉아 숨을 고르며 암흑 속에 잠긴 제 하나 남은 혈육에 대해 생각했다.

그와는 평생 적일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그리하여 언젠가 제 손으로 죽여야 할 날이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더러는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아직은. 그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들이 더 많다.

***

“성의 보수 공사 비용이 만만치 않다고 들었습니다.”

삼중관을 머리에 쓴 베오르토가 제 새하얀 옷자락을 매만지며 카르낙에게 말했다. 에나의 자리를 차지한 그의 얼굴에는 흡족한 미소가 가득했다. 카르낙은 매끈하게 다듬어진 황동 잔 안의 포도주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난 번 모래폭풍 이후로 캘던뿐 아니라 엘버그의 전 지역이 흉작으로 고통받고 있어.”

“금전적 지원이라면 걱정 마십시오, 폐하. 제가 할 수 있는 한 금전적 지원은 아끼지 않겠습니다.”

“중요한 건 테이먼 테르조의 잔당을 어떻게 처리할지야, 베오르토.”

“어쩌길 원하십니까?”

만일 그가 에나의 사병을 복수에 쓰겠다면 껄끄럽지만 베오르토는 그의 청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삼중관을 머리에 얹긴 했지만, 이렇다 할 연줄이 없는 그에게 아직 이 자리는 위태로웠다.

어차피 자신의 처지가 카르낙 발투만 왕의 외력에 힘입어 이룬 것임을 그는 모르지 않았다. 그 때문에 지금 발투만이 무너진다면 저 역시 무너질 게 뻔했다. 그러니 그가 필요로 한다면 에나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 그를 도와야만 했다.

“공식적으로 그들을 비난하는 성명을 내. 자신들의 왕을 잃고 에나의 신임까지 저버린 상태에서는 당분간 다시 큰 세력으로 부상하긴 힘들겠지.”

“그렇다면, 테이먼 테르조는 어쩌실 생각입니까?”

“그에 대해서는… 왕비의 손에 맡겼어.”

“그렇다는 것은 그를 제거하지 않겠다, 그렇게 선택하신 것 아닙니까.”

“…….”

어쩌면. 그의 말이 맞다. 파니릴리는 분명 자신의 혈육을 제 손으로 죽이지 못할 테니. 베오르토의 말처럼 파니릴리에게 그의 운명을 맡기겠다는 것은 동시에 그를 처형하지 않겠노라 선언한 것과 진배없었다.

“사막에서 여기까지, 내 왕좌는 죽은 이들의 사체 위에 올려졌어.”

그의 무자비함은 엘버그의 모든 이들이 알고 있다. 카르낙 발투만이 어떻게 알기어스를 베어 내고 그 자리를 차지했는지 말이다.

“어떤 때에는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었지.”

“…….”

“그리고 지금은 좀 다른 것을 배워 보려고 해.”

“…다른 것이요?”

카르낙은 대답 대신 희미하게 웃으며 포도주를 들이켰다. 그 온화함에 베오르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심중을 베오르토로서는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때, 벌컥 문이 열렸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사제 하나가 헐떡이며 말했다.

“왕비, 왕비 전하께서.”

거기까지만 말했는데 카르낙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슨 일이야?”

베오르토가 물었다.

“기록소 지하에, 테이먼 테르조가… 추락했다고.”

“뭐야?”

기록소 지하? 거기에 추락할 만한 곳이 있던가? 한 번도 당도해 보지 못한 곳이라 베오르토는 가늠할 수 없었다. 카르낙이 물었다.

“왕비는?”

“전하께서는 무사하십니다. 다만 많이 놀라신 것 같아서….”

“안내해.”

카르낙이 명령했다. 사제는 바쁜 걸음으로 베오르토와 카르낙을 기록소의 입구로 데려갔다. 지하로 향하는 문 앞에서 베오르토는 느닷없이 카르낙의 걸음을 막았다.

“폐하.”

이미 내부로는 많은 사제들이 들락거리고 있었다. 그 중 오로지 출입이 막힌 이는 카르낙 발투만 한 명뿐이었다.

“베오르토.”

카르낙은 조용히 제 앞을 가로막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베오르토는 곤란하고도 핏기 없는 얼굴로 마른 입술을 축이며 더듬더듬 말했다.

“이곳은, 폐하…. 아시겠지만 이 성전의 심장부입니다.”

“그래서?”

“…이곳은 오직 선택된 사람만이…”

아아, 그런 이야기인가. 감히 사막의 투로는 발을 들일 수 없다?

“엘버그 왕국의 왕좌 역시 선택된 사람만이 차지한다고 하지.”

카르낙은 고압적인 눈으로 베오르토를 내려다보았다. 금방이라도 저 거대한 몸으로 저를 짓누를 것만 같아 베오르토는 움찔 몸을 떨었다. 그러나 물러설 수는 없었다. 이곳에서만큼은 그랬다.

“폐하, 안에는 왕비 전하가 계십니다.”

“…….”

“만일, 만일 지난 번 같은 지진이라도 일어난다면.”

지진. 테이먼 테르조를 어처구니없이 군마에서 떨어뜨린 그 일 말이지. 베오르토는 그것이 진노한 아마네스 여신의 형벌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카르낙은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그런 일 따위 그저 기가 막힌 타이밍에 일어난 행운일 뿐이라고.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비웃으며 무시하기에 너무나 많은 일들을 겪어 왔다. 자신이 타고난 태생, 릴리의 알 수 없는 능력, 그리고… 그래, 베오르토가 말한 지진까지.

이 나라의 어딘가에서 어쩔 도리가 없는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다. 도저히 알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무언가가. 그러니 무시할 수 없다. 우연으로라도 베오르토의 말처럼 다시 지진이라도 일어난다면, 그래서 혹, 자신 때문에 파니릴리가 그때의 테이먼 테르조처럼 무너진 건물 기둥에 매몰되기라도 한다면…. 생각만으로도 현기증이 일었다.

“좋아. 가 봐.”

카르낙이 한 발 자국 물러나며 말했다. 베오르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왕비 전하부터 꼭 모시고 나오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베오르토는 젊은 사제들과 함께 계단을 내려갔다. 이미 곳곳에 횃불이 밝혀져 있었다.

“무슨 일이야? 왕비 전하는 어디에 계시나?”

베오르토가 걸음을 옮기며 묻자 사제 중 하나가 답했다.

“가장 지하층에 계십니다.”

“…….”

거기까지 언제 내려가 당도한단 말인가.

“몇 명이나 가있지?”

“두어 명 정도. 전하께서 밧줄 같은 것을 준비해 달라고 하셨답니다.”

“구덩이 같은 게 있는 것은 확실해?”

“예. 그런 것 같습니다.”

“세상에.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지하에 구덩이가 있다니. 그것은 베오르토도 알지 못하는 일이다. 선대의 에나는 알았을까. 이 신성한 성전의 기록소에 구덩이가 있다니. 왜, 그곳을 그렇게 남겨 두었을까. 어느 곳 하나 의미 없이 지어진 곳이 없는 이 신성한 장소에 필시, 그대로 남겨 둔 이유가 있을 터였다.

“가서, 가서 왕비 전하를 모셔 와.”

제 성치 않은 무릎으로 맨 아래층까지 당도하기에는 아무래도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릴 듯하여 그는 젊은 사제들을 독촉했다. 벽을 짚고 서는데 벌써 숨이 헐떡거렸다. 베오르토는 잠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호흡을 골랐다.

“테이먼!”

릴리가 다시 한번 소리쳤다. 어둠 안으로 그녀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그러나 들려오는 대답이 없었다.

“안 되겠어요.”

릴리가 사제가 들고 있는 밧줄을 앗아 제 허리에 감기 시작했다.

“저. 전하, 지금 무엇을 하시는 겁니까?”

“끌고 올라와야 해요.”

“예?”

“기절을 했던지, 아니면 너무 깊어서 내 목소리조차 안 들릴 수도 있어요. 직접 제가….”

“안됩니다, 전하!”

만류하는 사제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런 일에, 어떻게 왕비가 직접 나선단 말인가. 보다 못한 사제 하나가 손을 들어 자원했다.

“제가, 제가 가겠습니다! 그러니 용서하세요, 전하.”

사제는 감히 릴리의 허리에 감긴 밧줄을 풀어 자신의 허리에 감았다.

“그는, 푸른 섬광 같은 것을 보았다고 했어요.”

릴리가 경고하듯 말했다. 사제는 두려운 듯 눈가를 떨었다.

“전 보지 못했지만… 그는 분명 그렇게 말했어요.”

“예, 전하. 이곳은 아마네스 여신님의 집이니, 분명 그분께서 저를 지켜 주실 겁니다.”

사제는 떨리는 목소리로 애써 미소 지었다. 동료 사제가 얼른 그의 손에 횃불 하나를 쥐여 주었다.

“조심해요.”

릴리의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곧 사제들이 긴 줄을 각자 손목에 휘감았다. 아주 천천히, 사제는 어둠 안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릴리는 제 손톱을 뜯으며 그의 손에 들린 횃불이 어둠속으로 잠기고도 한참이나 밧줄이 아래로, 또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쳐다보기만 했다. 줄이 모자라 몇 번이나 로프의 끝을 이었다.

대체 얼마나 더 떨어진 것일까, 만약 테이먼이 아까와 같은 속도로 떨어져 내렸다면 죽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의 깊이였다. 이런 아둔한 사람 같으니. 어떻게 그렇게 겁도 없이.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깊이도 알지 못하는 구덩이 안으로 몸을 던졌을까.

생각만 해도 숨이 막혀 릴리는 제 가슴께를 짚었다. 로프를 끝까지 다 내리고 기다리기를 한참, 멍하게 구덩이만 바라보고 있던 사제가 몸을 움찔 떨었다.

“신호가 왔어요,.”

그는 멍하게 중얼거렸다. 분명 밧줄이 당겨지는 느낌이었다. 손목에 감긴 밧줄이 다시 한번 끌렸다. 툭, 툭, 두 번이나.

“당겨요!”

사내가 말했다. 그러자 사제들이 제 손에 붙들린 밧줄을 힘껏 당기기 시작했다. 곧 다시 붉은 횃불이 구덩이 안에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사제들은 신음을 흘리며 밧줄을 끌었다.

그리고 마침내 사제와 밧줄에 허리가 묶인 채 정신을 잃은 테이먼의 모습이 보였다. 눈가와 입가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아 자리에 주저앉는데 마침 테이먼이 계단 위로 안착했다. 어둠속에 사투를 벌이느라 지친 기색이 역력한 사제가 하얗게 질린 릴리에게 안심하라는 듯 말했다.

“괜찮습니다, 전하. 살아있습니다.”

그제야 릴리는 테이먼의 축 늘어진 신체와 면부를 살폈다. 고른 그의 숨결이 느껴졌다. 아아. 하고, 릴리는 안도에 신음을 내뱉었다. 그녀는 새까만 구덩이를 바라보았다. 그저 어둠뿐이었다.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가 보았다고 하는 그 빛은. 대체 어떤 환영을 저 안에서 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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