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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발 아래 은빛 눈-184화 (184/231)

184화

자조적으로 말한 후 그는 릴리에게 되물었다.

“너 역시 마찬가지이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이곳에 끌려왔잖아.”

“…난 내가 선택해서 이곳에 왔어요.”

“오지 않을 수 없었을 테니까.”

“오지 않을 수 있었어요.”

“그럼 감당할 수 없을 일들이 벌어졌겠지. 울며 겨자 먹기로 행한 일을 ‘선택’했다고 할 수 없어, 파니릴리.”

파니릴리는 그저 웃었다. 지금까지 흘러온 모든 인생에서 그녀가 선택하지 않은 것은 없다. 그것으로 인해 야기된 돌이킬 수 없는 손해, 불행, 험난하고 고된 시간들조차 그렇기 때문에 감내할 수 있었다.

“당신이 살아 온 인생에 대해 조금은 알겠네요, 오라버니. 무거운 책임과 고통이 따랐겠어요.”

그 말에 테이먼은 어깨를 으쓱했다.

“뭐, 내게 잘 어울리는 일이라고 생각해. 막중한 책임과 임무 같은 거. 어쩐지 근사하잖아.”

“발투만 폐하와는 영 다르시네요. 그분은 모든 것들을 고통스럽게 짊어지고 계시는데요.”

“그렇다면 내려놓으라 그래. 한 번뿐인 인생 즐겁게 살아야지.”

그는 익숙한 자세로 찻잔에 찻물을 따랐다. 그러더니 떫은맛에 미간을 찌푸렸다.

“이 염병할 차는 대체 뭐야?”

“맥잎차예요.”

“뭐?”

“부인들에게 아주 좋죠.”

“…그걸 내게 준 거야? 여인들에게나 좋은 차를?”

릴리는 씽긋 웃었다.

“노예는 주는 대로 먹는 거랍니다.”

빌어먹을 파니릴리 알기어스. 테이먼은 중얼거리며 찻물을 한 모금 더 마셨다.

“고프리는 구스를 데리고 무사히 찾아갔던가요?”

“누구?”

“고프리요. 코르넬리오의 장자를 데리고 갔던.’

“아아.”

골몰하던 테이먼이 그제야 아는 체했다,

“바르시 말이로군, 그래. 아사하기 직전에 무사히 우리를 찾아왔더군.”

릴리는 그제야 한숨 놓았다는 듯 길게 숨을 내쉬었다.

“코르넬리오는 투로 놈의 오랜 숙적이었지. 알고 있어?”

릴리는 대답하지 않고 찻물을 마셨다. 테이먼이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알면서 바르시를 살려 보냈다?”

“…….”

“영악하네. 내 여동생. 네가 어떤 짓을 해도 놈이 죽일 수 없다는 걸 아주 잘 알고서 행한 짓이겠지.”

“착하고 바른 아이예요.”

“바르시가 매일 매일 너를 그리더군.”

“…….”

“다시 너와 함께 지내고 싶은 모양이야.”

달달한 사탕과 쿠키를 입안에 가득 넣고 오물거리던 아이의 얼굴이 떠올라 릴리는 저 혼자 웃었다. 아이는 여전히 그러한 것들을 좋아할까. 지금쯤은 원 없이 먹고 있을까. 늘 조심스럽고 성실하던 구스. 그 아이로 인해 감당해야 했던 지난날들이 떠올랐다. 다행이야, 구스. 네가 살아 있다니 후회는 없다.

“아이를 데려간 남자는 어떻게 되었어요?”

테이먼은 그 음습하고 기묘한 사내에 대해 생각하다 저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몰라. 놈의 처리는 브리다스에게 맡겼어. 손주의 은인이니 죽이지는 못했겠지만, 사리 판단을 할 줄 아는 노인이라면 가까이 두지는 않을 거야.”

“브리다스라면, 코르넬리오 미망인의 부친이죠?”

“그래.”

“…….”

테이먼은 저를 조용히 주시하는 릴리의 말간 면부를 보며 웃었다.

“이깟 떫은 차나 내어 주고, 내 세 치 혀를 멋대로 움직이게 해 보시겠다는 건가?”

누가 이런 자리에서 브리다스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떠들 줄 알고? 겨우 이 정도 가지고?

“오라버니께서,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신다는군요.”

릴리가 찻잔을 놓으며 시종에게 명했다. 곧 문이 열렸고 경비병 두 명이 창과 방패를 든 채 안으로 들어와 그의 앞에 섰다.

“…….”

할 말 없으면 이쯤에서 꺼지란 이야기겠지. 가서 말똥이나 더 치우라는. 생전 굳은 일이라고는 해 본 적 없는 고귀한 테르조가의 핏줄에게. 테이먼은 아주 잠깐 파니릴리를 노려보다가 일어났다. 견뎌야 했다. 곧 누군가 저를 구하기 위해 올 것이다. 그에게 충성하던 가문 중, 어느 한 곳에서라도. 그러니 그때까진 굳건히 버텨야 한다.

“파니릴리.”

떠나기 전, 테이먼은 잠시 멈춰서서 제 사촌을 바라보았다. 하얗고 눈부신 여자. 네 존재를 알아차렸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너 이외에 다른 여자를 꿈꿔 본 적이 없다.

“언젠가, 내가 네게 함께 떠나자고 한다면, 나와 떠날 텐가?”

“…….”

릴리는 미간을 구겼다. 지금은 꼴에 어울리지 않는 허풍이라 생각할는지 모른다. 하지만 언젠가 이곳을 탈출할 테고 테이먼은 혼자 가고 싶지 않았다. 가능하면 너와 함께. 네게 어울리는 자리는 그자가 아니라 바로 내 옆이다.

“아니요.”

그러나 릴리는 단호했다. 생각할 가치도 없어 우습다는 듯 너무나 하찮게 답했다.

“대신, 오라버니께서 이곳에 남겠다고 하면 함께 남아 드리죠.”

허, 하고 테이먼은 웃었다. 그러고는 경비병을 따라 방을 나섰다. 서로 접점이 없는 평행선이었다. 창밖을 보며 릴리는 어쩌면 조만간 그를 죽여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에나의 즉위식은 그로부터 3일 후 치러졌다. 본디 신의 이름으로 에나의 머리에 삼중관을 씌워야 했으나 카르낙 발투만은 아마네스 여신의 성전에서 신의 이름 대신 자신의 것, 카르낙 발투만의 이름으로 에나의 머리에 관을 씌웠다.

그 때문에 즉위식은 조금 소란스러웠다. 여전히 발투만의 행동에 못마땅해하는 사제들이 더 많았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그는 엘버그의 국왕. 게다가 본디 살육이 없어야 하는 이 신전에서도 그는 분명 제 뜻에 거스르면 괘념치 않고 검을 들 것이 뻔했으므로 모두 입을 다물었다. 더하여 그의 옆에는 파니릴리 알기어스가 있었다. 아마네스 여신과 꼭 닮은 여자가. 그녀가 침묵하고 있으니 덩달아 저들 역시 침묵해야 할 것만 같았다.

즉위식 후, 성전에서는 전례 없는 대규모 연회가 이루어졌다. 악사들은 하프와 류트, 리코더, 탬버린 등을 이용해 경쾌한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큰 고난을 뚫고 이곳까지 와 주신 폐하를 위하여 우리 건배합시다!”

제 머리에 드디어 삼중관을 쓴 베오르토는 기쁨을 감추지 못한 채 잔을 들었다. 사제들도 그를 따라 잔을 들었고 카르낙도 마지못해 잔을 들었다. 미소로 얼굴이 환한 파니릴리와 다르게 그는 심드렁했다. 애초에 그에게 어울리는 장소와 장면은 아니었으리라.

“영원하소서! 국왕 폐하!”

베오르토의 선창에 따라 모두 입을 모아 외쳤다.

“영원하소서! 국왕 폐하!”

카르낙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애써 입꼬리만 올려 미소 지었다. 그런 남편의 모습이 웃겨 릴리는 와인을 축이며 슬며시 미소 지었다.

“불편해 보이시네요. 폐하.”

릴리가 속삭였다. 카르낙이 그녀를 향해 몸을 숙였다.

“당연하지. 여긴 날 저주하는 여자의 집이잖아. 모두 그 여자의 하수인들뿐이라고.”

릴리는 웃었다,

“폐하께서 에나의 머리에 삼중관을 씌워 주셨잖아요.”

“전략적 선택일 뿐, 미안하지만 난 누구보다 이곳이 망하길 바라.”

카르낙은 뒷말을 하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아마네스란 여자가 들었으려나. 새하얀 천장에 휘황찬란한 금빛 문양들이 가득해 눈앞이 어지러울 지경이다.

“어쨌든 전 기쁜데요. 이제 할 일을 마쳤으니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겠죠.”

집. 릴리의 말에 카르낙은 오늘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맞아, 이제 캘던으로 돌아갈 수 있지.”

언제부터 그곳이 집이 되었을까. 카르낙은 한 번도 그곳을 집이라 여겨 본 적이 없다. 그저 남들 보란 듯 뭉개고 앉아 있어야 할 장소였을 뿐, 그곳에 대한 애정이나 그리움 따위도 없었다.

파니릴리에게도 그곳은 집이 아니었을 터였다. 그녀에게 집은 늘 그라타였고 돌아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언제나 그곳이었을 텐데. 어느 순간 둘에게는 그곳이 집이 되었다. 결혼했던 순간부터일까, 아니면 서로를 마주했던 순간부터 우리에겐 그곳이 집이 되었을까. 카르낙은 제 아내의 손을 잡아 부드럽게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 남은 한 손으로 그 위를 덮었다. 아내와 마주 보는 순간이 좋았다. 그렇게 서로 미소를 주고받는 순간이. 나도 어서 돌아가고 싶어. 우리의 집으로.

“오늘 아침, 로로에게서 서신이 왔어.”

“로로에게서요?”

릴리는 그의 말에 반갑게 반응했다.

“몸은 좀 어떻대요? 모두 잘 지내고 있다던가요?”

환한 얼굴의 릴리와는 다르게 그의 표정은 어두웠다.

“설마…”

그러자 카르낙은 고개를 저었다.

“로로는 건강해. 다만 모두 하게너성을 탈출했대. 더는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 되었다더군.”

“…….”

더위가 참 지독했었지. 이미 그들이 방문했을 때부터 그곳은 점점 더 살기 척박한 땅이 되어가고 있었다.

“지금쯤 멀루아로 향하고 있을 거야. 하지만 당장 그곳에서 살 수 있을지 모르겠어. 어쩌면 포드가의 도움을 받아야 할지도 모르겠어.”

카르낙의 말에 릴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길란과 자미에라면 기꺼이 그들을 도와줄 터였다. 하지만 그 마을 사람들은 어떨까. 외지인에 대해 극심한 반감을 가지고 있을 텐데, 더욱이 그곳을 떠나오기 직전 벌어졌던 일을 생각하면.

거기에 투로들은 모두 성질이 괴팍하다. 수타르. 릴리는 그자를 떠올려 보았다. 곧 정육점 주인이 다시 바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남자라면… 분명 머지않아 목이 잘릴 테지. 투로들 사이에서는 다른 사람의 재산이 탐나거나 이미 임자가 있는 여자가 마음에 들면 상대를 죽여 갈취하는 것이 법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전에 당신의 친구들에게 엘버그의 규칙에 대해 좀 알려 줄 필요가 있겠어요. 마을 사람 모두를 죽여 버리면 곤란하니까요.”

“이미 경고문을 써서 보냈지.”

의외였다. 정말로. 카르낙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동그란 눈으로 쳐다보는 릴리를 향해 웃었다.

“당신과 그 문제로 또 싸우고 싶진 않아. 릴리.”

“…….”

“그러느니 내가 한발 물러서는 게 낫지.”

게다가 더는 고집을 부릴 이유가 없었다. 멀루아를 떠나 릴리와 단둘이 도망쳐 나온 후 그도 깨달은 것이 있었다. 예전엔 엘버그의 모든 이들을 한 덩어리로 생각했었다. 그들 따위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고.

그러나 이젠 그 안에 자미에가 있었고 길란이 있었다. 그리고 어딘가에 또 그들과 같은 이들이 있을 수 있었다. 이제 카르낙의 안에 엘버그인이란 입체적인 존재였다. 선한 이도, 악한 이도, 또 연약하여 어찌하지 못하는 이들도 그 안에는 존재했다.

자미에와 길란은 그에게 선한 이였다. 그 외에는 여전히 악한 이들이겠지만, 또 푸줏간의 모녀처럼 약하여 제 운명조차 어찌하지 못하는 이들 또한 존재했다. 세상의 규율에 얽매여 사내들에게 귀속되어야만 하는 어린 계집의 입장이 가련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그저 가만히 고개만 숙이고 있던 모습이. 엘버그의 계집으로 태어나는 것도 참 괴로운 일이겠구나. 그 아이를 보며 카르낙은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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